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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밤 무엇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몰라요. 생각을 하고 기억을 하셨나요?
아니, 그건 가능하면 안 하려고 해. 생각과 기억은 낮 동안에만 하기로 했지. 밤에는 주로 나 자신을 상대로 이야기를 들려줘. 밤에 잠이 안 올 때에는 그걸 해. 어둠 속에 누워 나 자신에게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거야. 이제 열두 편쯤 마련했어. - P227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 '브릴'과 23살 짜리 손녀 '카티아'의 대화를 통해 이 소설이 해피엔딩임을 알게 됐다. 3대에 걸쳐 상처받은 영혼들이 드디어 치유의 길에 접어들었음을, 적어도 행복 비슷한 걸 이제야 만끽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책 전반에 걸쳐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소소한 반전, 깊이 있는 영화 이야기 등을 깔아놓은 폴 오스터의 '어둠 속의 남자'.
'빵굽는 타자기' 이후 만나게 되는 폴 오스터의 첫 작품이다. 폴 오스터는 어느날 문득 날 찾은 작가다. 어떤 계기도 없이 무턱대고 전작 읽기에 도전 중이다. 물론 수많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그의 이름을, 블로거들의 숱한 추천을 은연 중에 마음에 담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왜 난 폴 오스터를 선택했던가?
주인공 브릴은 일흔을 넘긴 작가(평론가)다. 몇 해 전 아내와 사별하고,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마흔 일곱 먹은 딸 미리엄은 이혼한 후 5년째 독수공방으로 살고 있고, 스물세 살의 손녀 카티아는 친구(애인 비슷한)인 타이터스의 죽음 후 상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런 3대가 '황무지 속에서 하얀 밤'을 새며, 아픔을 삭이며 살고 있다. 참 기구한 운명이다.
서두에 밝혔듯, 피폐한 브릴은 어둠 속에 누워 자신에게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어둠이 물러가길 기다린다. 그 중 '브릭'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이 책의 1/2 가량을 차지한다. 현실과 비현실, 가공과 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점점 긴장감을 더해가던 찰나 브릴은 자신이 창조한 '브릭'을 죽임으로써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 '이야기'는 브릴의 추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의 내전 상황을 그리고 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비롯한 테러행위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한 듯하다.(손녀인 카티아의 애인 타이터스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되어 참혹하게 죽어가는 장면이 인터넷에 동영상으로 떠돌았고, 브릴, 미리엄, 카티아는 그것을 지켜봤다. 예전 우리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남겼던 古 김선일 씨가 생각났다. 가족의 심정이라면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것이다.) 미국의 각 주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심한 내전을 겪게 되는 상황을 그린 이야기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싱겁게 마무리되며(부시 정부를 강하게 비난하는 폴 오스터 개인의 메시지가 더 강렬한 것 같다) 큰 울림은 전해주지 못한다. 다만 왜 브릴이 그러한 이야기를 창조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뒷부분 손녀 카티아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삶의 끝자락에서 체념한 듯 살아가는 할아버지 '브릴'과 애인의 처참한 죽음을 자신 탓으로 돌리며 무너져내린 '카티아'의 일상이다. 휴학 중인 카티아는 브릴과 함께 매일 3~4편의 영화를 본다. '내겐 이미지가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카티아. 누가 경험할 수 있겠는가? 애인이 그렇게 살해당하는 것을. 할아버지와 손녀는 각자의 고통을 잊기 위해 영화에 탐닉한다.
로즈 호손의 시에 등장하는, 브릴이 특히 좋아하는 '이 괴상한 세상이 계속 굴러가는 동안'이란 시행에 3대의 아픔이 오롯이 담겨 있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브릴과 카티아의 오랜 대화에서 '괴상한 세상'이 그들 가족에게 던진 상처투성이 인생이 드러난다. 사실 카티아가 새벽녘에 할아버지 브릴의 방으로 찾아간 이유는, 할머니 '소니아'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릴은 왜 할머니와 헤어졌으며 재결합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마흔 살의 남자를 조심하라'고 했던가. 우연히도 브릴은 가수였던 소니아와 마흔에 이혼을 했고, 이후 딸 미리엄의 결혼식 때 재결합했다. 미리엄 또한 마흔 살의 남편과 이혼을 했다. 대를 건너 '도망가는 남자'들에 의해 아픔을 겪은 미리엄, 카티아 또한 애인의 죽음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으니... 영혼들의 아픔은 '괴상한 세상'이 운명처럼 '계속' 저주를 내린 듯했다. 하지만 너무나 드라마틱했던 브릴의 기억과 추억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묘한 힘으로 작용했다.(아내인 소니아와의 지난 추억이 잔잔하게 묘사된다.) 그것도 카티아란 더 심하게 아픈 영혼과의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아픈 영혼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내면으로 침잠할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지기 마련이다. 당장 치유가 힘들다 하더라도 누군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것이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일지라도... 그런 점에서 브릴과 카티아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던 셈이다.
