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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처럼 책도 첫인상이란 게 있다는 걸 알았다. 무의식에 의한 순간적인 판단이 때로는 몇 개월에 걸친 분석보다 정확할 수 있다고 <블링크>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은 말한다. 바로 첫인상의 힘이다. <박탈> 덕분에 책에서도 그런 첫인상의 경험을 얻은 게 유일한 수확이라고 말하게 됐으니 나는 그저 허탈할 뿐이다.
이 책의 부제가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진보 정치의 흐름이 궁금해서 서평단에 신청하며 이 부제목을 처음 읽었을 때 '혹시나?' 했다. 부제의 표현이 불편하고 어색해서다. 그런데 본문을 읽어보고 '역시나'임이 드러났으니 씁쓸하기 짝이 없는 건 물론 불쾌했다. 분명 우리 말, 우리 글인데 한두 번 읽어서 이해되는 문장이 거의 없다니 어찌 이런 일이! 아니, 서너 번을 읽어도 마찬가지다. 요즘엔 이런 번역서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저자의 화려한 이력 때문인지, 출판사의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인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이 좋은 내용이라는 건 알겠는데 읽어나갈 수가 없다. 한자어 투성이에다 그것도 부족해서 급조된 용어도 왕왕 나타나고, 문장의 어순이 의미 파악하는데 부자연한 데가 많아 의미 전달이 모호하다. 한마디로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만 아프다. 번역자의 해당 외국어 실력도 중요하지만, 모국어 실력은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아무리 원서의 언어를 정확하게 옮겼다 해도 일단 번역자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문장은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보통 수준 이하의 독자라는 고백밖에 안 될 것이다.
한편으로 이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고급 수준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는 걸 인정한다. 레즈비언 연구, 여성철학, 도덕철학, 페미니즘, 퀴어이론, 생명정치, 감응이론, 민족주의 연구와 기억의 정치학까지, 대담을 나누는 두 저자의 학문적 폭과 깊이를 내가 미처 못 따라가는 면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책은 대중서가 아닐 것이다. 전문가를 위한 학술서라고 광고해야 맞을 것이다. 이래저래 나 같은 보통 수준의 독자는 읽을 수 없는 책으로 결론 내린다.
참고로 이 책의 1장에 등장하는 '박탈'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을 소개한다. 이 부분을 읽고 이해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탈은 문제적인 개념입니다. ... 달리 말해 그것이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방식들과 겨루기 위해서 우리는 아포리아(aporia)에 직면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박탈은 예비 주체(subject-to-be)가 이해 가능성의 규범들에 처음으로 굴복하게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 굴복은 역설적이게도 그 반대 개념인 지배와 동시에 작동해 주체화라는 애매하면서도 취약한 과정을 구성해냅니다. 때문에, 그것은 "누군가"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 대체 어떤 "격렬한 애착"이 가능하고 적절한지를 결정하는 심리적 폐제를 상기시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박탈은 다른 사람에 의해 누군가가 박탈되는 상태(혹은 그 누군가를 박탈당하게 만드는 것)를 결정짓는, 이미 구축되어 있으면서도 선취적일 수밖에 없는 상실들을 모두 아우릅니다. ... 무엇인가를 박탈당한다는 것은 문화적 이해 가능성을 결정하며 취약성의 분배를 규제하는 규범적이면서도 정상화를 유도하는 권력에 의해 개인이 그 관계를 부정당하고 그 삶이 비참해지게 되는 과정과 이데올로기를 의미합니다. ...] (19-20쪽 인용)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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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의 시대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 될수록 한 개인의 가치는 그만큼 반비례하여 줄어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열정 페이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왕 인턴이 되었으니 정직원이 될 수 있도록 뼈가 가루가 되도록 노력했지만 물거품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기업이 애시당초 인턴 채용을 통한 고용 증진에 따른 정부의 보조금만 챙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노고, 그것에 바탕이 된 한 개인의 가치는 이토록 쉽게 버려진다. 내 존재와 노력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박탈감이 헬조선으로 보게 만들고 나를 좀 더 제대로 인정해주는 다른 나라로 떠나고 싶다는 갈망을 낳게 만든다.박탈은 인정과 관계되어 있다. 헤겔은 인정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인정은 한 개인을 주체로 만들고 그 지속의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사람에겐 근본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보았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넷은 이런 헤겔의 논지를 받아들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의 진실은 '인정 투쟁'이라고 정의 내렸다. 한 마디로 날 무시하는 사회에 "내가 누군지 똑바로 보란 말이야!"가 모든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행위의 아르케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정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사회학자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와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대담을 담은 '박탈'의 시작이다. 주체화와 연결지어 생각할 경우, 우리가 사회의 인정을 바란다는 것은 우리의 주체 정립이 어디까지나 내가 인정받을 타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내 주체를 정립할 수 없고 타인을 경유하여야만 비로소 형성할 수 있다.