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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가식없고 인간적인 느낌이 좋아서 집어들었던 책인데, #윤회 #중국 현대사 개인적으로 흥미보다 거부감이 앞섰던 키워드들이었다. 열반에 이를 때까지 전생의 기억이 지워진 채 태어나서 죽기를 반복하는 주인공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고, 중국 현대사는 어렵기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동물로 환생한 주인공이 관찰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면서 ‘영물’로 불릴 정도로 활동적으로 소설을 끌어나가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무겁지 않았다. 초반에 주인공이 저승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장면에서 한 문단에 하나의 색을 할애해서 색감을 집중적으로 펼쳐내는 묘사가 인상깊었다. 저승이 무채색공간은 아니지만 이승의 모습을 볼 때에서야 색깔 하나하나에 흠뻑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주어서 새로운 생을 목전에 둔 주인공에게 이입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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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모옌의 대표소설이다. 최근 표현에 대해 얼마간의 국가검열은 필요하다고 말하여 작가로서의 양심을 의심케 하지만 그 또한 나는 모옌의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검열이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내 개인으로는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지만 필요하다고 보는 견해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의 입장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고, 그 입장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소위 회색지대에 서 있는 사람이다.
모옌은 이미 198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쟝이모 감독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인 <홍까오량 가족>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사회문제에 관한 그의 시각은 알려진대로 보수적이다. 중국의 문화혁명기를 시대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과격한 혁명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농토를 지키며 살아가는 한 개인농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중국의 시골 마을인 서문촌의 지주인 서문뇨는 문화혁명때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총살당해 죽었다가 나귀 소 돼지 개 원숭이로 윤회하였다가 마지막에 다시 사람인 대두 남천세로 태어나는데 이 소설을 전지적 관점에서 서술하는 서술자의 하나이다. 소설의 1부는 서문뇨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에도 집단농에 참여하지 않고 개인농으로 남는 남검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2부는 남검의 후대들의 삶에 대한한 서술이다. 남검은 서문뇨의 머슴이었던 사람으로 정부의 끈질긴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마을에서 유일한 개인농으로 남는 사람이다. 그 와중에 부인과 자식들은 모두 집단농장에 참여하여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지만 개인농이 인간 본래의 삶을 더 잘 반영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개인농을 하면서 받는 여러가지 핍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는 남검을 보면서 자식들은 혼자 개인농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데, 남검은 "아무 의미 없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어 그런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 싶어 그런다. 다른 사람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런단 말이야"라고 대답한다. 집단농으로 변하고 나면 내가 나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이념이 주인이 되고 삶을 이끌어 간다고 본 것이다. 이념 따위에 간섭받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남검의 바램과는 반대로 문화혁명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 하는 남검은 결국은 1무 6푼의 당과 나무 파종기, 수레 하나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은 아들이 집단농으로 들어갈때 모두 갖다 바친다. 아니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재산, 즉 농기구와 가축까지도 집단농에 넣어야 되는 제도 속으로 아들과 함께 바치는 것이다. 아들은 이것을 사회주의혁명의 위대한 성과라고 말하지만 남검은 그저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 줄뿐 자신은 따라가지 않는다.
문화혁명의 바람이 지나가고 다시 집단농이 개인농으로 변화함에 따라 남검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시골에 있는 자기 집을 지키며 온갖 풍상을 겪는 자식들과 친척들을 거두어 들이는 남검은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그저 묵묵히 자신의 신념과 함께 살아가는데 , 모옌은 이 소설을 서술해 가면서 남검뿐만 아니라 집단농의 어느 누구도 비판의식을 가지고 서술하지는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서술할 뿐이며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아니 인간의 삶이라는 것 자체를 판단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중국의 고전소설을 읽는 것처럼 삶이란 것을 윤회의 수레바퀴위에 얹어놓고 보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생명 있는 것들을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게 된다. 서문뇨의 영혼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윤회하는 축생을 보면서 길 가다가 마주치는 짐승들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역사책만을 통해 배운다는 낡은 고정관념만 버린다면 이러한 소설을 통해서도 우리는 흥미진진한 역사를 배울 수 있다. 