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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러시아 작가는 이미 잘 알려진 몇몇 작가들 이외는 다소 생소하다. 아마 다양한 작품들을 접하지 못한 나의 무식함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막심 고리키라는 러시아 작가의 어머니는 제목에서부터 어머니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힘이 느껴진다. 한 노동자의 아내로서 비참한 삶을 영유해오던 평범하고 보잘 것 없던 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통해 노동자의 현실을 직면하게 되며 자신의 본질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뒤늦게 자신의 열정을 불사르는 모습은 늦었지만 참된 삶의 기쁨을 알게 되어 어떤 두려움도 헤쳐 나가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한창 산업혁명기의 어두운 유럽의 생활처럼 산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며 농노의 신분이었던 사람들이 노동의 생활에 빠져들게 되어 정말 목숨을 부지할 정도의 임금으로 삶을 지탱하게 된다. 희망도 없는 미래 속에 삭막한 노동 현장과 삶에 찌든 이들이 내뱉는 악에 깃든 소리들과 그 주변 환경들이 영락없이 상상된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폭력에 휘말리며 매일을 자신의 존재감을 죽이는 게 일상이었던 파벨의 어머니는 남편이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아들의 변화 속에 두려움을 느낀다.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자식의 안전과 평온을 원하는 보통의 어머니이던 그녀가 아들이 하는 일을 알게 되며 두려워 하지만 한편으로 의식이 깨어나는 과정은 배움이란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중요한 일임을 깨닫게 한다. 아버지와도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었던 파벨이 책을 통하여 사회의 현실을 알게 되는 것도 책이란 모든 지식의 총괄과도 같은 것임을 또 다시 자각하게 하는 점이다. 배우지 못하였지만 파벨이 의식의 개혁으로 리더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책을 통하여서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현실의 문제로 논쟁하는 아들과 친구의 모습에서 어머니는 그 두 사람이 마치 암흑 속에서 출구를 찾는 장님처럼 이쪽저쪽 있는 힘을 다해 더듬거리며 사방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는 표현이 당시의 러시아의 과도기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볼세비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들의 노력이 결국은 사회주의 체제의 러시아로 변화시켜 왕권 자체를 무너지게 하였다. 굶주림은 영혼을 먹어치우고 인간의 모습을 지워버리기에 그들의 추악한 모습 자체만 혐오할 게 아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며 지겨운 바닥 생활의 울화를 풀기 위한 분출된 행동이었음 알게 된 파벨과 어머니처럼 우리도 세상을 향한 그들의 울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어릴 적 우리들의 비웃음이었던 공돌이 공순이의 삶 또한 노동자들이 처해있던 비극적 단면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많은 이들의 살신성인 정신이 있었다. 현실 타파를 위해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하는 파벨의 삶이 결코 비참하게 보이지 않는다. 숭고한 희생의 모범이 되는 그의 어머니 또한 비극적 결말로 바라보게 되지 않는 이유는 새로운 사회로의 고통을 담당하는 것이기에 새 탄생의 희망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는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어떤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알게 되었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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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아이들의 눈높이에서만 책을 읽다가 문장 한 줄 단어 하나에도 힘과 조화가
전에 비영어권 국가를 대상으로 설문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로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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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결코 과격하지 않은데(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좋아하는 분야는 과격한 것들이다. 여기서 과격하다고 하는 것은 몸으로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고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마음은 그쪽을 향해 있는데 몸이 따르지 못해서 동경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시작을 노동자들의 힘들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으로 시작하기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참담하고 암울한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닮는다고 했으니 매일 술주정이나 하고 폭력이나 일삼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파벨이 처음 술 먹고 취해 들어온 장면을 보고는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아, 제목으로 보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그럼 앞으로 아들 때문에 힘겨운 삶을 살겠구나.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파벨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도 조금씩 길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외출해도 술을 마시지 않으며 책을 보고 어머니를 돕는다. 당시 노동자촌에서 그런 아들은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내심 사랑스러우면서도 불안해한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집에서 여러 사람과 토론하는 것을 보며 불안하면서도 막연히 나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만약 어머니의 눈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그린 소설이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해도 비슷한 많은 소설 중 하나로 그냥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서는 어머니가 단순히 아들을 이해하고 돕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하고 싶고 보람을 찾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어머니가 비로소 한 인간으로 탈피하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물론 아들이 매개체가 되긴 했지만 그냥 아들을 바라봐주는 어머니로 머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변화가 가장 눈에 띄었고 가슴 벅찼다.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특히 안드레이가 파벨에게는 따뜻한 가슴이 없다고 불평하는데 그것을 어머니가 대신 메워주었다.
