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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열기가 가라앉은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았다. 승자에 모두가 열광했고, 메달권 밖의 선수들에 대한 독려도 이어졌다. 바라보는 입장에 선 자도 이리 환희를 느꼈으니, 직접 경기에 임한 선수들은 아마도 온몸 가득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스포츠 스타에 대한 열광은 오래 전에도 있어 왔다. 물론 최근에는 자본을 등에 업은 하나의 상품으로서 스포츠 스타들이 부각되고 있다. 그렇기에 스포츠 스타들의 영향력이 여느 때보다도 크다고도 볼 수 있다. 잘 생긴 외모, 관능적인 몸매, 뛰어난 실력 등. 그들이 가진 매력은 다양하다. 하지만 경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때야 말로 그들의 진가는 발휘된다. 자로 잰듯한 정확함뿐만 아니라 예측이 불가능한 플레이에 관객들은 열광한다. 그 열광이라 하는 게 지극히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플레이로 인한 것임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우리는 넋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다. 거기에 각종 정치를 대입시키는 것은 스포츠 정신을 변질시키는 행위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사회의 각 요소들은 각기 분리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독재정권들이 스포츠를 장려함으로써 자신들을 향한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분출되도록 도모했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스포츠 안에도 정치는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포츠로부터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저자는 스포츠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것도 특정 종목이 아닌 모든 운동에 고루고루. 감정에 충실한 사람은 종종 객관성을 놓아 버린다. 스포츠에 열광하고 있는 저자 역시 그와 같은 취약점에 노출되어 있다. 그가 아무리 인문학자일지라도 이 책을 저술하는 그 순간만큼은 나와 같은 평범한 관객의 시선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학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친절함과 다양한 관점에서의 스포츠 분석을 통해 그는 자신의 열광이 정당한 것임을 증명한다. 급기야 짧다 볼 수 있는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 과거의 영광을 잃은 채 폐기물마냥 취급 받는 선수들까지 조명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스포츠가 행해지는 순간의 가치를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는 노인에 불과해 보이는 무하마드 알리를 자신들의 영웅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다. 아마도 나의 세대 중 일부는 축구 스타 지네딘 지단의 플레이를 보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꼭 뛰어난 결과를 도출해낸 선수들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난 올림픽에서 단 한 번의 시도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전 세계인의 박수를 이끌어낸 우린 각기 다른 것을 기억한다. 꼭 승자가 아닐지라도 아쉽게 져버린 경기, 이길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흘리는 눈물 등. 그와 같은 기억들은 그 자체로서 감동이다. 그 기억들이 모여 스포츠의 위대함을 구성한다. 그 기억들이 스포츠를 뛰어넘어 현실에서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열쇠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그럴 때도 우리는 스포츠가 지닌 힘에 감탄한다. 하지만 꼭 무언가 정치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더라도, 선수들이 보여주는 순간의 집중력, 온몸의 털이 다 서버릴 정도의 긴장감만으로도 스포츠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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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잘 안 팔린다는 올림픽기간에 ‘인문학자의 스포츠 예찬’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겁 없는 책을 만났다. 내용과 제목이 일치하는 것은 원서제목이지만, 열기를 뿜어내고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은 한국어판 제목에서 나온다.
근대 올림픽을 기점으로 스포츠는 급격히 산업화되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월드컵이나 아시안 게임 등 국제경기는 나라의 친선과 우호를 다지는 자리가 아니라 기업광고의 경연장이 되고 말았다. 또 국가주도형의 산업사회에서는 스포츠가 대중조작의 역기능을 보인다며 비판을 받는다. 저자는 이런 평가에서 스포츠를 구하고 싶었나 보다. 여러 미학용어를 동원해 예술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스포츠를 학문적 담론의 영역으로 초대했다.
저자에 따르면 스포츠는 상황이 전개되고 몸을 통해 어떤 형태form가 드러나는 그 실제 시간과 실제 장소에 참여하는 경험이다. ‘시간’과 ‘장소’에 ‘참여’하는 행위로서의 스포츠는 여느 예술작품과 구별되는 면이 있다. 회화나 음악이 창조자는 사라지고 작품이 남는다면 스포츠는 특정한 개별선수의 존재를 통해서만 성립되므로 오히려 연극에 가깝다. 그러나 행위자와 분위기가 바뀌어도 연극에는 반복되는 고정형식이 있는 데 비해, 스포츠는 개별 선수들의 현존이 중요함으로 연극과도 다른 장르의 예술이다. 굳이 형태form를 지칭한 것은 뽀이에인, 즉 미술에서의 형성이나 문학의 형상화와 대등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리라.
