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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도 바로 책을 책장에 꼽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가끔. 그런 책들은 그 책이 나에게 준 감동의 깊이가 그만큼 크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고 해서 바로 그 책에서 내 마음이 떠나게 하지 못하는 마력을 발휘하는 책들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책들을 만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내 마음이 점점 딱딱한 껍질로 덮여가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요즘 그런 깊은 감동을 가진 책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요즘 만나기 힘든 바로 그 오래된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책이었다. 길고 긴 이야기를 빙 돌아서야 비로서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해가 되는 책. 책의 처음부터 스릴과 쾌감을 느끼게 하는 트랜디한 책은 아니지만,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지는 감동이 오랫동안 가슴속에 지글지글 타오르게 만드는 강한 힘을 가진 책이다. 한 사내아이의 아픔과 꿈. 그리고 그의 소망과 세상을 향한 도전. 그리고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엔딩...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제목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제목이 그 책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책을 읽고 난 다음에야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특히 요즘 선정적인 제목을 덩달아 붙이는 출판계의 풍토에 비추어 볼때 책을 읽기 전의 제목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인 '본격소설'이라는 특이한 제목은 책을 읽기부터 늘 궁금하였다. 사실 '본격소설' 이라는 단어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듯한데, 그 뜻을 정확하게는 알수 없는 정체불명의 단어였다. 혹 내가 모르지만는 문학인들에게는 친숙한 용어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요즘 대세를 이루다시피 하는 장르소설과 장르소설이 아닌것을 구별하고자 하는 용어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가 쓴 또 하나의 유명한 소설의 제목이 사소설인 것을 감안하면, 본격소설이라는 제목은 사소설과는 대비되는 소설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9세기의 서양소설이 소설의 규범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19세기류의 소설들을 본격소설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늘 그런 류의 소설을 자신이 써보는 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말하는 본력소설이라는 것은 저자가 일본문학의 대세인 자신의 삶을 소설화한 '사소설'이 아니라, 저자의 창작에 의해 탄생한 실재로 있지 않은 소설을 말하는 것인것 같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본격소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이 책에 나오는 인물이 실재로 존재한 인물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의 화자 역시 저자의 실제 삶의 프로필과 유사한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전공자가 아닌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본격소설이냐 아니냐라는 저자의 명칭이 아니다. 이 책이 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에 관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소설은 아직은 일본이 전후의 피폐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기에 미국으로 밀항을한 한 가난한 사내에 관한 의문점으로 시작을 한다. 비자문제로 가장 허드렛일중 하나인 입주운전사로 미국생활을 시작을 한 어린 사내는 비상한 노력으로 짧은 시간에 미국내에서 성공을 거둔 사업가로 성장해버린다.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그의 노력은 눈물겨움을 넘어서 지독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이다. 과연 그 엄청난 노력을 한 에너지가 무엇일까... 그런 의문이 일어날 즈음 책은 과거의 일본으로 돌아간다. 태평양 전쟁전. 일본의 상류층과 귀족들의 생활. 같은 부유층이면서도 근본이 깊은지 얕은지를 따지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의 상류층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수도인 도쿄뿐만이 아니라 고급 별장지에다 경쟁적으로 별장을 짓고 호사스러우면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전쟁이 그들의 삶의 모습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한 스케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면서, 만주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속에 이 소설의 주인공이 들어 있었다. 거지보다 더 남루한 모습. 같이 가난한 가족중에서도 유난히 따돌림을 받을수 밖에 없는 이유. 총명한 눈빛을 가리는 겹겹히 쌓인 아픔의 층들. 그는 그 모든 굴레를 벗어나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그가 자신의 빈한한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목숨을 바쳐 사랑한 사람은 그가 감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밀항.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를 준다는 신세계로의 밀항은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길고 긴 서사의 끝자락 무렵에서 우리는 그의 집념이 어떤 아픔의 소산인지, 그가 성공을 이루어서 궁극적으로 얻기를 바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큰 성공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짧았던 15년이라는 시간이, 자신이 바라던 것을 얻기를 소망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긴 아픔의 시간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간이라는 힘은 그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고 말았는지... 이 책은 숙명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와, 무정한 시간이 삶을 허물어가는 힘에 관한 것이다. 본격문학이라는 것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든 나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은 트랜디하게 쉽게 읽히고 가벼운 감흥을 주는 책과는 분명히 차별되는 책은 아니다. 멋을 살린 어려운 문장은 없다. 미국에서 공부한 원작자의 문장때문인지, 깔끔한 번역때문인지 일본 번역서를 읽을때 느껴지는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쉽고 매끄럽고 술술 읽히는 문장들 뒤에 감추어진 아름과 감동과 슬픔은 크고 강하다. 그래서 이 책은 그야말로 본격적인 소설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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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씨지만 그래도 가을인가보다. 연애소설이 끌린다.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라도 읽게된다면, 그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핑계삼아 눈물이라도 흘려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배중엔 아름다운 로맨스만을 고집하기도 하지만,나는 아직도 노희경의<거짓말>같은 사랑이야기가 더 좋다.
