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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진의 작품은 이제껏 세 편을 읽었다. 장편 『앨리스의 생활방식』과 단편 두 편[i]. 이 세 편만으로도 이 작가의 색깔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까지 읽고 나니 뭐랄까, 확고부동하게 작가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장은진은 정의내리는데 크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작가이다. 좋게 말하면 자기 색이 분명하고 나쁘게 말하면 밑천이 얇다. 장은진의 대개의 작품에는 아파트가 등장한다. 그것도 복도식 아파트가 아닌 계단식 아파트.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거울처럼 자기를 들여다보게도 안 하고 유리처럼 그 자신을 드러내보여주지도 않는. 이런 아파트는 아무래도 도시 문명의 상징으로 읽힌다. 인간들은 이곳에서 외롭다. 익명으로 살아야 하니깐. 그래서 소통을 바라지만 그 바람은 조금씩 어긋난다. 그런데 이런 소통의 부재는 이웃 간뿐만 아니라 가족 간에도 일어난다. 아내와 남편 사이 같이 가장 친밀한 사이에서 조차도. 그 간극 사이에 자리하게 되는 건 ‘증오’이다. 이해받지 못한 사람들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은 마치 ‘증오’라는 듯이. 지금까지 난 쓰레기통에 처박힐 음식들을 만들어왔다. 내가 그 음식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는지 안다면 이럴 수는 없다. 내 신성한 노동은 무시되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음식을, 적어도 배불리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배고플 때 밥알 하나의 힘이 얼마나 큰지 굶주려보지 않은 그녀는 모른다. 풍족한 그녀는 정녕, 모른다. 항상 부족과 결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 빈곳에 다른 것들을 채워넣기 마련이다. 폭력, 폭언, 분노, 불만, 악의…… . 한 그릇의 밥은 굶주린 자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보다 더 환상적이고 매혹적이다. 그녀가 매혹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녀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음식이다(‘달은 위한 음식’, p.59). 예로부터 의식주는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하는데, 도시문명이라고 해도 좋고 자본주의사회라고 해도 좋은 현대 사회는 이 기본적인 의식주마저 인간에게서 박탈해가고 있다. 인간들은 의식주의 결핍 속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이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해졌을지 모르지만 살 곳, 즉 주거공간은 그 어느 사회보다 부족하다. 아니, 집은 넘쳐나지만 역설적으로 몸을 누일 곳은 없다. 왜냐하면 집마저도 투기(투자라고 하고 싶겠지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결핍과 박탈, 현대인들은 그것이 가져오는 두려움을 알기에 항상 버둥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요구하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다. 그런 현대를 사는 인간들의 의, 식, 주 이야기가 장은진 작품의 주요 소재이다. 의와 식도 마찬가지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넘쳐나는 사회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먹을 것이 홍수를 이루고 한 나라의 음식물 쓰레기가 최빈국 어린이들을 모두 먹여살릴 만큼 많다고 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아이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먼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웃은 우리 주위에도 얼마든지 있다. 입을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옷’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요구받는다. 아름답지 못한 몸, 날씬하지 못한 몸은 죄악이다. 따라서 ‘옷’ 역시 인간에게 박탈과 결핍을 경험하게 한다. 내가 도저히 입지 못하는 옷이란, 명품 등의 고가의 옷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몸을 갖지 못한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한다. 장은진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아우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의, 식, 주의 이야기이면서 현대 문명, 혹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앨리스의 생활방식』의 사회적 버전(『앨리스의 생활방식』은 좀더 개인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 이면의 사회의 구동 방식 등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혹은 연작소설 버전이라고 보면 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앨리스의 생활방식』보다는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이 소설집이 더욱 맘에 든다. 『앨리스의 생활방식』이 다소 지루한 동어 반복 같았다면(단편 소설로 만들면 더욱 좋았을 것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여덟 편의 단편은 옴니버스 소설 같다. 등장인물과 소재는 같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런데 여덟 편의 서로 다른 작품을 모아놓은 이 소설집이 『앨리스의 생활방식』에 비해 더욱 통일성이 있고 파장이 크며, 작가적 역량을 좀더 여실히 보여준다. 작가의 개성이나 색깔이 더 잘 드러난다. [i] <2010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나쁜 이웃’과 <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에 실린 ‘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가 내가 읽은 장은진의 두 작품인데, 개인적으로 후자는 별로였고, 전자는 기본적인 설정 등등이 <앨리스의 생활방식>과 유사해서 깊은 인상을 받진 못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껏 읽은 작가의 작품 중 이 소설집이 가장 낫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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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소재로 한 단편을 하나씩 읽어나가다보면.. 불행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우울한 기분이 든다. 해피엔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결말들.. 일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들.. 그치만 마지막 단편까지 읽고, "물질대사의 존재론과 신체예술의 윤리학"이란 제목의 심오한 해설까지 읽고 나면, 아...! 하고 짧은 탄식을 하며, 머릿속에 뒤엉켜있던 의문들이 풀린다. 친절한 해설만큼은 별 다섯개.
