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 화려한 판본의 요즘 책들이 가득 꽂혀있는 책장 윗칸에 이 책을 끼워 넣자니 그야말로 '초라' 하다는 걸 느꼈다. 보다시피 촌스러운 주황색과(보고 있노라면 눈이 아픈) 촌스러운 파란색으로 이루어진 얇은 커버에...아무튼 이 책, 그다지 뛰어난 센스의 편집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책이 나의 책장에 꽂혀있게 되었는지 당췌 기억이 안 난다! 작가는 김영하라는, 최근에 한국일보 문학상 후보로도 올라 수상이 거론되었던 30대의 소설가지만 당시만해도 나는 이 사람의 존재를 전혀 몰랐거늘(그러니까 앞의 수식어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내가 얼마만큼 김영하에 대해 관심이 생겼나-를 뜻하는;). 산문집이다, 이 책은. 내가 보기에 문인이 쓰는 산문집의 매력은 독자가 작가를 인간적으로 알게 됨으로써, 그의 문학 작품을 조금은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것인데(물론 좋고 나쁨이 갈리겠지요마는), 근거는 내가 김영하씨에게 그러했기 때문. 이 책을 읽고 난 뒤 한 주 뒤, 나는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는 김영하씨의 소설을 죄다 구해 읽고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 잇'은 실로 재미있었다. 매력있었다. 무엇보다 쉬웠다. 고등학교 올라와서는 한시간여를 배워 겨우 한 장 나가는 골아픈 텍스트를 붙잡고 사는 내게 이런 휴식같은 독서가 오랫만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음,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책을 붙잡는 것도 일종의 행운이라고 본다 난. 좀 과장해서 배를 잡고 구르며 책을 읽기는 오랫만이었고(나는 웃음이나 눈물이 책을 문화생활에 있어서는 짠 편인데도), '산문집은 다 이렇게 재미있나'해서 당시 인기 있던 박완서의 '두부'도 사 읽기까지 했다. 물론 재미있었고 나름대로 얻은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포스트 잇'에 나는 더 정이 갔다, 지금도 그렇고. 글을 더 잘 써서? 만무하다. 다만 김영하의 생활 속 코드가 주는 즐거움이 당시의 나와 맞물려서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할까(거창하긴;;); 지친 내머리에 깊은 사유를 요구하지 않고, 어떤 순간 마치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영상 세대만이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도 있고. 그리고 그가 결코 유치하지 않은 글솜씨로 일상의 에피소드를 버무렸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이후에 친구들에게 두 번 이 책을 선물했었는데, 나보다 덜 지쳤던지, 아무튼 둘 다 나만큼 이 책을 좋아하진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변함없이, '포스트 잇'은 사 놓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산문집으로 추천하고 싶은 마음:) 분명히 당신도 산문을 써서 책을 내고 싶어질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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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김영하는 소설 보다는 에세이에 치중하는 것 같다. 신문에 가끔씩 실리는 칼럼들도 그렇고, 최근에 출간한 <랄랄라 하우스="">도 그렇다. 아마 그의 소설이 너무 무거워졌거나 소설로 이야기하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때 그는 시대의 흐름을 그대로 호흡하며 줄기차게 “현대소설”을 썼지만 <아랑은 왜="">, <검은 꽃="">등의 소설에서 그 같은 재미를 기대하기는 힘들어졌다.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기에 에세이에 치중하고, 그의 팬들도 그의 소설보다는 그의 에세이에 더 재밌어하는 것 같다.
<굴비 낚시="">나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 이야기="">, 그리고 최근의 <랄랄라 하우스="">까지 모두 읽어봤지만 김영하의 에에세이 집으로는 이 <포스트 잇="">만한게 없다는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기에는 위에 적은 것처럼, 매력적이기 그지 없었던 김영하의 소설적 문장이 에세이라는 비단 위에 그대로 수놓아져있다. 예를 들면 제목, <포스트 잇="">에 대한 문장부터 그렇다.
포스트잇
아무 흔적없이 떨어졌다 별 저항없이 다시 붙는, 포스트잇 같은 관계들. 여태 이루지 못한, 내 은밀한 유토피아이즘.
p. 215
회사를 그만둘 때 제일 마지막에 쓰게되는 글은 사표가 아니라 “아주머니 내일부터 야쿠르트 넣지 마세요”라는 이야기나, 뇌가 손가락 끝에 달려있어 키보드 위에 올려놓아야 비로소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그의 위트와 유머는 즐거운 독서를 하기에 충분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봐왔던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는 에세이라는 점에서 소설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읽는 내내 이야기에 집중하다가 막판에 가서는 깔끔한 농담으로 피식 피식 웃음을 흘리게 만들고야 마는 좋은 문장의 에세이집을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나는 김영하가 굉장히 뻔뻔하면서도 똑똑한, 어찌보면 얄밉게 약아빠진 작가라고 생각한다. 가끔 그가 쓴 글을 읽고 있으면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이 없으며, 희롱꾼도 이런 희롱꾼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입가 한 구석에는 미소가 머금어지니… 최근의 소설이 실망이긴 했어도 나는 여전히 그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다. 아주 많이.