본격소설이란다.제목이 참으로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 했는데, 제목은 어쩜이리도 투박한것인가 궁금할 수 밖에. 제목을 그리 정한 이유는 책을 열어 보는 순간 알게된다. 친절하게 설명 해 주고 있음으로 해서.이 책을 <폭풍의 언덕>에 비유하는 설명도 보았다. 물론 나는 폭풍의 언덕을 읽지 않았기에 그 느낌과 연계에서 소설을 읽어 낼 수는 없었다.
본격소설이란 장르를 염두해 두고 읽어서인지,마음 한켠이 저려온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생각 해 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의 종류는 얼마나 될 것인가?
사랑을 해 보기전엔 몰랐다.사랑이란 것이 다 비슷한것이 아닐까? 그리고 힘들어 하는 사랑을 하는 이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가슴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만 하려고 했기때문이었으리라...
소설 속의 사랑도 나에겐 참 낯설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말도 안되는 사랑이라고도 이제는 말하지 못하겠다.그저 마음이 아려 올 뿐...
사랑이야기와 함께, 전후를 지나면서 일본의 시대를 관통하는 문화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감칠맛 나는 맛보기였다는 생각이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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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알수 없는 제목에다가 책은 상,하권 토탈 900페이지 정도의 상당한 분량에다가 단편적인 정보라곤 '폭풍의 언덕'과 유사한 사랑이야기가 묘사된다는 정도만 알고 이 책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적으론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일본 소설만을 한정해서 읽는 나로써는 계속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지 않으면 읽을거리가 지극히 한정되어서 읽을거리에 굶주리게 된다. 이 책도 어찌어찌 궁여지책으로 선택해서 좀 지루하고, 장황한 전개란 갈증을 갖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상권을 다 읽었을땐 어서 하권을 읽고싶어서 숨이 넘어갈듯 했다. 주인공 남녀가 어려서부터 성장한 이후까지 인연을 이어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반쪽처럼 혹은 자신 이상으로 사랑하고, 광기어린 집착까지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늦은 재회후 둘이 나누는 대화는 압권이었다.
트렌디 드라마에서 보는 경쾌하고 발랄하기만한 사랑이나, 끈적끈적하고 부담스럽기만한 아침드라마의 단골 소재같은 배덕의 사랑과는 또 다른 이들의 사랑이 눈부시게도, 혹은 질리 정도로 집요하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여자 주인공이 두 남자에게서 받는 극진한 사랑은 부럽기 한량없었다. 그리고, 그녀만을 바라보는 아지마 다로라는 남자의 집녑어린 사랑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둘만이 만들어내는 세계안에서 온전히 완성되는 그들의 사랑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다만, 완성도 높은 이 이야기를 읽어내기에 앞서 제목의 생경함이 왠지 묘한 거리감을 주어서 좀더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선택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란 우려가 심각하게 들어서 유감이다. 출판사에서 작가분께 충분히 양해를 구해 좀더 친근감 있으면서도 원작의 묘미를 살릴수 있는 멋진 제목을 새로 달아주면 좋지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노르웨이의 숲'도 '상실의 시대'란 제목으로 바꾼 이후 판매고가 껑충 뛰었단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이 작품도 알음알음 알만한 이는 찾아 읽겠지만, 좀더 독자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선 특단의 조치를 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바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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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이 본격소설이라니, 소설 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가치를 함축하거나, 소재나 주제가 되는 단어를 제목으로 삼지 않고 그저 '본격소설'이라니,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본격소설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소설 장르를 말하는 듯한데, '이것만이, 또는 이 정도는 돼야 본격소설이라 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작가의 자만심마저도 느껴졌다. 후일 <사소설>이란 제목으로도 소설을 써냈으니 어떤 맥락에서 이 두 작품을 구분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뭔가 강력한 포스와 카리스마를 무기로 독자를 휘어잡으려는 건가' 긴장하면서 첫 장을 펼쳤을 때, 의외로 사근사근하고 지극히 겸손한 말씨의 여성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이 나왔다.
