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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깐뎐>이라니, 책 제목이 참 재미있고 낯설다. ‘뚜깐’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것은 똥뚜깐밖에 없었는데, 소설의 중반 이후에서 확인해 보니 역시나 똥뚜깐에서 낳은 아이라 이름을 뚜깐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주막집 딸 뚜깐은 그 이름만큼이나 고단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양반 댁이 아닌 천한 주막집에서 그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태어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나중에 얻게 된 해문이슬이라는 고운 이름만큼이나 우리말의 아름다운 결을 살리는 시를 남기게 된다.
2044년의 한국은 영어 공용화 법안이 통과된 지 오래, 이제 한글을 의무적으로 배우기는 하지만 좋아서 배우는 아이는 없는 현실이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한글을 낯설게만 여기는 열여섯 소녀 제니는,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의 유품인 한글 시가 적힌 낡고 오래 된 천조각 한 장과 <뚜깐뎐>이라는 소설을 받는다. 그리고 제니는 소설을 읽고는 엄마가 이 시를 읽으며 왜 눈물을 흘렸는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연산군이 자신을 비방하는 나라말 괘서로 인해 한글을 탄압하던 시절, 주막집 딸 뚜깐이는 노름만 하는 아비 밑에서 고생하는 어미에게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라말을 배우고 한문으로 된 책을 나라말로 옮기는 뜰에봄 일행과 인연이 되어 한글을 익히게 되고, 자신이 남몰래 사모하던 최 역관 댁의 서진 도령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은 서찰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글을 배운다는 비밀이 드러나고 뚜깐이를 탐내고 있던 한량들의 횡포로 어미는 죽고 뜰에봄과 세모돌도 목숨을 잃는다. 사부로부터 해문이슬(해를 물고 있는 이슬)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뚜깐은, 단순히 한글을 배우고 번역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된 아름다운 시 열세 수를 남기고 자신의 삶을 서책으로 남긴다. <뚜깐뎐>이라는 예스러운 제목에 걸맞지 않게 작품의 무대가 되는 공간은 2044년 6월의 한국이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2044년의 미래를 배경으로 1500년대의 과거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2008년에 살고 있고….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의 원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또 현재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책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일 것이다. 굳이 영어 몰입교육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오직 영어뿐!’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말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재의 모습이다. 아마 우리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거나 아니면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게 어떤지 물어보면 그러자는 대답이 꽤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30여 년 뒤 우리말이 위축된 상황을 소설은 보여주면서 과연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뚜깐의 삶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창작물인 우리말과 글이 지닌 멋을,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얼과 땀을 보여준다. 책을 읽는 동안 뚜깐과 뜰에봄 일행의 말과 삶이 우리의 눈과 머리, 그리고 온 몸에 스며들어 우리의 마음을 강렬하지는 않지만 미세한 떨림으로 가득하게 하고, 웃음과 함께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한다. 이 책은 풍성한 우리말의 향연을 보여준다. 뜰에봄이나 길밗새, 바우뫼, 세모돌, 해문이슬 등 등장인물의 이름은 물론이고 시겟장수(곡식을 말이나 소에 싣고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파는 사람), 중노미(음식점, 여관 따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남자), 여리꾼(상점 앞에 서서 손님을 끌어들여 물건을 사게 하고 주인에게 삯을 받는 사람), 조방꾸니(오입판에서, 남녀 사이의 일을 주선하고 잔심부름 따위를 하는 사람), 음양쟁이(천문, 역수, 풍수지리 따위를 연구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사람), 알롱(지방 관아의 전령을 맡은, 평생을 총각으로 지내는 사람), 흙두뱅이(?) 등 그야말로 잘 차려진 상을 만난 듯 흐뭇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구사하는 구수하고 걸쭉한 사투리는 입에 착착 감기며 책을 읽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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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뚜깐이 되어 해문이슬로 태어나야 하지 않을까?]
