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과 교감하는 순간이 있다. 마음이 동해서, 소리내서 읽지 않고 못배기게 만드는 책. 오늘 아침, 이 책 너세네이얼 웨스트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 이라는 제목의 책과 교감했다. "인간은 늘 꿈을 가지고 자신의 비참함과 싸워왔다. 과거게 꿈은 아주 막강한 것이었지만 그 꿈은 이제 영화, 라디오, 신문 때문에 유치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꿈을 배신한 사례가 무수하게 많았지만 최근의 이런 매체들은 정말 최악이었다." 첫 페이지의 저 문장은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첫문장은 아니었고, 소설 뒷부분쯤에 나오는 이 소설을 뚫고 있는 한 문장이었다.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 꿈을 잃도록 조장하는 미디어들. 그 미디어들로 대표되는 세속.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 세상. 미스 론리하트는 신문에 투고하는 익명의 독자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주는 남자다. 이 책과 나의 궁합이 잘 맞은 것은 둘째치고, 너세네이얼 웨스트는 정말 내가 이때까지 만난 최고의 이야기꾼이다. 정말 맛깔스럽고, 문장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먹고 싶은 글을 쓰는 작가이다. "그 자는 도피주의자야. 자신의 내면적 정원만 단장하려 든단 말이야. 하지만 어디로 도망가겠나? 그 자가 자신의 성격이라는 과일을 과연 어떤 시장에다 내다 팔 수 있겠나? 요사이 영농위원회는 실패작이거든." 절망녀, 상심녀, 모든게 지겨운 여자, ( 그러고 보니, 소개 되는 편지들이 다 여자로 부터 온 것이다. 유일하게 남자로부터 온 편지는 미스 론리하트에게 직접 건네지고, 파티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전달되지 않는다. ) 들로 부터 받는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의 구세주가 없는 인간들의 갑갑한 이야기들은 독실함과 의구심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기독교인인 미스 론리하트를 황폐화 시켰다가, 집착하고, 강박하게 했다가, 굳건하게 했다가, 결국은 깨달음을 줬다가 그 즉시 모든 것을 빼앗는다. 얼마전에 본 J.D. 셀린저의 ' 바나나피쉬를 위한 완벽한 날들' 의 결말을 떠올리게 하는 허무하고도 강렬하고도, 믿기지 않아 다시 한번 전페이지서부터 읽게 만드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 이런 , '바나나피쉬를 위한..'를 보고 최고로 강렬한 문장이라고 평했던게 엊그제인데...) 사실, 마지막 결말이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은 처음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강한 인상으로 박혀버렸으므로, 외려, 전체적인 아우라에 비하면, 결말이 약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처럼 150페이지 정도의 중편소설을 읽고나니 수많은 의문이 든다. 의미심장해보이는 수많은 상징들로 가득차있다. 일독을 한 지금은 애써 분해하고, 해석하려 하지 않으려한다. 해럴드 블룸님의 '교양인의 책읽기' 를 보고, 잽싸게 샀던 두 권의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책이었다. 그의 평을 끝으로 리뷰끝. "미국 사회의 어두운 비전을 이처럼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은 두 번 다시 없다. [미스 론리하트]는 [위대한 개츠비],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 [성단]을 능가하는 작품이다. 20세기의 미국 산문문학을 통틀어서 [미스 론리하트]의 작품 수준을 능가하는 소설을 쓴 작가는 포크너 단 한 사람뿐이다. " 해럴드 블룸 Harold Bloom ( 예일 대학교 및 뉴욕 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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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정말로 놀라운 소설"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소개시켜준 책이기에 궁금해서 한 번 읽어보았다. 책을 빨리 읽는 편인 나는 처음 한 번은 빠르게 읽고 그 자리에서 바로 다시 천천히 정독했다.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는 그런 책이다. 뭐가 뭔지 모르고 빠져들어 읽다보면 어느 새 책은 끝나있고 난 소화불량인 채로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과연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중 몇 %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위대한 문학작품이 그렇듯 아마도 평생동안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소일거리, 장난처럼 시작했던 일.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 그러나 내가 가볍게 생각했던 그 일에 누군가는 목숨을 건다. 정말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매달린다. 미스 론리하트는 결국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어떤 평론가가 말했듯 이 책의 위대성은 어떤 것과도 비슷하지 않은 무서울 정도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다. 속된 말로 "생뚱맞다"고 느낄 수도 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소설도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풀진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기에 양장본으로 나온 것이 반갑긴 하지만 책 내부의 묶음처리가 섬세하지 못하다는 것이 약간 불만이다. 책을 산지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앞쪽이 좀 벌어졌다(내가 너무 여러번 읽어서인가?) 