이제 가족들은 희망을 꿈꾼다. 짧은 하룻밤 사이에 '어둠 속의 사내'가 카티아와의 대화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냈고, '내 방 안의 세상은 이제 회색이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며 새로운 빛을 향하고 있다. 잔뜩 숨 죽이고 있다가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희망'이란 옷을 제대로 입고 있는 중이다. 그 모양이 아직은 괴상할 지라도 말이다.
이미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을 구입해 놓았다. '무턱대고 전작 읽기 도전'이라 말했지만, 번역된 그의 작품 수가 만만치 않기에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성석제나 박민규를 보듯 이야기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폴 오스터이기에, 2011년도까지 꾸준히 그의 작품 궤적을 따라갈까 한다. 그 길을 이젠 잿빛 바바리 정도를 걸친 '어둠 속의 남자'와 함께 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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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상심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정말로 심장이 깨져서 죽는 것이다. 이런 일은 매일 벌어지고 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72세의 은퇴한 도서 비평가 오거스트 브릴은 47세 된 딸과 23세 된 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 그의 아내 소니아는 지난해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사위는 5년 전에 딸을 버리고 떠났고, 손녀의 남자 친구도 이라크에서 죽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딸 미리엄은 강의와 로즈 호손의 전기를 집필하는 일에 빠져 있고, 영화를 공부하고 있던 손녀 카티아는 헤어진 남자친구가 이라크에서 끔찍하게 살해되는 장면을 본 후 그 충격으로 학교도 휴학하고 집에서 영화감상에만 몰두하고 있고, 브릴은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소니아와의 기억 속으로 생각이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집필, 영화감상, 이야기 만들기...세 명 모두 각자의 고통을 잊게 해줄 마취제 혹은 자가 치료의 방법들을 하나씩 마련한 셈이다. 브릭은 브릴의 불면의 밤에 만들어낸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오언 브릭은 아내 플로라 곁에서 잠이 들었지만 엉뚱한 장소에서 눈을 뜬다. 9.11 테러도 이라크전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연방파와 반대파 사이의 내전에 휩싸인 또 다른 미국이다. 믿기 힘든 상황에서 이 내전을 끝낼 수 있는 중요한 임무가 브릭에게 주어진다. 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오거스트 브릴을 암살하라는 지령이다. 이 자가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서 오언 브릭과 이 전쟁을 만들어 냈다는 설명이다. 황당한 상황에서 군인도 아닌 직업 마술사인 자신에게 이런 황당한 임무가 내려졌지만 브릭은 살인을 할 생각도 없고 단지 이 상황에서 벗어나 아내 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명령에 따르겠다는 약속을 하고 한 달의 기한을 얻어 다시 아내가 있는 또 하나의 미국으로 돌아온 브릭은 이 사실을 아내에게 털어놓지만 아내는 이 상황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웹사이트에서 암살지령과 일치하는 오거스트 브릴이라는 실존인물을 확인까지 한 상태지만 실행에 옮길 생각이 없었던 브릭 앞에 다시 다른 세상의 존재들이 나타나 총구를 들이댄다. 낯선 사람을 죽일 수 없었던 브릭은 아내를 처가에 보내고 결국 자살을 준비하고 있는데 내전중인 다른 세상인 미국에서 온 첫사랑 버지니아는 브릴을 찾아가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얘기를 하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하지만 브릴과의 약속이 잡혀있는 전날 밤, 쾅!! 연방파의 폭격으로 버지니아와 오언 브릭은 죽고 만다.
