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한국 사회가 보이는 가치의 획일화로 상실된 너무도 중요한 자유와 행복의 몰락에 대한 통찰이며, 이의 회복을 위한 우리사회에 팽배한 그릇된 가치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지식인의 분투(奮鬪)이다. 지적되고 있는 문제제기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나, 저자의 깊고 예리한 성찰이 대중의 이해를 촉구하기에 수월한 문장으로 기술되어있어 그 전도된 가치들의 대중적 이해를 돕기에 적절하다. 주요 비평 및 논단지에 발표된 6개의 원고로 구성된 이 저작물은 발표된 시기에도 불구하고 오늘에 있어서도 그 의미와 지향하는 가치의 어느 한 부분도 손상되지 않는다. 전 지구적으로 맞닥뜨린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우리 한국사회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 태도는 우리에게 어떤 상황을 펼쳐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존중하고 지켜내야 할 가치들을 망각하고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며, 그래서 손상된 가치들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실천하여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한 냉철한 탐색과 분석을 통해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비평의 대상으로 저자는 공교육의 붕괴, 문화정체성의 상실과 같은 사회, 문화적 위기를 소재로 하여 시장자본주의의 전체주의화, 권력-기술-자본의 연정이 가져오는 폐해에 대해 경종을 울려주고 있으며, 오늘의 세계화를 서구의 세계 식민지화 시대인 19세기의 ‘진보논리’와 20세기 탈식민화에 따른 대체 이데올로기로서 강구된 ‘개발논리’의 연속선상으로 진단하여, 강자의 약자에 대한 착취의 악덕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의 중요한 특성인 전 지구의 단일화라는 획일성의 가치가 수반하는 다양하게 변주된 모습을 ‘아Q현상’과 같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잡종의 문화, 즉 혼합문화(Hybrid Culture)가 가지는 극단적 혼란을 지적하고, 이의 배후에서 은밀하고 음험하게 침투되는 시장전체주의의 과격한 몰가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는 시장자본주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시장유일의 만능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뒤틀린 사회현상으로 인한 가치의 왜곡을 바로잡자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공교육이나 대학경영에 물밀듯 불어 닥친 ‘경쟁의 논리’가 얼마나 모순되고 우스꽝스런 것인가는 민간기업의 경영이나 민간경제부문 또는 시장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부분이 아닌 곳에 시장이라는 유일의 논리를 마구 들이대는 우리사회의 몰지각하고 무지한 현실로 드러난다. 이로 인한 시장전체주의의 그 야만적인 결과들은 인간과 사회의 갈등을 재촉하고 양분하여 붕괴로 견인한다.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은, 우리의 교육은, 우리의 학문과 문학은, 우리의 사회정책은 그래서 지금 어떠해야 하는가? 기술과 자본과 권력의 결합이 무서운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어떻게(How)의 기술주의적 도구 사고가 왜(Why)라는 정당성의 질문을 압도하는 정신 상태”이기에 그렇다. 세계화가 가지는 그 실체의 속성을 이해하고 우리사회가 잃어버릴 수 없는 자유와 행복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래서 중차대하다. 저자의 신랄한 진단에서 내려가지 않던 울화와 분통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쾌감을 얻는다. 그리고 왜 시장자본주의가 세계화의 모습에서 전체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떤 추악한 모습으로 우리를 나락으로 내몰고 있는지 너무도 명쾌하게 평가하고 있다. 이 저술은 어느덧 황폐해지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가치의 세계로 향하는 우리들과 우리사회에 대한 진지하고 사려 깊은 조언으로서 저술자의 땅을 치는 진정을 볼 수 있다. 가치가 전도(顚倒)된 이 기막힌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에 대한 최고의 진단서이다. |
|
2+2=5일까? 2+2=4일까? 조지 오웰의『1984』에 나오는 윈스턴 스미스가 고민하는 문제이다. 그의 나이가 39세라고 한다면 초등수학을 걱정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 이 소설에서 이상한 일의 정체는 빅 브라더에 있다. 그가 감시와 통제하는 전체주의에서 2+2=5는 현재이며 2+2=4는 과거이다. 역설적으로 과거는 진리이면 현재는 만들어진 진리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를 기억하고자 일기를 쓰면서 정치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이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냉전 시대의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싸움이 베를린 장벽과 함께 무너졌다. 그리고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자유주의가 넘쳐났다. 그중에서도 시장(市場)이 빠르게 변화했다. 가령, 전 세계인들이 맥도날드 햄버거를 같은 시각에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빠르게 먹는다는 것(패스트푸드)이다. 이른바 시장이 템포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문명화된 사회가 곳곳에 위협받고 있다. 광우병, 정크 푸드, 문명의 야만 등 우리의 생명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의 장밋빛이 무서울 정도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장밋빛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것이다. 혹은 ‘아Q주의’의 오류이다. 루쉰의『아Q정전』에서 나온 이 용어는 밖에서 실컷 얻어맞고 패했으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나는 패하지 않았다. 나는 정신적으로 승리했다.”라고 믿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도정일의『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을 읽었다. 생각의 나무에서 ‘답이 아닌 질문의 절실함을 위하여’라는 ‘問라이브러리’ 시리즈는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해당 사안에 대하여 말 그대로 절실하게 사회와 문화를 비평하고 있다. 도정일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시장전체주의가 어떻게 야만을 야기하는지 문제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동시에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그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혹은 문학이 '현재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낙원(paradise) 혹은 유토피아(utopia)를 그려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듣기 좋고 말하기 쉽다고 해서 은근슬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경계해야 한다. 낙원이 과거지향이라면 유토피아는 미래지향이다. 결국 상상력이 상호 배타적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통합적 상상력은 과거가 미래에, 미래가 과거에 상호 침투하고 작용하게 한다. 이것이 과거-미래의 동시화이다.
그는 세계화에 따른 단일세계의 현재적인 문제점을 자본-기술이 지배하는 비합리성을 사려깊게 들려주고 있다. 즉 고도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무한파괴가 불가피하고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환경의 무한오염이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고도 생산성과 효율성은 생산의 사회적, 인간적 효용의 증대와는 반드시 일치하고 오히려 그 효용성을 감소시킨다. 이것이 곧 효율과 효용 사이의 모순이다. 자연과 인간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 효용의 감소이고 이 감소 위에서만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야만성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그는 아직 답하지 못한 야만성에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풀어 놓는다. 우리는 질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문명의 전환해야 함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앞으로는 어떻게(how)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왜(why)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전자가 기술주의적 사고이며 도구 이성이라면 후자는 인문주의적 사고이며 비판적 이성이다. 오늘날 문사철(文史哲) 즉 인문학적 가치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되살아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