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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미국 사회의 세속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미국교회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세상의 인정을 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세속주의 신학(여기에는 콘스탄틴주의라고 불리는 신앙과 세속권력 사이의 혼합 신학과, 신앙과 이성의 분열을 초래한 계몽주의 신학이 있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분명 이건 교회로서는 위기다. 하지만 이건 정확히 말하면 잘못된 신학에 기초했던 교회들의 위기다. 오히려 저자들은 이 상황을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교회 본래의 비전을 세울 수 있는 기회로 본다. 저자들이 생각하는 교회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이 세상의 일정 영역에 세운 개척지(이 책에서는 ‘식민지’라고 번역한다)다. 교회와 세상은 서로 다른 주인을 섬기며, 교회는 카이사르가 아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심을 그 존재 자체로 선포해야 하는 조직이라는 것. 당연히 교회로 산다는 것은, 세상 주류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일종의 ‘모험적인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저자들은 교회 자체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가 지닌 처음이자 마지막 임무라고 말하는 듯하다.(“우리가 제시해야 할 가장 창조적인 사회 전략은 바로 교회다.” 125쪽) 교회는 세속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어느 한쪽 편에 서려고 안달할 것이 아니라, 가장 교회다운 일에 집중해야 한다. 예컨대 교회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실제로 살아내는 모습을 통해 그러한 삶이 얼마나 가치 있고 유익한지를 보여주고, 나아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줌으로써 그러한 삶이 지속적으로 전수되도록 공헌할 수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은,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탈진해버린 많은 목회자들을 위한 조언을 담고 있다. 내용은 앞서 서술한 것들과 비슷해서, 우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 공동체인지를 바로 세운 후,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
2. 감상평 。。。。。。。 미국의(그리고 서구의) 교회들이 오랫동안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정작 중요한 자신들의 고유한 것들을 스스로 잃어버렸음을 지적하는 저자들의 진단은 날카롭다. 또 교회와 더불어 힘이 소진되어버린 목회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존의 대처방안(문제는 목회자의 심리적인 문제이며, 휴일을 요구하고, 거절하는 법을 배우고 하는 식으로 해결하라는)의 부족함이 무엇인지도 아주 분명하게 긁어준다. 이 모든 것들의 바탕에 깔려 있는, 교회의 본질과 고유한 가치에 집중하려는 저자들의 노력이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교회는 뭔가를 열심히 해왔는데, 그렇게 열심히 해 온 결과로 교회는 점점 힘과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교회는 ‘잘못된 열심’을 내 온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건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고) 사실 이런 문제들은 저자들이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작업을 하기 이전에도, 이미 우리의 경험을 통해 인식해왔던 것들이니까... 신학교와 교단들부터 돈과 권력에 매달리는 인사들이 잔뜩 달라붙어 전횡을 일삼은 지 오래되었고, 강단은 준비되지 않고 자격 없는 이들의 세속적 강론으로 깊이 오염되었다.
