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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아프리카, 브리타니아, 도나우강주변, 달타미아,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주변을 경계로 하는 로마제국의 정지척 심장이자 문화와 문명의 중심지였고 당시 로마제국과 변방의 국가들의 로망이었던 제국의 수도였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확립된 제정은 로마라는 도시국가를 공화정을 거쳐서 제정이라는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는 동안 항상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불변의 법칙이라고 여겨졌다. 제정 성립당시 최초의 황제를 비롯한 초기의 황제들은 로마의 원로원과 귀족출신이었고 이후 로마제국이 특성이 다양성이라는 조수에 의해 변방 속주 출신의 황제들이 제위에 오르게 된다. 물론 제위 계승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로마라는 제국의 수도에서 그 즉위식을 거행하고 원로원과 로마시민, 군대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으로 모든 불법적인 도발은 합법으로 당연시 받아 들려졌던 것이다(아마도 합법화하는 방법이 제국유지에 필수불가분한 역학관계를 자아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만큼 수도 로마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이러한 정치적 의미와 제국 변경의 속주민들 사이에서도 어마어마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제국 인프라적인 측면을 살펴봐도 모든 가도는 로마를 중심으로 뻗어나가 제국의 최하단의 변방까지 정비되어 있을 만큼 수도 로마는 제국의 성장과 함께 그 영욕을 같이 했다. 이러한 수도 로마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에 와서는 거의 그 역활을 상실하게 된다. 마치 세계의 모든 문물이 빠르게 수로 로마로 집중했듯이 그에 비례하여 수도 로마의 권위 또한 빠르게 쇠퇴하게 된다. 당시 도나우강을 중심으로 한 야만족이 잦은 로마국경 침범과 약탈로 인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편볍적인 변혁을 꾀하게 된다. 제국을 동방과 서방으로 구분하여 공동황제 제도를 선출하고 각각의 정황제 아래에 향후 안정적인 권력이양을 위해서 부황제라는 황제에 준하는 권력구도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머나먼 제국변경을 괴롭혀온 야만족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측면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서방제국은 밀라노를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고 동방은 니코메디아를 중심으로 수도 로마의 역활을 대신하게 된다. 이후 수도 로마의 역활은 원로원이 존재하는 형식적인 수도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2>는 바로 제국의 수도인 로마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장을 여는 비잔티움의 대두를 사실상 로마제국의 쇠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 의해 대제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게 되는 콘스탄티누스의 콘스탄티노스플의 창건은 새로운 시대의 도약이 아닌 로마제국 특유의 정신이 다양성의 몰락으로 본 것이다. 이후 발렌티아누스의 선출과 발렌스의 공동통치로 인해 로마는 동서 제국으로 양분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비잔티움시대는 로마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강력한 동기가 될 것이다. 물론 당시 고트족을 비롯한 야만족으로 간주된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과 동방의 페르시아와의 피할수 없는 대결때문에 제국의 분할통치가 불가피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결국 이러한 외침보다는 내부적인 권력의 배분이 로마의 쇠망을 더 가속시켰기 때문이다.
기번은 이번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이교도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후대에 대제로 일컫어지는 콘스탄티누스와 배교자라는 낙인이 찍힌 율리아누스의 치세기간을 비교 검토함으로서 그동안 일방통행격이었던 역사적 판단에 제동을 걸고 있다. 좀더 나아가서 기번은 율리아누스를 제정시대를 연 아우구스투스와 감히 비교하여 비록 짧았던 치세였지만 율리아누스의치세기간이 로마의 꺼져가는 혼을 되살린 마지막 기회였다고 단언하고 있다. 누누히 강조하지만 로마의 정신은 다양성과 그런 다양성의 포용력이었다. 이런 정신이 근간이 되어 로마는 각양각색의 민족과 이념 그리고 종교를 인정하고 그런 다양성의 화합이 제국의 버팀목 역활을 해왔던 것이었고 역대 황제들(제위의 정상적인 계승이나 찬탈은 차치하고)역시 창시자의 정신을 계승하고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치세가 후대의 비뚤어지고 편파적인 역사적 판단을 받는다고 해도 로마제국의 안정과 계승이라는 대의적인 명분에는 충실했다는 것이다. 이러면에서 그리스도교의 확장과 이를 적절히 활용한 콘스탄티누스의 등장은 새로운 로마의 첫출발이라는 형식적인 면보다는 내용면에서는 전혀 다른 로마의 출발점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율리아누스의 일시적인 과거로의 회기가 시도 되었지만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의 흐름을 거스릴수는 없는 것이었다.