본격소설과 사소설의 개념에 대해 본문 안에서 설명이 나오는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사소설은 작가 개인의 체험을 토대로 만들어 낸 이야기이고 본격소설은 이와는 달리 전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로 19세기 서양소설의 전형이다. 그런데 미즈무라 미나에가 작가를 직업이라기보다는 천직이라고 여기게 된 한 계기로 어떤 남자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 사연을 털어놓는 서문이나, 이야기의 중심부로 들어가기 전의 상황을 그린 '본격소설이 시작되기 전의 길고 긴 이야기'에서, 이 소설 속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을 토대로 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런 앞부분마저도 소설을 실제 이야기로 보이게끔 하는 장치이고 그래서 서론과 '본격소설이 시작되기 전의 길고 긴 이야기'를 포함한 이 소설의 제목이 '본격소설'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그저 내 추측일수도 있다) 약간 소름이 돋았다. 어쨌든 작가는 일본소설의 사소설적 경향을 탈피해,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일본판 <폭풍의 언덕>을 쓰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일본판 히드클리프와 캐서린은 어떤 모습일까. '본격소설'이라는 제목에 이어 또다른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야기는, 작가 자신인 화자가 현지 주재원으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미국에서 생활하게 된 시절부터 시작한다. 그때 작가는 아버지 지인의 '고용 운전사'인 아즈마 다로를 만난다. <폭풍의 언덕>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히드클리프가 저택을 떠나 자수성가한 과정을 생략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시절에 히드클리프를 만난 사람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폭풍의 언덕>이 캐서린이 죽고난 뒤 유령이 나오는 저택에 나그네가 묵게 되면서 시작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전개다. 그리고 후일 작가가 만난 어느 출판편집자가 전해주는, 우타가와 집안의 가정부 후미코의 이야기에서 비로소 일본판 히드클리프와 캐서린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작가-편집자-가정부, 이렇게 여러 겹 둘러쳐진 액자를 벗기고 나서야 본 이야기에 들어가게 된다. 그 여러 겹마다 저마다의 사연이 짧지 않게 서술되어 뜸을 너무 들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후에 기다리던 이야기를 만나게 될 터이니 그다지 조바심칠 일은 아니었다. 또 각자가 이야기를 전해주는 수단이나 조연에 그치지 않고 저마다 생명력을 가진 이야기의 주체가 되기도 해서 지루하진 않았다.
