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웬델베리는 극단주의자? 대답은 NO!! 책제목(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만 보아서는 저자가 극단적인 생태주의자로 오해하기 쉽상이다. 하지만 원제 What are people for? 를 통해 본 그는 인간애로 가득찬 한 사람일 뿐이다. 번역된 국문 제목이 소비자들의 흥미를 충분히 끌만한 꺼리라 생각되어 저자의 저작의도에 대해 개인적으로 미안한 맘이 든다. 웬델베리의 주의(-ism)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리고 생태운동가라는 역동적인 이와 어울리지 않을법한 "사랑"이다. 그는 인류 사회가 대면한 경제,사회,문화 그리고 환경의 위기를 풀 유일한 해결책으로 지역화와 지역민의 부활을 언급한다. 그리고 여기에 필수적인 요소는 너무나 추상적이지만 가장 현실적이기도한 사랑이다. 사랑, 가장 현실적인 필요 충족... 이 책에서 사랑이란 말은 그리 자주 언급되지 않지만, 그의 전반적인 글의 저면을 고요히 그러나 역동적으로 흐르는 그의 의식은, 사랑이다...감상적이거나 현실을 읽어낼 수 없는 사랑이 아닌 현실을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시각으로 그리고 필요에 답할 수 있는 미시적인 섬세한 사랑. 환경운동은 감상주의자들이 펼치는 운동이아니다... 운동이란 말이 보여주듯 사랑하기에 현실을 제대로 보는 이들의 질펀한 몸의 외침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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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 /저자 웬델 베리/출판 양문출판사/발매 2002.10.04.
저자는 1956년산 로열 스탠더드 타자기를 갖고 글을 쓰고 있다.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실천한다. 자연의 기준으로 돌아가려 애쓴다. 전기톱 시대에 전기톱을 쓰지 않고도 여유롭게 살 수 있다. 수동으로 움직이는 톱과 도끼로 나무를 자르면서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갈 뿐이다. 글 쓰는 텃밭 가드너의 삶을 꾸려가고자 한다.
자연에 은거하며 명상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제 여생을 그렇게 살다 갈 것이다. 연구를 해야 한다. 어떤 형태의 삶이 자연에 가장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인가를. 현대 문명은 잔혹하고 파괴적인 성격을 지고 있다. 존중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여유 이상의 돈을 지불하고 있다. 소유에 대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자연의 기준으로 다시 돌아가자. 이전 것보다 에너지를 덜 소비하자. 모든 것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새 도구는 신체처럼 대하자. 인간에게 생로병사가 있듯이 물건에도 그런 것이 있음을 이해하자. 어떤 형태로든 태양에너지를 이용할 방법을 강구하자. 스스로 생산자이자 창작자의 길로 접어든다. 유지나 수리를 위해 다시 재생 가능한 방법을 연구해서 일상생활 속에 응용한다.
지금까지는 자연과 유리되어 자연을 등한시하면서 살아왔다. 앞으로도 이런 삶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끝장날 때를 기다리며 계속해서 소비를 해야 될 이유는 없다. 소비를 위한 삶을 접어야 하다. 소비를 그만두다. 내가 소비하고 있는 물건 하나에에는 어느 불법 노동자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나에게 거쳐오는 풍요로움에 대해 외면하면 할수록 내 삶은 풍요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대량 생산이 계속되는 글로벌 경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소비'에 골몰하고 있다. 강국이 약소국의 희생을 요구하며 세상이 끝장날 때까지 '소비'를 강요한다. 결국 '소비'의 끝은 어디인가. 쓰레기다. 쓰레기를 생산하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사들여서는 안 된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 자연을 지키는 것이 쓰레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웬델 비리 저)》에서 일부분 발췌하여 필사하면서 초서 독서법으로 공부한 내용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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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쇄된 글자에 중독이 되어서인지 처음 타지기를 칠 때 꽤 흥분했습니다. 타닥타닥 자음과 모음이 모여 글자를 이루고 반듯하게 정렬한 문장을 읽을 때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쇄된 글만 읽다가 내가 직접 인쇄된 듯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은 타자기를 떠나지 못하고 자꾸 문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컴퓨터에 비하면 타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훨씬 더 쉽게 글을 쓸 수 있거니와 깨끗한 정도가 타자기와 견줄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는 것은 물론 모든 기록을 컴퓨터로 하고 싶어졌습니다. 컴퓨터로 글을 쓰고 기록도 컴퓨터에 의존하다 보니 컴퓨터 없이 글을 쓴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를 쓰는 것조차 컴퓨터 앞에 앉아야 생각의 끈이 풀립니다. 예전에 글을 쓸 때면 노트에 빼곡하게 쓰고는 했는데 어떻게 그랬을까 아득하게 여겨집니다. 언젠가 컴퓨터를 늦게 배운 아내가 장문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단편소설 분량의 글이었는데 그것을 컴퓨터로 옮겨야 했습니다. 컴퓨터에 옮기면서 이중으로 일을 하는 것만 같아 아내에게 왜 빨리 컴퓨터를 배우지 않느냐고 투덜댄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며칠에 걸려 쓴 글을 몇 시간만에 정리하여 되돌려주니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게다가 깨끗하게 인쇄된 글은 몇 번이고 고쳐 쓴 아내의 글을 주눅들게 했습니다. 이제 아내도 컴퓨터로 글을 씁니다. 능숙하게 문장을 만들어나갈 정도로 숙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내가 직접 쓴 글씨를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정다운 글씨를 보지 못하는 것이 그리 아쉬울 것은 없습니다. 연애편지는 옛 이야기가 된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아내 역시 컴퓨터 앞에 앉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하는 병에 걸릴 거라는 생각은 쓰디씁니다. 