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와 주디스 버틀러는 인정 저변에 있는 이런 '상호 의존성'에 주목한다. 우리가 여러 사회적 형태의 박탈에 취약해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우리의 상호의존성 때문(p. 24)인 까닭이다. 박탈감이 오히려 한 개인을 더욱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둘은 의심한다. 그래서 그런 의존 없이,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정립 가능한 주체화의 경로를 탐색한다. '박탈'은 바로 이러한 경로 추적을 대담 형식으로 엮어간 책이다. 의존을 의심하는 것은 그것이 규범화의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정은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에로의 편입에 다름 아니다. '정해진 사회 규약에 따라 당신을 승인한다.'가 바로 인정의 진실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의 틀이 존재하고 있고, 오로지 개인이 그 틀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이렇게 일방적으로만 이뤄지기 때문에 폭력인 것이다. 거기다 그 규범이라는 것조차 올바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모든 규범은 임의적, 잠정적인 것인데, 한 개인에 대한 그런 폭력을 통해 마치 항구적, 절대적 진실로 군림하려 들기 때문이다. 우연의 소산이 필연을 가장하고, 그런 거짓 권위로 한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어떻게 상호 의존에 바탕을 둔 주체화 경로를 택할 것인가? 그러므로 당연히 스스로 정립되는 주체화의 경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박탈 역시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인정의 갈망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을 갑자기 무중력으로 만들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나와 세상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런 가능성과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사회에 의존해, 박탈감 하나에다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박탈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실, 지금의 사회란 박탈을 통해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라는 것이 지속적으로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을 버리는 것으로 유지되어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의존이 아니라 독립으로써 주체는 쟁취되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수행성이 중요하게 된다. 수행성이란 쉽게 말해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뭔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버틀러는 그것만큼 부적절한 표현도 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되어야 할 그런 것 따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체성 같은 것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바로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수행성이다. 나란 존재가 먼저 이것이다 하고 규정되고 난 뒤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된 것은 없고 지금 내 행위를 통해 내가 형성된다. 바로 이 수행성의 강조는 그 어떤 의존 없이 독립적인 방식으로 주체성을 구축하려는 것의 일환이다. '박탈'은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시 석학들 간의 대담이라 그런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말도 어렵고, 얼른 납득이 안 가는 대목도 정말 많다. 인내와 끈기가 참으로 많이 필요한 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읽으면, 꽤 얻는 것이 많은 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지점에서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하나 얻게 된다는 점이 그렇다. 박탈이 페스트처럼 퍼지고, 그로 인한 절망과 허무가 쓰나미처럼 범람하는 시대에, 박탈을 오히려 혁명의 계기로 삼는 이 책은 보다 커다란 생각과 삶의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꼭 한 번 경청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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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쪽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고등교육의 기업화는 지식을 재산으로서, 상품으로서, 그리고 세계의 엘리트 기업가들의 경영관리 의제에 즉각 활용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상업 자산으로서 개념화하는 세댸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대학이 지식 상업화, 양적 평가, 회계감사 가능성과 벤치마킹 등 을 통해 기업적 통치성의 가치에 상응해감에 따라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경제적 위험성 뿐만 아니라 정치적 위험성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비판적 사유는 기업가적인 대학에 해로운 잉여로서 치부되 기 때문이지요. 시장성과 손익계산에 기반을 둔 효율성이라는 면에서 저는 우리가 이와 같은 반지성 적 시대에 과연 어떻게 대학의 대안적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지 궁금합니다. 대안적인 인문학을 이 해하고 이에 대한 요구를 하기 위해서 대체 어떤 종류의 비판이 표명될 수 있을까요? 비록 대학이 언제나 권력과 서열화, 불평등, 비대칭적 정치 경제에 의해 특징 지어지는 곳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만, 제가 볼 때 우리는 상업화할 수 없는 대학의 무조건성을 긴급하게 복원 하고 되찾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정확히 무엇이 되찾아져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 한 질문이 생깁니다. 또한 이와 같은 되찾기가 필요로 하는 것이 인문학과 포스트휴머니티가 갖고 있는 어떤 종류의 비판적 학문인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있습니다.