<폭풍의 언덕>을 생각지 않고 보더라도 이 자체로 울림이 강한 이야기라 느껴지지만, 읽는 내내 히드클리프와 캐서린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폭풍의 언덕>은 <좁은문>과 더불어 내 사춘기 시절을 지배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히드클리프는 독단적이고 강인한 성향에 복수심에 불타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사내였다. 그리고 캐서린은 히드클리프와 같은 성향을 지녔지만, 그 어둡고 무거운 영혼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달아나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불운한 여자였다. 이들이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든,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며 "유령이 되어서라도 곁에 머무르라"고 절규하는 히드클리프의 광기 어린 사랑, "나는 떠나지만 부디 행복하게 살라"는 말 대신 "데려가 버리겠다."고 죽는 순간까지 으르렁거린 캐서린의 집착에 매료됐다. 이 소설을 읽고 사랑에 있어 서로를 자기 영혼의 반쪽처럼 느낄 법한 공통분모가 밝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란 걸 깨달은 열다섯 살 소녀는 그날로 동심을 버렸다. 그리고 당시 내 내면에 도사린 슬픔, 참담함, 우울함에 공명할 누군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음험한 희망을 키워나갔다. 이 감당하기 벅찬 어둠을,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똑같이 공명할 만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사랑의 끝이 죽음일지라도 끝내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을 배경으로 다시 만난 히드클리프, 다로와 캐서린, 요코는 그 전신들과는 사뭇 달랐다. 아즈마 다로는 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울하지 않았다. 그 소년은 강하고 영리했지만, 슬프고 여렸다. 요코는 몸도 허약하고 외톨이였지만 오히려 다로보다 강하게 둘 사이이 주도권을 쥐었다. 요코는 다로에게 최초의 친구였고, 애인이었고, 엄마였고 할머니였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었다. <폭풍의 언덕>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하녀보다 한층 이들 삶에 깊숙이 관여한 가정부 후미코의 이야기는 생생하고 세밀해서 둘이 천천히 서로의 전부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야기 전개에 비약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고 헤어지는 아픔 또한 절절히 공감했다. 무엇보다 요코의 캐릭터가 맘에 들었다. 요코는 캐서린처럼 자기 운명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히드클리프의 출현에 캐서린이 지레 겁을 먹고 죄책감에 시달린 것과는 달리, 요코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사는 입장인데도 오히려 다시 나타난 다로에게 "왜 이제야 나타났느냐"면서 호통을 칠 정도다. 난 이런 요코의 태도가 좋았다. 어떤 모습을 취하든, 그 사랑에 자기가 마음을 헌신한 만큼, 당당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가슴 졸이고 그리워한 세월만큼, 그 사랑 안에서는 떳떳하게 주도권을 쥘 수 있을 테니까. 요코가 가루이자와 별장으로 상징되는 호화스러운 생활을 택해 다로를 버렸다기보다는, 다로 자신이 자괴감에 달아나 버렸기에 다로가 돌아왔을 때 복수심보다는 말못할 그리움, 곁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이 더 컸던 것도 이해됐다. 다로는 일편단심 요코만을 위해 온갖 고생 끝에 자수성가했고 요코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또 도련님의 대명사 마사유키와 결혼해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살았지만, 왠지 빚진 자는 요코가 아니라 다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대에 이르러 비로소 사랑의 결실을 맺는 <폭풍의 언덕>과는 달리, 요코 자신이 어느 정도는 마무리를 지어 그 사랑을 그 자체로 완결성 있게 했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가까이 다가가면 델 것 같아서 범접하기 주저하게 되는 두 남녀를 만났다면, <본격소설>에서는 보다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그럼에도 가슴을 할퀴는 처절함도 간직한 남녀를 만났다. 읽는 내내 오랜만에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다. 마지막에 요코가 죽고 나서 이야기 전달자 후미코와 다로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드러나는 데서는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시간을 두고 다시 읽어보면 이해가 될지도 모를 부분이다.
문장이 눈에 착착 감기는 기분으로 잘 읽히는 것도 장점이다. 작가의 역량에 역자의 노고가 잘 버무려졌으리라 짐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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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시간'을 추억하는 어느 이야기.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뒷 표지에 소개된 한 줄의 문구 때문이었다. '역사상 최고의 러브스토리 <폭풍의 언덕>이 근대 일본의 배경으로 되살아난다!' 는 이 한줄의 문구 때문에 <본격소설>을 집어 들었다.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을 읽을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어두운 사랑이야기에 매료 될지는 몰랐다. 지독하고 지독한 사랑을 한 히스클리프가 그리 매력적인지도. 때로는 당시에 읽었던 책들이 그리 감명깊게 읽지 않았을지라도 머릿속에 계속 남는 경우가 있는데 <폭풍의 언덕>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러다 미즈무라 미나에의 <본격소설>이 일본을 배경으로 그린 폭풍의 언덕의 러브스토리를 담았다고 하니 어찌나 이 책이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안 읽고는 못 베길정도로 이 책이 너무도 읽고 싶었다.