<어둠 속의 남자> 이야기 구조의 기초는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의 사상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어쩌면 폴 오스터의 전 작품들이 이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현실이라는 것은 단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야. 많은 현실이 있는 거야. 단 하나의 세상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세상이 있는데 그것들이 서로 평행하게 달리고 있어. 세상과 반(反)세상, 세상과 그림자 세상. 각 세상은 다른 나라에 가 있는 누군가가 꿈꾸고 상상하고 저술하는 바 그대로의 세상이라고. 각각의 세상은 마음의 창조물이라, 이 말씀이야. (96쪽) 희망이 있는 방향과 희망이 없는 방향을 놓고 이야기의 결말을 고심하던 브릴은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브릭을 죽이면서 자신의 인생은 캄캄한 어둠을 벗어나 회색빛 희미한 희망을 찾으려 했는지 모르겠다. 죽을 것이냐 이 괴상한 세상과 함께 굴러갈 것이냐를 고민하다 비록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이 괴상한 세상이 굴러가는 동안 살아보기로 결정한 것이 아닐까. 고통스런 기억과 슬픔과 자기 비난의 상처만 가득한 이 집의 불면의 밤은 이제 서서히 치유되어 가고 있다. 키티아는 할아버지 곁에서 몇 시간째 귀한 잠을 자고 있고,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는 남편이 내뱉은 ‘끔찍한 사람’이란 말을 자신에게 내려진 최종 선고인 것 마냥 상처로 끌어안고 살고 있는 미리엄은 로즈 호손의 전기를 끝냈다. 브릴은 오늘만은 함께 외출해서 거한 아침식사를 하자고 제안한다. 이 괴상한 세상은 계속 굴러가고 있다고 되뇌어 본다. 폴 오스터라는 이름에 거는 기대치는 항상 높다. 상대적 비교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고 오직 자신의 전작들이 비교 대상이 될 뿐인 그런 작가다. <달의 궁전>으로 그와의 첫 만남 이후로 벌써 10년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래, 10년이면 미운 정 고운 정이 얽혀서 어물쩍 넘어가는, 새삼스런 평가도 쑥스러울 정도로 스타일에 젖어 있다고 할 수 있는 작가와 독자 사이가 되겠다. 그런데 폴 오스터가 변.했.다. 그 조짐은 <브루클린 풍자극>에서부터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껏 발표했던 작품들 속의 등장인물들을 총출동시켜서 단순히 팬서비스 차원의 fan book이라고 생각했던 <기록실로의 여행>은 한 시대를 총정리하고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전환점을 삼으려는 계획된 의도였을까? 천권이 넘는 책을 쌓아두고 한권씩 읽어나가며 다 읽은 책을 헌책방에 팔아서 연명해나가다 결국 아파트도 잃고 자발적으로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가는 <달의 궁전>의 포그, 유산으로 상속받은 거금으로 자동차를 구입해서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니다 남아있던 전 재산을 도박으로 잃고 도박 빚을 갚기 위해 하루 종일 거대한 벽 쌓기 노동에 시달려야했던 <우연의 음악>의 짐 나쉬, 중력에 반하는 공중부양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고문에 가까운 훈련을 견뎌야했던 <공중 곡예사>의 원더보이 월트. 하지만 <어둠 속의 남자>의 독특한 인물 브릭을 너무 쉽게 놓아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끈질기게 쫓아가 끝장을 봐야 하는 묘사와 서사의 치밀함은 환상과 실제의 혼동을 가져온다.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가 폴 오스터를 통하면 왠지 일어날 법하고 그럴듯하기까지 한 이야기가 된다는 게 이야기꾼 폴 오스터의 힘이다. <브루클린 풍자극>의 인간미 넘치고 따스한 이야기에 이은 <어둠 속의 남자>의 치유와 희망... 인간적이고 따스한 방향으로의 전환이 폴 오스터 특유의 치열한 글쓰기에 살짝 김빠진 느낌도 든다. 난 반댈세~를 외치고 싶지만 난 아직도 폴 오스터의 소설에 배가 고프다. 다음 작품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지금 나는 지난여름에 출간된 폴 오스터의 신간 한글번역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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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당연한 선택. 솔직히 이쯤되면 내용은 둘째치고 오래간만의 그의 신작이라 집어든 분도 많이 않을까 싶다. 서점에서 이 책을 보았을때 제목은 둘째치고 발행사인 열린책들의 로고와 딱 봐도 폴 오스터의 책이겠거니 라고 생각이 드는 이 양장의 디자인을 보고 바로 구매했다.