[인상깊은구절] 봄 봄엔, 참 많은 일들이 저질러진다. 저질러진다, 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 포스트>포스트>랄랄라>김영하>굴비>검은>아랑은>랄랄라> |
| 그가 처음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는 그가 지극히 평범한 존재라는 것이었단다. 그. 가. 평. 범. 해? 김영하. 소설가인 그를 나는 포스트잇으로 처음 만났다. 책을 펴고 몇 페이지를 넘길수록, 한 편 한 편의 글이 끝날수록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대단한 진리가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렇게 재미있는 게 많았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이럴 수도 있구나. 모든 것에 무감각했던 내가 그 것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듯이 수많은 생각이 있다는 것 또한 새삼 깨달았다. 매일 먹는 야쿠르트를 나는 그저 먹는데 급급했으나 그는 달랐다. 삐삐가 세월 속에 잊혀져갔을 때 나 역시 무심히 잊어버렸지만 그는 달랐다. 그렇게 나는 무감각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래서 그에게 반했다. 그리고 이제 ‘포스트잇’은~ 그의 말처럼 내 책꽂이에서 숨겨진 책의 기능을 잘 할 것이다. ‘나 이 책 읽었어요~.’라는 나의 외침을 대변해주면서…. |
| 각설, 최근 가장 주목받는 글의 형태를 보자면, 수필 같기도 하고 고백록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가상의 대상과 대화하듯 말하는 인터뷰 같기도 하고 칼럼 같기도 하고 체험담 같기도 한 애매모호하고 복합적인 잡설이 대유행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역시나 인터넷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최근에 와서는 이러한 글들이 가장 많이 생산되고 인터넷 상에서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키며 소비되고 있다. 글의 생산적인 면에서는 누구나 글을 가까이 하고 쓸 수 있다는 점에서는 무척 고무적이고 진보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글의 생산이 많아진다고 해서 글의 품질까지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빛 좋은 개살구 식의 글이 인터넷을 잠식하고 있는 폐해를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가장 큰 해악은 글의 탈을 쓴 ‘말’이라 할 수 있는데, 인터넷의 특성상 문자로 표현되고 있지만 엄연히 말인 것들이 글처럼 표현되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는 글의 본질과 의미를 희석시키고 왜곡시키므로 마땅히 바로잡아야겠다. 인터넷의 현실에서는 생산이 수요를 능가해서 폭주하고 있다. 잡설이 마구 쏟아지고 있어 정작 옥석을 고르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 예술이라는 것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면 그게 예술인가! 경배를 바칠 가치가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쏟아지고 있는 산문집을 신중하고 섬세하게 가치를 따져야 한다. 이름에 기대어 내는 산문집에는 푸념과 실망이 쌓이기 마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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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포스트잇>은 작가가 각종 매체를 통해 발표했던 산문들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김영하의 장,단편 소설을 거의 읽은 다음에 이 산문집을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동안 김영하가 발표했던 소설 안에서 글들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영하라는 작가는 소설만 쓰는 저술가가 아니다. 영화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가벼운 영화 평론집을 내기도 했으며,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각색을 맡아 대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다분히 영상적이여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원제 그대로 영화화 되었으며, <주홍글씨>는 크레딧에서 그의 단편 소설 2편을 원작으로 올리고 있지만 실상 그의 단편 5~6개를 섞어 놓은 이야기이다.
또한 산문집 안에서 스스로 묘사된 김영하라는 작가는, 386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때 했던 동아리 활동이 "대금"이었을 정도로 사회 참여적이지 않다. 게다가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경영학으로 대학원까지 마친 사람이다. 그 와중에 어렸을 때는 신부를 꿈꾸었던 독실한 천주고 신자이다.
이런 면면들은 작가의 작품 속에 많이 녹아있다. 공지영 같은 동년배 작가들이 시대적인 아픔과 후회에 대해서 쓸 때, 김영하는 환타지류라고 할 수 있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아랑은 왜="">같은 소설을 썼다.
<포스트잇>을 보면, 작가가 유럽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한 여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 에피소드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자살안내자가 주인공을 만나는 장면이나 다른 소설 안에 녹아 있다. 또한, 신부가 되고 싶어 그에 심취했던 기억들도 소설들에 녹아 있다. 대금을 배웠던 경험은 거의 고스란히 한편의 단편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김영하의 소설 속 에피소드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증거사진 같은 <포스트잇>을 읽다 보면 ''자전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더라도 모든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게 된다.
