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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봄꽃은 번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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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를 보면 시집 전체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이 데뷔한 잡지를 보면 시인의 경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안 시인이 맨 처음 시를 발표한 잡지가 바로《녹색평론》입니다. 《녹색평론》은 “사회적 약자의 운명과 생명공동체 전체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사회 및 문화체제가 과연 인간다운 삶에 적합하며, 또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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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를 보면 시집 전체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이 데뷔한 잡지를 보면 시인의 경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안 시인이 맨 처음 시를 발표한 잡지가 바로《녹색평론》입니다. 《녹색평론》은 “사회적 약자의 운명과 생명공동체 전체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사회 및 문화체제가 과연 인간다운 삶에 적합하며, 또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묻는 매체이기를 고집”해왔습니다. 대안으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제시하며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 연대의 그물이 형성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녹색평론》의 오랜 독자이자 독자모임에도 깊숙이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녹색평론》에 처음 시를 발표한 시인의 첫 시집은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실제로 시집을 읽다 보면 시인의 생태적 감수성이 매우 뛰어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봄비를 보며 세상 만물에 ‘촉촉이 / 젖 물리는 소리’(「봄비」)를 듣는 시인의 생태적 감수성은, ‘깊은 산길 /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를 보고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어린것」)고 하던 나희덕 시인의 생태적 감수성에 비견할 만합니다. 시인의 생태적 감수성은 가을을‘병든 나뭇잎 먼저 // 더 많은 벌레를 먹인 나뭇잎 먼저 // 아픔이 먼저 // 아픔에게 문병 간다’(「가을」)고 인식한 시나, 겨울 꽃밭에서 ‘꽃 없는 열매가 메마른 향기를 감추고’ ‘부서지는 껍데기 속에서 부서진 알맹이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부서진 꽃 안으려다 말고 / 그 꽃의 껍데기와 알맹이 거두려다 말고 // 산산이 흩어놓’(「겨울 꽃밭」)는 행동 등 시집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한 생태적 감수성은 현실의 치열한 싸움에서 길어 올려진 낙관과 연결되어 믿음직스럽습니다. 싸움을 통한 낙관은 서시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입춘 우수 경칩 춘분도 지난 곡우 아침에 때아닌 우박을 맞습니다. 봄비가 내려 새 생명을 키워야 할 때에 우박과 꽃잎 사이를 보며 시인은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라고 노래합니다.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우박과 꽃잎에서 생명 질서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신 풍부한 생태적 상상력을 갖고 있는 이문재 시인의 평가를 보면 시인에 대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문재 시인이 극찬하고 있는 「십일월」과 「숨길 1」입니다. 십일월 나뭇잎 벗겨지자 노랗고 향긋한 냄새를 품은 산의 무덤 하나 둘 깨어나 마을로 들어선다 저, 잘 익은 발걸음 소리 들으며 오래 묵어 기운 집 뜰에 몇 알 모과가 빛난다. 향기와 소리, 빛깔이 다 있습니다. 무덤과 모과가 상봉하는 장면이 놀랍지 않습니까. 무덤이 일어나 마을로 들어서고, 텅빈 시골집을 지키던 모과가 반기다니. 재생, 즉 순환하는 질서에 대한 강렬한 희구일까요? 아니면 농촌 붕괴에 대한 아픈 은유일까요. 이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을 며칠 들고 다녔습니다. 지하철에서도 보았습니다 .맨 처음에 실린 '숨길 1'이라는 시에서부터 숨이 턱, 하고 막혔습니다. 때아닌 우박이 내리는 곡우(穀雨) 아침에 우박과 꽃잎의 해후를 순간 포착한 시인데, 적대적일 것만 같은 우박과 꽃잎이 마침내 하나가 됩니다. 상극에서 상생으로 일대 전환을 이루며 우주적 질서 속을 걸어 들어갑니다. 침침했던 눈이 다 환해지는 느낌입니다. (《동아일보》, 2002. 11. 2) 숨길 1 천둥 번개 지나간 곡우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들숨과 날숨, 부딪쳐 살아오르며 낯선 우박이 자기를 녹여 꽃잎을 깨우네 낯선 꽃잎이 자기를 찢어 우박을 맞네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YES마니아 : 로얄 g*******g 2004.07.01.