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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국민 작가라고 불리울 정도로 인기있는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 이 책 [웃는 암소들의 여름]은 1991년도에 출판된 비교적 연식이 오래된 작품이다. 평소 이 작가의 작품을 즐겨읽는 나로선 이번 작품이 그의 기이한 유머와 블래유머로 불리우는 측면에서 보면 조금은 재미가 떨어졌다. 내가 제대로 작가의 핀란드식 유머를 이해 못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여타 작품에서 보여지는 재미가 살짝 떨어짐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설 군데군데엔 우리 나라로선 가당치도 않는 행동과 어투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슬쩍 넘어가는 작가 특유의 위트가 숨겨져 있었지만, 등장 인물들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지루함 또한 가지게 된다.
택시 기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소르요넨은 우연히 도로 한복판에서 넥타이를 제대로 매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노인 뤼트쾨넨을 발견하고 기다림에 지친 소르요넨은 자신이 직접 노인의 넥타이를 매 주게 된다. 그러면서 우연히 그 노인과 핀란드 여행을 하기에 이른다. 노인과 말을 섞어 갈수록 노인의 정신 상태가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게 되고 급기야 치매 증상이 있음을 알게 된 소르요넨은 여행을 그만 둘 것을 매번 얘기하지만 노인의 고집은 계속 이어진다. 노인 뤼트쾨넨은 세계2차 대전 참전 용사로 장갑차 기병대에 근무했던 경험을 또렷이 기억하고 현재보다는 과거로의 그의 행적을 찾는 것에 시간을 맡기게 된다. 여행이 계속 될수록 노인의 겉잡을 수 없는 행동의 이면을 이해하게 되면서 자신 또한 그 노인의 돌발적 행동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사고를 막기 위해 여행에 동참한다. 하지만, 옛 전우가 살고 있는 농장을 방문하면서 노인의 돌발행동을 최고조를 치닫고, 마침 약혼식이 거행되는 순간에 있던 택시 기사 소르요넨은 노인의 돌발 행동을 지켜보지 못하게 된다.
얘기 중간중간에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든 문화적 차이를 제법 발견하고, 작가가 작품에서 얘기하는 타인에 대한 너그로움,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가지는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아둥바둥 거려봐야 자신의 삶에 그다지 보탬이 되지 않음을 작가는 특유의 유머러스함으로 넘겨버리고 삶을 관조하는, 때로는 어쩔 수 없음으로 받아 들이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지나치게 채찍질하고 앞으로 앞으로를 외치는 우리의 경쟁 사회와 비교해 봤을 때, 과연 삶에서 정답은 없지만 자신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노인이 넥타이를 제대로 매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그 순간,
"인간이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할 때 버림 받은 느낌으 든다" (p9)
라는 택시 기사 소르요넨의 생각을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이 들 때가 자신에겐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새삼 알아가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엉뚱하지만 자신의 옛 기억을 더듬어 보는 여행이 시작된 것은 아닌지....
노인의 치매 증상이 조금은 완화화 된 듯도 보이지만, 결국은 현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음 또한 받아 들이며 그들의 여행은 농장의 소들을 사냥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지금 가는 그 길이 어디든, 당신이 가는 길이 맞다고 소르요넨에게 얘기하던 노인의 말을 통해 가끔은 내가 가는 길에 의문이 들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답답해 질 때 떠올려 보면 좋을 듯하다.
우울한 날씨가 이어지는 북유럽 핀란드를 떠올려 볼 때 이 작가만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유머를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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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보지 못한 궁금하고 신비스런 땅 핀란드 인상적인 글귀 : 삶이란 이별과 출발 그리고 여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연히 이 길이 맞소. 모든 길은 다 맞는 길이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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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토 파실린나"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작가(아직도 사실 작가의 이름을 정확히 외우지 못했다)를 처음 알게된건 핀란드 라고 하는 지도상에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유럽에서 북쪽에 가면 있는것으로만 추정되는 나라의 작품이라는 점이 큰 흥미거리로 생각되어, 2006년 "기발한 자살여행"이라는 책을 일게된 후 부터이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이 주인공들(꼭 남자 2명이상이어야 한다.)이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가 대부분인것으로 기억한다. 헐리우드 식으로 이야기하면 "로드무비"라고나 할까?
또한, 한글판 제목만 그런지 원제가 그런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제목에 동물이 들어가 있는것이 공통점이기도 하다.
항상, 여행의 시작은 유쾌한 출발은 아니다. "웃는 암소들의 여름"은 치매에 걸린 노인"뢰트쾨넨"과 "기발한 자살여행"에 등장했다고 써있는(사실은 오래전 읽은 책이라 기억이 안남) 택시운전기사 "소르요넨" 두 남자의 엉망진창 여행기이다.
