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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20억 명의 인류가 기독교 신자로 추산되는 오늘, 이 배타적이고 종교적 다양성에 대해 관용이 없는 종교는 초기 기독교 종파간의 처절한 주도권 싸움의 승리를 통해 정통으로 자처한 것처럼 타자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배척과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연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었을까?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경전이라는 오늘의 신약의 기원을 들여다보면, 그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뜯어고치고, 위조하고, 지어낸,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것임을 목격하게 된다. 초기 기독교의 수많은 종파들과 그들의 경전, 그리고 주도권을 둘러싸고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과정은 선뜻 원정통, 정통으로 이어져온 오늘의 기독교의 교리를 낯설게 보이게 한다.
![]() 이 저술은 사라진 수없이 많은 경전들이 정경이 되지 못하고 비정경의 텍스트가 되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짐으로써 무엇을 잃었으며, 한편으론 무엇을 얻었는지, 그리고 오늘의 기독교가 특정 기독교의 승리를 통한 연장선에 놓이게 된 것은 인류 문명사에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新約(신약성서)’은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의 4대 복음서와 행전들을 포함하여 27권의 정경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이 27권의 정경은 엄청난 싸움의 결과이며, 바로 한 특정 종파의 오랜 전투의 성과물임을 알게 된다. “정치적 대립이나 문화전반에 걸친 대립과 마찬가지로, 종교 내부의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반대파의 교리를 진실하게 기술하는 일은 드물다.” 오늘의 신약에 포함되지 않은 비정경의 텍스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텍스트들의 내용은 어떠한 것이었고, 그 텍스들을 경전으로 하던 기독교 종파들의 믿음은 어떠한 것 이었을까? 주도권을 쥐게 되자 정통이라 자처하게 된 오늘의 기독교가 이들 비정경의 텍스트들과 종파를 그대로 보존했을 리는 만무한 것이고, 이단이란 꼬리표로 배척하였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정통’은 무엇이고, ‘이단’은 무엇일까?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믿음”은 정통이고, “바른 믿음에서 흘러나온 갈래”는 이단이란 본래의 의미와 같이, 누가 예수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또한 그 옳음은 누가 판단한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던지면, 결국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최후의 승리자가 ‘정통’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 배척된 복음서들과 행전, 계시록 등 초기 기독교의 비정경 텍스트를 찾아내고 이해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서기 2~3세기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텍스트들을 뜯어고치고, 서로 비난하는 가운데 부상한 오늘의‘삼위일체론’에 이르는 공방은 그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도 신이고 하나님도 신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유일신만이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 中略 ~ 왜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 대신 그의 아들을 보냈다고 말하고 있는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인일 수 있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예수가 기도할 때 그는 누구에게 기도를 드렸단 말인가? 만일 예수가 그 자신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그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올라간다고 말 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는 예수는 신성이라는 도세티즘(docetism)을 주장하는 에비온파, 예수는 인간이라는 양자론을 주장하는 마르시온파, 그리고 원정통(정통 이전의 본류) 기독교인들 간의 교리 논쟁 중 한 부분이다. 이는 유일신론을 주장했던 당시 원정통 기독교인들에게는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양쪽(도세티즘과 양자론) 주장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즉 예수는 신성인 동시에 인간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르고, 경전의 구절들을 샅샅이 뒤지고 짜깁기해서 재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는 하나지만 표현상 셋으로 구별”하고, “권능 면에서는 하나님은 하나지만 기능면에서 보면 셋”이다. 