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중에는 읽은 사람의 심기를 콕콕 찌르듯이 불편하게 하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저자는 바로 머레이 북친이다. 북친의 대부분 글은 내 혀에 돋은 바늘처럼 읽기에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글의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 글의 주장이 매우 독설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에 번역된 '휴머니즘의 옹호'도 그 한 예이다. 북친은 이 책에서 소위 '사이비 생태주의자'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에드워드 윌슨(사회생물학의 창시자), '공유지의 비극'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게러드 하딘, Earth First 운동을 주도한 Deep Ecologist, 각종 생태신비주의자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북친이 이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간단한데, 그것은 이들 모두가 반-인간주의적 정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제부터인가 환경운동을 옹호하는 개인이나 단체 중에 반-인간주의 감정을 지닌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거칠게나마 요약하면 모든 환경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은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환경운동은 인간이외의 생물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을 보호하기 위한 인간의 책임성을 망각하는 오류를 낳는다. 즉 생태파괴의 주범이 인간이라면 그 문제해결의 책임 또한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환경을 보호하는 것과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최근 부쩍 인간 또한 여러 생물 종과 마찬가지의 유전자 조합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는 자연과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무시한 주장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속의 관계속에서 형설될수 밖에 없으며, 인간-사회-자연관계의 복원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이 지닌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릴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인간만이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판단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근거도 약할 뿐 아니라 무책임한 것에 불과하다. 도리어 인간이기를 거듭 주장해야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이성을 더욱 발휘해야만, 지금의 문제를 슬기롭게 해쳐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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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레이 북친은 새로운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반인간주의 문화를 강도높게 비판한다. 반인간주의는 인간의 자기 진보 능력, 기술적 재능, 진보의 잠재성, 이성의 권능 자체를 비웃고 폄하한다. 반인간주의가 전하는 메시지는 주로 정신 위생이나 개인적 도피에 관한 것, 이성과 자기 혁신 능력과 같은 인간적 속성이 자연계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과 관련된다. 특히 낭만주의에 근거한 반인간주의는 현대의 세속 권력에 진지하게 맞서지 않고, 대체로 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대체로 선사시대의 신화적 정신성에 의지하던 직관주의와 비이성적 통찰력을 찬양한다. 문명, 진보, 과학 따위의 실재성을 부정하거나 존중되어야 할 목표로서의 그 가치를 부인함으로써 격하시킨다.
역자 구승회는 머레이 북친의 생태사상을 '에코아나키즘'으로 정의한다. 에코아나키즘은 우선적으로 자연과 사회의 일원성과 연속성을 주장한다. 생태/환경주의자들의 중심축이 인간보다는 자연에 쏠려 있고 인간 사회 활동의 부산물이 기본적으로 자연에 해가 되는 것이라 여겨 인간의 활동을 제약하고 규제하는 방향이라면, 북친의 생각은 인간의 활동 자체보다 그 방식과 내용이 문제라 판단하여 인간이 사회를 어떠한 방식으로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생태적인 사회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 환경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에 대적할 가장 강력한 양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환경 보호주의는 잘 먹고 건강하고 금연운동, 자전거 타기 운동, 채식주의 운동을 하며, 황무지와 손상되지 않은 자연을 찬양하고, 엄숙하고 금욕적인 섹스를 하는, 이른바 르네상스와 근세 고전주의 시대에 마녀를 사냥했던 청교도, 예수 재림 교회, 여호와의 증인, 모르몬교 등의 정신적 산물이다. 북친은 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 아나키즘에 근거해 반인간주의에 근거한 환경지상주의를 강도높게 비판한다. 이런 환경 지상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미국의 보수적인 전통주의자, 뉴에이지 신비주의자, 낭만주의적인 사회주의자, 신맬서스주의자, 그리고 퇴페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와 허울뿐인 다원주의자들이 있다.
