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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흐름에서 시간은 멋대로 역전되고, 회상과 비유가 난삽하게 연결되며, 모든 것이 화자의 의식 내에서 사실로 변조되어 있어, 그 진실을 알아차리기가 수월치 않다. 아니, 진실이란 없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수없이 다양한 장치와 기법을 통해 숨겨놓은 이야기들을 연결시키려면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무리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두 번 아니 세 번 읽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그래서 작가가 전달하려 애쓴 그 무엇들을 남김없이 밝혀내고 싶어진다. 화자(話者)인 나,‘베로니카’자신의 기억과 상상의 모호한 경계선을 위태롭게 거니는 이야기들은 그녀의 미분화된 자의식으로 더욱 긴장되게 한다. 바로 과거와 현실의 경계를 와해시켜 그녀의 의식의 흐름을 쫒아가야 하는 독자를 정말 수고스럽게 한다.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쥐어짜듯이 모아놓는 구성이기에 제목은 오히려 이 작품의 기법이기에 가깝다. 희미하고 비어있는 엄마, 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엄마, 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낳은 그 왕성한 번식활동, 그리곤 항상 신경증에 시달리고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지 못했던 엄마로 인식하는 베로니카에게서 우울한 증오를 목격하게 된다. 이 작품의 커다란 플롯은 베로니카보다 11개월 먼저 태어난 오빠‘리엄’의 죽음에 따른 나와 가족의 삶에 대한 기억이다. 그 기억은 리엄의 장례일로부터 5개월에 걸친 가족의 삶에 대한 자의식의 잔인할 정도의 해체이다. 번식과 신경증의 엄마를 위해 할머니 에이다의 집에 옮겨진 세 아이, 리엄, 베로니카, 키티, 그리곤 할머니 에이다의 처녀시절인 1925년, 호텔에서 마주하는 너전트와 에이다의 존재치 말아야 했을 만남의 암시, 그리고 두 딸 레베카, 에밀리의 엄마인 나, 베로니카의 구조는 나를, 나의 삶을 성찰하기위한 근간이 된다. 자식의 출산이‘번식’으로 표현되는 것은 사랑과 섹스의 개념적 분리와 그 의미를 극명하게 하기위한 수단이다. 또한, 할아버지 찰스와의 짧은 기억보다는‘에이다의 집’에 주인처럼 행세하던 너전트와 에이다와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그 끈질긴 욕망에 대한 탐색을, 그리고 영원히 씻지 못할 너전트의 추악한 모습에서 세상의 악을 발견한다. 이 주요한 이야기의 구조는 이렇듯‘욕망과 증오(desire and hatred)’에 대한 탐색이다. 이는 부커상 수상 직후,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엔라이트’의 작품 의도이기도 하다. 작품의 종교적 색채는 구교(카톨릭)이지만, 베로니카의 작품 초반의 선언처럼 종교를 던져버리며, 아버지의 신앙태도와 베로니카의 식탁에서의 에피소드에서처럼 그 믿음에 회의의 눈초리를 보낸다. 또한 위선적인 성직자로서의 오빠 어니스트를 통해서도 종교의 허울을 조롱하기도 한다. 이는 카톨릭이란 종교의 그늘아래서 반복되는 파렴치하고 무능한 자신들의 탐욕스런 행위와 교차되어 그들의 오래된 종교적 갈등(신교와 구교)에 대한 냉소적 회의와 어울려 묘한 정치적 여운을 던지기도 한다. 한편 베로니카의 섹스에 대한 의식은 혼선을 빚는다. 마이클과 섹스, 남편과의 섹스, 너전트와 에이다와의 섹스, 에이다와 찰스의 섹스, 아버지와 엄마의 섹스, 이들의 섹스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은 그냥 섹스에 불과한 것이다.”처럼 그저 욕망으로만 해석된다. 이러한 의식이 시종되지만, “다시 남편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省略”에서와 같이 “前略~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자기위안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작품이 이렇듯 절대적 이념을 거부하고, 어린시절 에이다의 집에서 벌어진 리엄의 성적학대에 대한 잔상을 시발로 한 자의식적 서술, 그리고 불쑥 “나는 독자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 생략”는 식의 메타픽션식 의식흐름은‘진실을 찾으려 했던’독자들에게 다시금 책장을 거스르게 만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안성맞춤의 뛰어난 소설이 될듯하다. 읽을수록 진한 맛이 우러나는, 세월이 흘러도 풍화되지 않을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화려한 수사와 극명하고 다양한 주제를 모두 토해 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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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상처의 기억은 가족에 있고, 또한 가장 애뜻한 기억도 가족에 있다.
가장 돌아가고 싶은 추억도 가족안에 있다. 그것이 바로 가족이다.