저자들의 대안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내가 이해하기에 이 주장에 담긴 첫 번째 의미는 지나치게 확장되어왔던 교회의 사역들을 좀 정리하고, 이것이 정말 교회의 일인가를 확인하는 성찰의 때를 가지라는 뜻으로 들렸다. 정말로 한동안 교회는 되돌아보는 시간 없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만 골몰했었다. 이제 잠시 그런 확장을 멈추고 이것이 정말 본질적인 사역인가를 고민해봐야 하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주장이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저자들은 정말로 교회다워지기 위해서는 일종의 ‘모험’이 필요함을 바르게 지적한다. 그렇지 않은가. 주류의 성공 공식을 거부하고, 수천 년 전 갑자기 나타난 작은 공동체의 행동방식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이만저만한 모험적 결단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
모든 것은 우리가 자신을, 그리고 이 세상을 무엇이라고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저자들의 말처럼, 우리가 좀 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라고 인식하고, 이 세상은 일종의 ‘무대’이며 진짜 세상이 따로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나그네가 아닌 ‘거주민’으로 살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독특함은 나그네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바르게 붙잡는데서 나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나그네가 아닌 (성공한) 거주민으로서 인정받고자 애쓰는 것 같다. 저 높은 분의 인정을 위해 기꺼이 세상의 인정을 포기할 수 있고, 한없이 확장하는 대신 본질에 집중하고, 성공을 위한 지혜 대신 옳은 삶을 위한 지혜를 구하기 시작한다면, 비로소 교회는 다시 교회다워지고, 교회에 약속된 복들을 누릴만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설명이 약간 퍼져 있어서 핵심 논지를 따라잡는 게 살짝 어려울 수 있지만, 언제라도 교회다움이 흐려졌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한 번 펴봐야 할 것 같은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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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주의, 계몽주의, 개인주의의 포로가 된 교회
세상이 변했다. 기독교적 사회는 붕괴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식민지다. 사랑 안에서의 정의가 가시적인 형태로 실행되는 곳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론이 아닌 정치적인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는 콘스탄틴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윤리는 행함의 문제이기 전에 보는 것의 문제다.
기독교 윤리는 세상이 공감하는 인간 공통적인 어떤 것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기독교적 원리를 정부에 요구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다. 교회 차원에서 그런 삶을 살아내기 위해 교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그 안에 들어온 개인을 변화시킨다. 보고 배움
교회가 그 모습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이 때 교회는 세상과 불편한 관계가 된다.
기독교 윤리에서 종말론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시는 세상이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이미 임했기에 우리는 산상수훈의 삶을 살아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알 때 목회자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목회는 교인들의 욕구를 해결하거나 도움을 베푸는 전문직이 아니다.
목회는 교인들이 복음의 빛을 따라 살도록 돕는 것이다.
목회자는 성도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줘야 한다.
교회가 이루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살아있고 증언하는 진리의 식민지를 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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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서평을 쓰고자 했지만 포기하고, 그냥 개인적인 느낌에 대해서 써야겠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은 2008년 복음과상황 월간지에서 모 출판사 기독교담당 편집장이 2008년 기독교부문 올해의 책으로 꼽은 책이다. 이 책은 충분히 그럴 만한(?) 책이다 이 책의 서평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은 아니고 내용이 깊고 이상적이기 때문에 도전적이여서 그렇다. 비록 20년전에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도 유효하며 적실하다. # 나에겐 환갑이 넘은 장모님이 계신다. 어려운 시절을 남편없이 홀로 5남매를 키우셔야 했던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시다. 장모님은 젊으셨을 때 부터 신앙생활을 해오셨지만 남편과 사별한 후에 더욱 고된 노동과 외로움, 막중한 책임감 들로 인해 더더욱 신앙생활을 통해 인생의 어려움들을 극복해 오신 분이시다. 당연히 장모님에게는 감사함과 존경을 마지해 않는다. 그 힘든 삶에서 도망치지 않으시고 자녀들 또한 믿음의 여정을 걷게 하신 그 분의 책임감에 박수를 보내드려야 옳다. 30대 중반인 나에게 장모님의 신앙은 여전히 축복하고 존경해 마지 않아야할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상당히 존재한다. 장모님은 가끔 "신앙생활 잘 해야 하나님이 축복하시지 물질의 축복도 주시고..", "손녀가 아픈게 사돈 어른들이 교회 안나가시고 기도 안하셔서 그런 거 아닌가..", "세상 돌아가는데 힘쓸거 없네.. 우린 기도만 할 뿐이야.." 바로 한국교회 기성세대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기독교 구원의 개인주의,기복주의이다. 이런 부분을 언급하면서도 늘 내 마음 한켠에 자유롭지 못한 것은 어려운 60,70,80년대를 거쳐오시면서 체득하신 신앙의 형성과정을 결과만 놓고 잘못된 신앙이라고 평가절하할 만큼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 내게도 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옳지 않은 신앙관을 막연히 내버려두거나 쫓을 수도 없는 것은 분명하다. #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강북의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다. 