실제로 레닌과 함께 혁명 운동을 벌였던 고리키는 레닌과 절친하게 지냈으나 10월 혁명 후에는 잠시 결별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고리키는 혁명에 앞서 인간을 우선시하는 것 같던데 레닌은 혁명을 우선시 했으니 둘의 견해가 갈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나라나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은 비슷해 보인다. 우리도 처음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할 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던가. 물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소설이라는 것도 잊고 어머니의 행적을 따라가기 바빴다. 하지만 시종일관 그녀가 아닌 '어머니'로 지칭하면서 이미지를 유지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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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라는 이름이 주는 위대함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수 있을까 ? 어머니 이전 여자라는 단어속에는 남자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상반되어 약하고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느낌을 만나게된다. 신체적으로 약한 구조를 타고난데다 사회적 편견과 관습속에서 그렇게 길들여지다보니 자신만의 사고도 사상도없이 의존적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현대에 살고있는 나역시 두아이의 엄마가 된지금과 결혼전의 모습을 비교하면 스스로도 놀랄만큼 장족의 변화를 보이고있다.
1905년 혁명의 피의 일요일을 배경으로 40평생을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공장노동자의 아내 펠라게야 닐로브나 그녀가 혁명활동에 뛰어든 아들의 영향으로 여성혁명가가 되어가는 여정은 어머니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여자라는 성으로 태어난 다른이들과 마찬가지로 닐로브나 역시 술주정뱅이 아내가되어 폭력과 억압속에서 두려움속에 살았다. 남편의 눈을 피해 오늘은 어디에 숨어야하나 라는 삶을 당연하게 여겼던 여인은 남편이 죽은후에도 자유롭지 못하고 또다른 남자인 아들의 무관심과 냉대속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노동의 댓가를 정당하게 받지못하는 설움을 술로 풀어내야했던 노동자들또한 여인들 못지않은 고통속에 살던시대 아버지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기를 거부한 파벨은 책을 매개로 새로운 혁명을 꿈꾸게되며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저녁마다 이어지는 책읽기와 토론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후일 볼세비키혁명으로 이어져 러시아의 전제권력이 무너지며 사회주의 공산당이 자리잡기에 이른다.
자신들만의 토론에서 대중속으로 들어간 그들은 권력자들과 피할수 없는 충돌속에 시련을 맞이하고 그런 아들을 인정하고 응원하고자 했던 어머니는 고통이 더해질수록 더강한 모성애를 보이고 있다. 대중을 선도하는 소식지의 위력은 공원옆 연못을 메꾸고자하는 사장의 부당함속에 봉기를 일으키고 그러는 와중에 그녀 또한 자신만의 생각과 의지를 가지게되며 남편앞에서조차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못했던 여인은 대중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만큼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된다.
철저히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진행된 재판이 끝난후 파벨은 다른동료들과 함께 유형을 떠난다. 그녀또한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여성혁명가로 태어나고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가난한 삶에 여러 직업을 전전했던 작가의 경험과 사회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지식들을 바탕으로 어머니라는 위대한 이름의 한 여인이 이렇듯 혁명가로 새로이 태어나는 이야기속에는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과 정신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도했다. 파벨의 어머니에서 펠라게야 닐로브나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여인 어머니 당신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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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입학하고나서 제일 처음 읽었던 책의 제목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대학교씩이나 입학했으니 이제 나도 제대로 된 책 좀 읽자는 생각에서 고른 책이었는데,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며 읽고나서 나의 대학시절 첫번째 책으로 고르기를 정말 잘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전태일의 직업이, 일하던 곳이 하필이면 재단사이고 평화시장...이어서, 어렸을 적부터 의류업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이것저것 알게 되고 나도 디자이너가 되겠다며 의류학과까지 들어간 상태여서 나 스스로의 위치와 생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생각이 난다.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어머니 눈앞에 세상의 풍경이 더욱 다채롭게 펼쳐졌다. 하지만 세상 어디를 가나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이기적인 욕망이 판을 쳤다. 세상의 한켠에는 없는 것이 없을 만큼 호화로웠지만 또 다른 한켠의 민중들은 늘 굶주려 있었다. " ....1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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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라는 이 책은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도 담겨있고,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는 그런 마음도 담겨있는 책이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1905년 혁명인 피의 일요일 혁명에 뛰어든 아들을 어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있다.
