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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한권의 책으로 소개할 수 있다면 작가의 능력은 대단하다.
조금 생소한 책을 읽을 때는 저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2가지를 강조한다.
기독교는 박해의 역사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그중의 하나가 ‘작은 예수’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를 믿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 놓았고, 직업을 잃었고, 여자는 사창가로 팔려갔다. 그럼에도 그들은 ‘작은 예수’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박해가 심해질수록 고통의 강도가 커질수록 십자가에서 고난당한 예수님과 자신을 하나로 일치 시켰다. “예수가 나의 생명을 위하여 고난을 당한 것처럼 나 자신도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기꺼이 내놓겠다!”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세상이 못 말리는 자들’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AD 324년 7월 3일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앞세우고 동로마의 황제 ‘리키니우스’와의 마지막 결전에서 승리하고 로마가 통일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도 변했다.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고위직에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고대하던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성직자들은 세속 지도자들에게 버금가는 권력과 부를 얻었고 결국은 기독교의 타락을 가져왔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을 갈구했던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벽은 금으로 빛나고 있고 천장과 기둥머리도 마찬가지다. 이에 비해서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가고 있다”. 며 그 당시의 세속적인 지도자들을 경멸했다. 지금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봐라! 우리나라의 기독교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라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그러나 지금도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목사나 교인들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현장을 지나고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정보를 TV에서 얻는다. 그리고 TV에서 본 것들을 확신한다. 그러나 뉴스나 프로그램이 편집되었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뉴스도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 만약 TV에서 한 영혼을 사랑하기에 희생하고 있는 목사나 신부의 이야기를 방영한다면 기독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것이다.
영적 권력과 세속 권력의 다툼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어두운 시대마다 빛을 밝힐 남은 자가 있었다.
지금은 기독교의 위기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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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전, 모래와 먼지를 뒤집어 쓴 중동의 작은 지방 나사렛, 그곳에서 태어난 한 남자가 오늘날까지 죽지않고 찬란하게 살아남아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일부에서는 그 남자가 달변이었다고 말한다. 항간으로는 그 남자의 외모가 대중을 완전히 매료시킬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믿는 사람들 중에는 그 남자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장님을 눈 뜨게 했으며 미친자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보기에 그 남자가 성공한 이유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주고 일곱 번 씩 일흔 번을 용서해 주는 것. 이게 바로 그 남자의 성공 전략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네 이웃을 내 몸의 반에 반만 사랑했어도'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타 종교를 증오하고 억압하는데 그들은 탁월한 능력을 보여줘왔다. 그리고 그 분노와 증오를 종교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대대로 전해오는 것을 그들의 존속 전략으로 삼아왔다. 종교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선행되야 하는건 교리가 아니라 바로 역사다. 이런건 유치 1, 2부 때부터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 나라 교회치고 역사에 기반한 기독교를 가르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종교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에 뿌리를 내린 역사적 실체다. 이걸 무시하면 종교는 현실과 유리되어 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 버린다. 인간과 구체적 세계가 사라진 종교? 그런걸 도대체 어디다 써먹는단 말인가! 우리 나라 종교인들 중에는 가톨릭과 기독교를 이른바 성당과 교회로 나눠(언제 한번 이 단어의 유래를 찾아보고 싶다) 마치 독립된 별개의 종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눈 앞이 캄캄해지고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일부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은 게거품을 물고 난리를 칠 일이지만 따지고 보면 가톨릭은 기독교의 형님뻘 되는 종교다. 가톨릭이야 말로 나사렛 예수를 계승한 최초의 종교라는 말이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에는 당연히 가톨릭 따위는 없었다. 예수와 열두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은 전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겼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이스라엘에 파견된 총독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핍박을 받았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예수의 언행이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그는 '안식일에 성전을 찾는 것보다 네 이웃과 화해를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거나 성전 앞에서 비둘기를 파는 상인의 좌판을 걷어 차며 '꺼지라'고 할 정도로 대담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혁명적 인물은 기득권의 눈 밖에 나기 마련이 아닌가? 당시 유대인 대제사장이었단 안나스와 가야바는 점차 넓은 지지를 확보해 가던 예수를 군중 선동, 정치 혼란의 주범으로 고발하여 결국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하고 만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예배를 보던 지하 묘지. 