주인공을 통해 현재의 미국을 직접적으로(또는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이 책은 달의 궁전이라던가 뉴욕 3부작 같은 작품을 기다렸던 독자들에겐 솔직히 많이 아쉬움이 남을지도 모르겠으나 위에서 말했던 나 같은 폴 오스터 애독자에겐 그런건 둘째 문제.
내용은 평이하고, 예전만큼 심오하더거나 마음에 와닫진 않는게 사실이다. 기존의 폴 오스터의 작품들을 많이 번역하셨던 황보석님에 비해 이번 역자님이 조금 생경스러운 느낌도 있다.(아무래도 기존의 역자에 익숙해서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 없을 정도는 아니고 나름 만족하면서 봤다.
어쨋든 오래간만의 신간. 많은 이들에게 기쁨이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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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남자]는 이야기의 치유적 효과를 극도로 부각시키고, 이야기가 창조하는 환상적 세계의 현실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환상의 책]의 자매편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 주축은 주인공 브릴의 이야기와 브릴이 만들어낸 가공인물 오언 브릭의 이야기가 창조하는 '이중현실'이다. 이런 이중현실외에도 좀더 색다른 세 권의 '환상의 책'이 등장한다. 바로 아버지 브릴의 책, 딸 미리엄의 책, 그리고 손녀 카티아의 영화가 그것이다.
브릴 가족의 구성원과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72세의 브릴은 47세 무남독녀 미리엄과 23살의 손녀딸 카티아와 함께 살고 있다. 기구하게도 브릴 가족은 모두 커다란 상실과 아픔을 겪었다. 브릴은 재작년에 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냈고, 작년에는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었다. 미리암은 교사이자 전기작가인데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손녀 카티아는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가 세상을 떠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저런 아픔을 견디기 위해 나름만의 방편을 찾는데 이들이 찾은 것이 바로 이야기다. 브릴 가족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상실감과 아픔을 치유하려고 노력한다. 세 사람 모두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직업과 배경의 소유자들이다. 브릴은 은퇴한 서평가로 자기 가문의 역사를 책으로 쓰려고 하고, 미리엄은 [주홍글씨]의 저자 너대니얼 호손의 막내딸 로즈 호손의 평전을 집필하고 있다. 그리고 카티아는 영화편집자가 꿈인 영화학도다. 브릴과 카티아는 함께 영화를 보면서 아픔을 치유해 나간다. 한마디로 한 집안에 작가 두 명과 영화편집자 한 명이 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자서전과 평전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블릭은 불면증을 버티기 위해 1977년 6월 12일 출생의 오언 브릭을 창조해낸다. 브릭은 한마디로 블릭의 또다른 화신이다. 그는 플로라라는 아르헨티나 여인을 아내로 두고 있고, 플로라는 임신중이다. 브릭은 '위대한 자벨로'라는 예명을 가진 직업마술사다. 브릭은 어느날 깨어보니 자신이 매우 낯선 환경에 처해있음을 깨닫게 된다. 낯선 환경이란 미국이 제2의 내전을 겪고 있는 상황으로 한창 독립을 선포한 주들과 미연방군간의 전쟁이 한창인 상황이다. 또한 브릭은 더이상 직업마술사가 아니라 하사 계급의 군인으로 이 내전을 끝장낼 암살자로 설정되어 있다. 놀랍게도 브릭이 암살해야 할 대상은 바로 블릭이다. 이런 시나리오는 블릭이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증후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꿈결처럼 낯선 웰링턴에서 브릭은 소대장 서지 토박, 몰리 월드, 듀크 로트슈타인, 프리스크와 같은 생면부지의 인물들과 만난다. 아는 인물이라고는 브릭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만인의 우상이었던 버지니아 블레인이다. 프리스크와 로트슈타인은 만약 브릭이 일주일내에 블릭을 제거하지 않으면 브릭과 플로라를 제거할 거라고 협박한다. 그런데 브릭은 연방군들의 총격에 죽고 만다. 블릭이 죽인 것이다. 기뻐해야 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블릭이 생의 의지를 완전히 회복했다는 증거이니깐.