기번은 1권과 2권의 상당량을 할애하여 그리스도교의 성쇄와 로마제국의 정치구도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어 다소 개인적인 역사관의 피력으로 기우는 듯 인상을 준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 로마제국의 영원한 골치거리였던 야만족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통해서 다시 한번 자신의 박식함을 독자들에게 은근히 내비치는 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방대한 주를 통해서 그리고 각야만족의 기원과 의식주, 통치구도등 정치,문화,경제등 각종 제도적인 면에서 두루두루 상세한 설명을 해 놓고 있다. 고토족을 필두로한 설명은 로마와 반대편에 있을수 밖에 없는 야만족들에 대한 변명으로도 비쳐 지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철저하게 반로마적인 입장에서 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기번이 살았던 역사시대의 한계였을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를 비롯한 아시아를 다루는 장에서 기번의 오리엔탈리즘은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어 방대한 그의 저작에 흠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기번이 살았던 대영제국의 당위성을 로마제국에서 찾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번 역시 아시아와 야만족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히려 로마제국이 바라보았던 시각보다 협소하면 협소하지 더 나을 것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로마제국는 그동안 수많은 야만족의 외침을 로마 특유의 정신으로 정복하고 회유하고 협상하면서 그 변방을 지켜왔다. 정복할때는 아주 단호하게 밀어 붙이면서 포용할때는 로마시민이나 원로원 자리를 수여함으로서 로마제국내로 흡수하였지만 국가라는 개념보다피로 연결된 민족의 개념이 훨씬 강했던 야만족의 본성을 충족하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속에도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역사서에 새로운 장을 개척한 것 만은 사실이다. 이번 편 역시 시시콜콜한 면도 있지만 본서에 맞먹는 방대한 주석을 통해서 당시 로마시대 인물들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 되었고, 그리스도교 초기 삼위일체로 분열된 종파싸움의 내막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로마제국을 둘러싼 경쟁민족들의 삶과 명멸에 대해서 일목요연한 정리는 로마제국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게끔 해주는 기번만의 보너스가 될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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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2>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창건하고, 밀라노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시대로부터 뒤를 이은 아들 콘스탄티우스황제 시대의 혼란상에 이어 갈리아군단에 의하여 추대된 철학자 율리아누스황제가 페르시아원정길에 전사하고, 역시 전장에서 추대된 요비아누스의 옹졸한 정치적 행보, 그의 뒤를 이은 발렌티아누스황제가 동생 발렌스와 제국을 나누어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할하였고, 발렌티아누스황제의 사후에 발렌티니아누스의 사망·그의 두 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을 계승하였고, 그라티아누스의 죽음 이후에는 테오도시우스가 동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던 시기를 다루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의 공표한 서기 324년부터 훈족에 밀려난 고트족이 로마의 영역에 자리잡은 서기 395년까지의 시기입니다. <로마제국 쇠망사2>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교의 공인과 이어 벌어진 삼위일체를 둘러싼 교리다툼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다양한 파벌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교가 타 종교에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갈등의 수준을 뛰어넘어 권력을 쥔 쪽이 상대를 엄청나게 탄압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세력을 잃은 쪽에서는 숨어서 권토중래를 노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데, 소아시아의 동굴에서 숨어지내던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제국이나 이슬람제국의 탄압을 피해서 숨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반대파를 피해서 숨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1>에서 보았던 것처럼 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았던 것은 제국의 수호신들에 대한 경배를 기피하는 정도를 넘어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배타적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그러니까 화를 자초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고, 역시 이교도에 관용적인 입장을 견지한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린 다음에 철저하게 짓밟은 것을 보면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에 대하여 생각을 더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로마군의 독특한 구성도 제국의 쇠망을 가속시키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는데 주력했던 로마군은 본국의 인적자원만으로는 도처에 깔아놓은 전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복한 야만족(철저하게 로마의 시각에서의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만)의 인적자원을 징발하여 군단을 창설하였던 것이며, 이들이 군대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에 뒤에는 속주출신의 황제가 탄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로마제국은 황제가 지배했다기 보다는 로마의 귀족들이 본토를 지키면서 황제들은 곳곳에 깔려있는 전장을 바쁘게 오가는 신세였는지도 모릅니다. 