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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의 소설집 『회색 문헌』의 인물들의 감정은 암담하거나 절박함으로 표출된다. 그들은 길을 잃거나 만나야 할 사람들을 찾지 못한 채 거리를 서성인다. 갈 곳이 없어진 그들에게 길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낯선 곳에서 할 일을 찾지 못한 인물들은 타인의 친절을 바라지도 못하고 과거의 기억과 싸운다. 회색 문헌이란 발행은 되었지만 정식으로 출판되어 시판되는 것이 아닌 문헌을 말한다. 강영숙의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몰래 돌려 보고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전반에 깔린 배경은 황사와 하늘의 어두운 모습이다. 숨을 쉬기 힘들고 하늘과 지상이 구분되지 않는다. 색채가 느껴지지 않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의 배경색으로 강영숙의 소설 세계는 펼쳐진다. 「귀향」의 그녀는 도시에서 어두운 모습으로 지내다가 남자가 있는 지방으로 돌아가 삶의 미소를 찾고자 한다. 도시에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추스르고자 남자를 만난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도시의 일상은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그녀를 피곤하게 만든다. 「폴록」은 이 책의 제목인 회색 문헌을 쓰는 J가 나온다. 환경운동가 K 이사를 인터뷰를 진행한다. 순식간에 잠이 드는 K 이사는 집안에 물건들을 쌓아두고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찾지 못한다. 삶이 와해되는 건 미세하게 어긋나는 시간의 균열 때문이다. 당신이 혹은 우리가 무너짐을 감지하는 순간 오늘은 사라져 버린다. 「맹지盲地」에서 길 찾기는 거대한 문을 닫는 행위로 종결된다. 환경에 관한 기사를 올리는 여자, 지영이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것을 안 '나'는 그녀에게 줄 마카롱을 산다. 잘못된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건수 산업단지로 간다. 그곳에서 짐을 잃어버린 노인들과 동행을 하고 잃어버린 것은 짐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읽었던 강영숙의 인상적인 소설은 「씨티투어버스」였다. 공항이 폐쇄되고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자가 버스를 타고 하루를 점검하는 그 소설은 강렬했고 소설 전체를 필사하게 만들었다. 강영숙의 모든 소설을 다 읽는 동안 일상은 안전하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은 세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잘해보려고 했던 일들도 시간과 물리적 힘이 맞지 않으면 오해와 갈등으로 범벅이 될 수 있다. 늘 가던 길이 사라져 있거나 이 세계에서 친절이라 믿었던 것들은 위선이었음을 강영숙의 소설 속 인물들은 처절하게 경험한다. 책이란 출판되었다고 해도 다 읽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이 출간되기 전 도장이 찍혀 폐기될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스스로 이름을 붙힌다. 『회색 문헌』이라고.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소설들은 존재를 인식당하기 전 도장을 든 누군가에 의해 지하 세계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다만 사라질 운명에 처할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소심한 일상인에 불과하다. 『회색 문헌』에 실린 소설들의 제목은 한자가 붙어 있다. 단어의 뜻을 차분히 헤아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어느 날 모든 단어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언어의 의미조차 파악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자아를 부정 당할 때가 있다. 그림자마저 이상해 보일 때 강영숙의 소설은 나의 옆으로 다가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말한다. 닥치고 먹기나 해라! (20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