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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해도 되고 걱정해도 된다. 그러나 비겁하지만 말자 비겁하지만 않는다면 이 세상 가치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으리.. 처음 이책을 펼처본건 군대 이등병 때였고 온실속에 자란 나는 내무생활에 적응치 못하고 하루하루 무너져가는 하루를 보냈다. 어김없이 선임과의 지옥같은 야간근무가 끝나고 나는 화장실로 와 소리없는 울음을 지었다. 그렇게 나는 나쁜생각까지 먹게 되었다. 그리고 행동에 옮기기전 식당에서 마지막 내 유언을 적는도중 이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심코 펼쳐본 한페이지에는 이리 적혀 있었다. 자신의 마음에 추호라도 비겁함이 있는지 의심이 든다면 패배를 마주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편을 택한다고, 도피하면 실제로 적이 가진것 보다 더 많은 힘을 그에게 실어주는 것이라고.. 육신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지만 영혼의 나약함.. 그것은 끝내 떨칠 수 없는 것이라고... 눈물이 오른쪽 뺨을 타고 내려왔다. 나는 그후 모든 계획을 접고 패배를 마주하기로 작정한다. 패배했다. 큰상처도 얻었다. 그러나 상처를 치유하며 전보다 강해진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인생을 구원해준 식당 구석에 꽃혀있던 이 책.. 평생 감사함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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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의 글은 지도 같다. 지도를 보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목적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유하고 여유있고 이상적인 배우자와 함께 하는 건강한 삶. 이 목적지는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만큼 좌석 수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먼저 도착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경로다. 어떻게 하면 지름길로 갈 수 있는가. 누군가는 그것을 끈기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꾸준함이라고 부르며 또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경로가 있다고 말한다. 운동을 예로 들어볼까. 멋지고 강한 몸을 갖기 위해서 누군가는 매일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쉬면서 운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별한 운동법을 익혀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이 대부분 저지르는 실수를 방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먹으라는 사람도 있고 먹지 말라는 사람도 있으며 무엇은 먹어야 하고 무엇은 먹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중에서 어느 게 진짜 경로인지는 모른다. 다만 사람들은 이 각각의 경로들이 모두 멋지고 강한 몸이라는 목적지로 도착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런 식이다. 멋지고 강한 몸이 목적지라고요?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요? 그건 목적지가 아닙니다. 운동의 목적은 몸을 깨우기 위한 것이지 TV에 나오는 몸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에요. 즉 파울로 코엘료는 우리가 이전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한 목적지가 정말 올바른 목적지가 맞느냐고 묻는다. 그 물음을 들으면 지금까지 찾아 헤맨 경로가 정말 유의미한 경로가 맞는지 자문하게 된다. 나는 늘 지도를 보고 있고 필요한 것은 경로일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울로 코엘료는 말한다. “지도가 잘못된 건 아닌가요?” 파울로 코엘료는 사람마다 다른 지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기존에 모든 사람들이 같은 지도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파울로 코엘료가 건네주는 지도 역시 단 하나의 목적지만 나와 있다. 다만 그 목적지는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이 아니라 ‘자아의 신화’라고 씌여 있다.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이 어떤 삶인가는 모두들 알고 있다. 그래서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으로 가는 경로는 무수할지 몰라도 결국 사람들은 중간중간에 만나게 된다. 모두가 같은 목적지로 가고 있기 때문에 좌석수는 모자라고 남은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한다. 하지만 같은 목적지라도 ‘자아의 신화’는 다르다.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과는 달리 ‘자아의 신화’는 이름만 같을 뿐 실제 도착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설령 길목에서 마주치는 일이 생겨도 그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들이다. 목적지는 이름만 같을 뿐 모두 제각각이어서 이 지도에는 지름길이 없다. 지름길이란 남보다 먼저 갈 수 있는 길인데 목적지가 모두 제각각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곳에 도착하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러니 내가 가는 시간이 곧 그곳으로 가는 시간의 표준이 될 것이다. 목적지가 달라도 사람들은 중간중간에 마주친다. 왜 그럴까.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의 목적지는 단일하지만 경로는 제각각인 것과 달리 자아의 신화라는 목적지는 제각각이어도 경로는 같기 때문이다. 