평생 주부로 살다가 소설가가 된 박완서가 지금까지도 자신의 가족 구성원의 에피소드와 며느리 살이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도 이 생각을 확인하게 만든다. 박완서 소설 안의 젊은 여자 주인공은 언제나 곧 박완서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드센 어머니 밑에서 살고, 오빠는 전쟁 중에 죽었으며, 미국부대에서 일하고, 만나던 연하의 애인이 아닌 은행원과 결혼한다. 어떤 소설은 결혼이 중심이 되고, 어떤 소설은 연하의 애인이 중심이 된다. 또 어떤 이야기 안에서는 전쟁 중에 가족이 겪었던 일이 주된 소재이다. 박완서 소설을 모두 합하면 그것은 작가의 평생의 일기가 될 수 있을 정도이다.
공지영은 학생운동으로 점철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그녀가 긴 공백을 깨고 내놓은 <별들의 들판="">을 보며 아직도 작가의 창작의 시계는 독재 정권 하에 째깍거리고 있는 듯하다. 공지영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과거 학생운동 전력을 가진 지식인들과 그 주변 인물이고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나, 잊었지만 어떤 사건을 통해 기억을 다시 꺼내놓게 된다.
에쿠니 가오리 같은 경우도 <당신의 주말은="" 몇개입니까?=""> 같은 소설은 작가와 출판사 담당자도 이게 경험적 에세이 인지 소설인지 헷갈려 했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이다.
<포스트잇>을 읽은 재미는 어쩌면 이런 독자들의 의문에 작가 스스로가 답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물론 <포스트잇>은 최근 소설들 보다 먼저 출간된 책을, 다른 소설들을 모두 읽은 다음에 읽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더 강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포스트잇>포스트잇>당신의>별들의>포스트잇>나는>포스트잇>아랑은>나는>주홍글씨>나는>내>포스트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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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산문집 <포스트 잇="">은 포스트 잇처럼 가볍다. 가벼운 메모를 담는 포스트 잇처럼 가벼웁다. 그리고 언제든 다시 붙였다가 뗄 수 있을 만큼의 융통성도 정말이지 포스트 잇을 닮았다. 그런 감각은 젊은 소설가로서의 김영하의 소설을 그리고 그의 삶을 닮았는지 모른다. 이 책을 4월에 읽기 시작해서, 중간에 그만 읽다가 다시 6월에 빌려서 끝까지 읽어냈다. 많은 분량의 책은 아니지만 어쩌다가 그렇게 읽다보니까, 처음 읽기 시작한 때와 두 번째로 끝까지 읽었을 때의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 처음 <포스트 잇="">을 읽었을 때에는 인상적인 제목의 글들만 몇몇 개씩 중간중간 골라서 읽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읽는 재미가 있었고 발상의 독특함도 느껴졌다. 그런데 두 번째로 끝까지 읽었을 때에는 순차적으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고 처음보다는 독특한 미감이 느껴지지는 않는 듯 했다. 표지의 강렬한 주황색깔처럼 내용도 첫 인상만 강한 것일까? 아니면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영하의 산문은 발랄하고 새로운 시각의 젊은 글이지 철학적인 사유가 진득하게 배어있는 그런 에세이들은 아니다. 가끔씩 진지한 삶의 성찰을 보여주기도 하는 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맛볼 수 있는 김영하 산문의 묘미는 젊고 독특한 시각이며 유쾌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이 김영하만의 득의의 영역이라 하겠고, 또 그 어떤 작가도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 안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아쉬운 것도 아니겠다. 하지만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었을 때의 그 오랜 파장의 감동은 접착력이 쉽게 사라져버리는 포스트 잇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겠다. 요즘 에세이의 문학성에 대해서 논한 권성우의 평문을 접하고, 그리고 스스로도 에세이의 매력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어서, 에세이에 대한 입맛도 점점 높아지나 보다. 가벼운 에세이는 그 가벼움 때문에 오히려 깊이 있는 사색의 자유를 선사한다. 그래서 에세이는 어떤 문학 장르보다도 성찰적인 '삶'에 가까운 문학 장르이며 그래서 높은 문학성을 갖는다. 에세이여, 내게 오라. [인상깊은구절] 포스트 잇 : 아무 흔적없이 떨어졌다 별 저항없이 다시 붙는, 포스트잇 같은 관계들. 여태 이루지 못한, 내 은밀한 유토피아이즘.감옥으로부터의>포스트>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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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주문하고서 너무 너무 기다리며 기대한 탓도 있다. 내가 이 책을 50페이지 정도 읽어나갈 때 받은 간헐적인 느낌들이 나쁜 아우라를 형성한 것이. 그리고 후닥닥 읽어 버리고 난 지금의 느낌은 전혀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실망했다. 무엇을 건졌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 많은 내용이 아니라고 독서후 느끼는 뿌듯함이 없어서 영 시원하지 못했다. 기대감때문이리라. 김영하라는 괴짜가 보여줄 또 다른 환상들에 대한. 그러나 전혀 새로운 것이 없었다. 이유를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집에 같이 사는 남편이라는 존재와 너무 닮은 부분이 많아서 (작가라는 점, 김영하랑 좋아하는 것이 너무 비슷하고 남편은 김영하보다는 더 괴짜다) 내게는 그것이 신선함으로 비쳐지지 않은 것 같다. 앞의 분들이 너무 좋은 말들을 많이 해 둬서 좀 미안하지만 이런 내용도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난 그냥 서점에서 서서 읽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끝까지...미안하지만. [인상깊은구절] 아버지에 대한 묘사 부분 정도. 기형도랑 이성복 시인 냄새가 나서. |