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시가 꽃 피는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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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계절탓일까, 아니면 나이 탓일까? 서른 한살에 바라보는 가을 하늘이 참 곱다, 참 곱다! 아니, 매해 이맘때쯤만 되면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다, 지금처럼, '참 곱다'라고. 그러나 자연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닐까.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같지 않은 감동을 준다는 것. 이 계절, 이 나이에 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였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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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계절탓일까, 아니면 나이 탓일까? 서른 한살에 바라보는 가을 하늘이 참 곱다, 참 곱다! 아니, 매해 이맘때쯤만 되면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다, 지금처럼, '참 곱다'라고. 그러나 자연이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닐까.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같지 않은 감동을 준다는 것. 이 계절, 이 나이에 <목마른 우물의="" 날들="">을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였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시인에게, 또 이 책을 아무 생각 없이 뽑아들게 한 '우연'에게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 뿐이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만나기가 마음에 드는 벗 하나 사귀기보다 힘든 요즘, 이 시집이 내게로 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러나 이 가을에 만나, 나를 푹 적신 시집, <목마른 우물의="" 날들="">은 가을이 아닌 봄을 노래하는 시집이다. 시집 곳곳에서 풍기는 봄꽃내음이 어찔할 정도로. 천둥 번개 지나간 곡우 아침 때아닌 우박과 꽃잎 사이// (중략)//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봄꽃은 번지네 -숨길1 시인은 '잘못 든 길을 알아차리고도' '설레설레' 피어날 수 밖에 없는 봄꽃으로 시작해, '마지막 꽃을/ 첫 꽃으로/ 전하여주'는 <꽃>이란 시로 시집의 문을 닫는다. 심지어 그에게는, 태어나 죽는 한 인생의 시작과 끝이 '눈 녹고 꽃 피었다/ 한 시절이 간다(-<하, 시절="">)'라고 노래될 정도였는데, 시집을 읽어나가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생각 하나는, 시인에게 봄, 아니, 정확히 말해 "꽃"은 어떤 의미일까?하는 의문이었다. '불에도 사는 꽃이 아니면/ 차라리 요절이다'이라고까지 말하는, 그 "꽃"이란 놈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통상적으로 봄, 그리고 꽃은 한 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 가장 화려했던 시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봄, 그리고 꽃 한송이는 결국 잘 야문 가을의 열매를 위해 그 화려한 생을 내주어야 한다. 그렇다. 잘 여문 열매 하나는 꽃의 죽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였을까? 김수영의 '누이여,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를 변주한 김지하의 '누이여, 풍자가 아니면 자살이다'를, 이안은 '아내여/ 꽃이 아니면/ 요절이다'로 받아치고 있는 것이다. 꽃, 죽음, 그것도 안되면 '차라리 자살이다'! 그래서였을까? 이안의 시에서 모든 '꽃'은 죽음을 깔고 피어난다. 오늘 낮 천만통은 족히 넘는 봄꽃의 부고를 받았네 - <흔해빠진 생=""> 중에서 사흘 낮밤 장대비에도 재수 없게 눈이 맞아 일찍 피어 먼저 진 꽃잎이여, 내 끊어진 길 사이를 흘러 나를 이어주고 죽은 꽃잎이여 - <꽃길> 중에서 조문하듯 꽃가에 간다 그대가 나를 몰라보는 게 당연하다면 나는 되었다 -<봄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가장 아픈 죽음을 만나고 돌아오는 시인의 마음이 대단하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 모든 것을 안타깝고도 장하게 껴안는 시인의 마음이 참 장하다. 사실, 나는 이 가을이 지나는 것이 두렵다. 서른 한살의 나이가 아직은 여물지 못한 탓인지, 아직은 겨울과 추위와 죽음과 실패와 끝이 두렵다. 세상의 이목과 지탄과 좌절과 절망이 두렵다. 그러나 죽음의 시간인 겨울을 앞둔 계절, 이 가을.... 복숭아벌레를 냉큼 집어먹고 철없이 웃는 돌배기 아들을 보며 '향기나는 집'으로 이사한 복숭아벌레의 안부를 묻는 (<복숭아 먹는="" 저녁="">) 시인의 마음을 생각한다; 죽음이 아닌, '향기나는 집'에서 배포 좋게 유영하고 있을 '복숭아벌레'의 모습을 생각한다.... 지금, 나는, 이 좋은 계절 앞에서... 벌써부터 겨울이 두려운가? 그래서 이 가을이 더욱 아름다운가? 시인의 말로 내 자신에게 대답해본다. '그걸 안다면, 그것으로 나는 되었다'!
g*****l 2002.10.07.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