그리고 캐더링은 그러한 이중적인 (도망가고 싶은 동시에, 이상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가족의 상을 잘 표현했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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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랜드 뿐 아닌 한국의 정서와도 비슷한 헤거티 가족의 이야기 이다. 헤거티 가족 중 베로니카의 오빠 리엄이 자살을 베로니카가 어머니에서 전하러 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책의 초반 내용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베로니카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며 할머니 에이다의 연애까지 현재와 과거 그리고 베로니카가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않은 상상의 세계를 넘나 들어 책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 시공간을 초월한다. 할머니의 잘못 된 선택으로 리엄이 죽었다고 생각 하고 어머니의 많은 출산으로 리엄이 부모의 곁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의 원인을 제공 했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성장하면서 제 갈길에 선 형제 자매를 보면서 행복하고 따뜻한 가족에 대한 추억이 아닌 매우 우울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떻게 가족이 이토록 단절 될 수 있는가를 느끼도록 내용이 전개되는 리엄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추억들을 밟고있다. 내용과 생각들이 매우 정치 하며 세밀한 관찰과 비유 은유로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평범한 그냥 그런 소설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작가의 화려한 문장과 세밀 한 묘사로 그냥 그런 소설이 아닌 대담하고 매혹적인 작품이 된 것 같다. 이 소설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유대감의 중요성에 대한 역설적 묘사가 아닌가 싶다.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 삶 속에서 가족의 중요성과 따뜻함이 아니었나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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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친숙치 않은 나라 또는 문화가 작품의 배경이어서인가?? 끝끝내 저공비행만 하다가 내려와 버린 듯한 느낌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수작이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작품의 1/3쯤 읽었을때, 반쯤을 읽었을때, 지금까지의 화자의 나레이션은 이제 곧 다가올 이륙을 위한 독백이라고 생각했는데, 끝끝내 그 이륙(?)은 없었다.
일곱번의 유산과 12명의 자녀를 둔 부모, 이젠 성장하여 제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형제들과 아홉살적 성추행의 상처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자살한 오빠... 그리고 작품에서 계속 등장하는 외할머니 에이다와 오빠를 성추행한 할머니의 연인(사실은 그 관계도 모호하다) 램 너전트라는 남성...
작품의 구도는 사실상 매우 흥미롭다. 그 많은 형제자매와 어머니, 그리고 대를 거슬러 올라가 이젠 존재하지 않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애증까지. 그리고 아픈 역사를 가진 아일랜드라는 나라의 문화적 배경. 이러한 구도를 가지고 작가가 더 많은 무언가를 이야기 해 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마 내 기대가 너무 컸거나, 기대의 방향이 틀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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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더링”을 읽으면서, 맨부커상 수상작에 대한 신뢰는 더욱 단단해져 가는 느낌이다. 처음 부커상 수상작을 만난 계기는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물론, 아무래도 수상작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면, 알게 모르게 더 기대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한권의 책을 통해 노벨 문학상을 제외한 다른 해외문학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후에서 관련 책들을 읽게 되었으며, 얼마 전에 읽었던 ‘암스테르담’과 이번에 읽은 ‘개더링’을 통해서 다음 해의 수상작이 더욱 기다려지게 되었다. 솔직히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맨부커상 수상작의 느낌은 고전 문학의 완성된 아름다움과는 다른 조금은 색다르고 다양한 시각에서 그리고 완성을 향한 과정 중에서의 백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신선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며, 약간의 아쉬움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느낌이 드는 책들인 듯 하다. “개더링” 한번을 읽고 모두 이해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책이 난해하다는 뜻이 아니라, 담고 있는 감성들이 너무 다채로워서 한번의 즐거움으로는 모두 즐기기에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우선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특별한 사건의 전개가 (물론,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인 리엄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극적인 느낌은 없다.) 없음에도 첫 페이지를 시작으로 책에 빠져들게 만든다. 베로니카의 생각들과 리엄의 죽음으로 인한 가족들 속의 이야기로 책은 구성되어 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은 다시 집이지만, 집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공간으로 모여들게 된다. 이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베로니카가 과거에 관한 상상들, 그리고 그녀가 진정으로 아꼈던 리엄의 죽음의 원인을 과거의 시간 속에서 찾으려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가족사가 여실히 들어난다. 때로는 전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짧은 표현을 통해서 그 모든 것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가가 표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머리 속에서 이해되고 생각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책속에서 나에게로 빨아들여지고 있는 느낌이다. 설명이나 이해는 요구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느끼고, 자연스럽게 모든 문장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솔직히 그리 아름다운 줄거리로 가득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표현하고 있는 방식들과 표현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때로는 발칙하다고 해야 할지 지나치게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상들과 생각들도 베로니카는 서슴없이 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문화적 차이로 인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문장에서 진지함이 느껴졌기 때문인지, 보통의 경우보다는 (물론, 살짝은 곤란하다는 느낌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한 불편함이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한번을 읽고, 그녀가 표현하고자 했던 모든 것들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정한 시간상의 흐름을 따르기 보다는, 시간을 오가는 베로니카의 이야기 속에서 약간의 혼란스러움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들과 약간의 혼란스러움까지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꽤 흐른 뒤에, 또 다시 “개더링”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때는 조금 더 인생을 알게 되었을 것이며, 더 많은 책들을 만나고, 수많은 길을 향한 여정과 그 시간 속에서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좀 더 성숙해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아마도. 따라서, 그때는 그녀의 말을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이 공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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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맨부커상 수상작. 이것 만으로도 벌써 기대치가 높아져 있는데, 게다가 아일랜드가 무대, 이건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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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단편소설집만 읽다보니 장편소설이 힘에 부쳤다. <밤은 부드러워> 같은 것은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사명감으로 겨우 다 읽어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책, 앤 엔라이트의 <개더링>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몰입해서 빨리 읽었다. 문장 뿐 아니라 문장 사이의 공백이나 호흡 그 어떤 것도 다 갖고 싶을 정도로.