| 내가 김영하 선생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쓰는 한 신문의 연재물을 통해서였다. 성석제 선생의 바통을 이어받아 하루에 짧은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는데, 삶에 대한 예리함같은 것이 느껴져서 재미있게 읽고 있다. <포스트 잇="">은 그의 단편집이다. 그런데 단편집이라기에는 꽁트같은 글들도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섞여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자신의 그에서 스스로를 숨기는 경향이 강하다. 뻔히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짐짓 부인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은 작가의 권위주의라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김영하 선생의 글에는 그런 권위주의가 없다. 소위 말해 작가입네 하는 허영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한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평범함에 대한 컴플렉스라고 말할지는 모르겠지만.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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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까, 생각이 포스트 잇과 같아서 쉽게 붙였다가도 쉽게 떼어 버릴 수만 있다면. 사람 관계도 또한 포스트 잇과 같아서 쉽게 손 잡았다가 쉽게 손 놓아 버릴 수 있다면. 아니라는 것을,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아마 마음 깊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반대로 포스트 잇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겠지.
작가의 산문집인 이 책을 읽으면서(무려 지금으로부터 10년이나 지난 때의 글인데도) 호감이 생겨나는 만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 싶은 그의 소설들 때문이었다. 소설가가 소설로 팬을 불러 모아야 할 텐데, 이런 점에서 나는 불편한 팬이 될지도 모른다. 가까이 하기엔 거북하고 멀리 하기엔 아쉬운, 그런 팬.
이 책 속에는 '속도'에 대한 이야기가 몇 편 나온다. 현실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거다. '삐삐'가 증거라면서. 부분적으로는 인정하게 되는데, 내게는 그 빠르다는 속도가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 십 년? 글쎄, 사는 게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물건 몇 개 바뀌고 또 새 물건이 나왔다고 한들, 사람끼리 엮는 관계는 여전하거나 오히려 더 옛스러워지기도 하는 것을. 십 년 전의 작가나 지금의 작가나 글로 보는 그는 여전해 보여서 더 그럴 수도 있었고.
어쨌거나 나로서는 이 책의 내용이 재미있어서,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내용으로 살고 있는 작가의 삶이 괜찮아 보여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는 만족스럽다. 앞으로 읽게 될 그의 소설도 내 취향으로 들어온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행여 실망하게 되더라도 괜찮다, 산문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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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벌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이 책을 보며 처음으로 김영하의 학벌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다. 학벌 좋은 사람이 글 잘 쓴다는 선입견을 갖자는 것은 아니고, 그냥 김영하는 역시 똑똑한 사람인듯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굉장히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쉽게 읽히는 문장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쉽게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포스트잇 같은 관계들과 포스트잇에 대충 휘갈겨 메모해놓았을듯한 사물에 대한 단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꼬이고 비틀어지고 손상되어버린 우리들 사는 모습이 마치 시시콜콜한 메모들을 담은채 한 번 쓰이고는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포스트잇 같다.
출간된지 꽤 된 책이지만 지금 읽는데 별다른 저항은 없는 편이다. 아무래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포스트잇' 부분인데 그러한 형식으로 된 글만 모아서 단행본 형식으로 출간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마음에 든다. 이외수의 "감성사전" 형식으로 책을 만든다면 어떨까? 이외수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김영하라면 비교적 명확하면서도 유쾌하게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소설가가 쓴 수필은 소설을 더욱 깊이 있게 읽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책을 통해 김영하라는 작가 한 사람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된 김영하가 나쁘지 않다. 그래서 다음 목표는 김영하가 쓴 기행문 "여행자: 하이델베르크"를 읽는 것이다.
(그리고 표지 특성 때문인지 보관 기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표지가 좀 낡은 책이 왔다. 딱히 책 읽는데 방해가 된다거나 기분이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