카타콤 예수 사후 와해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사역을 이어갔다. '사도'로 일컬어 지는 열 두 제자들이(특히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독립 종교로서의 지위를 다지게 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라기 보다는 '바울'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주변국을 여행하며 선교에 힘썼고 당시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수 많은 피지배층들이 사회적 소수자를 옹호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르자 기독교는 점차 로마의 지배층으로까지 침투했다. 세속적인것을 거부하고 경건한 생활에 힘쓰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기독교인의 삶은 속세에 찌든 로마의 도시인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었다. 그리고 서기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마침내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의 수호자를 자칭한 뒤 벌인 첫 일은 교리의 통합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랜 핍박 끝에 자유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그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심각한 교리 다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교회의 분열을 우려했던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7월 4일, 3백 명의 감독과(Bisop) 2천 명의 장로들(presbyter) 및 집사들(deacon)을 당시 황궁이 있던 니케아에 소집해 교리 통일을 시도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니케아 공회'다. 니케아 공회가 채택한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역시 삼위일체론일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비록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났으나 그 본성은 '신'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늘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 같은 교리를 공의회까지 열어 결정할 정도면 초창기 기독교는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상당히 분분한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대립은 결국 반 삼위일체론의 대표격이라고 볼 수 있는 아리우스가 추방되면서 일단락 된다. 하지만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종파는 현재까지도 당당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선 완전히 사이비 종교로 오해받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 대표 종파다. (여호와의 증인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으며 대한민국에만 10만명의 성도가 살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가 시사하는 바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교리, 즉 이단을 구분해 내고 그들을 잔인하게 심판하는 절대적 교리라는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와 말씀을(성경)을 임의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합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의 채택은 당연히 정치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교리는 줄곧 교회 권력을 놓고 벌이는 정치적 암투의 희생양이 되어 왔으며 특히 정적을 제거할 구실로는 그만한 방법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상당히 퇴색하고 말았다. 교리 선택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다수의 추종자들의 합의하여 결정하는 구조를 채택하는 한 교리 해석의 난립과 이를 통한 종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실제로도 그리스도교는 수 차례의 교리 논쟁으로 많은 분파를 만들어 냈으며 그 때마다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진흙탕 싸움을 계속해 교회의 분열을 가속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 안에서도 또다시 교리 논쟁이 벌어져 이집트, 에티오피아의 콥트교회와 시리아의 야고보교회를 탄생시켰다. 과연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진짜 말씀인가를 따지는 일은 강물과 바다물을 앞에 두고 무엇이 진짜 물인가를 가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오늘날의 교리에 따르면 두 번 따져볼 가치도 없이 터무니 없는 주장이겠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인가? 아니면 교회를 지배하고 그 권력을 향유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목소리인가? 내가 '신은 믿을 수 있지만 교회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후 그리스도교의 상황을 얘기하면 한 마디로 분열이다. 분열이 심했다는건 그만큼 기독교가 '장사가 됐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개인의 구원, 정의로운 삶 어쩌구 하는 가치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건 언제나 힘 없고 무지한 평신도들 뿐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종교는 직업이다. 밥벌이라는 뜻이다. 밥 그릇 주위에는 언제나 악취와 오물이 넘쳐나는 법이다. 7세기에는 이슬람이 탄생했다. 마호메트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마호메트의 하나님은 이슬람교도들에게 자신이 직접 창조한 자식들을 무참히 살해하라고 사주했다. 아이러니한건 기독교인들도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사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동일한 계시를 받고 서로를 무참히 살해했다. 이런 이중인격적인 하나님의 계시에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섭리가 존재하는 걸까? 사람들이 기독교(가톨릭)의 부패와 멍청함과 부정의에 언제까지 참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든 최초의 유럽 왕이었다. 그는 영국 성공회를 국교로 인정하고 종교 개혁을 실시했다(16세기). 물론 그에게 정의로운 동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파문 시킨 로마 가톨릭이 꼴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틴 루터와 칼뱅이 등장한다. 이들은 가톨릭에서 분리된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고, 한국에서는 이를 개신교 또는 '교회'라 지칭하며 가톨릭의 '성당'과 구분한다. 유대교에서 시작한 '야훼의 종교'는 가톨릭, 콥트교,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영국 성공회, 프로테스탄트 교회 등 수 많은 종교를 파생시켰고 프로테스탄트교는 장로교(칼빈파),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교, 루터교, 제7의 안식일교(삼육 재단)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파를 만들어 냈다. *이들은 똑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었지만 탄생 당시에는 거의 예외없이 서로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댔다. 