이제 미리엄의 로즈 호손 평전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1851년 생인 로즈 호손은 시와 단편소설을 출판한 적이 있는 작가였지만 중년 이전에는 슬프고 고통받고 실패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45세 이후에는 수녀가 되고 수녀원 '불치암 구제의 종들'을 설립하여 암환자들을 돌보고 존엄사 권리를 옹호하는 등 보람 찬 생을 보냈다. 미리엄이 어머니를 암으로 잃었다는 점에서 암환자를 돌본 로즈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해가 되고, 지금의 미리엄처럼 로즈도 인생 전반부는 힘들고 괴로웠다는 점에서 자기위안이 되는 그런 롤모델이 아니었나 싶다. 브릴은 미리엄의 책에 대해 한마디 한다. "문제의 핵심을 잘 짚은 것 같아. 더 이상의 의심이나 회의가 없어. 넌 멋지게 해냈어." 브릴은 전문 서평가다. 책에 대해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저자가 좀더 풀어서 로즈 호손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어도 좋았을 법한데 너무 짧고 빠른 템포로 마무리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으로 손녀 카티아의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카티아는 헤어진 남자친구 타이터스의 비참한 죽음을 인터넷 동영상으로 목격한다. 이라크 파병에 지원한 타이터스가 이라크 테러분자들에게 인질로 잡혀 잔인하게 도끼로 살해당하는데 그 끔찍한 장면이 비디오에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죄책감에 시달린 카티아는 영화를 통해 나름의 탈출구를 찾는다. 브릴과 카티아는 르누아르의 <위대한 환상>,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 레이의 <아푸의 세계> 그리고 <도쿄 이야기> 같은 영화들을 섭렵하며 서로 논평도 해가며 지낸다. 그리고 때때로 화제는 외할머니 소니아의 이야기로 넘어가기도 한다.
이 괴상한 세상이 계속 굴러가는 이유는 결국 '이야기' 때문이다. 브릴 가족은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 나갔고 이야기의 힘을 극명하게 보여준 모델이 된다. 그리고 폴 오스터는 다중현실의 경계와 중첩을 꿈과 같은 몽경과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다중현실에 대한 견해를 중심으로 다중현실자와 단일현실자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프리스크는 대표적인 다중현실자이다. 루 프리스크는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를 인용하며 '다중현실론'을 정당화한다.
"하사, 현실이라는 것은 단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야. 많은 현실이 있는 거야. 단 하나의 세상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세상이 있는데 그것들이 서로 평행하게 달리고 있어. 세상과 반세상, 세상과 그림자 세상. 각 세상은 다른 나라에 가 있는 누군가가 꿈꾸고 상상하고 저술하는 바 그대로의 세상이라고. 각각의 세상은 마음의 창조물이라, 이 말씀이야."
반면에 브릭의 아내 플로라는 '지금여기'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단일현실자로 등장한다.
"그녀는 여성 특유의 감각을 발휘하여 남편을 그 사소한 생활로 이끌어 들었다. 그녀는 다른 세상을 믿지 않고 오로지 이 세상만 있다고 생각했고, 반복되는 일상과 작은 언쟁과 금전적 걱정이 이 세상의 필수적인 부분이며, 온갖 고통과 권태와 실망에도 불국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가장 천국에 가까운 상태라고 믿었다."
당신은 다중현실자인가 아니면 단일현실자인가? 답이 어느 쪽이건 이야기의 세계에 푹 빠진 당신은 나름의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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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기에 그런 소설이 있다. '공원으로의 산책'. 한 사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그 내용인즉 바람이 난 아내가 정부에게 남편을 죽이게 한다는 것. 그런데 마침 문이 열리고 그 남자에 의해 살해되는 사람은 책을 읽던 남자다.
그런 영화도 있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 한 인물이 자신이 어떤 실제하는 소설가의 소설 내용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작가가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어가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자는 우여곡절 끝에 작가에게 접근해서 소설의 내용을 바꾸어줄 것을 요구하지만, 마침내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그 내용에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기꺼이 죽음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인상깊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그는 원고를 읽는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어느 낯선 거리 위에서 그는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자신이 한껏 고양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독서가 오늘날에도 가능할까?