열두 살 때 건너간 미국에서 이십 년간 살아온 저는, 일본에 돌아왔을 때 너무도 변해버린 조국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국에서 꿈꾸던 고향은 이미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 p.6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그린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 책을 러브스토리를 담은 동시에 패전 후 일본 사회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담은 '시간'을 추억하는 소설이었다. 패전 후 사라져간 사람들, 농촌의 사람들, 가난했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콘크리트만 난무한 일본의 변화들이 생소했던 작가는 과거를 추억하고 그 시간에 있던 사람들을 애도하기 위해 이 소설을 그렸다.
본격소설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다른 소설과 달리 광범위한 사회 속에서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쓴 것이라는 의미와도 일치한다. 주인공들의 시간속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누군가로 듣고, 들었던 이야기를 누군가의 글로 옮겨 쓴 것같은 시선으로 쓴 책이 바로 이 책, 본격소설이었다.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일장연설처럼 길어진 서문이 굉장히 지루하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전 마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진짜 인물이 보면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하기전 길고 긴 이야기는 변명에 가까운 혹은 이 소설을 쓴 것은 자신의 운명이었듯 늘어놓는 작가의 글은 이 소설이 존재하기 까지의 긴 여정을 그린듯 했다.
작가의 프로필을 소설이 시작되기 전의 긴 이야기를 통해 길게 듣고 나면 드디어 누군가로 부터 바톤을 넘겨 받는다. 유스케 그는 작가와 소설의 주인공 사이의 매개자이자 우연히 여행중 사고로 그들의 공간에 들어간 사람이다. 유스케가 메이드인 후미코에게 듣는 그녀의 이야기, 그리고 별장에서 본 한 남자 아즈마 다로에 관한 이야기.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듣게 되는 시게미쓰 가와 사이구사 가의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유스케에게 말하는 듯 후미코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두 가문의 이야기는 하루에, 나쓰에, 후유에의 세 자매 중후미코가 나쓰에의 메이드로 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흑백사진이 곁들여진 그들의 공간을 바라보며 후미코의 시선으로 두 가문을 훓는다. 그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로 지내고 있는 아즈마 다로의 출현과 나쓰에의 둘째 딸 요코의 이야기가 시작 되기전 배경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그들이 사는 일본의 시간은 조금씩, 흘러간다. 일본인의 위치도, 사회적 배경도, 인식하는 것들과 현실에 맞닿아진 그들의 부까지도 관계가 깊다. 조금씩 흘러가는 시간을 그린 이 책은 잔잔한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사랑이야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상권에서는 그런 기대감과 달리 계속되는 후미코와 두 가문의 이야기로 채워져 아쉬움이 남았다. 책이 그리고 있는 이야기와 독자가 생각하는 기대감이 엇갈렸지만 하권에서는 다로와 요코의 이야기가 일본의 폭풍의 언덕이라고 부르는 그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접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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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특이하다. 뭔가 그럴듯한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래서 욕심내본 책.
일본소설을 좋아해서, 무리해서 욕심낸 책인데, 결코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는 책도 아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디게 읽혔다.
기회가 된다면, <폭풍의 언덕>이라는 고전을 만나보고 싶다. 그런 후에 다시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일본판 <폭풍의 언덕>이라는 설명이 자꾸만 뇌리에 남는다.
일본드라마나 영화를 즐겨 보는 편이라서, 상류사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려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보여지는 것과 실제의 모습이 얼마나 같을지는 모르겠다. 이 소설은 상류층을 이야기의 큰 흐름으로 잡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와 비교되는 주인공 아즈마 다로. 외삼촌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무시당하는 삶에서 큰 성공을 이루는 사업가가 된다. 그의 첫사랑에 대한 집념,이라고 해도 되려나?