서른아홉의 베로니카 헤가티는 열두남매 중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한살 위의 오빠 리엄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다. 리엄이 왜 자살했는가,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한 베로니카는 30여년 전 외할머니 에이다의 집에서 리엄에게 일어났던, 자신이 목격했던 그 일을 생각해내고 분노한다. 10대 소녀였던 외할머니 에이다와 그 너전트의 만남부터 리엄의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베로니카는 여러 시간과 공간을 탐색한다. 베로니카는 끊임없이 상상하고 분노한다. 외할아버지인 찰리와 만나기 직전 너전트는 에이다를 보고 사랑에 빠졌을 것이고 에이다가 찰리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여 세 아이를 낳는 와중에도 너전트는 여전히 에이다를 사랑하며 맴돌았을 것이라고. 램 너전트는 찰리가 날려버린 집을 되사서 그녀의 집주인이 되었지만 그녀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듦에도 그녀를 소유하지 못했기에, 그 보답받지 못한 마음 때문에 그녀의 어린 손자에게까지 눈독들였음이 분명하다고. 베로니카는 분노한다. 램 너전트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를 자신 곁에 내버려 둔 자신의 외할머니와 아홉살 난 소년이었던 오빠 리엄에게 추악한 짓을 저질러버린 램 너전트를. 그리고 30여년전에 이미 가족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리엄을 눈치채지 못했던 11명에 이르는 형제자매와 부모에게도. 그리고 오빠의 장례식 전날에 섹스를 요구하는 남편과 그에 응해버린 자신과 자신이 낳아버린 딸들에게까지 그녀는 분노한다. 리엄이 베로니카를 비롯한 자신의 가족에게 멀어졌듯이 리엄의 죽음으로 베로니카는 점점 세상으로부터도 부모와 형제와 남편과 자식들은 물론, 자신에게마저 멀어지고 무너져내린다.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점점 바스라져 사라지고 있음이 분명한 진실과 이성과 분명 존재했을 감정과 가족 사이의 유대와 믿음, 뭐 그런 것들이. 결국 한 영혼의 구원에는 그 어떤 티끌 만한 영향도 줄 수 없었던 것들이. 진실이 무엇인지 거짓이 무엇인지 그 경계가 몹시 모호한 이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균열과 붕괴와 그리고 소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 어떤 것도 그 과정을 거쳐 사라져버린 리엄을 구하지는 못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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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매혹적인 소설 한 편을 읽었다. 아픈 가족사를 바탕으로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섬세한 필체가 잘 어우러진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 때 외설도 예술일 수 있는가, 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성적 묘사는 충분히 예술적이라 평가할 수 있을만 하다.
이 소설의 생소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가족의 이야기와 다름 아니다. 부모님들의 성적 관계, 양육 태만의 문제, 형제들간의 단절된 관계,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가 모두 경험할 법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독특한 소재를 바탕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공감을 획득한다.
너무나 다행인 것은 이 소설을 통해 가족관계의 단절과 상처를 주로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베로니카는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서 가족의 사랑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가족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때론 부담으로, 때론 상처로, 때론 형식적인 관계로, 때론 필요에 의한 무언의 계약관계로, 때론 떨쳐버리고 싶은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개인의 자유와 가족의 공동체적 삶에서 우리는 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가족을 선택하는 것이 옳음을 알고 있다. 불완전하지만 가족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성숙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감각적인 문체와 섬세한 여성적 필체에 매료되기도 하다가 너무 성적인 묘사가 많아 민망하기도 하다가 사건있는 이야기가 없는 부분에선 지루하기도 하다가 작가의 상상으로 얼룩진 확실치 못한 이야기를 만나면 허무해 하기도 하다가 바쁘고 치열한 생활 속에 소설이나 읽고 있는 내 모습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다가 소설처럼 허무한 내 삶을 생각하며 허망한 생각해 잠기기도 하면서, 긴 시간에 걸쳐 어렵게 한 편의 소설을 읽어 내었다.
