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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밀란쿤데라를 무척 좋아한다. 서점에 갔다 밀란쿤데라의 신간이 눈에 띠기에 망설임없이 사들고 나왔다. 속지에 내 사랑 쿤데라씨라고 적을 만큼 밀란 쿤데라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히 말해서 책에 대한 실망이라기 보다는 민음사에 대한 실망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과연 교정을 보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책을 읽다 너무 화가나 홈페이지에 접속했지만 독자의 란은 없어 작가에게 누게 됨을 알지만 감히 이렇게 아무데나 최저의 평점을 준다. 번역서라는 한계를 차치하고 라도 띄어쓰기와 문장의 혼란함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밀란쿤데라는 책이 번역 되어 나오는 과정을 무척 신경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책을 읽으며 나 스스로 무지한 것인지 오역인 것인지 끊이 없이 반추해 보지만 전술했듯 번역서의 한계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이건 심하다 싶다. 번역가는 서울대 교수이고, 편집인 또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개인적으로 세계문학전집 또한 극찬하는 바이다.)중 밀란쿤데라의 농담을 발행한 경력이 있는 분이 이 책을 만들어 내셨는데, 그런데 도대체 왜? 표면적으로 커튼을 만들기 위한 인력은 훌룡하다. 난 도무지 이 책을 이렇게 성의 없이 만들어 낸 이유를 모르겠다. 작가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작가는 흥행보증수표라고 생각해 아무렇게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한 건지 어차피 무지한 독자라고 생각한 것인지.... 민음사는 작가와 독자에게 공개 사과까지는 못 하더라도 죄책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약 책이 차라면 리콜을 요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억울하면 원본 읽어라!" ?? 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지식을 샀다. 그 대금에는 번역과 교정에 대한 감사와 수고비가 포함되어 있다. (비교를 위해 민음사에서 출간된 농담- 432p 8,000원 2007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58p 7,500원 2007년/ 느림-182p 7,500원 2002년/ 커튼- 232p 13,000원 2008년) 환율의 변동, 자제값과 인금 인상 뭐 기타 등등을 감안하여 보더라도 커튼은 결코 저렴한 가격의 지식은 아니다. 그런데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리콜을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전 보다 엄청나게 인상된 금액으로 독자에게 책을 구매하도록 하였다면 전 보다 나은 질의 책을 제공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책의 질이라는 것이 표지를 화려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커튼을 처음 사 들고 나오면서 페이지에 비해 책이 가벼워 기분이 좋았다. 팔 아프지 않아 좋군! 하고 말이다. 어차피 작가보고 산 책이기 때문에 표지 디자인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었지만 번역이 이따위(?) 다 보니 화려한 색상이나 양장이 저질 번역을 가리기 위한 눈가리고 아웅용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이건 민음사의 지적 독점의 횡포다. 지적 권력의 횡포다.
저질 번역으로 커튼에서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커튼으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면 결코 작가를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민음사에 대한 무한한 실망을 보낸다. 다시 한 번, 참고로 민음사에서 농담이라는 책을 읽을 무렵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농담과 비교해 본 적이 있다. 나는 민음사에서 나온 농담을 읽은 것을 무척 감사해했고 민음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느낀 바 있다. 이번 역시 민음사에서 나온 책이기에 의심없이 사들고 나온 것인데 이런 식으로 배신감을 주다니 다시 한번 민음사에 대한 무한한 실망을 표하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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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람 쿤테라의 책이라면 무조건 산다. 그리고 다른 것에 우선해 읽는다. 그의 경쾌한 문체에 미치고 아이디어에 환장한다. 대강 읽고, 다시 꼼꼼히 읽었다. 200자 원고지 5, 6매 분량의 짧은 수필 74편 속에 밀도 높은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소설 전반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필요하다면 그의 소설들 몽땅 읽어도 이 한 권을 읽는 것만 못할 것이다. 0 역사는 반복의 악취미를 가진 반면 예술의 역사는 반복을 용인하지 않는다. 예술은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며 풍악을 울리지 않는다. 0 오늘날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유일한 모더니즘은 반현대적 모더니즘이다. 0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2권 마지막 부분에서 돈키호테 위작에 나오는 돈 알바로를 만난다. 허구가 허구를 만나는 순간이다. 밀란 쿤테라는 불멸에서 작가가 새벽 막 깨어나는 순간의 깨어남과 잠 사이에서 어렵프시 꿈을 꾼다. 잠자리에서 깨어나 알몸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서 옷을 입는 여자, 꿈 속의 여자, 아네스. 소설의 주인공을 설정하는 순간이다. 허구의 인물이 허구의 소설 속 인물을 창조하는 순간이다. 0 이성적 통제없이 20쪽 가량의 글을 쓰고 나서 날카로운 비평정신을 가지고 그 글을 다시 읽고 핵심을 지키면서 계속 써나가라. ‘도취’라는 이름의 야생마와 ‘명석함’이라는 이름의 훈련된 말을 나란히 묶고 싶은 말이다. 0 이어령의 ‘흙바람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미치지 않은 젊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비슷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놈이란 소릴 들을 것이다. 