어떻게보면, 흥미진진한 이야기였고, 또 다르게 보면 별세계 이야기처럼도 느껴졌던 소설이다.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끌리는 책이지 않나 싶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곳의 사진이 실려있다.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하는 그런 작용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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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친구를 마중나온 기분으로 [본격소설]에 빠져들었다. 일본판 [폭풍의 언덕]이라는 설명을 굳이 보지 않았어도 읽게 되었을 이 책은 히스클리프 같은 남자 주인공을 바라고 시작한 소설이 아니었다. 본격소설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이 붙었다는 생각은 다 읽고 나서도 접지 못한 채 오랜만에 선 굵은 문학작품을 읽은 담백한 기분으로 2권 모두 읽기를 마쳤다. 단 반나절 사이에 두 집안과 그 사이에 얽힌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읽어버린 것은 어쩌면 미안한 일인지도 모르는 일일테지만. 농촌의 순수를 잃고 콘크리트의 나라가 되어버린 일본에 실망감을 느꼈다는 저자 미즈무라 미나에. 그녀의 생각은 남자 주인공 아즈마 다로에 고스란히 입혀져 작품 곳곳에서 그의 대사로 내뱉어진다. 다소 냉소적이고 과묵하지만 후미코에게만은 정직하게. 시작의 대부분은 이 이야기가 미즈무라 미나에 자신이 들은 이야기이며 주인공인 아즈마 다로를 보았던 어린 시절,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아 마치 진실을 모티브로 한 것처럼 꾸며놓았다. 정말 저자의 말처럼 연인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니면 이것조차 작가의 트릭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부분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고 자신이 바라본 미국과 일본, 그리고 그맘때의 사람들에 섞인 아즈마 다로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또한 다시 아즈마 다로를 떠올리게 만들 유스케와의 만남 뒤엔 유스케가 일본에서 우연히 듣게 된 성공한 이 남자의 과거사로 이야기를 옮겨간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바라보는 화자는 가정부 후미코다. 후미코의 시각이 가장 객관적이면서 따뜻해서였을까. 누가 화자가 가에 따라 이야기는 추할 수도, 탐미적이 될 수도, 가난한 누군가의 성공기로만 남을 수도 있었을 일이기에 후미코는 결코 가볍게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인물 중 하나다. 시게미쓰가와 사이구사가, 그리고 하인 아즈마 가 사이에 얽힌 세월의 애증은 소설 두 권 속에서 일본의 근대화와 함께 맞물려 변화되고 있었다. 괴롭힘과 질투, 시기와 무시함의 관계가 표면화되고 인간보다는 계급의 문화가 일반시 되던 시절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부림의 혜택을 유지하며 살아온 노파3인방. 그 중 큰 언니인 하루에의 밉살스러움은 결국 세월도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제껏 이토록 밉살스러운 노인네를 만나본 적이 없다. 미나에의 기억속 아즈마 다로는 어딘가 필사적인 스무살 청년이었다. 영어를 배우려고 필사적이었던 그가 어느새 회사 제 1의 세일즈맨이 되고 종국엔 회사의 부당한 계약갱신조항 때문에 타 회사로 스카웃 되어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녀의 기억속 남자는 언제나 스무살 청년 아즈마 다로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다로의 모습을 엿볼 기회가 주어졌다. 유스케가 별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48세의 성공한 아즈마 다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학대받는 소년 아즈마 다로에 이르기까지 [본격소설]은 완벽한 고전의 틀 안에서 인물의 일대기를 묘하게 비틀어 보여주고 있다. 영감을 준 사람. 소설을 쓰기전 사연이 소설의 분량만큼이나 길었떤 소설. 본격소설. "정말 있었던 이야기"를 꾸며낸 이야기처럼 썼다는 작가에게 아즈마 다로는 영감을 준 사람이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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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미칠듯한 두 사람의 사랑에 일본의 근현대사를 담아놓은 놀랄만한 소설이다. 폭풍의 언덕에 비유를 하지만, 개인의 삶에서 역사를 읽어내는 통찰력과 역사 속에서 살아숨쉬는 인물을 창조해 냈다는 점에서 폭풍의 언덕과는 아주 다르다. 인물 하나하나에 독특한 개성과 인격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들을 통해 격정의 근현대사를 거쳐온 사람들의 내면세계, 정신세계를 드러낸다. 놀.랍.다. 현대일본문학에서 이런 깊이와 스케일을 찾아보기란 정말 어렵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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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사라져간 '시간'을 애도하고, 그럼으로써 지금 사라지고 있는 '시간'을 애도하며 아끼는 것을 가능케 하는 언어의 예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7,작가의말) 미즈무라 미나에의 본격소설은 폭풍의 언덕을 모티브로 한 강렬한 연애소설이면서 또한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일본 사회를 보여주고 있는 시대소설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한 시대가 끝나고 한 시대가 시작되면서, 모습이 사라진 수많은 것들, 쓰이지 않게 된 말들을 가득 담아넣어, 아아,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고 