음 천천히 읽으면 별 이야기가 아니지만 대단히 긴호흡으로 이야기한다고 느껴집니다. 그 불편 함을 제외한다면 "상업화할 수 없는 무조건성"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할까요? 어린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것만은 꼭 지키고 싶어."라 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돈으로 살 수 없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집니다. 무 엇 또는 누구? 또는 그 무엇도 아닌 것? 행복한 고민을 할 시간이네요. 이런 고민은 저를 행복하게 만 들지요. 물론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생산수단 확보에 대한 제 고민은 지금도 저를 행 복(?)하게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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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체를 주제는 책 제목인 박탈입니다. 두 저자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박탈이 단순히 소유물을 빼앗기는 상태만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고 탈취적 속성을 지닌 박탈과 관계적 박탈 혹은 탈-소유로서의 박탈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아타나시오우는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박탈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가 있을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 박탈은 우리가 타인에 대한 반응성과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있을때 곧 타자가 처한 상황이라든가 타자의 고통을 보고 우리가 한없이 무너질때 생겨나고 그를 성향-으로서의 박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탈취적속성을 지닌 박탈을 경험하거나 타자가 박탈의 고통을 겪는것을 목도할때 우리는 이것을 계기로 또다른 차원의 박탈 곧 타자와의 관계성을 인식하고 타자의 취약성에 허물어지는 반성적인 차원의 박탈을 통해 타자와의 연대를 꾀하고 나아가 박탈당한 이들의 정치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라고 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세계 곳곳에 영향을 끼치면서 민중에 대한 박탈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와 그리스의 사회인류학자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의 이둘이 직접나눈 대화와 이메일로 주고받은 토론의내용을 책으로 엮은 대담집이었습니다. 책은 21가지의 주제와 그 주제에 따라서 두저자가 주고 받는 내용이 서술되어있었습니다. 한가지의 주제에 대해서 두 저자가 서로 토론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방식이었습니다. 책은 아마도 어려운 내용일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는데 역시나 어려웠습니다. 역자가 용어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표기했으며 필요한 경우 역자가 새로이 번역했다는 것이 책에 들어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생각도 없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뒷편에 있는 옮긴이의 말이 있는줄 몰랐습니다. 옮긴이가 쓴 글을 읽고 난뒤 이책을 처음부터 읽고 나니 이제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보다 용어들이 생소해서 책을 읽는데 많은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모르는 용어들에 대해서 조사하면서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시절의 전공서적을 읽는 느낌의 책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대담집이라길래 이라서 그냥 읽으면 되는줄 알았지만 읽다보니 본인의 부족함을 마음껏 느낀 책이었으며 많은 공부가 된책이었습니다. 그래도 유명한 두저자의 대담집을 읽을 수 있어서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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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
아마 지금껏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헤매었던 책이 아닌가 한다, 읽고 – 읽으면서 헤매었으니 제대로 읽기나 한 것일까? - 나서도 대체 어떤 말로 리뷰의 운을 떼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하여 첫마디는 ‘어렵다’이다.
책의 문장 자체도 어렵거니와, 그 내용도 어렵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공동 저자인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에 대하여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것이 그 첫째이다.
이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저작을 두고 공동 저자들 간에 의견을 교환하고, 그 교환된 의견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대체 주디스 버틀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니, 각 장마다 주디스 버틀러의 저작에 대한 아테나 아타나시오우가 시작하는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 감이 오질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같은 독자들에게 불친절하다,
아테나 아타나시오우는 발언을 이렇게 시작해야 했다.
주디스 버틀러의 어떤 주장, 어떤 책에 보면, 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라고 운을 뗀 다음에 그리고 역자는 그 책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바를 간략하게 언급해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초보자에게 입문하는 과정을 거치게 했더라면,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역자의 말에 의하면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오해받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국내에 기번역된 버틀러의 저서들을 소개하는 일부 문구를 보면 그녀를 “퀴어 이론의 창시자”라고 칭송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 출처 불분명의 칭호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역자는 의아할 따름이다.>(336쪽)
물론 두 저자의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주디스 버털러의 저작물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 이해가 빨라지는 것을 감안할 때, 각 장마다 대화의 맨 처음 도입부에서 토의의 대상이 되는 저작물을 언급해 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더 절실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아타나시오우 :..... (전략 ),, 선생께서 <질료화하는 몸들>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 놓으셨다시피..,,,,,(89쪽)
버틑러 : 설명해주신 내용은 흥미롭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분명 <질료화하는 몸들>에서 제가 제시했던 시각 중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좋은 설명입니다. (9!쪽)
그래서, 그런 사전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내용면에서 어렵기만 하다.