피식거리는 웃음과 함께 현실적이지 않은 여행(직장을 때려치우면서 치매노인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거나하는)을 따라가다보면 유쾌한 마음으로 책을 마무리하게된다. "읽고 난뒤의 유쾌함" - 이것이 내가 "아르토 파실린나"의 작품을 읽는 이유이며, 이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P.S 1: 논리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에겐 적당하지 않은 작품일 수 있다. 항상 논리적인 아버지는 10장을 채 읽지 않으시고 "재미없다"고 책을 덮으셨다. 하지만 아마도 그건 요즘 나이가 들어 자꾸 무언가를 잊어먹는 본인이 치매에 걸린 "뢰트쾨넨"이 될지 몰라서 이지 않을까 걱정되서 였지 않을까? 싶다.
P.S 2: "아르토 파실린나"의 작품은 핀란드 어로 쓰여있을거라 생각하는데, 번역한 사람들은 영문학과, 혹은 독문학과 출신이다. 결국 작가의 소설은 모두 중역된 작품이라고 하는것이 결론인데, 원래의 핀란드 어로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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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작가의 핀란드 소설이다- <기발한 자살여행>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작가의 책으로 길지 않은 유쾌한 소설이다. 표지가 책의 내용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
핀란드의 젊은 택시 운전사 소르요넨은 그날도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다. 택시운전사라는 직업은 승객이 항상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야 하는 자신의 삶을 맘대로 결정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소르요넨은 도심속보다 시골길을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날도 도심속을 운전하다 도로 길 한복판에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한다.
회색양복을 점잖게 차려입은 그 노인은 도로 한복판에서 양 팔을 벌리고 넥타이를 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고. 도시의 교통 체증은 노인때문에 더 악화되었다.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 그 속에서 소르요넨은 택시에서 내려 노인에게 다가가 넥타이를 매 주었고 노인을 택시로 인도했다. "어디로 모실까요?"라고 묻는 소르요넨의 질문에 노인은 "어디든 가고 싶은 데로 가시오." 라고 응수한다.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소르요넨은 시골길을 따라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운전한다. 그 일을 시작으로 노인과 소르요넨은 함께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노인은 유명한 측량의원으로 현재 치매현상을 겪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기억을 잊어버리게 되는-
그노인과 함께 소르요넨은 여행을 하게 되고.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과 치매라는 망각. 그리고 뜻모를 곳에서 발견되는 재치와 유머를 소소하게 나타내주는 소설이다. 그리 두꺼운 장편 소설이 아닌 짧지도 길게 느껴지지도 않는 적당한 길이의 유쾌한 소설.
인간이란, 자신이 지금 어디 있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할 때 버림받은 느낌이 드는 법이다. 예순여덟 살의 타베티 뤼트쾨넨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지만 그곳이 어딘지, 또 자신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도 말할 수 없었다.
삶이란 이별과 출발 그리고 여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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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왕년의 삶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 삶을 추억하거나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특히 자신이 스스로 나이가 들어감을 느낄때, 점점 나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을 때, 잘나갔을 때 나를 그리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한다. 추억일뿐 부질없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추억을 다시 집어넣는다. 추억을 아무리 되새겨도 그때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일명 왕년에 전차병이었고, 측량사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치매가 있는 타베티 뤼트퀘닌, 이상한 손님을 태움을 시작으로 의사행세를 하며 뤼트퀘닌의 여행의 동반자가 된 전직 택시 기사 세포 소르요넨 이 두사람의 언발란스적인 여행이 시작되는데, 소르요넨은 길에서 넥타이를 메는 뤼트퀘닌을 태우게 된다. 그는 좀 이상하다. 어디가냐고 하니 가고싶은곳으로 가라고 얘기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가는길이 잘 가고 있는것인지 제대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 당연히 이 길이 맞소. 모든 길은 다 맞는 길이오" 라며 그들의 여행은 시작된다. 너무 멀리 택시를 타고 가게된 소르요넨은 결국 택시회사에서 짤리고 돈많은 뤼트퀘닌의 여행의 동반자가 된다. 치매기가 있는 노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의사가운을 입고 동행한다. 그리고는 뤼트퀘닌의 옛 전우를 만나고 농장을 망가뜨리고 소 10마리를 사냥하며 즐거운 여름을 보낸다.
참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우연으로 여행의 동반자를 만나고 치매때문에 기억이 났다가 잊었다가 다시 기억남을 반복하며 그들은 여행을 하게된다. 그러다 옛 전우를 만나고 노년의 즐거움을 다시 찾게된다. 마지막 소를 잡는 부분은 굉장히 유쾌하다고나 할까, 아니면 굉장히 즐겁다고나 할까? 아무런 걱정없이 소를 잡고 먹고 나눠주고 함께하고 즐겁고 왠지 영화속의 잔디속에 뛰어노는 아이들같은 그런 그림이 떠올랐다.
