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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기행>1편을 읽고 나서, 2편을 읽기에는 조금의 망설임이 있었다. 동양이 시작되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된 작가의 여행에 계속 함께 해야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공간들에 대한 호기심과 작가만의 독특한 여행에 끌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와 조금은 편협하고 차별적인 시각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2편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작가의 여정이 점점 동쪽으로 향하면서 필연적으로 한반도를 거쳐갔기 때문이다.
1편을 읽을때 처음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점점 동쪽으로 여행이 진행되면서 과연 이 여행이 언제 이루어진 것인지가 가장 궁금했었다. 그 해답이 명확히 들어난 것은 작가가 마지막 여행지인 한반도에 도착해서였다. 작가와 택시 운전사와의 대사 중에서 나는 이 여행기가 쓰인 시점을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무려 27년 전인 1981년... 나는 그동안 27년 전의 동양 세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시간과 공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발길이 인도하는 곳과 그가 만난 사람들이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일 수도 있고 작가가 만나고 느낀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이 인간 세상의 보편적인 삶의 형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작가는 여행을 마치고 정리하면서 당시 일본사회가 처한 물질문명의 폐해를 걱정한다. 그리고 일본의 물질문명이 순박한(?) 동양사회로 퍼져나가는 것을 경계한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어쩌면 현재의 동양은 작가의 걱정대로 변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가 우려했던 일본사회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긴 여운을 남긴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새로운 것을 보고 유명한 건축물이나 장소를 구경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여행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면서 자신을 찾는 과정이 진정한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기에 서점에 나와있는 수많은 여행서들 중에서 <동양기행>은 여행의 본질과 자아를 찾는 성찰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몇 안되는 지침서 중 하나일 것이다.
<동양기행>의 아쉬운 점이라면 작가의 시각이 특정한 종교적 관점을 바탕으로 그가 거쳐온 사회와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에 따른 자신의 관점을 불변의 진리처럼 규정해버린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 곳에 삶의 터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몇가지 사건과 느낌만을 가지고 그곳의 사회와 문화, 사람들의 삶을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ps1. 작가가 보았던 티벳의 하늘을 보고 싶다..
ps2. <동양기행>1,2권에는 작가가 여행하며 찍은 수많은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진들이 하나의 사진을 양쪽 페이지에 걸쳐서 수록해 놓았다. 이러한 방식이 사진을 크게 볼 수 있어서 좋을진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론 왠지 하나의 사진을 둘로 나눠버린 듯하여 조금 아쉽다. 접히지 않은 원래 모습의 사진이 더 감동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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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동양기행1) 터키, 중동, 인도에 이어 태국, 미얀마, 홍콩, 한국에서 다시 일본에 이르기 까지.
특히 2편은 '한국'이 속해있어 더욱 흥미를 끌었다. 저자의 눈에 비친 한국의 속내는 어떨지... 여행지도속 '대전, 부산' 에 대한 얘기는 없지만 '서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터일까. 사진은 80년대의 서울인듯 싶었다.
1편보다 더 심오하고, 더 섬세하고, 더 발전된 철학을 독자에게 얘기하는듯 하다. '옮긴이의 말' 처럼 이책은 단순한 기행기가 아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접했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 나갔고, 마지막엔 다시 가벼워졌다.
특히 티베트의 수도원(절)에서 머문 21일동안의 기록은, 마치 다른 세상을 같이 동행한 느낌이다. 범접할수 없는 그들만의 세상에..
<후지와라 신야>. 그는 평범한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상이 아닌것 같다) , 그런것들이 그의 책을 특별하게 만들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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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이 여행의 첫 시작이었던 이스탄불에서 파키스탄의 카라치까지 버스와 기차를 바꿔 타며 매일같이 질리도록 바라봐야 했던 저 메마른 광물적 풍경이 떠올랐다. 광물이 지배하는 서아시아를 달려 아시아 대륙의 중간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이스탄불에서 일본에 이르는 동양 전역은 인도 대륙을 경계로 삼고 있다. 그 경계에 따라 서아시아의 광물세계, 동아시아의 식물세계가 분리되며, 두 세계를 이루는 본성 또한 정확히 분리되고 있다.' -p.73 동양기행 1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점점 분위기가 바뀐다. 서아시아-> 동아시아로 옮겨가면서 좀 더 분위기는 신비스러워 지고 있다. 특히 티베트에서의 사원생활을 읽고 있으면 같이 동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모든걸 버리고 말도 거의 하지않고 먹는것도 흙덩어리 같은 것만 먹으면서 미칠 뻔한 한계점에 다다를때 깨달음을 얻어 사원생활에 적응을 해가는 저자의 모습.
동양기행 2는 티베트-버마(미얀마)-치앙마이-상하이-홍콩-한반도-고야산/도쿄로 여행기의 막을 내린다. 2권에서의 사진들은 1권보다는 색감도 나아지고 분위기도 한껏 부드러워졌다. 역시 여기서도 멋지고 세련되고 웅장한 모습은 티베트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냥 사람들의 모습이다. 창밖으로 바라본 그런 모습을 흐릿한 초점으로 찍었다. 이 책의 좋은 점 중에 하나는 단락이 시작될때 지도로 위치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내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주변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작은 지도가 네비게이션 역할을 해준다.