파울로 코엘료에 의하면 그 경로란 일상의 표지를 찾는 일이다. 이 표지는 유튜버나 인플루언서의 조회수 수십만에 달하는 비밀과는 다르게 공공연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쉽게 알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표지는 일상적이고 전혀 특별한 게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표지를 알아보는 눈이다. 즉 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는 눈을 길러야 한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다도에 관한 이야기가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다도는 차를 마시는 일이다. 차는 그저 한 잔의 액체에 불과하므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정성과 예의 그리고 규범이 갖춰지면서 다도는 차 마시는 일이 아니라 신을 만나는 일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차를 마시는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다도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신을 만나는 일로 격상시키는 작업이다. 이 말을 확장하면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아무것도 아닌 수많은 일 속에서 얼마든지 신과 만날 수 있다. 어릴 때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한 사람이 잠을 자고 있는데 꿈에 신이 나타나 오늘 너희 집을 방문할 거라고 말했다. 잠에서 깬 사람은 신을 맞이하기 위해 집안을 청소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으며 마당도 쓸었다. 그런데 정작 방문하는 사람들은 거지거나 도움이 필요한 누추한 자들이었다. 그는 기껏 청소한 집에 거지를 들이고 신을 위해 마련한 음식을 배고픈 자에게 주었지만 끝내 신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는데 다시 신이 나타났기에 물었다. 왜 오늘 저희 집을 찾지 않으셨나요? 그러자 신이 말했다. 난 오늘 너희 집을 방문했어. 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하자면 거지와 굶주린 자들이 바로 신이었던 것이다. 범속에 숨어 있는 신성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파울로 코엘료가 주는 지도에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은 없다. 가족을 버리라는 말도 어딘가 멀리 떠나란 말도 없다. 머리를 밀고 굶는 고행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종교에 귀의하라는 말도 없다. 그는 단지 표지를 찾으라고 말한다. 표지를 찾다보면 자아의 신화에 이를 것이라고. 그리고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내려진 단 한 가지의 목적지라고 그는 말한다. 표지는 일상적인 것이나 그것을 발견하는 눈은 일상적이지 않다. 평범에서 비범을 찾고 익숙한 것에서 특별한 것을 찾아내는 것은 반성의 일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 때 표지는 발견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시 볼 것인가. 책에 실린 마지막 기도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광대한 들판에서 우리는 만나리라.” 이 말은 <연금술사>에 나온 “사랑이 이긴다”는 말과 같다. 세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과 틀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 싸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수피교의 수도자가 말한 ‘광대한 들판’과 파울로 코엘료의 ‘사랑’은 이 싸움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곳의 이름이다. 타인과의 갈등이든 자기 자신과의 갈등이든 해결책은 갈등 내부가 아니라 갈등 너머에 있음을. 무엇이든 좋다. 만약 이익과 무관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 우리는 갈등 너머에 존재하는 땅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위치를 찾는 일을 반복하면서 무엇이 표지인지도 역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서 파울로 코엘료의 글을 지도와 같다고 했는데 막상 쓰고보니 지도가 아니라 그의 글은 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별을 보면서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목적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고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별을 보면서 자기가 생각하는 목적지로 걸어가는 일이다. 이곳이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면 행운이겠지만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우리는 이제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보면서 걸어왔다. 스포트라이트는 별보다 강한 빛이지만 너무나 강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얀 어둠에 갇힌 채 살아왔던 것이다. 단 한 발자국이라도 자기 걸음으로 걸을 수 있다면 설령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못해도 감옥에서는 벗어난 게 아닐까.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일은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 알을 깨는 거라고 말했다. 필요한 것은 탈출이지 비상이 아니다. 2023년 11월 27일부터 2023년 12월 3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