폴 오스터의 신작 '어둠 속의 남자'는 장르로 보자면 모호한 감이 없지 않다. 소설의 앞부분은 거의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잘 짜여진 환상소설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허구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엮어서 흥미로운 상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이 전쟁터로 변해 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고 보니 그게 한 외로운 노인네의 상상 때문이란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그 노인네-작가를 죽여야 한다. 영화 '터미네이터'가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현재를 싸움터로 삼는 것이라면, 이 소설에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뒤섞여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어느 순간에 다소 허망한 방식으로 상상 속에서 자신을 처치하기 위해 다가오던 환상을 파괴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물론 작가는 언제든지 그럴 수 있다. 다만 왜 그랬는가를 납득시키는 일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자 남는 것은 어둠 속에 누워 가라앉아가는 세계에 대한 음울한 몽상과 희망을 거듭하는 한 늙은 작가의 내면일 뿐이다. 솔직히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마지막까지 그래도 환상이 현실에 관여하는 순간을 기대했지만 -문이 열리고 상처투성이의 환상이 작가를 덮친다. 저 "어셔가의 몰락"에서처럼.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어둠 속에 작가는 손녀딸을 들어오게 하고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녀의 옛친구가 이라크에서 인질로 잡혀 끔찍하게 처형되었던 것,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그가 살해되는 그 장면을 보았던 것, 그들에게는 그 끔찍한 이미지를 이겨내기 위해 다른 이미지들이 필요했던 것. 실은 우리들 모두가 그러하지 않을까?
조금 싱겁다는 느낌이 드는 어느 순간에 나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 작가는 한낱 소설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 상상에 의지해서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그런 의미에서 나는 폴오스터의 결정에 마음 깊이 공감했다. 여러분도 그러할지.
이 작가는 우리들이 속한 이 세계가 왜 이렇게 끔찍한 전쟁을 거듭하고 있는지, 우리들의 평화는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모색이 소설을 만들어낸다. '어둠 속의 남자'는 그러므로 '꿈을 꾸는 남자'이며 인류의 절망을 끌어안는 자다. 다만 여전히 이 작가가 미국적인 지평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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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을 읽으며 폴 오스터란 작가는 독특한 방식으로 소설을 풀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기 다른 단편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그걸 이해하는 것도 꽤 재밌는 읽기였다. 그런데 이번 책인 어둠속의 남자는 또다른 공간을 창조해냈다.
다른 두 소설이 하나의 소설속에 액자식처럼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소설속의 소설이 아니라 동일한 선상에서 존재하는 두 소설이 마치 액자소설처럼 그려져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나이든 작가이다. 세상살의 고통이 누가 없겠냐마는 그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고통스러운 적이 몇 번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부인이 죽고난다음부터 더 심해졌다. 그의 가족은 이혼한 딸, 그리고 남자친구가 살해당한 손녀 이렇게 셋이다.
요즘 이혼이란 너무도 흔한 말같이 들리지만 당사자에게 그 고통이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주인공 역시 바람, 이혼, 그리고 재결합한 케이스다.
여기까지 보면 몇가지 단어로 소설의 내용을 압축해볼 수 있다. 불륜, 이혼, 전쟁. 아마 이 세가지는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일 수 있다. 모든 드라마에 불륜과 이혼은 세트처럼 따라온다. 지금 우리나라의 드라마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리고 전쟁, 미국이란 나라의 존속을 위해 끊임없이 일으키는 전쟁, 그 전쟁의 피해자이자 대변인으로 손녀 카티아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남자친구의 죽음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얘기다. 그래서 그 충격과 기억이 가슴아프게 각인된다.
이런 괴로움을 잊기 위해 가족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다시 뭉쳤다.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겠지만 각기 저마다 고통을 이겨나가는 방식이 다르다. 주인공 브릴은 고통을 잊기 위해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또다른 전쟁이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또다른 전쟁, 아직도 그의 혼란이 잠잠해지지 않고 있단 얘기다. 그 전쟁속에서는 그를 죽이기 위해 또다른 주인공이 등장한다. 결국 살해당하지만 전쟁이 끝난게 아니라 그냥 생각속에서 극복하려는 의지를 포기한 것 같다.