콘스탄니누스대제 시절에는 통합관리하던 제국을 116개의 속주로 나누어 통치를 위임하는 일종의 지방분권제도를 정착시켰던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의 그리스도교의 공인 배경에는 정적을 제압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고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기번은 그리스도교인들의 특성, 즉 종교집단의 결속력과 정신력을 활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인에게 중요한 보직을 맡겼던 것이고, 그들은 황제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였으며, 비그리스도교 관리들을 개종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적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회사에 기록되어 있는 소위 기적에 대한 기번의 입장은 “참으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믿을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로 교묘하게 혼합되었던 것(165쪽)"이라고 정리된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2>의 마지막 장에서 정리된 훈족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분명치가 않은 것 같습니다. 훈족이 중국을 위협하던 흉노족이었고, 한나라가 자리를 잡으면서 흉노족을 압박하자 이들이 나뉘서 중국의 영토 안으로 이주해서 살게 된 집단과 서쪽으로 이주한 집단이 있었다는 것인데, 중국의 북방에서 유럽까지의 이동경로가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공부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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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속담에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란 말이 통할 것 같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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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 2권입니다. 15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완전히 점령당하고 동로마가 멸망하는 것을 로마의 멸망으로 두고, 그 전 약 천년 동안의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이 조금씩 무너진다는 구성으로 천 년 동안의 역사를 재구성한 책으로, 이번 2권에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만든 것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야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 직후의 로마 역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그 시대 역사를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받아들였다는 서사에 맞춰서 쓴 분위기 등 시대의 한계가 뚜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문장과 장대한 호흡 등 이야기 자체로는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느껴지는 책이어서 오히려 인상적이기도 합니다. #연말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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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 건국으로부터 대략 천 년에 이르는 동안 이룩한 성과는 광대한 영토, 개방적인 사고, 뛰어난 예술, 법과 질서의 정립, 도덕과 명예에 대한 존중, 경제적 번영, 각종 기반시설(infrastructure) 확충 등 국가와 사회 전반에 걸친 대단한 진보였다. 그러나 제국의 명운은 2세기 후반부터 차츰 기울기 시작했다. 무능하고 폭력적인 황제는 제국을 병들게 했고 잦은 내전은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갔다. <로마제국 쇠망사 2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자손들의 치세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라키니우스를 제압하고 다시금 제국의 1인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콘스탄티누스는 통일된 것을 분할하고 강력한 부분은 약화시키고 군과 행정을 분리했다. 자신이 내전을 거쳐 제위를 차지한 것처럼 어느 집단에 힘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했다. 군인의 수는 줄지 않았으나 각 군단의 규모를 축소했으며 보병대장과 기병대장을 따로 임명했다. 잦은 내전을 거치며 군인의 임금과 복지를 과하게 높였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손 볼 형편은 되지 못했다.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군대의 눈치를 봐야했고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방식으로 불만을 잠재웠다. 군대의 기강은 해이해지고 방만해졌다. 시민의 자유는 축소되고 계층간 이동은 제한되었다. 과도한 세금은 혹리에 의해 더욱 가중되었음에도 시민은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일반 시민에게 법적 절차는 길고 까다로웠으며 특히 남들이 탐낼만한 재산을 지닌 시민에겐 더욱 그러했다. 높은 세금과 수탈로 인해 근로의욕은 저하되고 비옥했던 토지는 방치되어 불모지나 미경작지로 바뀌었다. 긴 전란과 폭정으로 자유와 명예를 숭상하는 선조들의 미덕은 잊혀졌고 시민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과거 로마제국의 상징이였던 로마는 모는 국정(군사, 행정, 외교, 경제 등)의 중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원로원은 명목상으로 존재하는 명예직이 되었고 속주 출신 군인 황제가 제위에 오름에 따라 로마 중심적 사고는 점차 퇴색됐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각각 니코메디아와 밀라노에 자리잡은 뒤로 수도 로마의 위상은 더욱 떨어졌다.