그래서 별 한개 뺐다. [인상깊은구절] 미스 론리하트는 계속 술을 마셨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호주머니에 폭탄을 넣은 채로 영화관에 앉아 있는 무정부주의자처럼. 그 무정부주의자는 그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잠시 뒤 그는 영화관을 나서서 대통령을 암살하러 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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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론리하트. 그는 자신이 예수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 역시도 한 인간에 불과했다. 다른사람의 고민상담을 해주며 자신 역시 치유를 받았던 것은 아닐까. 책을 읽긴 읽었지만. 어렵다. 완벽하게 이해를 못했다. 몇번이고 더 읽어봐야 할 책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숨어있는 속 뜻이 너무 많다. 문득 어린왕자가 생각이 난다. 어렸을적 어린왕자를 읽고 정말 어린왕자가 왜 그렇게 유명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못했다. 난해한 내용에. 재미라고는 전혀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때 다시금 읽게 됐다. 그 때 느낀 감동이란... 어린왕자는 어린이가 읽어야 할 책이 아닌. 어른들이 읽어야하는 책임을 절실히 느꼈었다. 내가 어렸을때 어린왕자를 이해못한 것이 당연하게 생각됐다. 미스론리하트. 두번째 읽었을 때 난 깊은 감명을 받을 수 있을까? |
| 책 제목만 보고서 직장 여성이 겪는 이런 저런 일들을 무겁지 않게 다룬 짧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심심풀이로 금새 읽을 수 있겠거니 하고 선택한 책이었지만 전혀 예상 밖의 소설이었다. 너새네이얼 웨스트. 아주 생소한 이름이지만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작가로 일부 평론가들은 피츠제럴드보다 더 뛰어난 작가로 평가한다고 한다. ‘노인과 바다’도 ‘위대한 개츠비’도 다 읽지 못하고 내던져 버린 나에게 두 작가의 작품은 지루한 소설로 남아 있다. 그 시기의 작가들이 다 나와는 맞지 않는 것인지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도 그다지 재미있는 글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짧은 글이어서 중간에 내던져지는 수모는 겪지 않았지만. 작가는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글 속에 담아낸 듯 하지만 나는 그 절반도 이해하지 못 했다. 어려운 글이었지만 부족하게나마 이해한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인간 삶의 부조리’가 될 것 같다. 마음 속에 이상을 품고 살아가지만 현실과의 괴리감 속에서 힘들어하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이상향에 도달하더라도 현실 세계에 의해 배척당하는 인간상이 작품 속에 드러난다. 결국 이상의 성취를 목표로 하는 삶이란 부조리한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질서’를 추구하는 인간의 삶을 버리고 ‘무질서’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자연 세계에 편입하라는 말을 하려던 것일까. 작품의 뜻을 이해하려면 여러 번 읽어봐야 하겠지만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음울하고 축축한 소설 속에 발을 들여 놓고 싶지 않다.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밝고 촉촉한 세상과 어둡고 축축한 세상, 어느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다 솔직하게 그려낸 것일까.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문득 양지에만 머물고자 하는 마음은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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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아무 생각도 없이 들른 골목에서 한 식당을 그냥 들어가 밥을 먹었는데 그런데 대박 ! 정말로 음식이 맛있는 거다 그렇게 이 책을 그리고 이 작가를 요약할 수 있다 미국문학에 있어서 20세기 초에 위대한 작가들 중 하나이지만 이 소설의 저자 너새네이얼 웨스트는 거의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다 작품도 장편 하나 중편 셋 이렇게 낳고 죽은 탓일까 그러나 그 명성과 인지도에 비해 첫인상은 매우 유쾌하고 좋다 유머가 흐르는 가운데 작품 전체가 포용하고 그리려고 하는 주제가 포괄적이다 단지 대공황 그 시대 의 빛과 그림자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을 그런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것은 오독으로 이 작품을 작은 틀 속에 억지로 구겨넣으려는 것이다 미스 론리하트는 신문사의 인생상담 칼럼을 집필하고 있는 남자기자이다 비록 명칭과 이름은 여자이지만 그는 남자로서 그리스도를 욜렬히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팬이다 그런 종교적 사생팬으로서 그가 보는 세상은 그가 받는 인생상담의 사연들만큼이나 어둡고 절망적이다 그 사연들이 어둡고 절망적인 것은 그 사연들이 동시에 무의미한 고통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 무의미한 고통들을 덜어줄 해답이 보이지 않기에 미스 론리하트의 가슴은 더욱 암울해지고 그래서 이름처럼 점 점 더 고독해진다 이름인 론리하트는 세상을 보는 자 그 시선이 자비와 연민으로 괴로워 하는 자인 주인공의 마음을 표현하지만 그러나 사실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들이 고독하고 외롭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고통과 무의미와 환난이기에 이건 기독교건 불교건 기타 종교의 깊은 교리를 들먹일 필요조차 없다 왠만큼 나이만 먹으면 누구나 다 공감하고 동의할 경험칙이니까 누군가 당신 나이를 그래도 먹을 만큼 먹고 살만큼 산 당신은 인생이 기쁨이고 축복이라고 설마 생각하고 있지 않겠지????? 