당연히 이 길이 맞소, 모든길은 다 맞는 길이오,, 머랄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라고 할까? 난 아니 나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항상 인생에 정답을 매긴다. 민지야, 넌 이리로 가면 안되 거긴 틀린 길이야. 항상 이길로 가야되, 자 보렴 다들 이길로 가고 있지? 아니면 넌 나쁜 어린이야, 다른 길로 가면 넌 나쁜어린이야. 단 한번도 엄마아빠의 기대에 어긋나게 했던것이 없었던것 같다. (뭐, 몰래 귀는 뚫어본적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난 모든 사람들이 그 길로 가고 있기에 그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 길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은 다른 길이지만 그 길을 걸어갔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넌 틀린 길로 가는 바보야.. 라는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근데 이 문구를 보았을 때 머랄까 나 역시도 인생의 길에 정답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했다. 뤼트퀘닌의 이런 마인드? 어디든 세상을 떠나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마음때문에 훌륭한 동반자도 만나고 친구도 만나고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낯선곳에서 깨어나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가는 그 길이 옳다고 믿고 항상 즐거웠기에 그게 가능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대체 왜 이런 책을 쓴것이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세상 모든책에서 배움이 없는 책은 없는 것 같다. ^^ 내 지금의 생활과 주인공의 노년 생활에 대한 부러움. ㅋㅋ 그리고 반드시!! 돈을 많이 벌어놔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ㅋ 그래야 나도 소르요넨과 같은 동반자도 만날 수 있고 치매라고 병원같은데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멋진! 여행을 할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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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인간은 얼마나 절망할 것인가. 자연스레 자신의 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치매라도 걸리게 되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면 늙는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를 보면 젊은 시절이 있었을까 싶다가도 가끔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인생의 허무함과 그리움을 발견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점점 더 많은 경험을 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험이 많은자들은 경험이 적은자들에게 항상 말을 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삶을 공유하고 싶은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기발한 자살 여행>, <목 매달린 여우의 숲>, <토끼와 함께한 그해>, <모기나라에 간 코끼리> 등 기발한 제목으로 알려진 아르토 파실린나의 <웃는 암소들의 여름>에서 그 노년의 삶을 만났다.
일상에 치져 있는 택시기사 소르요넨은 자신이 치매를 앓고 있는 줄도 모르는 뤼르쾨넨을 손님으로 만나 엉뚱한 여행 길에 오르게 된다. 그와의 동행으로 인해 그는 택시회사에서 해고되었지만 번쩍 하는 번개처럼 하나, 둘 자신이 누구인기 기억해내는 노인을 혼자 둘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을 치른 전차병이었고 토지측량사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함이 정말 다행인 것일까. 양파 범벅인 장갑차에 갇히고, 호텔 저수조에 빠져있고, 낯선 레스토랑에서 맛난 식사를 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잠시 눈을 돌리면 여기 저기서 사건 사고에 휩싸이는 뤼르쾨넨, 그를 떠나지 못하는 소르요넨은 치매에 관한 책을 읽고 그에게 알게 모르게 애정을 갖게 된다.
최근이 아닌 아주 먼 기억을 떠올리는 뤼르쾨넨은 젊은 시절, 풍족한 삶의 터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저 먼 기억 속에 멋진 전차병의 자신을 기억한다. 그 시절 자신과 생과사를 함께 했던 전우를 떠올리며 찾아나선다. 그의 전우 매키탈로도 역시나 늙은 농부, 고집센 농부로 전락해버렸다. 옛 전우를 만난 매키탈로는 미래가 없는 농촌 현실에 탄식하고 뤼르쾨넨와 함께 소를 풀어주고 차례 차례 농장을 파괴한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핀란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자신의 분신과 같은 농장을 파괴하는 매키탈로의 허무한 심정이나 어제를 기어하지 못하는 뤼르쾨넨은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독거 노인, 젊은이는 사라지고 노년의 농부만이 가득한 우리네 안타까운 농촌의 현실의 모습과 연결된다.