아내에 대한 증오심을 비둘기, 개구리 등 특이한 요리로 복수하는 남편(키친실험실), 고용인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하게 요리를 하지만 그것을 먹지 않고 버려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극한 배신감을 느끼는 여자 (달을 위한 음식), 다이어트를 위해 아파트에서만 생활하는 P와 K(동굴 속의 두 여자), 다양한 뼈를 수집해 작품을 만드는 남자(뼈), 다른 사람의 냉장고를 훔쳐하는 여자(냉장고를 열어보세요), 거울을 보듯 닮아있는 604호와 605호 남자(거울의 잠), 어쩌면 차 주인일지 모르는 남자와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여자(날짜없음), 사람의 알몸에 글을 쓰는 남자와 두 남녀 모델(몸). 총 8편의 단편이다.
먹는 행위의 이면이 불편하지만 신선하다. 단순히 포만감을 느끼고 만족해하는 수단이 아니라, 소설 속의 음식은 대부분 고립된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타인과의 소통의 매개체가 된다. 음식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최악의 경우 절박함, 분노, 잔혹함으로까지 이어진다.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 건 인간쓰레기라 거침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초반에는 다소 난해하고 거부감이 있었지만, 조금씩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난나나님의 추천대로 키친 실험실 - 앨리스의 생활방식 -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순서로 읽어봐야겠다.
- 키친 실험실 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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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실험실이란 제목에서 섬뜻한 느낌을 받았더랬다. 아니, 제목이 문제가 아니라 표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식탁 위에 엎드리고 있는 사람과 하얀 테이블 보에 번지고 있는 피, 오른쪽 구석에 높고 조그맣게 나있는 창. 그런 표지와 함께 돌아보는 키친 실험실에 대한 이미지는 조마조마하고 위험해 보인다. 주방은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고 청결한 장소여야 하는데, 그 곳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이라니. 적어도 맛있는 요리를 위한 실험임이 아님에 분명하다.
표제작인 키친 실험실은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남자가 새로운 취미로 요리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을 한다. 요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한 정열, 그러나 곧 등장한 사내아이에서부터 이 소설을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어째서 사내는 고양이와 개구리 등 길거리의 짐승들을 사 들이는 것일까? 그의 요리는 아내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담아 가장 맛있는 요리 안에 독을 숨긴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위험한 요리재료로 요리하고, 눈치채지 못할만큼 덜 익힌 고기를 섞는다. 소통되지 않는 답답함이 그와 그의 아내 사이에 떠돌고, 유일한 통로인 요리에 사내는 독을 넣어 전달하는 것이다.
음식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며, 누구나 맛있는 요리를 먹었을 때의 행복한 추억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단편들에서 요리는 여러가지 의미를 담는다. 나에겐 소중하지만 상대에겐 그저 음식물 쓰레기에 불과한 달을 위한 음식, 먹으면 살이 찌는 죄악인 동굴 속의 두 여자, 그리고 자신의 냉장고 안에서 볼 수 있는 음식에 따라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냉장고를 열어보세요, 굶지 않기 위해 상한 음식도 밀어넣어야 하는 날짜 없음.
이 단편들에서는 먹는 행위가 즐거운 행위가 아님을, 살아가는 것이 즐거운 일이 아님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 수록 갑갑해지는 것인지 모른다. 마지막 단편인 몸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주며, 어디까지가 지어낸 이야기이고 현실인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앞의 이야기들은 몸에다 적히는 작품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막 마지막에 마지막에서 작가는 조그만 소통과 구원을 넣어 두었다. 이야기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벗어날 수도 있다고.