어머니는 준비과정, 진행과정을 모두 사랑하는 아들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혁명을 무척이나 두려워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여성 혁명가가 된다.
어머니는 정말 대단하다. 자신만의 삶을 위해서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어머니라면 이렇게 위험하면 처음에 어머니가 겁을 먹은것 처럼, 계속 겁을 먹고 몸을 움크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두려움을 떨치고 혁명을 위해서, 지금의 삶보다 좀더 인간다운 삶을 인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떨쳤다. 노동자 촌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불쌍하다.
그들의 삶에는 싸움, 욕설, 음주등의 나쁜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들의 삶에는 행복, 기쁨, 웃음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을 서로 싸우고, 욕하고, 술을 마시는 것 들로 푸는 것 같다.
어머니도 그런 그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들을 위해서 혁명을 하다니 대단하다. 나는 그냥 나 혼자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어머니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공장의 사장들도 정말 못됐다. 노동자 촌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 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더 인간다운 삶을 살고싶다는 것인데, 그것조차도 못들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안드레이가 인간적인 것 같다.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사무적인 파벨과도 잘 지내는 것 같다. 안드레이는 인간적이면서도 여유롭다. 왜냐하면 여유롭기 때문에, 재판을 할때도 농담도 하고 그러기 때문이다. ..............6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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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의 자막이 올라가고 관람객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직장 생활을 4년 넘게 했었지만, 사회주의, 근로기준법, 혁명 등에 대한 단어 조차 생소할 정도로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지했었다. 하지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라는 말과 함께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전태일을 통해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그의 노력과 투쟁에 감동과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진 자의 착취와 박해에 맞서 투쟁했었다는 저자 고리키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파벨’ 과 어머니인 ’닐로브나’를 통해서 세계 모든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책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했던 것은 분명 주인공 ’파벨’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제목은 ’어머니’이다. 그것은 아마 사회주의 속에서 억압과 고통,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순종속에서 점점 변해가는 닐로브나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점점 변해가길 바라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었던 건 아닐까? 그저 지금의 생활에서 안주하려는, 어떤 목적의식도 없이 순종적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의 폭력 속에서도 늘 참고 지내야했던 닐로브나는 아버지의 삶에 반하는 아들이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일깨우려 애쓰는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 투쟁 속에서 권력에 밀려 힘겨워하는 모습을 봐야했고,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닐로브나 역시 투쟁에 가담하게 된다.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에 대한 목적보다는 아들을 위하는 마음, 그 모성애 하나만으로 기꺼이 투쟁에 나섰던 닐로브나는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다. 늘 남편과 사회의 모순 속에서 순종해야만 했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동안 가난과 불의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사람들이 가진 자들에게 맞서려고 일어났습니다. 이제 민중이, 자신들을 위해 감옥에서 고통당하며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그들과 함께라면 결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바람을, 즉 자기가 직접 진실을 말해 보겠다던 바람을 비로소 이룬 듯해서 무척 흐뭇했다. 241p 이 책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하는 파벨을 통해서 인간의 권리와 사회주의의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입니다. 거대한 기계는 물론 아이들 장난감처럼 섬세한 것들까지 모두 우리 노동자의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권리마저 박탈당했습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간단명료합니다. 모든 생산 수단은 민중에게! 모든 권력은 민중에게! 이것뿐입니다. 우린 결코 폭도가 아닙니다. " 277p 하지만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어머니 닐로브나가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다.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과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끝없는 모성애를 가진 아름다운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 '닐로브나' 지금 내 삶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나는 지금 이 상태에서 순종하며 살아갈 것인가? 더 희망찬 앞날을 위해서 개척하며 살아갈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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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막심 고리키는 필명이고 '비참한' '가슴 아픈'의 뜻을 지녔다. 그는 실제로 하도 살기가 힘들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의 글이 감동을 준다면 바로 이런 삶을 딛고 쓴 데서 우러나오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외침 중에는 입만으로 하는 것들이 있고, 자만심이 더 크게 자리하는 이들이 있고, 자신이 깨어 있다는 착각으로 하는 것들이 있는데, 고리키는 그렇지 않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는 공장부지 내에 있는 썩은 연못을 메우는 데 노동자들의 품삯을 깎아 비용을 대겠다고 한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노동자들이 일어난다. 노동자들은 비참한 삶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며,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다. 사회주의가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비참함에서 건져내 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비참함과 그 대물림을 좌시할 수 없음은 깨인 이들의 필사의 미션이었을 것이다.