예컨대, 6장과 7장에서 언급되는 ‘자아 생성의 사회성: 인정 폭력에 대한 응수’와 ‘인정과 생존, 혹은 인정을 견디어 내기’를 읽으면서는, 겨우 헤겔의 인정투쟁에 대한 것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고군분투, 나침반 겨우 하나 들고 보이지 않는 길을 뚫고 나가려는 고군분투하는 모습이랄까, 그런 모습을 연출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이 책 읽은 나름대로의 효과는 있다.
박탈의 개념, 그중에서도 관계적 박탈이라는 개념은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자 타자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열린 존재라는 사전인식이 있다면, 관계적 박탈이라는 개념 역시 이해된다는 것, 이것을 계기로 하여 다른 박탈의 개념 역시 하나씩 정리되는 것은 이 책을 읽어 얻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제목이 『박탈』인 이 책, 제목 자체를 이해하는 수준은 조금 넘어섰으니, 책을 읽기는 한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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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쪽
누가 이해 가능한 주체가 될 수 있고 또 누가 될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저 규제적 이상들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가 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용기를 비판이 라는 실천 자체와 공명하는 미덕이라고 언급한 이유입니다. 우 리 중 누구도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혹은 혁파하고자 하고 있 는 존재론의 체제 아래에서 우리가 정확히 어떤 사람이 될 것 인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례로 우리가 오늘날 각자 가 가진 인격성이라는 이념을 학고하게 해주는 젠더 범주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에 맞서게 됨에 따라 동시에 우리는 더 이상 정확히 우리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 알지 못하게되는 거 만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일종의 자아 형성 혹은 자아 생성 의 잉태에 관련되어 있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아 형성 혹은 자아 생성은 곧 이해 가능성을 위태롭게 하고 문 화 번역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요. -중략-
좋은 말들이 있기는 한데 갑자기 정신현상학 생각이 났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뜬금없이 받아 읽은 이 책은 정말 난해하고 읽기가 버겁더군요. 한자 한자 읽다가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 도 그런 노력을 요구하네요. 말을 아는 것과 전체적인 그림을 다시 그리는 노력이 이 책에서 얘 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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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와 사회학자 아테나 아타나시오우 가 만났다. 이 책은 철학과 사회학이 같이 등장하여서 그런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특히 수행성 (遂行性, performativity) 이라는 생소한 단어.. 이 단어는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 <젠더
트러블>에 처음 등장하며, 주디스 버틀러가 처음 만든 단어였다. 여기서 수행성이란 어떤 행동에 대해서 그 행동 자체가 아닌
그걸 완결될때 그순간을 의미한다. 투수가 공을 던질때 심판이 볼을 선언하는 것, 부부가 결혼식에서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와 같이 완결 짓는 그런 경우를 수행성이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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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주디스 버틀러 아테나 아타나시오우 ![]() ![]() ![]() ![]() ![]()
책의 제목과 책 안의 목차부터 어려운 느낌이 팍팍 풍기는 책! 부제가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이다. 흡사 대학의 논문을 읽는 것처럼 굉장히 어려운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읽어야 할 수도 있겠다. 저자인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는 둘이 나눈 대화와 메일 등으로 이 책의 내용을 만들게 되었다.
특히 동성애자나 퀴어에 대한 이야기와 정치, 자아에 대한 이야기 등 한 번 읽어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솔직히 많았다. 많은 책을 읽어서 지식을 쌓아놓은 뒤에 다시 도전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목차만 봐서는 어떤 내용인지 감이 안올 수도 있다.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이어서 각자의 주장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뒷부분에 있는 옮긴이의 말을 먼저 보고 난 뒤에 읽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스 국적의 저자이다 보니 우리에게 많이 익숙하지 않은 문화가 있어서 그리스라는 나라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가 원어이다 보니 한국어로 번역을 하는데에 같은 단어라도 여러가지의 뜻으로 해석을 했다고 한다. 박탈이라는 같은 단어도 수탈과 박탈 두가지의 뜻으로 번역을 했다고 한다.