이 책은 오랜 기독교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지만, 2천년이란 그렇게 만만한 시간이 아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담는다는 생각 자체가 넌센스다. 숨가쁜 질주에 내용은 다소 산만하고 일부는 빈약해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의 역사를 한 눈에 훑어 보기에는 이것만큼 좋은 책도 없어 보인다. 시간과 지면이 허락했다면, 저자도 분명 더 나은 책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언젠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기독교인 이야기'를 내 손으로 직접 써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분명 흥미진진한 작업이 되겠지만, 죽기 전에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대교, 가톨릭 보다는 개신교의 분열이 훨씬 심각한 이유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근본 정신이 저항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부패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단호한 태도.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저항 정신이 오히려 프로테스탄티즘의 분열을 가속화 시켰으니, 역시 세상은 아이러니의 천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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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도서 목록에 올려 놓은 지 몇 개월 만에 드디어 책을 구입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초대교회부터 오늘날까지의 교회사를 군더더기 없이 정리한 내용과 빠른 전개를 통해 책을 잡은 순간부터 빠져들어 그야말로 거침없이 읽을 수 있었다. 이름만 알거나 단편적으로만 알던 신앙의 선배들과 그들이 온몸으로 살아냈던 역사적 순간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참으로 신앙의 뿌리를 찾아가는 즐거운 여정이었다.
초대 교회의 외부적 박해, 내부적 위협이 된 영지주의, 순교자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 공인한 배경, 서방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기원, 십자군 원정대, 종교개혁, 근대시대까지 역사와 종교를 아우르는 내용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내게는 새로운 지식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세계사 지식과, 교회에서 배운 신앙의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의 조각들이 이제서야 맞춰지는 느낌이다.
지난 2천년 동안 세상은, 그리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인이시지만 때로는, 아니 많은 순간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잊고 살아오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노력도 없이 사는 무지렁이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온전히 드려서 말씀을 가르치고 그대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많은 용기가 필요한 결단이었고, 때로는 죽음을 불사한 용기가 필요했다.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화형에 처해지거나 사자의 먹이가 되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지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직접 겪은 일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배도하지 않은 그들의 믿음은 아무런 핍박도 없는 상황에서 사소한 도전 앞에서도 쉽게 좌절하는 내 신앙의 단계에서는 이해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미 다 역사 속에 사라진 인물이 되었지만, 그들의 행한 일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기독교를 박해하고, 또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현실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포기하고 살았던 사람들도 역사 속에 사라진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선배들과는 다른 평가를 받는다. 이 세상의 평가는 차치하고 하나님 나라의 평가는 어떠한가? 큰 위용을 떨치고 세계를 지배하던 사람들도 다 죽었다. 나의 유한한 삶을 나의 욕심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계획하신 것이 있기 때문이리라. 순종한 이들 그리고 반역한 이들. 어느 편에 서야 할 지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날마다 옳은 결정을 하기로, 그리고 한번 영원한 결단 이후에 뒤돌아 보지 않기로 다시 용기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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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통해 나는 종교 아니 하나님은 결코 쉬거나 졸지 안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물론 기독교 역사는 인간의 욕심때문에 왜곡 되고 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은 쉬지도 안고 만은 사람을 보냈다. 종교 개혁의 밑거름을 마련하고 갱신하고 변화를 주는 역사를 만들어 갔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수도원에서 나오고 그 왜에 많은 종교 개혁의 자료는 갈빈의 기독교 강요로 탄생했다. 이러한 밑거름을 통해 종교 개혁은 꽃을 피우고 하나님의 역사는 빛을 받았다. 또한 이단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는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하고 오히려 진리는 증명되었다. 수 많은 이단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그 것은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했다. 결코 다를 것이 없는 이단에 역사가 반복되었고 현재도 그러고 있다. 그러나 별로 다를게 없다. 그리고 중세는 어둡다고만 생각했으나 그 안에서도 오히려 문학과 의학은 꽃을 피웠다. 모두들 르네상스는 하루 아침에 뚝딱 이루었졌다고 생각했지만 그 동안 쌓아놓은 기독교의 문화와 또한 헬레리즘을 모아 놓은 그 방대한 자료가 도움이 되고 또한 종교 개혁으로 인한 경제의 부가 불러 놓은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역사는 늘 반복되지만 한 단계 더욱 전진하는 모습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이 책을 통해 하나씩 변화되고 또한 잘 못된 역사를 다시 보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아갈 길에 등불이 되어 주는 책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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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를 읽고
막 책을 읽고 서평을 쓰려다가 그대로 씌어진채 읽은 책 커버(뭐라고하나? 맨 마지막에 한장 씌어놓은 것)가 벗겨졌다. 바같 표지와 같은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루터와 츠빙글리가 크게 초상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새로운 맛이다. 기독교 역사의 사건들에 거침없이 빠져들었다가, 다시 한번 표지에 새로움을 느꼈다.
