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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글이 빛나는 곳에서 한국학 연구의 심장부로-규장각
"임금의 글이 빛나는 곳에서 한국학 연구의 심장부로-규장각" 내용보기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했다. 별자리 가운데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별이 규성(奎星)인데, 그래서 규장각(奎章閣)은 임금의 글이 빛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곳이다. 규장각은 정조 사후에는 조선의 정세에 따라 부침을 겪다가 마침내 1910년 조선이 그 운명을 다할 때까지 135년간 존속했고, 해방 이후 다시 부활해 최근에는 한국학 연구의 중추로 그 역할을 다하
"임금의 글이 빛나는 곳에서 한국학 연구의 심장부로-규장각" 내용보기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했다. 별자리 가운데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별이 규성(奎星)인데, 그래서 규장각(奎章閣)은 임금의 글이 빛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곳이다. 규장각은 정조 사후에는 조선의 정세에 따라 부침을 겪다가 마침내 1910년 조선이 그 운명을 다할 때까지 135년간 존속했고, 해방 이후 다시 부활해 최근에는 한국학 연구의 중추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문화 정치의 산실-규장각’에서는  규장각 관장을 4년 동안 역임했던 저자가 규장각의 역할과 그 변화를 통시적으로 살펴보는 동시에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걸맞는 규장각의 의미와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규장각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그 명칭대로, 임금의 글씨나, 기록을 보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규장각을 그대로만 두지 않았다. 문신들을 재교육하고, 신하들과 토론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친위 신하들을 양성했다. 또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하는 등 정조 시대에 규장각은 정조의 친정체제를 강화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거기에 각종 책을 수집해서 보관하고 편찬 사업을 펼침으로써 조선의 문화 수준을 한층 높여주었다.

문제는 정조 사후였다. 규장각의 기능과 위상이 위축된 것은 예견된 운명이었다.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을 거치면서, 규장각은 정조대의 위상을 되찾지 못했다. 각신들 임명이나 초계문신제도의 기능에서 규장각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세도가 집안에서 각신이 나오고, 초계문신제도 등도 폐지되거나, 잠시 존속했다 다시 폐지되는 등, 규장각 역시 세도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규장각은 잠시 활기를 되찾았다. 고종 역시 규장각을 통해 근왕 세력을 양성하고, 또 군주 제도를 바탕으로 한 점진적인 개화를 추진했지만,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일본의 제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규장각은 고종이 아닌 일본에 의해 좌지우지됐고, 일본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등 그 위상이 추락하고 말았다.


고종 이후 해방 전까지 규장각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의 의궤와 자료 등은 프랑스군이 약탈해가는가 하면, 통감부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 자료 일부를 일본으로 반출하기도 했다. 또 오대산사고에 보관됐던 실록 또한 일본으로 반출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심각한 것인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뒤 규장각 자료를 연구해, 조선 역사를 왜곡하거나 수월하게 식민 지배를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것은 모두 제나라를 지키지 못한데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이 비극은 프랑스와 일본으로 반출된 규장각 문화재들을 반환받기 위해 끈질기게 요구하고 협상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규장각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으로 또 한 차례 수난을 겪어야 했다. 전쟁으로 규장각 자료 중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 국보급 자료를 수송해야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수송하지 못해서  적상산 사고에 남겨두었던  ‘조선왕조실록’을  북한이 북으로 가져간 것도 한국전쟁때 였다.

이런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서야 규장각은  서울대로 이관됐고, 이후 전문적인 인력들이 투입되면서, 한국학 연구의 핵심 기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제는 그 이름만 들어도 규장각은 한국의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유형무형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조선왕조 실록’,‘승정원 일기’,‘의궤’ 등이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됐고, 규장각 자료들이 국보급과 보물급이라는 것이 가치의 전부가 아니었다.  규장각은 조선의 정치적 수준과 정신적 가치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무형의 무한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선비 손홍록과 안의를 기억하자.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소장됐던 실록이 위험에 처하자 이들은 이 실록들을 내장산으로 옮겨서 지켰던 인물이다. 일촉즉발의 위험 속에서 목숨을 걸고 왕조의 역사적 기록을 지켜내려 했던 정신, 규장각은 바로 그렇게 역사를 믿고 붓의 힘을 믿는 선비들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규장각의 이러한  전통과 정신적 유산은  21세기 우리 사회가 정보화와 지식기반사회에 걸맞는 컨텐츠와 정신문화를 창조하는 데 든든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e****0 2011.03.14. 신고 공감 10 댓글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