라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이라는 신비스런 교리를 그럴듯하게 꾸몄다는 것이다. (*사료와 입증 경전, 해석은 본문 참조) 이처럼 오늘의 기독교는 초기 기독교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사용한 다양한 무기들, 즉 상대방에 대한 논박, 인신공격성 비판, 사도들의 이름을 도용한 문서들의 위조, 저술들의 변조를 통해 태어났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367년에 비로소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오늘날 주교격) 아타나시우스의 정경의 골격에 관한 회칙을 통해 27권으로 구성된 경전 간주 주장이 최초의 신약구성의 원칙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복음서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어느 누구도 그렇다고 답할 수 없으며, 더구나 현존하는 사본들의 대부분은 중세시대에 필사된 것으로서, 그것들 중 다수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죽은 뒤 천년이 지난 뒤에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신약에 나오는 단어들의 총수보다 필사본들 사이에 발생하는 불일치의 수가 더 많다는 사실과, 심지어 정경화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완전한 합의가 도출된 적도 없다는 이야기는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원정통 기독교의 승리가 가져온 역사적 의미를 다른 종파, 즉 에비온파가 되었든 마르시온파가 되었든, 아니면 영지주의가 되었든 이들이 승리했다면 오늘의 인류문명과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단, 이교도들이라 배척하고, 타종파와 타종교에 대한 불관용은 승리를 거머쥔 오늘의 기독교의 역사를 거슬러 성찰하게 되면 오늘 그리고 미래의 인류를 위해 의미를 숙고해 볼 중대한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저술은 이렇듯 도마복음서, 베드로복음서, 마리아복음서, 베드로계시록...등 외경들, 비정경의 텍스트들의 내용과 예수의 선재설을 주장하던 에비온파, 반유대적 기독교로서 양자론을 주장하던 마르시온파, 영계로부터 온 인간의 영혼에 대한 구원을 주장하던 영지주의 등 실로 다양한 초기 기독교의 진실을 엿보게 하여준다. 이 모든 것의 진실이야 어떻든 기독교의 태동과 원정통의 성립 등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열쇠를 제공하여 주고 있으며, 종교의 관용에 대한 진지한 제언이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사료적, 인문학적, 사회학적 의미를 갖는 저술이라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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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익숙한 기독교의 핵심인 신약성서는 그 기원을 어디에 두고 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은 비단 성서학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흥미를 주는 질문들일 것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성서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다양성과 논쟁의 역사를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누락된 경전이 있었다는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서 왜곡의 역사’로 한국에서도 그 이름이 낯설지 않은 미국의 성서학자 바트 어만(Bart D. Ehrman)은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Lost Christianities)’에서 초기 기독교의 생존경쟁에서 탈락한 많은 경전들을 소개하고 그 문서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배경과 논쟁을 설명하고 있다.
각 파트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1부 위서와 발견: 바트 어만은 초기 기독교의 경쟁 속에서 패배하여 한동안 사라졌다가 현대에 와서 극적으로 발견된 4가지 종류의 위서들을 다룬다. 위서는 일반적으로 ‘필명서(pseudonymous writings)’라고도 불린다. 고대의 위서는 어떠한 형태로건 속이기 위한 가명을 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신약성서에 속해있는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는 학자들에 의해서 바울이 쓴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40p). 1부에서 바트 어만이 다루는 4종류의 위서는 베드로 복음서, 바울행전과 테클라행전, 콥트어 도마복음서, 그리고 비밀의 마가복음서이다. 베드로복음서는 서기 199년 감독이 된 세라피온(Serapion)이 도케티즘(가현설; 헬라어 ‘도케오’는 ‘겉으로 보인다’는 의미이며, 예수의 고통과 죽음의 실제성을 부정한다)과의 연관성을 의심해서 비난한 문헌이고 그동안 사라졌다가 19세기에 발견되었다. 바울행전의 경우는 드물게도 이 책을 위조한 사람이 그 당시에 잡혀서 위조사실이 알려진 특이한 경우이다. 바울행전이 담고 있는 테클라는 초기 기독교에서 잘 알려진 여성이며 테클라행전에는 그녀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수록되어있다. 테클라행전이 경전에 들어가지 못한 주된 이유는 그녀가 여성이었고 가부장적 사회에 도전하여 금욕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주류 기독교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마복음도 영지주의(그노시스파; 헬라어 ‘그노시스’는 ‘지식’이라는 의미)인 이유로 경전에 들지 못하고 사라졌다가 1945년에 이집트 나그하마디에서 발견되었다. 도마복음은 114구의 예수가 남긴 잠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복음서에는 신약성서의 4복음서와는 달리 구원을 주는 것이 예수의 죽음이나 부활이 아니고 하나님의 왕국이 이 지상에 도래한다는 말도 보이지 않는다(149p).