삶은 누구나 다 힘들다. 이런 저런 이유로 모두 삶의 어둠을 힘겹게 지고 살아간다. 부유하건 가난하건 저마다 마찬가지다. 마지막 문구인 괴상한 세상이 계속 굴러간다는 말에 동의한다. 나 역시 지금 너무도 힘들고 이 모든 것을 당장 포기하고 싶지만 그래도 세상은 굴러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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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이야기꾼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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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준히 읽어오고 있는 폴 오스터의 새 작품... 중간 중간 실망스러운 작품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 포기할 단계는 아니기에 이번 책 역시 빼어 놓을 수 없었다... 현실의 이야기와 작가의 상상 속 이야기라는 두 가지 스토리 라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결국 가족의 의미와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도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지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많은 굴곡없이 편안하고 완만하게 펼쳐지기에 아주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주 특별한 스토리는 아니었지만, 그런 편안함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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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신작.
작년에 빵굽는 타자기를 읽었더랬다. 그 책은 소설책은 아니었고, 그냥 자전적인 이야기 책이었다. 나름대로 재밌게 읽긴 했지만, 익히 들었던 명성에는 못미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내 기억속에 그가 잊혀질 때 즈음에 조제는 언제나 그 책을 읽었다에서 소개된 조인성, 신민아 주연의 영화 마들렌에 그가 등장했다. 영화에 배우로 등장한 것은 아니고, 그의 책 달의 궁전이 출연 했다. 조인성이 신민아에게 빌려준 책이다. 그리고 또 잊혀질 때즈음에, 신문에서 폴 오스터의 신작 어둠 속의 남자가 출간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재밌을 것 같아서, 바로 책을 샀다. 책을 산지는 한참 전인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리뷰에 줄거리를 쓰는 것은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살짝 줄거리를 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브릴은 불면증이 있다. 잠이 못드는 한 밤중 긴 고요한 적막 가운데에서 그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가 지어낸 인물은 마술사 브릭인데, 이야기 가운데 브릭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그 임무는 바로 브릭을 만들어낸 브릴을 죽이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 전쟁을 만들어낸, 수 많은 사람을 죽게만든 브릴을 말이다. 브릭은 이야기 가운데 첫 사랑을 만나는데, 이는 브릴의 첫사랑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야기 속에서 브릴을 죽이기 전에 브릭이 먼저 죽는다. 이야기는 약간 허무하게 끝났다.
신문 기사에서는 여기까지만 소개되었는데 소설은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브릭의 이야기가 끝나가는데, 아직 읽어야 할 분량이 많이 남은 것을 보고, 이거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쨌든 이야기가 허무하게 끝나고, 손녀와 밤새 이야기를 한다. 뭐 이런 저런 할 얘기가 많나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미국의 할아버지와 손녀는 거리낌 없이 친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인 브릴의 젊을적, 자신의 부인인 소니아와의 결혼, 그리고 외도 이런 이야기를 손녀에게 한다. 물론 손녀가 물어봐서이다. 그리고 손녀의 죽은 남자친구 이야기도 하고, 그리고 책 중간중간에 영화 이야기도 있다. 음. 영화 이야기에서 어떤 도구(사물)가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등장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특히 책에서 등장한 영화 도쿄 이야기는 읽고 싶어진 영화이다. 그리고 브릴의 정치관 - 즉 뭐 폴 오스터의 정치관이겠지 - 도 읽을 수 있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오랜만에 조금 특이하고, 뭔가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로서 내면을 치유하는 등장 인물들. 그리고 독특한 설정, 좋았다. 음. 그리고 폴 오스터 특유의 묘사, 가령 (23쪽) 텔레비전 화면 위에서 춤추는 이미지들의 끝없는 행진, (39쪽) 태양이 이른 아침의 안개를 태워 주었고, (82쪽) 고통이 홍수 난 것처럼 마술사의 온몸으로 넘쳐흘렀다. (101쪽) 망각의 검은 구멍으로 떨어지지. 죽음처럼 깊고 어두운 허무 (228쪽) 아마 4시가 넘었을 것이다. 어쩌면 5시 가까이 되었는지 모른다. 새벽이 오기까지 한 시간. 어둠은 옅어지고 창문 곁의 나무에 사는 때까치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울음을 울어대는 불가사의한 시간 이 그것이다. 작가 지망생은 아니지만, 뭔가 독특한 묘사를 하고픈, 글을 잘쓰고 싶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걸 쓰지, 하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었다.