그런 우를 우리는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 보아야 한다. 0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진부하다. 선해석이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세르반 테스가 새로운 소설기법을 개척했던 것은 선해석의 커튼을 찢어 버렸기 때문이다. 0 평범한 배관공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이지만 일부러 덧없고,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래서 무익하고 결국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 책들을 만들어 내는 평범한 소설가들은 경멸당해 마땅한 존재이다. 0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 작가의 작품은 일종의 광학기구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기구를 독자에게 줌으로써 이 책이 없었다면 아직도 자기 자신 안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독자가 책이 말하는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인정하는 일은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0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고 소설은 무한히 증식하며 자멸한다. 0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 몇 개 대강 뽑은 글이다. 책 한 권에 반해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이 책이 그 책 꼴이 될 것만 같다. 처음부터 다시 읽을 필요는 없다. 집히는 대로 아무 쪽이나 닥치는 대로 읽어도 내용의 단절은 없다. 한 쪽 한 쪽 모두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언제나 신선하게 나를 울리고 재발견하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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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쿤데라의 팬이지만 소설 이외의 글은 처음으로 읽어본다. 그래서 그런지 기대도 컸다.
그리고 밀란쿤데라는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물론 그가 풀어놓는 썰을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되돌아가 읽는 수고도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 책을 읽는 재미의 일종이었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밀란쿤데라는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가 인용한 소설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책을 읽는 즐거움과 분석하는 기쁨을 선사한다.
그나저나, 이 책을 읽은 이상 여러권의 고전을 읽지 않으면 안 되게 생겼다.
그렇게 고전들을 섭렵하고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고 싶다. 그 때엔, 분명 지금보다 수 백배의 즐거움을 느끼지 않을까?
참, 소설을 쓰는 태도에 대해서도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니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읽어볼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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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소설
이 세상의 근본적인 진실 또는 진리는 선(先)해석의 커튼으로 가리워져 있다. 그 커튼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어떠한 사상과 교의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하면서 그러한 사상과 교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우리들은 커튼을 보면서 그것이 세상의 모습이라고 인식한다. 여기에 쿤데라는 덧붙인다. 소설이라는 예술은 이 선(先)해석의 커튼을 찢고 그것에 가려진 진리와 진실을 밝혀내고 조명하려는 시도에서 탄생했다고. 쿤데라에 의하면, 소설의 일반적인 목표는 ‘‘(커튼 뒤에 숨겨진)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이다. 그래서 “소설을 창작하면서 소설가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져 있던 ‘인간 본성’의 한 양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쿤데라는 소설가이다. 그는 커튼을 찢고 진리를 조명하는 작업을 즐긴다. 또한 그는 한 명의 소설가로서 소설이라는 예술의 기능 그리고 역사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커튼을 찢는 소설의 특성과 특징에 대해서,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무척이나 흥미로워하고 즐거워하면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나는 소설이라는 예술 자체에 크게 흥미가 없었다는 것을. 왜 그랬을까? 음악이든 미술이든 문학이든 각각의 예술은 그들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자의 장구한 예술의 역사 속에서 작품 하나하나는 특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각각의 작품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어떤 예술을 진정으로 즐기는 이들은 그 예술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들이 그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얻는 원천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작품을 그 작품이 속한 예술의 역사에서 그것의 위치를 가늠하고, 다른 작품과 비교·대조하면서 지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에서 받는 즉각적인 인상과 느낌보다는 이러한 즐거움이 더욱 크다. 즉, 매니악한 예술 감상 행위는 필연코 지적인 즐거움에 기반하고 있다. 