이런 소설을 왜 읽느냐고 물으면, 이야기가 끌어들이기 때문에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이유도 그렇지 않은가. 부조리함과 소통되지 않은 갑갑함만이 남은 이야기 속에서도 무언가가 일어나길, 혹은 뭔가 다른 것이 있길 바라면서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뭐가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독자 개개인마다 다 다를 수밖에. 내가 얻은 것은 지각이다. 단편이어서 지하철 안에서 가볍게 잡았다가 환승역을 못 듣고 종점까지 간 것이다. 책과 나 외엔 아무 것도 없는 소통의 부재에 대한 가벼운 폐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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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이 소설집이.. 참으로 더디게 읽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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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에 다 읽었다. 작년에 국문학 전공 동생이 추천한 한국 소설 세 권을 읽는 중인데, 그 첫 번째 책이다. 원래 사서 보는 편인데, 마음에 들진 모르니까 일단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랬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니 책장이 누렇게 바랜 것이 책 다운 냄새를 풍겨 소설 읽는 감칠맛을 더했다.
그런데 방금 깨달았는데 최근 한국 소설을 읽은 것이 거의 1년 전이다.-0- 참고로 그 사이 읽은 책은 막 세어보니 34권인데 한국 소설은 없다니 좀 부끄럽다. 어떤 소설을 읽고 그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문단의 흐름과 작가의 다른 저서도 알아야 읽는 책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읽으면 영영 못 보게 될 것이다.
동생이 추천한 책들은 역시 무슨 수상작이기도 했다. 어디서든 상을 받았단 것은 최신 흐름이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경우 그 추세에 충실한 것이거나, 최신 흐름이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 이단아적 성향을 보인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한국 문단의 흐름은 모른 채 읽어,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단 것을 스스로도 알지만, 그냥 느낌은 있다.
일단 왜 이리 바닥 생활이 많이 나오고, 먹고 살기도 어려운 서민이 많이 등장하는지 평소에 궁금했다. 이 책도 마찬가지인데, 아마 스타 작가가 아니고서야 글 쓰는 생활이 경제적으로 고달프기에 그들의 생활이 작품에 배어나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된다. 어느 정도 체험이 바탕이 될 것이고, 소설이라 해도 현실성이란 게 있는 거라고 배웠으니까 알지만, 어쨌든 평균 이하로 지나치게 고달픈 서민이 소설엔 유독 많이 등장하는 게 꺼림칙한 건 어쩔 수 없는 느낌이다. 요즘 같이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이 굶주린 시절처럼 지독히 궁핍한 서민 이야기가 여전히 많은 걸까? 어쩌면 그래야만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끄집어 내기 쉬워서 그런 것일지 모른단 생각도 들지만, 잘은 모르겠다.
제일 앞 '키친 실험실'에 이은 '달을 위한 음식'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의아했던 것은, 이 두 이야기가 이어진 것인지 별개의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더란 것이었다. 그런데 좀 더 읽다 보니 각 다른 이야기이고, 차례에 있는 제목들이 하나의 장편 속 챕터별 소제목이 아닌, 독립적 단편이란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렇게 헷갈릴 만큼 요리나 식사, 장애나 뭔가 부족한 점, 혼자와 함께, 등 비슷한 구석이 많았고, 앞에 두 이야기뿐 아니라 전체가 그런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다. 다른 단편이고 다른 내용이지만 왠지 방금 읽은 것을 또 읽는 느낌이 꼭 있었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 가운데 하나인 식욕을 표현의 중심으로 하여, 절제하다가도 가끔은 터뜨리는 인간의 속성을 그린 것 같다.
작가는 일단 '무엇이 어떻다'라고 굳이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것 같진 않아 보인다. 전혀 다른 단편들을 모아낸 책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란 느낌이 오는 것은 어쩌면, 다만 '무엇은 어떻기도 하더라'라는 걸 말로 하는 대신에 자신의 시각 기준에 따라 모은 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시각을 독자들이 봐주면서 저절로 알아봐 주길 바라는 게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