흘러가버린 시간을 애도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본격소설은 오로지 일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씌여졌기 때문에 그녀가 이야기하고 있는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애도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그녀가 그려낸 인물들의 삶의 모습은 문학적 서사이면서 사실과 소설을 넘나드는, 한 시대의 진실함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인이거나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공부하지 않은 이상, 미즈무라 미나에의 시대성을 살린 문장들에 감탄을 할수는 없지만, 그녀가 그려낸 한 시대의 격변과 그 시대를 살아낸 인물들, 가문의 성쇠를 통해 변화해가는 일본의 계급과 계층구조에 대한 묘사는 이 책을 단지 연애소설이라고만 할수없게 만든다. 소설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폭풍의 언덕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만 내 기억이 희미해서 그런지 폭풍의 언덕이 격정적인 사랑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아있다면 본격소설은 그들의 격정적인 사랑이야기를 통해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변화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사회의 모습도 담고 있는 사회소설의 모습도 담고 있는 느낌이다. 폭풍의 언덕을 모티브로 한 소설답게 본격소설은 주인공 요코와 다로의 운명적인 만남과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이 두 사람의 계급의 차이와 시대적 상황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소설에는 그들의 사랑을 어린시절부터 죽을때까지 지켜보게 되는 서민 후미코의 삶의 모습과 그녀가 모시는 가문과 그들 주위의 귀족가문의 성쇠가 시대와 맞물려 묘사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이 '본격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것은 진짜 소설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하며 소설이면서도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이야기일 것 같은 시대적 통찰을 담고 있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을 읽는 재미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본격소설을 끝까지 읽으면, 이 소설이 왜 굳이 작가가 '유스케'라는 인물을 내세워 글을 시작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후미코가 차마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유코와 다로, 후미코의 주변인물로 그려진 - 시대와 더불어 몰락해가는 귀족가문의 세자매에 대한 묘사로 소설의 흐름속에 끝까지 등장하는 후지에가 알고 있는 단 한가지의 사실을 유스케가 듣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소설의 재미가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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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소설> (2008,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문학동네 펴냄)의 제목을 차지하고 있는 '본격소설'이란, 19세기의 서양소설이야말로 소설의 규범이라는 개념이다. 본격소설은 전지전능한 화자가 특징이며, 꾸며낸 이야기를 가리킨다 (上권, 179~180쪽). 이에 반해 '사소설'적인 작품이란 실제로 소설가가 쓴 것이 자신의 인생이든 아니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든 아니든 간에, 읽는 사람이 어떤 형태로든 거기에서 소설가 당사자를 읽어낼 것을 전제로 하는 작품이다. 사소설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인생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지 않고 쓰는 것이 독자에게 가치를 지니며 단편적인 것이 그 자체로 정(正)의 가치를 지닌다 (上권, 181~182쪽) 이야기는 미즈무라 미나에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12살에 상사의 미국 주재원이 된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뉴욕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지인의 고용 운전수로 아즈마 다로를 처음 만난다. 아즈마 다로는 끝없는 노력과 성실함으로 미나에의 아버지 회사에 수리공으로 채용되었다가 세일즈맨이 되고, 독립해서 벤처를 차리며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간에서 사라져 버린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다로와 요코의 모습은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히드클리프와 캐더린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나 일본의 전후 세대와 거품경제와 붕괴, 흥망성쇠라는 배경에서 묘사되는 이들의 모습은 물 흐르듯 유장하며 거의 50년에 걸친 한 사람의 인생에 푹 빠진 느낌이 든다. 아즈마 다로의 마음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들을 수 없지만, 그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깊은 절망과 격한 기쁨, 서투른 배려 등은 멋진 묘사를 통해 아주 잘 전달된다. 그래서일까, 작은 글씨에 상하권 더해 900쪽이 넘는 책을 다 읽고 내려놓은 지금, 아즈마 다로의 고단한 삶을 함께 한 것처럼 아주 노곤하면서도 아련하게 행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