제2부 이단파와 정통파: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던 로마사회에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생긴 변화는 기독교는 자신만이 옳다는 배타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는 점이다(203p). 더욱이 교리가 정해지지 않은 초기의 기독교에서 교리논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2부에서 바트 어만은 이러한 교리논쟁 속에서 정통파(물론 그 당시에는 많은 기독교 공동체 가운데 한 공동체에 불과했고 교리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정통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에 밀려 사라진 이단 공동체에 대해 설명한다. 바트 어만이 말하고자하는 요지는 그 당시 이단으로 규정된 공동체가 역사의 승리자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확연히 다른 기독교를 믿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포함된 정경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이다. 바트 어만이 처음 소개하는 초기 기독교의 공동체는 에비온파(Ebionites; 히브리어 ‘에비온’이 ‘빈곤하다’는 의미)와 마르키온(마르시온, Marcionites)파이다. 에비온파는 원정통(proto-orthodox)기독교에 있어서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에비온파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유대 경전을 완성하기 위해서 유대 백성에게 온 유대의 메시아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법을 철저하게 지켜야한다고 주장했다(219p). 에비온파의 예수관은 다른 기독교 공동체와 비교해서 구별되는데, 예수의 선재설과 처녀 잉태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예수를 아들로 선택했다고 믿었다(이는 양자론[adoptionism]이라고 불린다). 마르키온(마르시온)파는 2세기에 활동한 기독교 전도자이며 신학자인 마르키온의 추종자들로 알려져 있다. 마르키온파는 유대적인 요소를 배격했으며, 예수는 육신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는 도케티즘을 옹호했다. 마르키온파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사상은 하나님이 두 분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바울이 예수의 진정한 사도라고 보았다. 에비온파와 마르키온파가 원정통파와의 교리전쟁에서 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바트 어만에 따르면 에비온파는 지나치게 유대주의적인 교리로 인해서 2세기말에 이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고, 마르키온파 역시 옛것을 숭상하는 로마에 뿌리내리기에는 교리가 맞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원정통 기독교는 교권제도를 강화해 나감으로써 경전 채택에 대한 결정권을 쥐게 된다. 결국 원정통 기독교는 양자론자에 반대해서는 예수가 신성이라고 주장하면, 도케티즘의 신봉자로 의심받게 되므로 예수가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양자론자로 보이게 될 소지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신성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 것이다(408p).
3부 승자와 패자: 기독교 내부의 싸움에서 승리한 원정통 기독교는 정경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정경화 과정은 기원후 50년경에 바울이 서신은 쓴 이후로 약 300년이 지난 시기에 이르러서야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27권의 정경을 받아들인데 반해서 5세기 시리아 교회는 22권, 그리고 에티오피아 교회는 27권을 인정함으로써 완전한 일치를 보지는 못했다.
결론적으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간의 교리전쟁에서 마르키온파, 에비온파, 영지주의차 등 어느 파가 승리했다면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을 겸비했다고 보는 교리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삼위일체론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514p). 초기 기독교의 다양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 하는 점을 말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다만 자신의 종교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그리고 심지어 같은 종교에서도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정죄하고 비난하는 일들이 여전히 현대의 종교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이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었다는 다양성을 조금만 인식하고 상대편의 종교에 대한 관용을 가진다면 팔레스타인 사태, 이슬람 세계와 미국의 대결, 한국 기독교 내의 교파 갈등과 같은 문제들의 해결점에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과 더불어 자매서인 ‘Lost Scripture’를 함께 읽는 다면 초기 기독교에서 사라진 문헌들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참고로 ‘Lost Scripture’와 더불어 초기 기독교 문헌들 가운데 특히 나그하마디 문서(영지주의 문서)에 관심이 있다면 James M. Robinson이 편집한 ‘The Nag Hammadi Library’가 필독서이다.
참고. 역자의 전공이 성서학이 아닌 관계로 기존의 성서학계에서 사용하는 익숙한 용어가 아닌 어색한 용어의 번역이 눈에 띈다. 29페이지 에우세비오스 --> 유세비우스(Eusebius) 44페이지 오리게네스 --> 오리겐 46페이지 도세티즘 --> 도케티즘 또는 가현설 60페이지 테르툴리아누스 --> 터툴리안 326페이지 오리게네스 --> 오리겐 357페이지 투빙겐 --> 튀빙겐 457페이지 호모의 일리아데 -->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타: 47페이지 deceo --> doceo 114페이지 5:15 --> 5:14 327페이지 오르게네스 --> 오리게네스 392페이지 히브어 --> 히브리어 69페이지에서 번역자가 원서에서 베드로계시록 1장이라고 잘못 기재되어있는 부분을 수정해서 2장으로 정정해놓은 점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만 114페이지에서는 원저자의 실수를 고치면서 번역자 역시 실수를 하고 있다(마태복음 6장 33절이 맞는 구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