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손에 쥔 후 비잔티움을 수도로 삼고 '콘스탄티노플'로 명명함으로써 제국의 중심지 역활을 수행하던 로마는 사라졌다. 이전의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를 방치하거나 때로는 탄압했다.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게 로마의 기본방침이었으나 기독교의 배타성과 교리가 로마의 방침과 부딪칠 때 교리를 존중하는 기독교인의 태도는 위정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박해받은 기독교 시설의 수복과 기독교도들의 종교적/시민적 권리를 보장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절실한 기독교 신자였는가에 대한 의문은 남지만 그가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정치적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근면과 도덕적 미덕 그리고 내세의 존재는 국민들로 하여금 자연적/공적 의무를 느끼게 하여 안정적 사회질서 확립에 기여한다. 콘스탄티누스가 타개한 후 제위는 그의 세 아들에게 이양됐다. 장남은 콘스탄티누스의 질투로 죽은 상태였고 2남 콘스탄티누스 2세, 3남 콘스탄티우스, 그리고 막내인 콘스탄스가 제국을 분할통치했다. 분할통치는 오래가지 못하고 내전으로 번졌으며 먼저 콘스탄티누스 2세가 콘스탄스에 의해 죽고 콘스탄스 자신은 또다른 내전의 희생자가 되었다. 제국의 동방을 지배하고 있던 콘스탄티우스는 죽은 형제들이 지배하던 제국의 중서부를 다시 되찾기 위해, 콘스탄스를 죽이고 황제를 칭하는 찬탈자(마그넨티우스)와 전쟁을 치뤄 승리함으로써 제국 전역의 유일한 황제가 된다. 콘스탄티우스는 몇가지 행운과 상대방의 우행에 힘입어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에 올랐지만 그의 능력과 품성은 황제의 직에 어울리지 않았으며 황폐해진 로마제국의 부흥에는 더욱 모자랐다. 콘스탄티우스에 의한 의심의 눈초리 하에 갈리아를 담당할 부황제로 임명된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사촌형제이며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폐허로 변해버린 갈리아에 도착해 적은 수의 병력과 극히 제한된 지원을 받으며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만족을 격퇴했다. 군사적 성공에 더해 현인의 가르침을 내면에 지닌 율리아누스는 선정을 베풀어 갈리아를 재건하고 다시 농업과 상업을 번창시켰다. 율리아누스의 성공은 필연적으로 콘스탄티우스의 질투와 견제를 부추겼다.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아누스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고 율리아누스 휘하 군단은 콘스탄티우스의 부당함에 분노해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강압적 분위기에 이끌려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제국의 분할 통치를 원했으나 콘스탄티우스는 단호히 거절했고 다시금 내전이 예고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대규모 전쟁을 앞두고 콘스탄티우스가 병사함으로써 내전은 급히 종식되고 율리아누스가 황제에 오른다. 율리아누스는 궁정의 향락을 거부하고 금욕적이고 성실하게 제국을 통치했다. 철학자의 심성으로 공공의 이익과 자기 계발에 힘썼으며 이전의 통치자들에 의해 방만해진 궁전을 개혁했고 공정한 사법제도를 시행했으며 국정 전반에 걸쳐 관대하고 자비로운 정치를 펼쳤다. 페르시아의 잦은 약탈로 로마제국의 변경이 수난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율리아누스는 대규모 군단을 꾸려 페르시아로 진격했고 그가 갈리아에서 보였던 용맹을 다시금 떨쳐 페리시아를 압박했다. 페르시아의 여러 도시를 정복했으나 결정적인 일격이 부족했고 적장인 샤푸르 왕의 병력이 건재했기 때문에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샤푸르 왕과 그의 군대를 격파하는 것이 중요하단 점을 인식하고 샤푸르 왕과의 일전을 꿈꾸며 진격한다. 그러나 북방과는 전혀 다른 기후에 대한 적응 문제와 적의 간계에 빠져 길을 헤매이면서 율리아누스는 큰 곤란을 겪었고 퇴각을 결심한다. 안타깝게도 율리아누스는 군단을 퇴각시키는 도중 벌어진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결국 사망에 이른다. 출중한 역량으로 로마 제국의 부흥을 이끌 재목이 1년 8개월의 짧은 통치를 마치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율리아누스는 후계자로 따로 지명하지 않고 전장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 로마군은 급히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한다. 요비아누스는 특별난 용기나 재주가 없는 자인데 요행으로 제위를 얻자 페르시아의 굴욕적 강화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조인하고 선조들이 피땀으로 얻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아르메니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페르시아에 양도한 후 서둘러 회군한다. 요비아누스는 타락과 향락으로 짧은 치세를 유지했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던 중에 갑자기 사망했다. 요비아누스의 뒤를 이어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로 지명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제위를 얻고 자신의 동생인 발렌스를 부황제로 삼아 제국을 동서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발렌티니아누스는 제국의 서방을 책임지며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건너 침략하는 게르만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아프리카와 브리타니아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반란도 효과적으로 진압했다. 