107쪽 오로지 선량한 사람이 자신의 선량함을 의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쁜 자는 자신이 선량하다고 생각하지만, 선량한 자는 자신의 선량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남들을 용서하면서 삶을 살아 나가지만, 정작 자기 사진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 영화 도쿄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중
120쪽 사람들은 상심으로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정말로 심장이 깨져서 죽는 것이다. 이런 일은 매일 벌어지고 있다. 이 세상이 끝날 때 까지 계속될 것이다.
140쪽 나 자신을 그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이야기는 현실이 된다. 아니면 비현실, 즉 나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그림이 된다. 어느 쪽이든 그 효과는 만족스럽고 나의 분위기와 더 조화를 이룬다.
237쪽 그의 존재를 깊이 호흡하여 우리 내부에 그를 간직할 수 있도록. 그 외롭고 비참한 죽음을 우리 내부에, 그 마지막 순간에 그가 당했던 그 잔인함을 우리 내부에 간직함으로써 그를 휩싼 저 무자비한 어둠 속에 그를 혼자 내버려두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라크전에서 피랍되어 살해된 손녀 남자친구의 동영상을 보며
이 문장을 읽으며 어둠 속의 남자란 이 글의 주인공으로 불면증때문에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짓고 있는 브릴 뿐만 아니라 이라크에서 무자비하게 살해된 타이터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두를 얘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는 뭐 책 소개에도 없고, 그냥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딱! 든 생각이다.
아. 그리고 빵굽는 타자기에 나왔던 희곡이었던가. 뭐였나. 하여튼, 거기에 나온 주인공 중의 한명의 이름이 브릭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음. 그리고 그 것을 읽을 때, 웬지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음. 이 책에서도 그러한 비슷한 설정이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는 몰랐었다. 역자가 말하는데, 폴 오스터가 베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 때 내가받았던 느낌이 정당해졌다는 생각에 웬지 뿌듯한 느낌이다.
재밌다. 폴 오스터의 다른 책도 읽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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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책이라면 일단 습관처럼 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그런 작가는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신간을 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작가의 리스트는 수시로 업데이트 되지만, 폴 오스터는 몇 년째 나의 그 리스트의 TOP에 있는 작가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폴 오스터의 책 "어둠 속의 남자"는 약 250 페이지의 어른 남자 한뼘 보다는 좀 큰 크기의 책인데, 이 정도의 분량은 예비군 훈련을 갔을 때 건빵주머니에 넣어 놓고 간간히 읽어서 하루에 다 읽기에 적당한 분량과 크기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읽었으니까. 하지만 이 책을 예비군 훈련 자투리 시간에 모두 읽게 만든것은 단지 분량만이 아니다. 폴 오스터라는 이야기꾼의 능력에 책을 중간에 끊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구성 자체가 너무나 탁월하다. 상처입은 딸과 손녀와 함께 사는 브릴 이라는 사람의 시선으로 그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이야기를 액자구조를 통해서 보여주는 이 소설은 구성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브릴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브릭 오언은 그 이야기를 지어내는 브릴의 투영인 것 같다. 그리고 그 브릭 오언의 Mission이 브릴을 죽이는 것이라는 설정 자체도 너무나 극적이다. 사실 이 소설은 코엔 형제 같은 탁월한 '영화적 이야기 꾼'들이 영화로 만들어 낸다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만큼 책이 그 줄거리 속에 가지고 있는 스토리 라인 자체만으로도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해 내는 파워가 있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여친에게 입이 마르도록 이 책을 칭찬했다. 단지 구조와 스토리의 일부만을 말했을 뿐인데, 여친은 읽고 싶다면서 빌려달라고 했다. 아마도 그녀가 책을 끝까지 읽고 글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폴 오스터의 영화에 대한 통찰력이라든지, 마지막에 등장하는 슬픈 손녀딸의 사랑 극복 이야기 등을 직접 읽게 된다면 감동이 더 배가 되리라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