쿤데라는 이 에세이에서 소설이란 예술에서 얻는 이러한 지적인 즐거움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그에게 있어서) 소설의 역사를 정의하고 그 역사를 구성하는 작가들(세르반테스, 플로베르, 보르흐, 카프카 등등)을 나열하면서. 나는 그가 이 글을 쓰며 즐거워했을 것이 눈에 선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만큼 즐겁지 않았다. 왜? 그것은 내가 여태껏 소설을 도구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소설 읽기를 목적이 아닌 과정으로, 인식의 도구로 삼았던 불량한(?) 독자였다. 나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커튼 뒤의 진실과 진리를 알기를 바랬다.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알기를 바랬다. 하지만 소설 자체를 알고자 하지는 않았다. 즉, 나는 소설이라는 예술을 장르적으로 즐기기보다는 그것의 열매를 따먹는데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였구나. 종종 ‘나는 소설을 쓸 자신(또는 생각)이 없다’고 느꼈던 이유가. 그래서 이 책이 다소 재미있었으나 무척 재미있지는 않았나보다. 이 책에서조차 내가 흥미를 느낀 부분은 쿤데라가 지나가듯 언급하는 인간의 본성과 본질에 대한 내용이었으니, 이것만 봐도 내 독서의 목적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셈이다(‘어리석음’에 대한 고찰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로 흥미롭고 유쾌했으며 게다가 유익하기까지 했다.) 이 책을 덮으면서 이제 내가 소설이란 예술을 조금이나마 목적으로 대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살짝 받았다. 아마도 이 소설에 대한 에세이를 통해 소설의 역사와 그 흐름에 조금 감을 잡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실제로도, 나는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아두었던 카프카의 책을, 뽑아서 옆에 고이 놔두었고(그것도 이 책을 읽는 도중에!), <마담보바리>도 다시 보고 싶어졌으며, 쿤데라의 소설들도 차분히 읽고 싶어졌다(이건 당연한건가?) 어쨌든, 덕분에 순수하게 지적으로 즐기는 예술 분야가 하나 생길 듯 하다. 각 예술은 그것의 역사에 해박할 때에야 비로소 지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교훈도 하나 얻었고 말이다. 구절 “소설가를 매혹시키는 역사란, 인간 실존의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97쪽)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 작가의 작품은 일종의 광학 기구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기구를 독자에게 줌으로써 이 책이 없었다면 아마도 자기 자신 안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돕는다. 독자는 책이 말하는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안에서 인정하는 일은 진실과 대면하는 일이다.”(13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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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예로 드는 많은 소설 작품들과 소설가들이 생소해서 모두 소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내겐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품들과 작가들인데 모두 저명한 위치에 있었다. 조금 익숙한 '카프카'의 작품은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을 뿐더러 어린 나이에 너무 어려웠던 작품으로 남아있다. '알베르 까뮈'는 이제 알아가는 단계이고, 그나마 최근에 읽었던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가 익숙하게 등장하여 위안이 되었다.
여타 책을 소개하거나 소설 작품에 대한 비평을 한 글들과 달리 '밀란 쿤데라'의 이 작품에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 무게감이란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장들 때문만은 아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만의 무게감이 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여러 작품들을 읽었으면 더욱 즐거운 읽기가 되리라 생각이 들지만, 이 작품을 통해 소위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을 알게 되고 또 찾아 읽어 봐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이 작품을 들게 될 것이다.
최근에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아 있는 부분들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 남겨둔다. 그것은 '인정하라' 혹은 '인정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인정하지 않아서' 일어나게 되는 것임을 여러 사람들이, 여러 작품에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도 그 '인정'과 '이해'에 대한 노력으로써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를 말하고 있다.
(...) 돈 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p.21)
이 글을 보면서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나도 그래야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도 곰곰이 따지고보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돈 키호테]를 읽었지만 작가가 언급한 부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 처럼 말이다. [돈 키호테]의 패배에서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의문이 한 가지 들었다. 작가는 공부하 듯 소설을 읽었을까 아니면 편안히 소설을 읽었을까. 공부하 듯 읽지 않고서도 그런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읽었어야 할 작품인데, 집중력이 흩으러진 분위기에서 읽어나가서 미련이 남는다. 작품에 언급된 작품들을 만나고 꼭 다시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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