정말 마음에 드는 표지옷을 입은 책 한권이 있다.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뒷태가 수수한 한 여인을 담고 있는 뚜깐뎐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오래전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뒷방 여인네들이 썼을 법한 책 한권의 이미지도 함께 있다. 제목만으로는 어떤 이야기인지 통 감을 잡을 수 없었는데 첫 페이지를 접하고 황당함은 더했다.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겠지 싶었는데 이건 생뚱맞게도 2044년 태어날 때부터 영어를 상요하고 국어시간에 의미적으로 낯선 한글을 배워야만 하는 미래를 다루고 있다.
한글이 너무나도 쓸모없는 종이조각처럼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드는 미래, 그 미래에서도 한글을 지키기 위해, 실은 우리 정신을 지키기 위한 사람들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고 설정된 작품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뚜깐뎐'이다. 작가의 이런 설정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부정하기 보다는 지금 대학문만을 바라보면서 영어에만 매진하고 있는 우리 모습과 별반 다를 게 뭘까 싶은 생각이 밀려왔다.
늘 가까이 있기에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우리가 늘 사용하는 우리 말과 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작품이었다. 똥뚜깐에서 태어나서 뚜깐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주막집의 처자. 뚜깐의 선머슴 같은 행동에서는 우리 옛소설에서 느껴지는 풋풋함이 은연중에 베어나왔다. 연산군 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선머슴같던 처자가 한 사내를 사랑하고 배신 당하고 그리고 천대받는 자신의 처지를 조금씩 인식하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배움의 길을 떠나게 된다. 글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마음의 고통만큼 성장하고 한글을 한자씩 깨우치면서 글을 통해서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꿈을 지니게 된다. 해문이슬...해를 머금은 이슬로 다시 태어나는 뚜깐을 보면서 마지막 미래의 주인공의 시점으로 돌아오는 순간 책을 읽는 이들은 모두 또 하나의 뚜깐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가 싶다.
영어교육의 필요성에만 목소리를 높이고 국제중학교까지 가세를 하면서 우리의 정신과 삶을 지탱해주고 있던 한글의 부재를 더욱더 느끼게 만드는 요즘.. 우리 글과 말에 대해서 좀더 의미심장하게 생각할 시간을 갖게하는 작품이었다. 작가의 이런 발상에 놀라면서 그 준비기간이 10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우리 말과 글에 대한 그의 고민의 흔적을 작품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와 너,,우리 모두 어쩌면 이 시대의 또 하나의 뚜깐이 되어 해문이슬로 태어나야 하지 않을까? 우선 내 글의 정신부터 제대로 입은 후에 영어든 중국어든 받아들여야 뿌리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그런 생각이 더 깊이 자리잡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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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시간 2044년 6월 21일....” 미래 이야기네. 어, 그런데 한글을 소재로 다루나봐. 그런데 뚜깐뎐이라니... 이야기는 연산군 시대로 올라가고, 그 시절 여자 주인공 뚜깐이 주인공이란다. 서서 오줌 누는 아이, 주막집 주모인 어머니와 노름꾼 아버지 둔 뚜깐이는 다 큰 처녀지만 아직 선머슴처럼 뛰어다니는 못 말리는 여아다. 이런 뚜깐이 우연히 임금의 비행을 적은 한글 괘서를 붙이고 다닌 사람들과 알게 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나라 글도 배우고 우리글의 소중함을 깨달아 간다는 이야기는 뚜깐 인물전이 액자소설처럼 그려져 있다. 한글의 소중함에 뚜깐의 첫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그런데 첫사랑에게 농락당하고 버림 받는 뚜깐의 이야기는 없이 사는 인생들, 특히 남정네의 우악한 주먹다짐 앞에 맞고 사는 여인네들의 삶과 이어져 있다. 그래. 그 당시는 대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으리. 똥 뚜깐에서 났다고 뚜깐이라 이름으로 살 때는 그저 천한 신분으로 살기 너무 버거워서 훌훌 세상구경이나 다니고 싶은 철없는 뚜깐이었다. 그러나 동틀 녘 해를 문 이슬이란 의미의 ‘해믄이슬 ’은 대의를 깨우쳐 준 사부로부터 받은 이름이기에 이후 뚜깐의 삶도 달라졌으리라. 우리나라 최초로 한글로 된 시를 지은 여자, 해문 이슬의 이야기를 후손인 제니에게 전해지기까지 정말 그럴듯하다. 중세 국어의 낯선듯하면서도 익숙한 글자들이 반갑기도 하고. 과연 머지않은 미래, 영어가 우리나라에도 공용어로 쓰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요즘도 심심찮게 영어공용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말 우리글을 천대하면 그런 시대가 분명 올 수도 있으리라. 작가의 조그만 상상력에 살이 보태고 다듬어져 아주 흥미로운 한글 관련 청소년 책으로 나온 것이 무지 반갑다. 처음은 재미로 책을 읽고, 그 다음은 이야기 속에 담긴 뜻을 소중히 새기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비록 역사책에 한 줄 글로 적히지 못해도 우리글을 지키려고 애쓴 이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귀한 책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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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고민을 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내가 알고 있는 단어중에 뚜깐이라는 말은 없는데 하고 말이다. '뎐'이라는 말은 '전'의 고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 앞의 두 글자의 의미만 알면 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거다. 결국 모르는 채 읽기로 했다.