저자는 이어서 말한다. 처음에는 할 수 없었던 동작을 재연하고자 하는 충동이 스포츠에는 담겨 있다고. 이를 플라톤식으로 해석하면 스포츠는 이데아를 끊임없이 모방하는 것과 유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보자면 선수들의 독창적인 관점과 의지가 창조적인 미메시스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3부 매혹’은 이 책의 백미이자 조금만 더 다듬으면 대중을 위한 미학입문서가 될 수 있을 부분으로, 스포츠를 미학 언어를 통해 설명한 내용이 그다지 어렵지 않고 직관적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스포츠에서 사용하는 도구에 대해 인간 육체의 확장이자, 선수들은 도구들과 사적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보는데, 사격선수가 사용하는 총에 대해서는 입장을 살짝 달리한다. 아마 저자는 도구에 과다하게 의존하는 스포츠보다 어느 정도의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고 도구와 육체의 관계가 분리되지 않을 정도의 일체감을 보이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듯하다. 타이밍과 폭력의 관계를 고찰한 부분, 훌리건을 억압된 좌절감의 발산체가 아닌 집단적 몸체로 인식하는 부분 역시 미학적 즐거움이 있다.
대중의 동경과는 행보를 달리하며 소수자 팀을 응원하는 유럽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 저자는 자기기만이라고 일갈하는데, 이 점에서 나는 저자와 견해가 다르다(물론 저자가 어떤 의도로 이를 기술했는지는 십분 이해한다). 비유하자면 지식인들의 의도적인 마이너리그행인데,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에는 정치사회적인 의미가 있으며, 이미 산업화된 스포츠에서 ‘순수한 열기’만 분리추출할 수는 없기에 지식인들은 ‘의도적인’ 거리두기를 한다. 지식인들의 독특한 자의식을 폄하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러한 책이 유럽 학자에게서 탄생한 것은, 스포츠가 일반인들의 삶에 ‘생활체육’으로 자리하고 있는 유럽환경 덕분이 아닐까. 스포츠 참여나 관전에서 느끼는 순수한 열정, 선수 및 경기와 내가 일체가 되는 몰입의 경지를 체험할 기회가 일상적인 체육환경 말이다. 스포츠에 담긴 아름다움을 섬세한 언어를 통해 보여주는 이 책은 사유거리로 풍부하다. 행위 하나에서도 수많은 의미를 읽어내는 굼브레히트의 작업을 보며, 철학과 미학 등 인문학의 역할을 새삼 느꼈다. 인문학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이를 주목하게 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저자의 애정과 매혹적인 인문학의 향기가 고루 느껴지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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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혹시 그가 먹물이라면 '나 스포츠 좋아하지;라는 얘기를 잘 하진 않는다. 자본주의, 우민정치의 수단 등으로 자리잡아버린 스포츠의 역할(?)이 찜찜한 탓일까.
심지어 스포츠를 사랑하는 학자라도 막상 자신이 갈고 닦은 개념을 적용할 때면 결국 스포츠를 바람직하지 않은 경향들의 어떤 증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지곤 한다....(중략)... 간단히 말해, 스포츠 찬양이 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한편 지식인들이 스포츠를 찬양하는 데 무능력한 더욱 일반적인(그리고 더욱 설득력있는) 이유는 항상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있다.
스스로를 교양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적 경험이란 오직 몇 가지 규범화된 대상과 상황에 의해서만 유발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즉 '문학적'이라고 내세우는 책에 의해, 연주장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의해, 박물관에 걸려 있는 그림에 의해, 혹은 무대에서 공연되는 극예술에 의해서만 미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엘리트 집단은 정전(正典)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회적 차별화와 특권의 도구가 되어버린 미적 경험에서 이득을 본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요즈음 스스로 교양있는 중산층이라 칭하는 사람들은 이 차별화의 기제를 무식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보다는 '그저 돈만 많은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기준을 통해서 볼 때, 그리고 '주변성'이 스포츠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스포츠는 틀림없이 미적 경험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고 강조한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스포츠를 미학적으로 분석하면 '현존'과 '의미'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미의 차원에서 사건은 새롭고 다소간 심오한 변화의 시작을 특징짓는 순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현존의 차원에서는 '모든' 시작이, 심지어 끊임없이 반복되거나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시작조차도 '사건'이라는 지위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의 '세계'에 대한 고찰도 꽤나 탁월하다.
운동선수와 관중에게는 오히려 그런 규칙들이 일상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경기중에 강렬하게 집중하여 몰입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이 된다.
비록 책의 뒷 부분에 가서는 왠지 처지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 능력은 분명 인문학자로서 반드시 갖춰야할 것이 아닌가 싶다. 내 관심사를 '그럴듯'하게 포장해낼 수 있다는 것. 타인이 어찌보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예찬할 수 있다는 것. '도구'와 결합되는 스포츠를 설명하는 장면을 보라.
...정말로 유명한 선수들은 기계적 지식과 육체적 직관의 조합을 통해 그런 셋업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나타낸다....(중략)...그런데 자동차경주에서 관중이 위다함과 마주하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사실 이 말은 오후 한 나절 내내 경주차량이 단지 몇 번 전속력으로 눈앞을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 켄타로우스 같은 경주 선수의 윤곽을 포착한다는 뜻이다.