주인공 펠라게야 닐로브나는 남편 미하일 브라소프에게 매일이다시피 얻어맞으며 살았던 여인이다. 남편이 죽자 아들 파벨은 남편의 행동을 답습하다가 어느 날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들은 결국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인물이 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며, 그 일이 결정된 재판 다음 날 한낱 불쌍한 아낙네였던 닐로브나는 위대한 혁명가의 어머니로 장엄하게 일어선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닐로브나에게 깊이 동화되었다. 그녀가 끔찍한 생활에 길들여져 그저 남편 눈에 띄지 않고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랐던 것, 아들이 쌀쌀맞고 멀게 느껴질 때마다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던 것, 자신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기던 삶에서 아주 조금씩 껍질을 벗고 주체적인 삶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들어가는 모습이 남 같지 않아서다. 진실로, 닐로브나는 그저 나와 다르지 않은 여인이었는데 소극성을 벗어던지고, 수동적인 삶에서 능동적인 삶으로, 이타적인 삶으로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켜 나갔다. 책에서 닐로브나는 작가에 의해 '그녀'라는 지시어 대신 꼬박 꼬박 '어머니'로 묘사된다. 어느새 독자는 닐로브나를 나의 '어머니'로 받아들인다. 배운 것 없고, 평생을 고단하게 살았으나 자식을 위해 용감하게 나설 줄 알며, 결국 모든 이의 어머니로 다시 태어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그녀가 '어머니'라는 것에 있었다. 가장 약한 존재이지만 가장 강하기도 한 어머니. 어머니가 실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에 대한 벅참이 밀려왔다. 나는 두 딸의 어머니이고, 내 어머니의 딸인데, 과연 내 삶은 어느 만큼 어머니다울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진정한 어머니다움이란 내 자식만 감싸고 도는 것이 아님은 분명한데 말이다. 이 책이 지닌 온갖 의미와 의의를 다 제치고 오늘 나는 그저 '어머니'라는 단어의 깊이를 새로 떠올려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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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내용으로 러시아 10월 혁명이 배경이 되고 있는 이 책 어머니는 내용과 제목이 뭔가 부조화를 이루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으나, 어머니라는 말이 모든 노동자를 품으로 끌어안아 투쟁에서 사랑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통해 민중의 힘과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한다.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부나 자본은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적대적인 관계로 들어서게 되고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아직도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분신을 하였던 바 있고 가장 최근에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것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었기에 그 관심을 이어서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인간도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싸이렌 소리에 따라 일을 시작하고 마치는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 남아 힘겨운 노동의 반복 속에서 불만과 울분을 가슴에 담고 매일 밤 술집을 찾아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둘러 대는 것으로 마음속의 화를 풀어내도 그것이 당연시 되었고 다른 분출구를 찾지 못했다. 파벨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을 아내나 자식들에게 쏟아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에 피하기 위해 조용히 움직여야 했고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파벨에게 변화가 왔다. 노동자들의 삶의 진실을 알려주는 금서를 읽게 되면서 파벨은 이성과 진실과 자유의 깃발을 들고 노동자 만세를 외치는 중심에 서게 되고 어머니와 함께 동지가 된다. 노동자들의 저항운동과 재판 과정을 보여 주는 등의 일련의 과정 속에서 파벨보다 어머니의 내면이 변화하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동안 피동적이고 억압된 삶을 살았던 어머니가 노동 운동이나 투쟁을 통해 한 사람의 어머니가 아닌 모두의 어머니로서의 모습으로의 변화는 대단히 놀라웠다. 이렇게 고리키가 내뱉는 주장이 지금에 와서 설득력을 다시 얻고 있는 것은 아직도 노동자의 인권이나 삶이 제대로 인간다움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아직 아이에게 이런 내용의 책을 한 번도 읽힌 적이 없기에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나온 이 책을 중학생 딸아이는 어떻게 느꼈을지도 궁금하지만 사회주의의 이념이나 작품의 상징적 의미 등을 알게 하는 이러한 고전이 지금의 정부는 어떻게 해석할지도 또한 궁금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