발렌스는 형과 달리 능력과 심지가 탄탄하지 못한 자였으나 형인 발렌티니아누스의 원조를 받으며 제국의 동방을 통치해 나갔다. 발렌티니아누스가 12년의 치세를 마치고 병영에서 급하사자 제위는 그의 두 아들에게 이양되었다. 로마 제국의 서방은 발렌티니아누스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고 제국의 동방은 발렌스가 통치하는 체제가 되었다. 로마사를 읽다 보면 많은 등장인물에 압도된다. 한 명 한 명이 이름을 남길 가치를 지닌 자들이기 때문에 허투로 읽기 어렵다는 점이 로마사를 읽는 어려움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충 읽고 페이지를 넘길까 하는 유혹이 들다가도 로마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과 위인들의 이름을 읽고 기억해주는 것이 후대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찬찬히 읽게 된다. <로마제국 쇠망사 2권>은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에 대한 역사를 담고 있다. 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자손들의 행적을 밝히는데 치중하고 있다. 이 시기(4세기)의 로마 제국은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제국을 어거지로 통치하는 느낌을 준다. 능력있는 자가 제위를 차지하더라도 무너지기 시작한 군대의 기강, 시민의 정신, 정치 체제 등을 바로잡기란 요원해 보인다. 내전과 외침에 시달리고 위정자들은 부패한데다 자유와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던 시민정신은 쇠퇴한 로마 제국을 보게 된다. 이제 3권에서 동서로마제국의 분할과 패망을 다룰 것으로 예상되는데 제국의 말기에 어떤 인물과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꼼꼼히 읽어봐야 겠다. * 만약 로마사를 읽고자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처음부터 <로마제국 쇠망사>를 택하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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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들의 반란과 내부 분열에 시달리던 로마 제국은 4세기 말, 결정적인 위기를 맞는다. 멀리 동방에서 갑자기 쳐들어온 유목민족인 훈족의 침입을 받은 것이다. 이 훈족의 정체가 과연 어떤 집단이었는지를 두고 아직도 세계 학계에서는 수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훈족이 고대 중국을 자주 침략하여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유목민족인 흉노족과 같은 집단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려면 이 블로그에 적는 것만으로는 내용이 너무나 많아서 무리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자면, 훈족은 흉노족과 같은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고대 북아시아 초원은 유목민들에게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였다.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고작 5년 만에 몽골 초원에서 러시아까지 휩쓸고 다닌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며 이동해온 유목민들에게 중국에서 로마까지의 거리는 결코 도달불가능한 미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망하자, 요나라 왕족 야율대석이 추종자들을 이끌고 먼 서쪽인 중앙아시아로 달아나서 서요를 세웠고, 그 서요가 몽골에게 망하자 다시 서쪽으로 달아나 이란 남쪽인 케르만까지 이동해서 나라를 세웠던 일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다 힘에서 밀려 먼 서쪽인 중앙아시아로 달아났던 흉노족이 기후 변화와 다른 유목민 집단과의 마찰로 인해 더 서쪽인 유럽으로 이주하여 로마인들에게 훈족이라 불렸다고 가정을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니란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훈족은 로마인과 게르만족들에게 무시무시한 악마로 인식되며 오늘날까지도 파괴자라는 이미지를 지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느리고 무거운 보병 전술에만 익숙해 있던 고대 서구인들에게 말을 타고 번개 같이 달리며 화살을 쏘고 재빨리 돌격했다가 흩어지는 훈족의 전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미지의 적, 그 자체였을테니까. 이렇게 훈족의 침입으로 고대 서구 사회를 결정적으로 바꿔놓을 사건이 벌어지니, 그것이 바로 고트족 등 게르만족들이 훈족을 피해 로마 영토로 달아나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이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막으려 했던 로마제국은 그러나 발렌스 황제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면서,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게르만족의 이동을 막을 힘조차 없다는 사실을 대외에 뼈저리게 보여주고 만다. 그리고 발렌스 황제의 전사 이후 약 100년 후, 로마제국은 마침내 서방에 대한 지배권을 잃고 몰락하고 만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가 아직 남아있었으니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로마는 예전 로마제국 같은 위상을 떨치지 못했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영토와 국민들의 절반을 잃었으니 말이다.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천년 제국 로마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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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기번의 명작, 로마제국 쇠망사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2권이다.