그저 스포츠의 기록과 에피소드만을 담은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
오랜만에 '신선함'을 느끼며 재미있게 읽었던 책.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에피스드가 주는 감동이 뭔지 대충은 알 거다. 그리고 이 감동을 대충 아는 사람은, 이 책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오사카 출신인 내 친구 에이코 후지오카에게 야구와 관련된 가장 소중한 기억은 정확히 패자의 비장미와 관련된다. 그런 우아함은 아레테(탁월성을 향한 노력)가 아곤(경쟁)에 비해 아주 눈에 띌 정도로 우위를 점하게 되는 어떤 수준이 존재하리라고(이것은 당연히 스포츠가 거둔 최고 수준의 성과일 것이다) 희망할 수 있게 해준다.
15년 전쯤 당시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뛰던 코지 아키야마의 팬이었을 때가 정말이지 앚혀지지 않아. 난 텔레비전으로 일본 챔피언전을 시청하고 있었지, 두 명 아니면 세 명쯤 주자가 진루해 있고 투아웃 상황에서 아키야마가 타자석에 들어섰어. 또 한 점 얻을 수 있는 기회였지. 볼카운트는 투스트라이크였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된 상황이었는데 그 다음 투구에 아키야마는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어. 그런데 그만 스트라이크가 돼버린 거야. 삼진을 당해버린 거지. 이런 아주 중요한 경기에서 자기 팀에 또 한 점을 올려줄 기회를 그만 잃고 말았던 거야. 경기장은 실망한 라이온스 팬들의 큰 한숨 소리로 가득 찼어. 이런 상황에서 아키야마는 타자석에 평소보다 잠깐 더 오래 머물러 있더니 진정으로 아름다운 웃음을 투수에게 보내지 않겠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키야마의 웃음은 상대 투수가 그날 야구 시합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느낌, 그리고 경쟁에서 패했지만 그 자신도 이러한 성취의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고 나는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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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스포츠(Sports)'란 무엇이었을까? 어렸을 때 공부만 해서 몸이 좋지 못했던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축구와 농구 둘 중에 한가지 운동을 선택해서 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아직도 기억하는데 당시 나는 나름 축구와 농구 두가지 운동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었으나 중학교에서 두가지 운동을 전부 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굉장히 고심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농구를 선택했던 이유가 기억나는데 최소 20명이 필요한 축구와 달리 농구는 그냥 공만 있으면 가능하고 게임 하기가 쉬우며 결정적으로 당시 마이클 조던(Micheal Jordan)의 덩크슛이 굉장히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축구보다는 농구가 속된 말로 '뽀대'가 나지 않는가? 이렇게 Sports는 나에게 있어서 건강과 멋이라는 두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스포츠(Sports)라 하면 이른바 우민정책인 3S(Sports, Screen, Sex)의 하나로서 건강을 제외한 의미는 평가절하되어 오고 있었다. 특히 스포츠(Sports)가 상업주의와 결합한 모습에 대해 많은 지성인들이 비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본인의 경우에도 1등을 향한 경쟁과 상업주의가 만연한 올림픽의 경우에도 썩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농구공 튀기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 두근하며 각종 구기 스포츠에 심취해있고 매달 1번 이상씩 농구, 축구, 야구를 직접 관람하러 다니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비판적이면서도 스포츠(Sports)에 심취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하지만 당시에는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조차 가지지 못하였다. 내가 농구를 하면 즐겁고 야구장에서 야구를 보면 그저 즐거울 뿐인데 좀 더 구체적이고 학문적으로 분석해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현재 국내에서 출판된 스포츠 미학서적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중에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책 뒷 편의 추천사 중에서 '박동희 기자'가 눈에 들어왔다. 박동희 기자는 Sports 2.0 시절부터 야구 전문기자로서 분석력있고 가차없는 비판으로 큰 주목을 받았었다. 비록 이런 스타일에 대해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갈리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신뢰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야구 전문기자이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비판'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며 스포츠를 이데올리기 조작의 수단으로만 보는 서양의 많은 지식인들의 편협한 안목과 스포츠를 오직 우민화의 수단이며 대중불만의 표출통로 제공, 그리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육성이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스포츠(Sports)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글쓴이는 주장한다. 분명 이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분은 평소에 야구, 축구, 농구 경기장을 잘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생각해보라.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본인도 기쁨을 주체 못해서 신촌 앞을 뛰어다녔는데 당시에 분출되었던 엄청난 에너지와 모두가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을 되새겨보던데 단순한 우민화의 수단이나 대중불만의 표출통로 제공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기존의 스포츠(Sports)에 대한 비판에 대한 스포츠 예찬론자의 탁월한 반론으로 현재 국내에서 출판된 거의 유일한 스포츠 미학서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생각한다. 혹시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뭔가 다른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뭔지 모르거나 그 이유가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과 함께 하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