유명하신 목사님이 교회를 부흥시키셨고, 후임 목사님이 출석성도, 교회재정등을 더욱 발전시키셨다. 현재 담임목사님은 당회와 힘겹게 싸우시면서 현재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치유를 통해 비전과 변화를 요구하고 계신다. 전적으로 그 싸움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정직하고 사심없는 교회행정과 직분자들의 역할을 강조하시며 교회와 성도 개인의 내면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목사님의 뜻과 행동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또한 우울함도 상존한다. 참여정부 시절 목사님들의 설교에는 적지않게 정부의 정책들에 문제점이 있다고 하시며 "이건 아무리, 누가봐도 분명히 잘못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MB정부가 들어선 뒤 참여정부시절 설교에서 정치와 관련되어 하셨던 말씀에 후회가 있으셨던지 요즘 설교에선 현 정국에 대해 아무 말씀도, 어떻다고 언급을 안하신다. 아니 아무런 말씀이 없지는 않으셨다. "요즘 정부에 대해서 말들이 많은데.. 우리는 지금 거기에 뭐라 할수도 없고 우린 그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라는 말씀만 하신다. 맞다!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린 믿음으로 살아야지 그리스도인이니깐! 근데 내심 이건 참 편향적이고 불공평하다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나는 지금 목사님의 정치적 편향의 불공평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가치중립적인 내용을 가지고 강단에서 설교시간에 언급하시냐는 말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논점을 흐려 죄송하다. 내가 언급한 에피소드들로 부터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우리가 양적인 면에서는 부흥을 이루고 영적인 인프라를 갖추었지만, 질적인 면에서 자녀세대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만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여! 교회가 교회다워야 교회지! 교회가 권력화되어 국가를 흉내내고, 교회가 개인들의 탐욕과 만족에 면죄부를 내어주는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하는 행위로 인해 공동체는 죽어가고 살아있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라! 성례전을 통해 너희의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하라! 신학자와 신학교수들이여! 너희는 지적인 티를 한껏내는 데 바빠 제 기능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여~ 너희들이 해야할 일은 진리를 수호하고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약자들에게 손 내미는데 주저하지 않는 신학생들을 기르는데 그 사명이 있다! 목회자들이여! 너희는 교회(공동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진심어린 마음에서 귀 기울이고, 우둔한 공동체에게 논쟁만 가득한 피상적인 교리가 아닌 그 교리속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데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 목회자들이 세상의 물질주의, 소비주의, 성공주의에 도취되어 있는 성도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지 않고 종말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병든 양들만 잔뜩 데리고 있는 목자가 되어 책망받을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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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 』
Resident Aliens
저자: 스탠리 하우어워스/ 윌리엄 윌리콘 (Stanley Hauerwas, William H. Willimon 지음 김기철 옮김)
출판: 복있는 사람
빌립보서 3장 20절
“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새번역)
본서는 위의 구절을 기본으로 하여 쓰여진 ‘교회론’에 관한 책이다. 저자들은 일관되게 오늘날의 교회를 하나님이 이 땅위에 세워놓은 ‘식민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들은 식민지 교회의 구성원들을 ‘나그네 된 백성(거류민)’이라 부르고 있다.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어감이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배운바 많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는 AD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당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에 의하여 국교로 인정되기 전까지 핍박받는 종교, 지하세계의 종교였다. 그러나 이후 초대교회는 황제가 공인한 종교가 되어 지상으로 올라오는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기독교는 자유를 허용 받았고,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으며, 기독교를 속박하던 법률도 모두 폐지되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초대기독교의 저항성, 비판성은 상실되어갔다. 교회의 외형은 발전되어 갔지만 교회의 내부는 종속되어 갔다. 국가와 교회가 서로 협력하는 시대가 가속화 되었다. 이것은 이후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별히 중세교회시대에 교회가 국가 위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근대 이후 국가는 교회를 지배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위의 문제들은 ‘콘스탄트주의’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세계교회속에 지속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이다. 본서의 기록목적은 먼저는 오늘날 미국교회가 성서의 본질적 교회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그 외침이 한국교회에는 예외일까? 아니다 분명 동일한 경고로 들려진다. 미국, 한국교회 둘 다 교회 밖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교회역시 교회밖의 일에 힘을 행사하려고 한다. 그것이 성서적인것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말이다. 정치가는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목적에 시민들을 선동하려고 하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선포하기 보다 정치가를 이용하려 교회의 상업, 대중적 유익을 취하려 한다.