지중해 일대를 호령했던 대제국 로마도 서서히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제위를 둘러싼 장군들 간에 격렬한 내전이 벌어졌고, 거기에 잇따른 게르만족의 침입과 동방의 대국, 페르시아의 침공과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와 기존의 전통 신앙과의 대립, 전염병의 창궐까지 겹쳐 제국은 혼란에 휩싸인다.
경쟁자를 제압하고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마침내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승인하고 수도를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로 옮기는 획기적인 조치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황제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내전은 계속 되었고, 기독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전통 신앙 숭배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배교자라 불리는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로마 철학에 심취하여 결국, 그리스 로마의 전통 신들을 숭배하는 이교 신앙으로 복귀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불행히도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 로마의 전통 신앙을 살리려는 율리아누스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당수의 귀족과 유력 인사들은 기독교를 믿고 이교를 배척한지 오래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을 존경하던 그는 자신이 알렉산더처럼 동방의 페르시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대군을 동원해 페르시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만만하지 않았다. 서전에서 몇 차례 로마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지만,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시절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군대를 모아 격렬하게 맞섰다.
결국, 율리아누스 황제는 페르시아 원정에서 전사하고 그가 꿈꾼 그리스 로마 신앙의 부활과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도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의 사후 10년 후에 드디어 머나먼 동방에서 말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공포의 집단, 훈족이 로마제국을 폭풍처럼 강타하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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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졸업식에 가면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표현을 많이 듣게 된다. 로마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야말로 저 표현에 가장 걸맞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적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두 가지인데, 비잔티움으로의 천도(콘스탄티노플 건설)와 밀라노 칙령을 통한 그리스도교 공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의 로마제국과의 단절, 즉, 끝을 의미하면서 이제 로마제국이 과거와는 다른 방향을 잡아 나갈 것이라는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길이 통하던’ 로마를 떠나 철저하게 황제가 계획한 도시(비잔티움)로 천도했다는 사실은 로마인들이 기억 속에서나마 긍지로 삼고 있던 ‘과거의 로마’와의 완벽한 결별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밀라노 칙령은 누구에게나 종교선택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일견 로마의 다신교적 전통과 관용적인 종교정책의 실현에 충실한 것 같이 보이지만, 황제 자신도 그리스도교도로 개종(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용)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칙령의 실질적 혜택은 그리스도교에 주어졌다.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던, 또는 천덕꾸러기였던 신세에서 벗어나 세계 전체를 호령할 수 있는 날개를 단 셈이다. 콘스탄티누스 치세의 로마제국은 이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전의 전통과 사뭇 달라진 길에 들어선 것이다. 2.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임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 제국 전체를 4분하여 각 지역에 황제를 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외적의 침입이 잦던 시기에 넓은 땅덩어리를 ‘지역방어’하는 체계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대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권력분점은 내부에서 붕괴될 위험이 높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체계이기도 했는데, 황제끼리 반목하거나, 야심만만한 황제가 여럿 등장했을 때 내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이 바로 이러한 약점을 통해 생존했으며, 또한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무수한 위기를 넘긴 끝에 재통일에 성공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분산된 황제의 힘을 다시 하나로 모으기 위한 노력의 결정체였다. 이제 그동안 형식적이나마 남아 있던 ‘로마 공화정체’, 즉, 로마의 시민권을 존중하거나 원로원의 의견을 묻는 최소한의 절차조차 사라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비잔티움이 이웃하였던 페르시아의 군주가 그랬던 것처럼 한 명의 ‘전제군주’로서 재탄생한 것이다. 