컴퓨터를 사는 데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 우선 내가 지불할 수 있는 여유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내가 별로 존중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치러야 할 대가는 금전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술 혁신이란 항상 ‘구모델’을 버리도록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구모델’이란 우리 집의 로열 스탠더드 타자기뿐 아니라 비평가이자 가장 가까운 독자, 그리고 나의 동료인 내 아내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대체되고 폐기되는 것은 어떤 사물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기도 하다 (22 - 23쪽) 컴퓨터에 종속된 글쓰기와 그에 따른 사람 관계의 변화는 절감하고 있었는데 웬델 베리는 컴퓨터에 의존하면서 치뤄야 할 중요한 대가를 금전과 사람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합니다. ‘존중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여유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 하고, 사람을 포함한 이전 모델을 대체하고 페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평화나 경제적 정의, 생태적 건강함, 정치적 정직, 가족과 공동체의 안정, 선한 노동’ 따위, 그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에 도움을 주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이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자연의 기준’이라 할 만한데 몇 가지를 들어보면 ‘이전 것보다 에너지를 덜 소비’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새 도구는 신체처럼 어떤 형태로든 태양에너지를 이용해야’ 하며, ‘유지나 수리를 위해 다시 맡길 수 있는 개인 소유의 작은 가게나 상점으로부터 생산된 것이어야’ 하고, ‘가족이나 공동체 관계 등을 포함한 기존에 있는 어떤 좋은 것들을 대체하거나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것 하나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 하는 일이 컴퓨터가 없으면 도대체 가능하지 않고 일이 아닌 휴식도 많은 부분 컴퓨터에 의존합니다. 그러니 웬델 베리처럼 컴퓨터를 쓰지 않는 것이 이제는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컴퓨터는 컴퓨터만의 문제가 아니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컴퓨터의 폐해를 그대로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컴퓨터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컴퓨터를 쓰되 컴퓨터에서 자유롭기, 그것조차 어렵고 사소하더라도, 그렇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컴퓨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기억함으로써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일입니다. |
| 이 책은 제목 자체가 충격적이다. <나에게는 컴퓨터가="" 필요없다=""> 이 한 문장만으로 웬델 베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지는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겨울까 생각도 하게 되지만, 한편으로 그 용기 있는 삶에 내 자신도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요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한다. “늙으면 난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짓고 살거야.” 난 이런 말을 들으면 “좋을 거야. 하지만 농사는 아무나 짓나?”하고 말한다. 이 지긋지긋한 문명의 끝자락에서 난 인간으로써 얼마나 자연과 유리되어 살고 있는가, 얼마나 자연을 등한시하고 살게 되는가, 얼마나 그를 해치며 살고 있는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왜 모든 것이 끝장 날 때를 기다리며 계속 소비해야 되는 건가... 알고 있으면서도 이 대열에서 떨어져나가 살아가는 것이 두려워 그냥 묵묵히 배기가스를 마시며, 인스턴트음식을 사고, 농약에 절인 과일을 먹으며 각종 알레르기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도시인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가. 사회에서의 이탈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풍족한 것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코 풍족함을 알지 못하리라.” 나는 블레이크의 이 문장을 젊음의 무절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우리 인간 종족을 독특하게 비난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풍요로움에 대한 무절제가 지혜의 궁전에 이를 때, 치유된 상처와 오래된 흉터가 되는 것이다.>(웬델 베리, 상처 중에서) 위의 문장은 이 책의 모든 문장들을 대변하고 있다. 내가 인간으로서 풍요로움을 느끼는 동안 나의 풍요로움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곳에서 희생을 치르고 있다. 그것을 각성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풍요로움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고 있는 물건 하나에는 어느 불법노동자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는 인종차별과 불합리한 노동조건에 한이 서리고 상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자연으로부터 나에게 거쳐오는 이 풍요로움에 대해 외면하면 할수록 내 삶은 풍요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편의의 도구들은 인간이 인간임을 망각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인간은 손을 이용하고 두뇌를 이용하여 사색하고 생각해고 찾아내고 움직이고 뛰고 해야 한다. 하지만 편의의 도구들은 내 손을 대신하고 내 두뇌를 대신하고 찾아내고, 움직이고, 뛴다. 그것을 두고 우리들은 발전했다고 한다. 좋아졌다고 한다. 과연 그런 것일까? 어쩌면 편의의 도구들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 퇴화시키는 꼴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커다란 굴레는 점점 우리를 죄어오고 있다. 계속되는 대량생산의 글로벌 경제도 앞뒤 가리지 않고 “소비”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다. 이것은 크게는 선진국 안의 문제가 국가간의 문제로 번지는 문제이고, 결국 힘 좋은 국가가 약하고 세력 없는 나라의 희생을 요구하며 세상이 끝장날 때까지 “소비”하는 문제로 번진다. 결국 그 “소비”의 끝은 어디인가. 바로 쓰레기이다. 우리가 먹고 싸는 것도 쓰레기요, 쓰고 버리는 것도 쓰레기이다. 파리에 있는 베르사이유도 부수면 쓰레기가 된다. 결국 그 무엇이든지 간에 살아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은 쓰레기로 남는다. 우리가 등한시하는 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생명 없이 보호 받는 물건들보다 더 먼저 보호해야 한다. 거리의 가로수들을 보호해야 하고, 소비의 문제를 개선하여 쓰레기의 오염으로부터 생명을 지켜야 한다. 결국 웬델 베리의 말은 <생명들과의 유대감="">이 아닐까. 인간과 인간으로부터 박테리아까지 지구상에 살아 있는 생명들을 버릴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는 것은 우리들이 아니겠는가.생명들과의>나에게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