미국의 예를 들어 보자 본서에 등장하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생각하여 보자 그것이 과연 합리적인 결정인가?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민주주의 선봉장 미국의 정치행위을 미국교회가 과연 축복하여 주어야 하는 것인가? 전쟁의 합리화를 교회가 성서적으로 뒷받침하여 주어야 하는가?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전쟁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수많은 생명을 전쟁으로 죽여갔다. 이후 미국의 베트남전에서의 패배와 철군은 미국기독교에 많은 상처만을 남겼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의 신학은 위명한 칼 바르트, 폴틸리히등 현대신학자들이 서구 철학과 문화적 해석학을 통하여 성서를 현대인들에게 해석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성서는 해석을 요구하지만 실천에 더 무게가 있어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것이 행동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 대한 많은 지식이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성서는 세상과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는 평화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그 자체만으로 사탄의 나라는 위협을 느끼고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 교회를 핍박하고 대립하며 공격한다. 복음은 세상의 변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나라의 식민지 교회를 세상에 세우기를 원한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전투의 선봉장이 교회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싸우기를 원하시지 교회를 통하여 세상과 화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세상은 경쟁하며, 이익을 추구하고, 비밀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을 나누고, 공평하며, 진리를 공개적으로 선포한다.
구원은 모험을 보여준다. 교회안에 있다고 하여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죽음과 핍박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고난을 참아가며 제자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구원의 체험적 삶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다. 하나님의 구원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삶이 아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믿고 날마다 원수를 대적하며, 예배의 시간마다 구원자의 축제를 여는 것이다. 구원은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안에 있다 성서는 기억을 되살려 내며, 성도의 삶속에 내면화하고, 세상속에서 그 이야기들이 선포되고 체험으로 반복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안에 보수주의, 진보주의 등 다양한 정치, 사회, 문화적 의견들이 있다. 그런 의견에 교회도 한 자리를 차지하려 여러 모양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사회의 다양한 관심에 교회는 이제 생각을 중지하기를 원한다. 이제 교회는 교회안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성서의 본질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잘 지킬수 있다고 한다. 정말로 동감된 말이다. 과거 서구 사상사에서 해석학적 영향을 받은 현대교회들은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잃어 버렸다. 이제는 다양한 성서해석학의 한 조류가 성서의 말씀이 되어버린 시대가 되었다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가 궁금한것이 아니다. 여러 다양한 해석들중 어떤 해석을 어떤 상황에 적용하여 사용할까를 고민하는 시기이다. 이것이 과연 진리일까? 이제 해석학의 범람이 아닌 성서의 말씀 그대로를 설명할 때다. 교회외부의 상황이 중요한것이 아니다. 성서 내부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에 사는 백성이다. 식민지 백성은 우리가 가야할 본국의 왕인 하나님의 명령에 익숙하여야 한다. 그 명령의 교지가 성경이다. 이제 세상에 대한 관심을 버리자. 그곳,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이 아니다.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목표해서 가야할 곳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천국이 멀리 있다 하여도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우리가 가야할 곳을 소원하며, 그곳의 법을 이 땅안에서 지키며, 살아가는 백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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