신문만 펼치면 들려오는 삶의 질곡에서 울려퍼지는 고통의 비명들 그 끔찍한 비명 소리들로 가득찬 것이 미국(뿐만 아니라 세상 자체)이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주제 아래 삶의 여러 괴로움으로 점철된 모습들에 대해 왜 그것이 존재하고 그것의 탈출구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 이 소설이다 그야말로 신문에서 그런 살아있는 세상의 소리에 대해 답하고 그들을 조금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이 미스론리하트의 할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불가에서 말하는 세간의 모든 소리를 보는 천안(千眼)과 모든이를 구원하는 천수(千手)의 관세음보살과 다름없다 혹은 성모 마리아와도 같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처럼 관세음처럼 권능과 신통력이 없다 같이 아파할 뿐 그들을 구제하고 해결할 능력이 전무하다 단지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개발괴발 신문지면에 실어 답할 수만 있을 뿐이다 이렇듯 미국 대공황 전후의 시대적 맥락에서만 고통스러운 하는 사람들로 읽기에는 이 소설이 건드리는 인생이 범위가 너무 크다 인생이란 결국 고통스러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울음이라는 비극을 작가 웨스트는 블랙 유머의 간결한 코미디 속에 흥미롭고 재치있게 잘 그려 넣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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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 웨스트 (Nathanael West)의 이 작품을 20세기 미국문학의 3대 봉우리라고 말한 것은 1962년 스탠리 에드거 하이먼의 문학비평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몇대란 식으로 손가락으로 꼽는 것이었다. 만약 당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책이 있다면 한권으로 꼽을 수 있겠는가. 단 한권으로 '가장'이란 베스트를 집을 수 있다면 그건 대단한 행운이 아니면 꼴통 (미안 ^^)이다. 1962년이라 함은 아직 20세기가 끝나기도 전 30년이나 남은 상태이니, 이 책을 논할 때에는 20세기 미국문학의 3대 어쩌고 하는 말은 뺐으면 좋겠다. 많은 이들이 [호밀밭의 파수꾼]이 왜!! 유명한지, 왜 꼭 읽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는 그리 많지도 않다. 중요한 문학작품이라니까 이해가 안되는게 마음에 닿지 않는게 자신의 잘못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잡을 때 참으로 못마땅했다. 읽는게 좋을까, 말까를 하다가 그래도 주문을 해서 책장을 젖힌 것은, 내가 오래전 Korea Herald에 연재되던 Dear Abby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때 실린 무명의 시가 턱하니 일부 수정되어 모 유명인의 자작시인 것처럼 해설인지 서문엔지 소개되다가 다시 정정되어 밝혀지긴 했는데). 뭐랄까 누군가 이렇게 고민을 많이 하면 산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참으로 용기백배했다고나 할까.
미스 론리하트는 뉴욕 포스트-디스패치 신문에 실린 판촉용 고민상담 칼럼이었다. 그는 일찌기 교회예배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칠때 배안에서 뱀의 비늘처럼 꿈틀거리던 히스테리를 느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게 지겨운 여자, 절망녀, 듣지못하는 여동생을 든 고민녀 등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해 줄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머리 속을 지배하는 이들 괴로운 인간군상들은 그를 아프게 만들고, 일부러 그자리에서 쫓겨나가기 위해 그는 상사인 쉬라이크의 아내 메리를 유혹한다. 끊임없이 빈정대고 농담을 해대는 쉬라이크와 술집의 친구들, 끊임없이 남편을 욕하면서도 섹스를 허용하지 않는 이들과의 대화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대화가 아니라 그저 머리속을 잠식하는 인간의 괴로움을 잠시 망각시켜줄 수 있는 소음일 뿐이다. 약혼녀인 베티와의 자연과 단순한 생활 (그럼에도 베티는 한가지의 일을 계속 할 수는 없다)을 맛보기도 하지만, 그는 개츠비처럼 오해받고 꺠달음의 순간에 살해당한다.
항상 이 시대를 얘기할 때면, 전쟁전후의 세기말적 분위기와 대량생산으로 풍요로와졌지만 거품으로 인한 주식시장의 붕괴와 절망 등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난 가끔 이런 소설이 과연 읽는 이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지가 의문이다. 그러한 시대의 절망이 현재에 반복될지라도 인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잊지말라고? 이 모든 상징, 여자=바다 등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해설을 볼 때면 더욱 더 회의가 깊어질 뿐이다. 좋은 작품은 그냥 놓아도 다시 생각나고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맛이 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미스 론리하트의 절망과 깨달음이 과연 무엇에 영감을 줄지 의문이다. 미학적인 맛봄과 감각의 깨어남 이상으로 문학이 주는 영감을 느껴보고 싶다. 절망을 묘사하는 것은 그만하란 말이다.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의 모소설을 보고 있으면,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서 뭐, 우리의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인류애적 사랑으로 확장하라고? 그래서 그걸 읽고서 누군가 다른 인간에 대한 배려가 생겼냐고? 리뷰 하나만 늘어났을 뿐. 다들 허겁지겁 책을 사들이고 영감을 느끼기도 전에 리뷰를 쓰고 그저 또 한권을 쌓아놓을 뿐이다.
누군가 멋진 리뷰를 썼더라도, 어디에선가 베스트셀러라도, 어느 유명 학자가 손꼽으면서 3대이건 최고이건을 붙이더라도, 스스로 뱃속에서 뭔가 꿈틀거릴 수 있는 - 눈물 말고!!! - 작품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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