미국의 군대를 숭고한 희생으로 빗대는 것이라거나 자살 폭탄 테러 같은 요즘 급진적인 종교 문제들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아직은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리스에 대해서는 나라가 파산 직전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을뿐 그들의 문화적, 정치적 수행성이 이렇게 세계로 뻗어나가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나라와의 비열한 정치판과는 오히려 많이 다르게 느껴져서 어렵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국회에서 멱살잡이를 하면서 육탄전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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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탈 : Dispossession.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을 번갈아가며 찾아보았다. 그동안 내가 생각하는 박탈은 스스로 선택한 무언가에 대해 결과가 받쳐주지 못한 것에 대한 심리적 '박탈감'에 가까웠다. 혹은 어떤 단체나 일정한 자격에서 '박탈'당하는 것으로 생계 혹은 박탈의 어원의 시작이었던 '토지'적인 부분으로는 사실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러워 이 책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선 토지에 의한 박탈을 먼저 다루자면 '박탈'을 경험하게 되는 배경이 신자유주의와 신제국주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부터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사실, 합법적 몰수냐 불법적 몰수냐는 결국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합법적 몰수라는 것은 불법적인 몰수와 마찬가지로 부당하고도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53쪽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시장경제에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지금 우리사회가 떠안고 있는 빈곤, 비정규직, 심화된 빈부격차 등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의미의 박탈 상태에 빠져있다. 위의 발췌문의 사례로 팔레스타인을 언급하는데 그들의 개인 소유지의 몰수가 설사 합법적이라고 해도 일단 '몰수'자체가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소유지라는 개념자체가 과연 누구에 의해 정의되었느냐를 따지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에 치우치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다소 멀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위의 사례는 신제국주의와 관련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고, 이보다 더 오래전에 있었던 영국으로 부터 건너온 백인들에 의해 호주 원주민들의 터를 빼앗긴 사례도 해당된다. 원주민들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았다는 법률 자체가 박탈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렇게 드러나는 박탈외에 전혀 짐작하지 못한 저항으로서 스스로를 '박탈'하는 상황도 책에서는 언급한다. 자신의 권리나 편의를 내려놓으면서 시작되는 박탈은 안타깝게도 상대방이 기본적으로 그것이 '박탈'상태라는 것을 깨달을 만한 태도를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씁쓸해졌다.
우리가 상호 의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하든 평등에 대해 생각하든 그것은 우리가 당면한 상황과 선택하는 어휘에 따라 자유 혹은 저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결 행동을 통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감응적 동맹을 유사성과 공동체에 대한 주장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299쪽
버틀러가 그동안 발표했던 글들을 토대로 아타나시오우가 문제를 제기하거나 좀 더 명확한 의견을 요구하거나 서로의 의견차이를 담은 책으로 역자의 수고가 고스란히 들어나는 책이었다. 사전지식이 부족한 까닭에 중간중간 다시금 철학용어와 '현전'이란 단어에 침착되고 아예 고착된 적도 많지만 그럴때면 역주를 또 친절하게 붙여준 덕에 방황이 길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역자에 대한 감사를 꼭 덧붙이고 싶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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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최근 한창 독서에 탄력을 받고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주춤했다. 한 페이지씩 넘기는것 조차 어려워서 책을 폈다 접었다 하기를 수십 번. 첫 번째 장을 다 읽기도 전에 그냥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조금 욕심을 버리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완독하리라 마음먹었다. 실제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아도 그냥 넘어가며 읽었다. 주디스 버틀러와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의 대담집으로, 몇 달 동안의 회의, 이메일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박탈. 영어로는 dispossession. 우리가 생각하는 박탈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러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말 그대로 박탈감에서부터 수탈, 탈소유 등 여러 의미가 있었다. 이를 주제로 우리 정치, 사회 등 여러 부분에 걸쳐 여러가지 의미로 박탈당하고 있는 상황,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박탈을 경험하고 살고 있다. 나 역시 현재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속에서 효율성만을 중시하려는 정부에 맞서 파업을 앞두고 있다. 많은 노조들의 파업 소식이 들려오는 지금 많은 노동자들이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부분들을 주장하며 성과연봉제를 제지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정부에 패배할 것이다. 성과연봉제를 잠깐이라도 미룰수는 있어도 영원히 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성과연봉제 저지에 대한 벌로 어떠한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은 당장은 정부에 맞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려 하고는 있지만, 결국 장기적으로는 수 많은 노동자들은 적당히 타협하며 입을 막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박탈당하는 데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게 아닐까 싶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탈에 대해 그대로 받아들이며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결국 스스로를 박탈해야 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박탈에 저항하기가 쉽지도 않은 현실이다.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지금 당장 효율적이고 이득이되는지에 대해서 계산하기 보다는 과연 무엇이 인간적인 것일지, 어떤게 자신을 인간으로 만드는지 고민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비록 그들의 대담을 많은 부분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 갈 수밖에 없었지만, 저명한 교수들의 대담을 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좋았던 책이다. 훗날 교양을 좀 더 쌓고 난 후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