분명 제목은 어떤 과거시대를 배경으로 할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미래시대가 펼쳐진다. 이미 영어공용화 정책으로 한글이 거의 쓰이지 않는 가까운 미래다. 2044년이라니까 그다지 멀지도 않다. 사람들은 불편함을 최소로 줄인 첨단시대에 살고 있다. 도대체 그런 생활과 옛날 책 같은 제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내 생각하며 읽어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야기가 과거로 들어간다. 사실 미래의 어느 날을 이야기할 때는 마음이 불편하고 읽는 속도가 느렸는데 과거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자 마음이 편하고 속도도 붙는다. 역시 아직은 첨단을 살 준비가 안 되었나보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연산군이 왕위에 있을 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천방지축 못말리는 말썽꾸러기에 선머슴인 뚜깐의 이야기다.(물론 중반까지만 그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뚜깐이란 여자 아이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뚜깐의 뜻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똥뚜깐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단다. 양반의 자제였다면 그럴 듯한 이름을 붙였겠지만 어차피 천한 주막집 아이로 태어났으니 아무렇게나 붙였겠지.
남자 아이들을 거느리고 놀러 다니던 뚜깐이 우연히 주막에 손님으로 온 한 무리의 사람들로부터 한글을 배우면서 벌어지는 일이라지만 배우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뚜깐의 내면의 변화와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언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한 나라의 얼이 담겨있다고 하는 언어.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기에 지금도 툭하면 영어 공용화가 어쩌고 몰입교육이 어쩌고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무조건 영어를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다. 배울 건 배우되 적어도 우리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잊지는 말자는 것이다.
여기 숨어 있는 의도를 알아차렸을 때 저자가 영어에 올인하는 현실에 쓴소리를 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단순히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오래전에 구상하던 이야기를 지금 끄집어 냈을 뿐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지금 현실의 문제와 결부시켜 읽는 것은 독자의 마음 아니겠나.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했을 때 반대하던 사람들의 말이나 지금 영어 몰입교육을 외치는 사람들의 말이 어쩜 이리도 비슷한지... 단지 중국에서 미국으로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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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뚜깐뎐>>이라는 책을 보고는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참으로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고전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첫 장부터 예사롭지 않은 전개를 암시하듯 2044년 6월 21일 11:34:07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아! 미래 과학 공상을 소재로 한 책이구나 싶어 읽기 시작했다. 그렇다. 1막은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안경피시는 눈을 깜빡이면 꺼지고, 눈동자를 돌려 아이콘을 클릭한다. 참으로 흥미진진한 얘기가 펼쳐진다. 한글창제 60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우리의 후손들은 한글이 낯설고 영어에 익숙해 있다. 단지 한글은 중세의 한 문자에 불과하다.
제니는 세살 때 세계 여행을 떠났던 엄마가 페루인과 한 눈에 사랑에 빠져 자신과 아빠를 버리고 떠났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지만 용서를 하지 못한다. 엄마 남편의 자식인 캐빈에게서 낯선 천 조각을 받게 된다. 그것은 한글로 된 최초의 시가 적혀 있는 천이었고 함께 붙어 있던 작은 칩을 통해 천에 얽힌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이야기가 <<뚜깐뎐>>이다.