난 사실 2권에 나오는 '한반도'의 모습이 궁금했었다. 일본인이 바라본 1981년의 한국의 모습은 어땠을까. 내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을 그 당시. 저자는 한국에 와서 왜 청량리 뒷골목에 갔는지 그 음흉함과 칙칙한 모습에 또 한번 실망했다. 한국에 좋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왜 청량리를 간걸까!!!! 게다가 그 안에서의 에피소드 또한 내가 봤을때는 불결하기 짝이 없다. 한반도의 모습에서 같이 나오는 사진들은 웃음이 나온다. 정말 80년대의 그 모습이다. 사람들의 촌스러운 모습. 단순하고 초라하기 까지한 길거리 간판들. 주로 시장에서 돼지머리 삶은 모습이 나왔다. 역시 저자답다.
마지막 부분엔 일본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겨있으나 반일감정 때문인지 그냥 크게 생각하지 않고 읽어나갔다. 일본인의 우월주의랄까 아시아 전역에 일본의 기술이 유행처럼 퍼져나간다는 뭐 그런 내용이다.
동양기행 1,2권을 읽으면서 둘중에 하나를 추천하기보다는 1,2권 모두를 쭉 훑어보는게 좋은 것 같다. 나도 저자와 함께 아시아를 한번 쓱 훑어본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생고생 해가면서 여행을 했지만, 암울하면서도 서민적이고 오히려 빈민에 가까운 그런 곳들의 기행문을 보면서 여행의 새로운 모습을 간접경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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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분노와 금욕이 지배하는 광물적 세계인 이슬람의 바다를 헤쳐 나온 후지와라 신야는 이번에는 신의 세계인 티베트를 찾는다. 지금도 티베트를 여행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당시에 캐슈미르 분쟁으로 인해 아마 국경이 개방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티베트 기행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하늘의 테두리에서 그가 찍은 <하늘, 구름, 바위산, 흙, 초목, 물, 집, 사람, 절>(18-9페이지) 사진처럼 티베트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사진도 없을 것 같다. 하늘과 구름의 광활한 배경을 뒤로 하고, 바위산이라는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흙-초목-물-집 그리고 사람. 마지막으로 티베트 정신세계의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사원에 이르기까지 티베트가 보여 주는 모든 것의 집합체였다. 이 인도령 티베트에서 작가는 라다크라는 지역에 있는 심산의 사원을 찾는다. 엄격하게 기도와 수양을 위한 공간인 예의 사원에서 후지와라 신야는 21일간의 수도에 들어간다. 역시 사원에서의 경험을 원하는 이와 사원에서 삶을 사는 이들 간의 차이는 그가 말하는 흙덩이와 야채즙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21일은 최대한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시간과 공간이 멈춰 버린 듯 그 사원 속에서 그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후지와라 신야가 만나는 이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가 그렇게 그 나라 말들에 정통했던 걸까? 아니면 자기임의 대로의 생각을 적은 걸까, 풀리지 하는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이제는 미얀마라는 익숙하지 않는 이름으로 불리는 버마였다. 이슬람권-힌두권을 거쳐 드디어 불교의 나라에서 다시 한 번 식물적 세계에서 만나는 기습적 폭우, 스콜을 대하는 현지인들의 자세를 관찰하는 작가. 많은 관찰을 통해서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했던가. 주홍색 법복이 인상적이었던 비오는 날의 수채화가 절로 그려졌다. 버마식 카레로 식사를 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응달을 만들어주는 자기희생에 감복하는 모습은 <동양기행>을 읽으면서 느낀 최고의 감동이었던 것 같다. 역시 불교의 나라지만 버마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 주는 태국의 치앙마이로 무대는 바뀐다. 다시 한 번 유곽을 찾은 작가의 광화(狂花) 에피소드는 책에서 소개된 여느 이야기보다 싱겁기만 하다. 회색빛 상하이의 통제된 관광 스토리도 역시 다를 게 없었다. 홍콩에서 우연하게 만나게 된 리콴-유콴 브라더스의 이야기는 역시 개인적 관계가 있어야 흥미를 가지게 된다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불변의 사실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책을 접하기 전에 우리나라에도 들렸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었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었다. 후지와라 신야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의 이미지들은 택시 안에서 들은 판소리와 시장 좌판에 둔기를 맞고 죽은 돼지머리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일 년 전의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 거였고, 여전히 통금이 실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왠지 모를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 번, 복잡하기 그지없는 정치 이야기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리고 마는 작가가 그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돌아간 작가는 오사카 근처의 고야산에서 402일 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자신을 다시 찾고, 되돌아보기 위해 이런 대단한 모험으로 가득한 여행을 시작하고 마무리 지은 작가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한다고 보았을 때, 작가 후지와라 신야와 더불어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많은 순간들을 경험했던 것 같다. 눈발이 내리는 이스탄불의 황량한 거리에서, 지중해 태양과 장미향이 깃든 안탈리아에서, 지상에서 가장 더럽다는 캘커타의 숙소에서, 시간과 공간이 멈춰버린 라다크의 이름 모를 사원에서, 사람 응달을 만들어 준 버마의 노천식당에서의 그 특별한 경험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서양의 물질세계와 동양의 정신세계라는 아마도 서양에서 유래한 그의 도식적인 이분법적 분류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행자는 결국엔 타자의 시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근 30년 전에 ‘동양기행’이라는 이런 멋진 기획을 하고, 실천에 옮긴 한 사나이의 열정에 마냥 부럽기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