머레이 북친은 낙관주의자의 박애주의나 혐오스러운 염세주의 중 어느 쪽에도 근거하지 않고 이 두 가지 편향된 견해를 초월하는 새로운 철학을 지향한다. 북친의 눈에 이 새로운 철학이란 다름아닌 '상보성의 윤리'에 기초한 새로운 휴머니즘이다. 고전적 휴머니즘이 종교적 광신주의, 종교적 신비주의, 낭만주의, 민족주의 등의 비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계몽적 휴머니즘이라면, 새로운 휴머니즘은 위계질서주의, 문화적 원시주의, 생태 신비주의와 천사 신드롬, 생물학적 환원주의, 뉴에이지 영성주의, 환경보호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에코 휴머니즘이다. 북친은 인간은 만물에 해로운 존재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생명 중심주의도 거부하고, 만물은 오로지 인간의 쓸모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인간 중심주의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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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친의 생태이론이 핵심은 생태문제는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에게 <사회문제>란 초인간적으로 이미 결정 혹은 폐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동적 실천에 의해 열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없는 생태론, 인간의 능동적 <실천>이 결여된 생태론은 북친에게 실날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는 이런 경향들을 대개 인간혐오주의, 신비주의, 원시주의 등으로 이름붙이며, 그 구체적 비판 대상들은 윌슨의 사회 생물학, 도킨스의 문화적 유전자 결정론, 에를리히 등의 신멜서스주의, 네스 등의 심층 생태론, 낭만화된 (상상적) 원시에 근거한 원시적 영성(primitive spirituality) 찬양, 기술을 정연명령으로 보는 기술공포적(technopobia) 경향들, 인간의 수동성과 무위성에 대한 정당화로 나아간 하이데거를 직간접적으로 계승한 포스트모던 허무주의, 그리고 파이어벤드 류의 인식론적 상대주의 과학철학 등을 하나하나 논파 혹은 빈정거린다.
북친의 날카로운 비난 혹은 빈정거림은 바이마르 시대에 대두된 보수주의 혁명론이 유포된 이래 인간의 능동적 문제 해결 능력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해온 몽롱하거나 결정론적인 여러 이념들이 여전히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채 다시 재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자 구승희씨는 저자가 빈정거리는 몽롱한 생태이론가의 한 부류가 된 때문인지 해설문이나 후기에 직절적인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역자가 자기가 번역한 책에 대해 이렇게 감정적인 반응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경우는 나로썬 처음이었다. 그러나 구승희씨의 비난은 충분하지도 구체적이지도 못하며 인신공격적 성격이 너무 노골적이다. 개인적으로 별을 다섯개 주고 싶지만 번역 상태가 후반부로 갈수록 성실성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역자의 해설 역시 그다지 성실하지 못하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학부생들에게 요약을 맡겨서 대충 짜깁기한 인상을 주는 해설이었다. [인상깊은구절] 그러나 2차 대전 후 우리 시대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반발을 사회적 수단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회 문제로 보지 않는다. 현대의 사회 병리학은 기술의 성장, 인구, 개인적 태도와 같은 원인보다는, 문명 그 자체 - 한마디로 휴머니즘, 인간 중심주의, 이성, 과학과 같은 결과에 더 관심을 갖는다. 시장 경쟁과 자본의 전지구적인 집중이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혼란의 직접적인 근원으로 우리의 눈앞에 제시되고 있을지라도, 이런 흐름은 지금 <소비자 중심주의> <인간 중심성> <정체성의 상실> <신성의 부재> 등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하는 반인간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신비화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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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레이 북친은 생소한 이름이다. 알기로는 독일 녹색당의 이론적 배경이고, 미국이나 서구에서는 이미 상당한 명망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에코 아나키즘은 생소하기만 하다. 생태주의와 아나키즘으로 명명되는 그의 사상적 배경이 궁금하기도 하고 또 거의 들어보지 못한 이름을 암기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이 책은 나에게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이 책은 다만 끊임없이 휴머니즘에 반하는 반인간주의에 대해서 독설을 퍼붓는다. 읽는 중간중간에 책읽기의 불편함을 몸소 느끼게 하는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도 엇비슷한 내용으로 일관한다는 말에 더 이상 책찾기를 그만두게 만든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서 얻은 것은 반인간주의 철학에 대한 돌아보기이다. 뉴에이지, 가이아이론, 심층생태론, 프리초프 카프라, 포스트모더니즘 등은 이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분야이고, 지금도 내 서재에는 몇 권의 책들이 목을 내밀고 있는데, 머레이 북친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이 책들에 대한 부정의 근거를 마련했으니 손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에코아나키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나는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를 읽고 있는데 머레이 북친을 접한 후 이책은 때로는 지독하게 혐오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부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혹 쉽게 접하는 생태이론이나 반자본주의적 삶의 지향에는 중산층의 여유를 삶에 대한 지루함으로 해석하는 오만함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진정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인가 개인적인 것인가?... 여러 화두를 던져주기에 이 책은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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