뚜깐은 똥뚜깐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뚜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찌보면 친근해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천대받은 이름이 틀림없다. 연산군 시절 피비린내로 인해 백성들은 살아남기가 무척 힘겹다. 그 시절 괘 벽보가 여기저기 나붙는다. 이런 어수선한 시절, 뚜깐은 더벅머리 남자와 만나게 된다. 뚜깐은 주막집 딸로 태어나 엄마의 삶과 언니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저렇게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자이지만 남자애들과 어울리며 심지어 오줌도 서서 눈적이 있다. 16살이 된 뚜간에게 소원이 있다면 역관의 자제 서진 도령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더가 기회는 온다 옛날에 만난적이 있는 더벅머리 총각이 바우뫼였던 것이다. 바우뫼와 세모돌 뜰에봄이 뚜깐의 헛간에 묵게 되면서부터 뚜깐의 운명은 바뀐다. 이들은 한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사부는 뚜깐에게 한글을 열심히 익혀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한문 이름을 버리고 나라말 이름을 지어주고 한문을 나라글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 이들은 늘 쫒기는 운명이다. 나라말로 글을 짓는 일이야말로 가장 값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부를 따르던 이들에게 서진도령과 근휘 일당은 뚜깐을 괴롭히고 결국 엄마도 죽게 만든다. 서진의 아기를 가진 뚜깐은 사부가 죽기 전 ‘해문이슬’이라는 한글 이름을 지어준다.
뚜깐은 일행이 모두 죽는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아 사부와의 약속을 지킨다. <<뚜깐뎐>>이라는 책과 함께 천 조각에 시를 써 후손에게 전해지게 했던 것이다. 500년의 세월이 흘러 제니에게 전해진 것은 한 장의 천 조각에 불과 하지만 그것을 되찾기 위해 엄마는 기억을 되살려 기록물로 남겨 딸 제니에게 보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상상력과 한글 사랑의 마음이 가슴속으로 전해져 마음이 따뜻했었다. 우리는 지금 한글을 천시하고 있다. 한글은 잘 못쓰고 틀리면서도 영어는 죽어라고 공부한다. 정말 작가가 상상한 것처럼 먼 미래에는 한글이 없어지고 영어 공용화가 될지도 모른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기록물로만 전해진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뚜깐은 비록 천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시대를 뛰어넘는 삶의 방식이 있었다.
뚜깐이 남긴 싯구의 한귀절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데등키리라 기대하며 쓴 일기 시 나부랭이 모다 태와 버리고
별하 난 누구지? 별하
해문이슬 뚜깐은 들킬 것을 기대하며 아름다운 한편의 시를 완성한다. 뚜깐이 쓴 시 그대로 옮기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그 마음은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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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조선시대에 쓰인 한글 소설을 대하는 듯한 느낌의 제목과 표지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의외로 이야기는 2044년에서 시작된다. 분명히 한국인인 주인공의 이름은 제니이고, 제니는 눈을 깜박이거나 눈동자를 움직여 컴퓨터를 조작한다. 그만큼 테크놀러지가 발달한 시대다. 그런데 제니는 한국말에 서투르다. 영어 공용화 법안이 통과된 지 오래되어 청소년들은 한국어를 배울 까닭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이름조차 미국식으로 지은 제니의 컴퓨터에 '한글 창제 600주년 기념'이라는 내용의 바이러스가 침입한다.
이렇게 시작된 소설은 어느 순간 다시 조선시대 연산군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부터는 말 그대로 뚜깐의 전기이다. 뚜깐은 똥뚜깐에서 태어나 쉽게 뚜깐으로 이름지어져 버린 주막집 딸. 제니보다 더 낯선 이름이다. 이 이름을 우리 하는 식으로 한문으로 나타내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변소? 이름이 그의 정체성을 일정 부분 담당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함부로 지어진 이름은 참 슬프다.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뚜깐의 삶도 그랬다.