빠져들려고 하지 않았는데 거침없이 빠져들었다. 그렇다고 빨리 읽는 것을 끝내지는 못했다. 여러가지 여건상ㅋㅋ. 그래도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 재미가 소소하다.
역사책을 대하면 늘 그러하듯이, 이 책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릴수 없다. '2천년의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인가? 그런데 사건 사건을 고리에 고리를 물고 읽다가 보면 참 바로 엊그제가 2천년 전인 것같은 느낌을 지울 수 가 없다. 책 두께라봐야 고작 2센티 미터 정도인데 2천년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주님의 눈에 보이는 수천년의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짧은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다.
2천년의 역사를 이렇게 나름대로 사관을 가지고 엮어낸 것에 대해서 대단한 생각을 가진다. 역사에 밝지 못해서인지 저자가 배경이나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던 조연적 인물을 토대로 교회사를 쓴다고 했지만 별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각을 못했겠죠!!! 교회가 어떻게 생겨나서 지금까지 어떤 도전과 응전을 거듭하면서 나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인물들이 있었는지 거침없이 알수 있는 재미난 시간이었다. 그냥 이들이 주연으로 생각하고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 한데~~~
어떤 의도에서인지 12장으로 나눈 것도 눈에 들어왔고, 정말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고, 재미있으니 전체적으로 기독교회사를 조망할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기네요. 그리고 중세 유럽의 교황과 왕정의 싸움과 유럽공동체의 움직임등은 한번 더 찾아보고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또 바르트를 거쳐서 최근의 리처드 도킨슨 까지도 언급하면서 따끈따끈한 맛을 더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중간 중간 들어있는 그림, 삽화는 말 할 것도 없이 책에 거침없이 빠져들게 하는데 공헌을 한다. 표지는+++ 근데 루터는 그런데, 츠빙글리는 좀?
새로운 기독교역사에 대한 재미와 더 많은 역사로의 여행을 하도록 충동하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전반적인 기독교회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가에 대한 좋은 생각을 갖도록 잘 엮어져 있다. 저자의 귀한 노력에 박수를 짝짝짝+짝!!!!
기독교회사에 관심있다면 재미로~읽어본다면 많은 유익이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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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역사를 다룬 책, 지금까지도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는데 얼마전에 공감적 책 읽기라는 개념에 대해서 배워서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한장 한장 가슴으로 읽게 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거기서 거기일 수 있겠다라는 의구심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림과 사진 자료들, 그리고 중간 중간 궁금할 만한 것과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설명한 조그만 박스(?)들,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는 기독교 이야기'도 솔솔찮게 등장하고 있다. 내 판단으로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역사 속에서 위인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내 마음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곳이 있다. 아픔이 책을 읽어가는 내내 자리잡고 있었다. 아마 책장을 펴 놓은 상태로 한참을 울었을 것이다. '거침없이' 써 내려가고 있다.