사회주의체제로 변하는 중국의 역사속으로 직접 들어가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따라가다보면 인생이란 남검의 바램대로 사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단지 사회의 흐름에 빨리 길들여지는 사람과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뿐인 것이다. 때로는 허황하고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전개되고 있지만 모옌은 이 소설을 환타지로 풀지 않고 다른 어느것보다 더 깊이 한 시대의 사회상을 담아내고 있다.또한 거대한 서사적 흐름을 통해 한 시대의 이야기를 유장하게 풀어내고 있는 모옌은 탁월한 이야기꾼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민초들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으니 하나의 소설은 때로 이렇게 깊은 역사와 철학적 통찰력을 제공해 주기도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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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달파]는 소설로 치면 중국 향토 버전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다. 마술적 사술주의의 기법뿐만이 아니라 가족사와 시대사를 묶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모옌의 작품이 마르케스의 것보다 유쾌하고 해학적이라는 점. 나는 마르케스보다 모옌을 한 수 위로 친다. 물론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지만. 영화로 본다면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떠올리게 한다. 공통점은 고정된 공간을 바탕으로 불교의 윤회사상과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인 귀토사상 그리고 인간 욕망의 영원회귀를 그렸다는 점이다. 차이점이라면 모옌은 축생도와 인간도의 육도윤회와 시대변천에 따른 인간 욕망의 외적인 투사를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이 책의 원제인 [생사피로生死疲勞]는 불경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작가의 작품 가운데 소설 한 권에 특정한 농촌마을을 무대로 50여년의 변천사를 담아낸 작품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박경리와 조정래의 작품이 떠오르지만 단권에 담아낸 작품은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의 향토문학은 이미 멸종했지만 중국의 향토문학은 모옌이란 커다란 산맥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모옌은 4인용식탁과 사적인 신변잡기를 탈피하여 가문의 생명사를 장구한 역사적 분위기와 맞물리게 써내려가는 문학적 상상력이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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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기억속에 주말의 명화로 방영된 <붉은 수수밭>이 있다. 원작인 모옌보다는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라는 책을 통해 만난 번역자 이욱연이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껴진다. 그만큼 내게 중국 문학은 아직 친근하지 않다. 더구나 1000쪽이 넘은 책이니, 책을 읽는 동안 책읽기는 고달파 라는 우스개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중국 농촌 소설을 꾸준하게 발표했다는 이력이 보여주듯 <인생은 고달파> 역시 농촌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1950년 1월 1일을 시작으로 2000년에 이르는 50년 중국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소설이라 하겠다. 소설 속 주요 화자는 인간이 아닌 동물이다. 불교의 윤회설을 빌려, 인간이 죽은 후 동물로 환생한 것이다. 서문(西門) 집안의 지주 서문뇨(西門鬧)가 염라대왕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한다.그리하여 환생하였으나 인간이 아닌 나귀, 그것도 자신의 집 안에 나귀가 되었다. 기발한 것은 나귀가 죽어 소, 돼지, 개, 원숭이 순으로 환생을 거듭한다. 나귀가 되어 자신의 머슴을 주인으로 섬기니 그 치욕이 어떨까. 서문뇨가 나귀가 된 시절, 중국은 대대적인 토지개혁에 들어간다. 머슴인 남검은 나귀가 주인이 환생한 것을 아는 듯 그를 극진하게 대한다. 집단농장체제가 아닌 자신의 땅을 고수하고자 하는 남검곁에 결국 가족이 아닌 나귀만이 남으니 참으로 인생은 고달파라는 말이 제격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로 살면서 바라본 세상사, 딱하고도 딱하다. 화자는 이제 서문뇨가 환생한 가축에서 남검의 아들인 남해방과 함께 한다. 서문뇨의 아들이자, 남검의 아들들의 세대에 소와 돼지가 되어 함께 생을 마감하고, 손자들의 세상은 개와 원숭이가 되어 그들을 지켜본다. 그 안에서 50년의 격동의 시간이 흐른다. 남해방이 아내를 버리고 사랑을 찾아 떠날 때, 개가 된 서문뇨는 그의 아내와 아들의 편에서 대립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공산당이 집권하던 시대는 끝이 나고 자본의 물결이 넘쳐 유명 브랜드 나이키나 아우디가 거론되는 시대로 접어든다. 시대가 변화하는 동안, 서문뇨의 둘째부인이자 남검의 아내인 영춘과 같은 세대를 살며 혁명을 주도했던 이들은 모두 죽고 그의 자녀들로 하나 둘 죽음을 맞이한다. 사상의 이유로 서로를 증오하고, 사랑때문에 목숨을 걸고, 인생은 이렇듯 쉽지 않음이 가축들의 세상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모양이 인간과 다를 바 없다. 특히, 나귀, 개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시대는 정말 인상적이다. 인생의 희노애락이 그대로 담겨있다. 의인화된 그들의 세상, 이야기꾼인 모옌은 과장된 익살스러움으로 그려낸다. 소설 속 주인공 격인 남검의 자손의 이름을 보면 해방, 개방, 2000년에 태어난 손자는 천세(千歲)로 이어진다. 인생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 부귀와 명예도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원치않는 생명으로 환생하는 것일까. 돌고 도는 인생사라고 하지만, 그래도 개똥밭에 뒹구는 이승이 좋다지 않냐는 옛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내세가 아닌 현세를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인생이란 달콤한 즐거움이 아닌 쓰디쓴 고통과 슬픔도 안겨주는 것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