뚜깐은 신분과 성별, 그리고 폭압적인 군주라고 하는 삼중의 올가미 속에서 분투한다. 조선시대 연산군 시절에 천한 신분의 여자로 태어난 뚜깐에게는 사랑할 자유, 정절을 지킬 자유도 없었거니와 '나라말'을 익히고 쓸 자유도 없었다. 뚜깐이 익히기 쉬운 나라말을 배우고자 했던 것은 그저 사랑하는 서진 도령에게 속내를 표현해 보고자 했을 뿐이며, 대단한 의식이 있어서였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라말이 무지몽매한 백성을 일깨우고, 누구나 폭정에 대한 일침의 괘서를 쓸 수 있게 되자, 탄압이 이어졌고, 힘 없는 뚜깐과 그 가족은 와중에 희생당한다. 그저 사랑과 표현을 기대했을 뿐인 뚜깐은 자신이 저들에게 한낱 노리개감일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뚜깐의 주변인물들은 폭압에 스러진다. 뚜깐은 그러나 해문이슬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뚜깐과 해문이슬, 즉 해를 머금은 이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녀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제니는 마침내 아버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한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로 거슬러 오르는 피줄의 연결을 느끼게 된다. 왜 어머니의 새 아들 캐빈이 '한글'에 천착하는지 어렴풋이 느낀다. 글은 정신이며, 정체성이며, 삶의 향방을 좌우하는 힘을 가졌다는 걸. 자신이 제니일 때와 해문이슬의 자손일 때, 그 사이에는 얼마만한 거리가 존재하는 것인지.
20년 전에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10년 걸려 마무리했다는 이 책이 한글날에 즈음하여 나온 것은 아마 필연이었을 것이다. 작가께 감사한다. 이렇게 강물같은 삶의 이야기에 한글이 얹혀져 있음은 당연할 수 있으나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친할머니 성함은 김우남이었다. 원래 이름은 또남이었다 한다. 시집 와서 남편인 할아버지께 새로 지어 받은 이름이 또 우, 사내 남이었다 하는데, 갑자기 먼 옛날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와락 올라온다. 마치 강물같다. 할머니와 내 사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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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즐기는 초,중교생이라면 이용포작가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도 딸 덕분에 그의 유명난 작품은 거의 다 읽어본 편인데, 대체로 유쾌하고 발랄한 필체로서 교훈적인 주제를 어린이 특성에 잘 맞게 구성하여 전달하는 분이라 생각했던 차, [뚜깐뎐]은 이용포표작가에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만든 수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작부터 의외였다. 제목이 [뚜꺈뎐]이요, 표지의 옛 한글문서도 분명 이 책이 과거를 배경으로 한 것이리라 짐작케 했는데도 불구하고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마우스가 클릭되는 2044년이 배경. 발전된 컴퓨터처럼 이미 예견된 미래의 모습 뿐아니라 캡슐 속에서 혼자 산다든가 지상 지하 수중을 오가는 집이라든가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들 영어를 쓰는 것 같은 황당(?!)한 상황이 펼쳐지며 웬 SF 영화를 보고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뚜깐뎐'. 이 소설 속 소설은 다시금 완전히 새로운 세상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니, 때는 한글(훈민정음)이 박해받고 있는 조선시대의 어느 시점. 정사를 돌보지 않는 왕에게 항변하는 한글 괘서를 붙이고 다니는 일당들, 그들과 우연히 한 배를 타게 된 뚜깐. 한낱 여인이자 천민이었던 뚜깐을 통해 그런 풀뿌리같은 사람 사람들의 크디 큰 희생과 수고가 한글을 지켜왔음을 마치 사극을 연상케하는 등장인물과 장면들로 빠르고 흥미롭게, 동시에 진지하게 풀어내었다.
그런데, [뚜깐뎐]의 '뚜깐뎐'은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이용포표작가의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을 정도로 제대로 된 역사물의 면모를 갖고 있는 반면, 소설의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다뤄지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선 상대적으로 왠지 어색하고 매끄럽지 못하여 몰입의 정도가 떨어지기는 했다. SF물보다 역사물을 더 좋아하는 내 개인적인 취향이 그런 느낌을 갖게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기존 작가에게서 새로움을 발견하여 더없이 기뻤다는 사실.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로 독자를 다시 찾을지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