고대 로마의 자유에서 비롯한 미덕의 외형조차 잃게 되자, 간소함이 특징이었던 로마 예법은 어느덧 아시아 궁정의 위엄 있는 겉치레로 전락했다. 공화정에서는 개인의 뛰어난 재능과 능력이 매우 두드러졌지만, 군주제 아래에서는 미약하고 모호해지면서 황제들의 전제 정치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황제들은 개인 능력 대신 왕실의 노예로부터 전제 권력의 미천한 앞잡이에 이르기까지 계층과 직위에 따른 엄격한 종속관계를 도입했다. (p.17) 물론 이렇게 군주 한 명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 체제는 오래가지 못하는 법.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력을 발휘하던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는 전제적 지배체제가 의도했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그의 사후, 능력면에서나 품성면에서나 그에 미치지 못한 황제들과 환관들(나라망친 환관들은 중국에서만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의 전제적 지배는 로마제국을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된다. 3.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대제'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위대한 황제로 대접받는데, 사실 이러한 평가는 그의 정치적 업적 보다는 '그리스도교의 공인'이란 종교적 업적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밀라노 칙령 자체는 관용적이면서도 로마의 전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누구도 그 신앙으로 인해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는 종교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와 함께 개인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용인 그 자체야 욕먹을 일이 아니겠으나, 문제는 황제 스스로가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실제 현실에서는 종교간 평등이 아니라 다신교가 억압받는 종교간 차별 상황이 연출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그리스도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황제가 바뀌었다고 해서 반대방향으로 동일하게 작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이 통치하던 시대. 소위 ‘이교도’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으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원래 주인을 찾아 준다는 명목아래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넘겨졌다.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소위 ‘삼위일체’를 둘러싼 그리스도교도들의 격렬한 논쟁은 국론의 분열과 속주간 반목‧대립이라는 해악만을 끼쳤을 뿐 로마제국 입장에서 엄밀히 말하면 아무런 실익도 없는 것이었다. 후대의 폭군들은 오랜 치세동안 무고한 자들을 무수히 죽여도 재생의 물, 즉 세례를 통해 순식간에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이리하여 종교의 남용이 도덕의 토대를 심각하게 위협하게 되었다. (p.176) 종교적 관용의 대헌장인 밀라노 칙령은 로마제국의 국민이면 누구나 자신의 종교를 선택하고 신봉할 특권이 있음을 천명했으나, 이 귀중한 특권도 얼마 안 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함께 박해의 원칙까지도 받아들였으니, 가톨릭 교회와 의견을 달리하는 종파들은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고통과 억압에 시달리게 되었다. (p.195) 기번은 이 지점에서 또 한 명의 로마 황제를 등장시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대비시킨다. 그가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조카인 율리아누스 황제이다. 콘스탄티누스에게 ‘대제’라는 영예로운 별칭이 붙은 것과 반대로 율리아누스에게는 ‘배교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따라 다닌다. 물론 이 ‘배교자’라는 별칭은 철저하게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개념이다. 로마제국 이후 서양세계를 지배했던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이교의 부흥과 다신교적 전통의 계승자를 자처했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아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으리라. 율리아누스 황제는 제위에 오르기 전 그리스 아카데메이아에서 학문을 닦았고, 그리스-로마신들에 깊이 천착하여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교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로마의 전통을 되살리려 하였다. 율리아누스 황제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정치형태는 과거 로마 공화정이었으며, 이상적인 종교는 다양성을 가진 다신교였던 것이다. 물론 율리아누스 황제의 시도는 실패했다. 페르시아 원정에서의 뜻하지 않았던 전사와 그의 뜻을 계승할 후계자의 부재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4. 기번이 기술한 두 황제의 대조된 배치는 이런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기번 역시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 아닌가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콘스탄티누스=위대함>, <율리아누스=배교자>란 평가를 내린다. 그리고 이 평가속에는 로마제국 부흥의 명예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쇠망의 책임은 율리아누스에게 돌리는 의도가 엿보인다. 