이 소설을 읽어내기까지 약간의 참을성이 필요했으나 소설을 다 읽어내고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나의 느낌은 "대만족"이다.
이런 멋진 문체로 소설을 쓰고 이런 괜찮은 주제를 다루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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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더링을 읽었습니다. 몇 년전에 읽은 것은 분명하지만, 내 뇌속의 해마에서는 이 책의 줄거리가 모두 증발한것 역시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억을 채우고 싶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오빠 리암의 죽음을 계기로 주인공인 베로니카가 이런 저런 기억들을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죽음이 휘감고 있는 그녀의 분위기는 우울합니다. 마치 흐린날 해질녘의 겨울 바다에 혼자 앉아서 지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느낌입니다. ( 어찌보면 새해 정초부터 읽기로 고른 내용으로는 참으로 적절하지 못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꿈을 꾸는 동안 공간과 시간이 헝클어져서 있는 것처럼 느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결국 파편화된 기억과 욕망이 뒤죽박죽으로 조합된 것이 꿈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기억 또한 마찬가지여서, 과거를 떠올릴 때 그 기억은 하나의 흐름이라기 보다는 조각난 퍼즐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베로니카의 기억 역시 시간과 공간의 배열이 마구 뒤섞여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할머니와 연관된 상상까지 덧 붙여져서 그녀의 기억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기억의 조각들을 서서히 맞춰가는 과정을 통해, 조각보다 오히려 사이의 틈이 더 크게 드러납니다. 아버지와 베로니카의 대화 내용만 보더라도 가족들 사이의 단절감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네 오빠 만나면 말해라. 나한테 맞설 수 있으면 맞서 보라고. 네 오빠한테 내 말 전해." "아, 뭐라고요? 뭘 전하라고요?" "뭐라고? 그게 무슨뜻이야?" "알았어요. 전할게요." "뭐라고?" "전한다고요." <p.118~p.119> 이렇듯 가족 사이의 벌어진 틈을 보여주는 예는 이 사례 하나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이 베로니카의 기억과 상상을 순서없이 배치하고 있어서,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등장인물들이나 시대의 배치를 놓치기 쉽게 되는... 그러니까, 독자와의 거리감마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자면, ( 남편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는 베로니카는 ) 눈가에 긴장된 미소가 어린 품이 자신의 눈 먼 이마 중심이 보고 있는 것이 너무도 그럴듯하고 덧없고 사랑스러운 듯하다. <p.166> 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눈 먼 이마 중심을 보고 있는 것'은, (잠을 자는 중에)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두 다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런식으로 그녀의 문장은 은유로 넘쳐납니다. 이렇듯 그녀의 소설은 빨리 읽으면서 지나칠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작가가 이야기 하는 주제는 위의 예들처럼 구성과 문체가 안개처럼 모호함속에 숨어 있고, 그 속에서 주인공의 우울함만이 뚜렷하게 베어나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바로' 이러한 서술 방식을 통해 바로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개인과 가족의 해체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과거 시대를 대표하는 12명의 자녀가 있는 대가족 속에서 자란 주인공이 흩어져 있는 가족들 사이에서 현대를 상징하고 있는 혼돈과 모호함을 기억하는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해체되고 또 해체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작가의 쓸쓸함이 책의 페이지마다 묻어난다는 얘기지요... 장례를 치르는 가족들의 행동과 대화에서 공허함은 절정으로 향합니다.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는 일련의 행위에서 그들은 목적도 관계도 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는 사이, 베로니카는 결말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돌아가기를' 멈추지를 않습니다. ... 이 책을 읽은 느낌을 짧게... 말하라고 한다면, 청회색의 낮은 구름이 지평선에 짙게 드리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함입니다. 책의 뒷표지에 굵은 글씨로 씌여져 있는 '가족과 개인의 붕괴에 대한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대서사시'라는 내면의 이야기도 중요하겠지만, 제가 느끼는 표면적인 심상인 '청회색','황량함' 그리고 '우울함'을 뚫고 들어가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 그리고 이미 한 번 읽었던 책이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봉인되어있었던 이유도 두 번을 보고 나서는 이해가 될 듯합니다. ) ... 저에게 이 소설은 전에 읽었던 또 다른 아일랜드 작가인 존 반빌의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 원제 : The Sea )'에서 만났던 풍경에 우수가 가득했던 기억에 더해져서 아일랜드 소설에 대한 하나의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P.S 이 책은 세계 3대 문학상 중의 하나로 꼽히는 맨부커 상의 39회(2007년) 수상작이며, 2008년 아일랜드 올해의 소설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