"제 1차 십자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들은 1097년 6월에 니케아를 점령했고, 1098년에는 안티오크를 되찾았다. 그들은 성직자를 앞세우고 예리코(혹은 여리고)의 성벽을 맨발로 돌고난 뒤에 공격을 감행했다. 1099년 7월 15일에 예루살렘이 십자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스도인 병사들은 대 학살극을 펼치면서 성전 산에서는 무슬림들의 피가 발목까지 차오를 정도였다. 십자군은 회당으로 몰려 가서 불을 지르고 유대인들을 산채로 불에 태우고는 어차피 예수님을 모르니 지옥에 가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로 뚫고 들어가서 아이건 노인이건 임신부건 가리지 않고 몸을 찢고, 칼로 베어서 조각을 냈다."(p.308)
오늘날 우리가 무슬림들 앞에서 어떻게 비난과 정죄의 화살을 쏠 수가 있을까? 아직도 그 상처와 앙금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에 동감했다. 회개하고픈 마음이 절로 생기게 되었다.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 예전엔 그들의 역사, 유럽의 기독교역사로만 인식했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그들만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에 간직하고픈 명언
*도전이 되는 놀라운 사실
흉터로 인해 그렇게 보였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타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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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사실 이 책은 성경 밖 성경 이야기처럼 간단하고, 심플하게 쓴 책인줄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간단하게만 쓰여진 것은 아니다. 한 단원이 13장 정도 써 있고, 1페이정도의 단락으로 나누어져있다. 물론 이 13장 정도 써있는 분량중 상당수는 그림이나 사진이 있기때문에 글짜로만 친다면 10페이지 내외정도 되는 것 같다. 이전의 글쓰기와는 달리 조금 장문의 글이었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초대교회부터 최근에 까지 교회의 역사를 몽땅 다 집어 넣은 책이어서 내용적으로도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일반 교회사같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교회사의 내용을 상세히 다룬 책이라 할수 있겠다. 이 책을 읽을때 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동료목사님들이 뺏어서 읽기도 하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책이름처럼 거침없이 빠져드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거침없이 빠져들기보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그렇게 쉽게 거침없이 빠져든다고 말할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어마어마한 많은 내용을 담고 있기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이 좀 아쉬운점이었다. 너무 많은 내용이 담겨져 있어서 이 책을 한꺼번에 읽기에는 벅차게 느껴졌기때문이다. 오히려, 많은 내용을 삭제하고, 전체 교회사적인 책보다는 부분적인 교회사적인 책이었으면 더 나았을뻔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쯔음 교회사에 관심을 가진다면 읽어볼만한 책이다. 물론 심도깊게 보려면 세부적으로 중세면 중세, 중세도 초기 중세, 중기 이런 식으로 나눠서 읽어봐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교회사가 어느정도 정립이 될만큼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첫째는 교회사의 굴찍굴찍한 내용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부적인 내용부터 큰 내용까지 정말 하나하나 남김없이 다 적혀있는 듯한 느낌이다. 둘째는 다양한 그림과 사진이다. 이 책은 마틴루터의 얼굴부터 최근의 인물까지 교회사에서 중요한 인물의 얼굴이나, 사진, 그림등이 나와서 즐겁게 만든다. 셋째는 조그만 상자속에 써있는 작은 토막내용들이다. 토막 토막 조그만 상자 안에 재미있는 내용들이 담겨있는데 이 부분이 또 매력적이다. 책을 읽어가다 이 부분에서 잠시 여유를 찾게 만들고, 위트를 찾는 느낌이 든다. 넷째는 이 책은 교회사적인 내용이 거의 다 담겨있는 반면에 이야기적인 글쓰기로 인해서 딱딱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건에 조명하기 보다는 사람에 조명해서 써있어서 야사같은 세부적인 내용들도 있어서 읽는 도중 재미를 느끼게 할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라틴어 불가타를 번역한 히에로니무스는 주님이 단번에 씻어주었기때문에 평생 몸을 씻으려고 하지 않은 내용등이 그런 내용이다. 이런 내용은 교회사책에서는 볼수 없는 이 책의 독특한 글쓰기에서 나오는 내용이라 할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한번쯔음 교회사에 대해 알고 있었던 분이 이 책을 읽는다면 더더욱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지 않겠는가 생각이 드는 흥미로운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