과연 이 평가는 정당한가?” [로마제국 쇠망사] 제1권에 대한 서평에도 그런 말을 적은 바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로마제국 쇠망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솔선수범하고 진취적이던 로마시민의 가치관이 타락한 것에 있으며, 대제국에 걸맞지 않는 관용과 포용정신의 쇠퇴를 그 다음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정상적인 로마였다면 게르만족이나 고트족 등 외적의 침입에 좀 더 합리적인 대책을 제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자비를 들여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앞장서 종군하는 로마시민군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은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송두리째 맡겨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거다. 로마 군대의 야만족 수용은 날이 갈수록 일반화되고 불가피해졌으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p.36) 문제는 이런 자발적 정신의 타락이 당시 로마제국의 종교와 악순환의 상승작용을 일으켰다는 점이었다. 기번은 이 때의 ‘악순환’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고 보고 있는데, 첫째는 로마 황제들의 표면적인 종교관용정책에도 불구하고 실제에서는 종교차별로 나타난 비관용과 불포용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나 율리아누스 황제 모두 표면적으로는 관용적인 종교정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절대군주제에서 황제 자신이 어떤 종교를 신봉한다는 것 자체가 제도적 평등에서 현실적 차별을 유발할 위험성이 농후하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에 집중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나 로마 다신교를 신봉한 율리아누스 황제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과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즉, 자신의 종교의 절대성과 타종교에 대한 교묘한 탄압이 어우러진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 종교가 로마제국에 가져온 악순환은 사치와 낭비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은 예외없이 사치와 향락, 낭비를 일삼았다. 철인(哲人) 황제와도 같았던 율리아누스 황제조차도 자신이 신봉하던 종교행사에 대해서만큼은 아낌없이 국가의 부를 쏟아부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황제 본인과 궁정의 관리들, 그리고 황제가 총애하던 성직자들(그리스도교 주교는 물론 로마 다신교 신전의 사제들까지)의 사치는 모두 근면한 농민들의 희생에서 나온 것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엄격하게 근검 절약을 실천했으나, 종교의식에는 세입의 상당 부분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신들의 제단에 바치기 위해 먼 지방에서 희귀하고 아름다운 새들이 끊임없이 수송되어 왔으며, 하루에 백 여 마리의 소가 율리아누스의 손에 희생되는 일도 흔했다. (p.322) 따라서 기번이 보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율리아누스 황제를 선악의 화신처럼 대비시켜 왔던 당시 가톨릭의 관점은 그야말로 ‘웃긴 농담’이며 편파적 평가일 뿐이었다. 오히려 기번은 상당 부분 율리아누스 황제야말로 ‘조국을 사랑하는 자이며 세계의 황제가 될만한 자(p.304)’라고 인정한다. 5.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비잔티움 천도에서 시작된 [로마제국 쇠망사 2]는 율리아누스 황제 시대를 거쳐 또 한 명의 위대한 그리스도교 황제로 일컬어지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국교’로 격상시킨 인물. 따라서 이제 로마제국에서 다양성에 대한 포용은 찾아보기 어려운 미덕으로 전락해 버리고 ‘정통’의 자리를 다투는 분파적 파벌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질 거란 예상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빈사 상태에 빠진 로마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리고 그 대응에도 왜 로마제국은 쇠망을 피하지 못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3권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이다. 뱀다리 [로마제국 쇠망사 2]의 책이 가지는 흐름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는 지적일 수 있으나, 기번이 가진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은 반드시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런 시각을 드러낸 부분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극단적으로 나타난 다음과 같은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서 승리하고 그곳의 궁전을 불태운 사건에 대한 평이다. 그러나 이처럼 함부로 저질러진 파괴행위에 대해 우리가 동정하거나 분노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인 예술가의 손으로 완성한 단순한 나체 조각상 하나가 야만족들의 노동으로 빚어진 이 모든 조야하고 비싸기만 한 기념물들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p.378) 물론 이와 같은 역사인식은 당시 서구사회에서 일반적인 의식이었을 것이고, 기번 역시 이러한 시대정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역사가로서 그의 자세는 로마 제국의 쇠망 과정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만큼이나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 반면교사의 시사점을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