전우와 아쉬운 이별을 뒤로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소르요넨과 그의 약혼녀 이르멜리와 나머지 인생을 함께한다.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못하는 뤼르쾨넨은 언제나 당당하다. 그의 곁에 멋진 친구 소르요넨이 있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뤼르쾨넨이 언제 어디서 엉뚱한 일에 휘말릴지, 치매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게 아닐까 그의 여행 길의 시작은 불안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어디든 상광없으니 그냥 달리시오.” “당연히 이 길이 맞소. 모든 길은 다 맞는 길이오.” 본문 11~12쪽
어디든 달리고, 뤼르쾨넨의 말처럼 모든 길은 다 맞는 길, 그 길은 인생이라는 길이리라.그러나 그 여행 길에서 예고 없이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은 즐거움이었다. 언젠가는 모두가 늙어지고 망각의 세계로 접어들지 모르는 인생.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보다 가장 빛나던 기억의 편린들로 행복해하는 노년, 결코 나쁜 결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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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가장 먼저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이런 소설은 나오기 힘들겠군, 하는 생각때문이라고나 할까. 소설은 치매에 걸린 노인 뢰트쾨넨과 우연히 동행하게 된 택시기사 소르요넨의 여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소설은 핀란드라는 나라를 여행하는 두 남자의 여정으로 채워져 있으면서, 동시에 변함없는 풍광을 지니고 있는 나라, 그리고 치매 걸린 노인의 뇌리에서조차 지워지지 않으려 하는 다양한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하고 파헤쳐지고, 메워지고, 물에 잠기기도 하고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내기도 하고, 고공행진을 하다가 폭삭 주저 앉고, 도로가 깔아뭉개고 지나가고 터널이 뚫고 지나가고, 강바닥이 드러내어지고 강의 길이 바뀌고 굴곡있어 정감도 따르던 강둑은 싹둑싹둑 정렬되어가야만 유지될 것 같은, 혹은 그러하다고 강변하는 자를 대통령으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는 도통 발굴되기 힘든 소설이라고 밖에...
“... 그는 자신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사실도 다시 알게 되었다. 그는 오래전에 이러한 것을 예측했어야만 했다. 이제는 이 모든 것, 그의 삶 전체가 낯익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이러한 분명함과 선명함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슬그머니 엄습했다. 기억상실이 또다시 자신을 덮칠 거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니까 이 치매걸린 노인이 걱정하는 기억상실과 소설을 읽는 내가 걱정하는 바는 다른 듯하지만 비슷하다. 노인의 경우 세상은 그나마 그대로인데 자신이 기억을 잃어가는 대신, 나의 경우 나의 기억은 아직 정정하기만 한데 나의 기억 속에 지그시 자리잡고 있는 장소들이 (더불어 추억들까지도) 변형되거나 소실되어 버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 부자의 돈은 가난한 사람의 돈보다 영향력이 크고, 가난한 사람의 돈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드물다. 가난한 사람이 뭔가를 돈으로 해결하려 하면 틀림없이 돈을 잃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가난할 리가 없을 것이다.”
핀란드 특유의 (라는 건 그저 내 생각이지만) 느긋하고 자연친화적인 유머를 구사하면서도 때때로 촌철살인의 문장을 쏘아대는 작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는 두 사람의 행적은 그러나 (그러니까 소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리네 삽질 정권에 대한 짜증에도 불구하고) 꽤나 유쾌하다. 느닷없는 손님을 위해 장거리 여행을 마다하지 않는 택시기사, 그리고 두 사람이 여행길에 만나는 사람들 모두는 선하기만 하다.
“그렇게 다시 새 날이 밝았다. 그날은 여섯 번재이자 마지막 파괴의 날이었다. 하느님은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했다. 매키탈로의 신(新) 이주자 농장 역시 엿새 동안에 파괴되었다.”
심지어 나라로부터 제공받았고 평생을 바쳐서 일구었던 자신의 땅을 나라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싫어 철저하게 파괴해버리는 치매 노인의 전우인 전차병 마저도 노인답지 않은 좌충우돌식의 행동과 성격으로 독자를 즐겁게 만들어준다. 여기에 파괴된 농장으로부터 벗어난 소들을 추적하며 이들이 벌이는 식도락, 그리고 이 어설픈 카니발에 동참한 외국인들까지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뢰트쾨넨은 여름 내내 자신을 도와준 소르요넨에게 수고비와 경비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소르요넨은 이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우정 때문에 측량위원과 함께 돌아다닌 거라고, 잘 생각해보면 우정이란 자연이 대가 없이 준 선물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갈되지 않을 만큼의 우정을 가지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그렇게 치매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좌충우돌 노인 뢰트쾨넨과 우직하고 선하기 그지없는 택시기사 소르요넨의 조금은 뜬금없는 우정만끽 여행은 끝이 난다. 그리고 이제 소망해본다. 작가의 손끝에서 풍성하게 넘쳐나는 핀란드의 자연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풍성함이 유지되 수 있기를, 그리고 이러한 자연에 대한 묘사와 함께 어우러지는 인간 군상들 또한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는 이 핀란드 작가처럼 우리의 자연과 제대로 어우러지는 우리들을 우리의 작가들도 그려주기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