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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바로 그들의 진정한 세계였다. 금속과 시멘트의 도시가 아닌, 이 모래, 이 돌, 이 하늘, 이 태양, 이 침묵, 이 고통은 샘이 흐르는 소리와 인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그들의 세계였다.’ 사막, 그곳에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모래만 존재할 것 같은 그들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하여 조상들은 ’문명’ 과 싸우며 그곳을 지켜냈다. 태어나면서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조상과는 ’단절’ 된 그녀는 고모인 아암마와 함께 살아가며 엄마의 이야기,조상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소설은 랄라의 조상인 ’누르’ 의 이야기와 현재 사막에서 살고 있는 ’랄라’ 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날실과 씨실처럼 엮어 아름다운 한편의 서사시를 만들어냈다. 모래사막과 바다가 전부인 그곳, 그녀가 문명세계에 대하여 전해 듣는것은 ’나망’ 이라는 늙은 어부에게서가 전부이다. 그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가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사막을 사랑하고 자연이 몸에 벤 강인한 소녀이다. 사막에는 말은 통하지 않지만 ’휘파람’ 만으로도 동물을 움직이고 통제하게 하는 목동인 ’하르타니’ 가 있다. 그는 그녀보다 두살아래지만 그의 강인한 눈빛과 거침없이 사막을 제 집처럼 질주하는 그에게서 강한 사랑을 느낀다. 그런 그녀에게 문명세계에서 온 결혼할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가 가져온 ’문명’ 이나 ’돈’ 으로 비유될 것들은 그녀에게 필요치 않다. 랄라에겐 아무것도 없지만 사막의 자유로움과 자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하르타니가 그녀의 삶의 안내자이고 동반자인것 것이다. 하르타니도 그녀도 사막을 떠나서의 삶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함께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온몸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순간, 그곳은 그녀에게 어머니이고 한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인 곳이다. 사막에서의 행복한 기억들, ’랄라는 모든 길들과 모래언덕의 움푹 파인 웅덩이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눈을 감고도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맨발로 땅을 디디기만 해도 지금 어디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안전하고 행복한 곳에서 비록 먹을 것은 부족하지만 행복으로 충만한 그녀의 사막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아름다운 시처럼 고운 모래알로 박혀 느린 템포로 읽어야만 사막 곳곳을 탐험하고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카메라’ 로 찍어 놓은 듯 정교하게 그려낸 문장들은 급속은 안된다는 경제속도를 숨겨 놓은 것처럼 진도가 나지 않는다.그래도 작가가 그려낸 정교한 모래언덕을 함께 걷고 있는 것처럼 독서의 즐거움은 스러지지 않는다. 하르타니와 새로운 삶은 선택하여 탈출을 하였던 그녀,마르세이유의 허름한 빈민가에서 새로운 삶에 도전을 하지만 껍데기만 다른 삶, 마음은 늘 ’사막’ 의 자유롭고 자연과 함께 하던 그 때로 향하고 있었다. ’ 다음에 떠나실 때는 나도 데려가주세요.’ 랄라가 나망에게 말하면 ’ 그렇지만 너는 가게 될거야. 이 도시들은 모두 볼 수 있을 테지.그리고 나처럼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게야.’ 나망이 다시 사막으로 돌아온 것처럼 랄라 그녀 또한 마르세이유의 삶에 길들여지기도 전에 그녀는 원시의 삶인 살아 숨쉬는 사막으로 돌아와 하루타니의 아이를 출산한다. 사막에서 살 때는 문화적인 삶을 동경했지만 막상 자신이 그 삶을 겪어 보고는 물질이 풍부한 삶이 모든이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에게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하고 강인한 사막이 자신이 살아야 할 곳이란 것을 알게 된다. ’대사막, 그곳에서는 말야, 사람들이 며칠을 걸어도 집 한 채 보이지 않고 우물 하나도 마주칠 수 없을 때가 있단다. 왜냐하면 사막은 너무 광막해서 아무도 사막을 전부 샅샅이 알 수가 없기 때문이야. 사막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마치 바다 위에 뜬 배에 타고 있는 것과도 같아서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어,어떤 때는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하지.’ ’도시는 이상한 곳이다.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사막에도 삶이 있고 자유가 있고 자연이 있고 폭풍우가 있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문명이 발달된 곳만 역사가 있고 행복이 있다는 것보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 들이는 작가의 역량이 담겨 있다. 랄라가 일탈을 꿈꾸는 삶은 우리도 한 번쯤은 꿈꾸며 산다. 하지만 자신이 사는 일상에서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살는 삶이 대부분이라면 한번쯤 경험을 하듯 새로운 일탈을 행하며 산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한 듯 하다. 마르세이유에서의 삶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 또한 사막의 자유에 너무 깃들여져 있어서가 아닌가 한다. 이 책은 언젠가는 꼭 한번은 ’사막여행’ 을 하고 싶은 로망을 가지고 있어 더 읽게 되었다. 작가의 다른 책들을 가지고 있지만 ’노벨문학상’ 의 작가들 책은 왠지 더 읽혀지지 않는다.작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더 뒤로 미루다 잡게 되었는데 언젠가 티비에서 보았던 사막여행중 장면중에 물한방을 떨어 뜨리니 바삭 말라 있던 죽은 식물과 같았던 것이 금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사막의 자연에 길들여진 식물을 보고는 모래뿐이라고 알고 있는 그곳에도 생명이 있는 식물과 동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더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소설도 더 재밌게 읽었을지 모른다. 랄라가 누리던 사막의 자연과 자유과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결코 누릴 수 없고 볼 수 없음을 알기에 그녀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사막을 떠나보고나서야 진정한 사막의 가치를 발견하듯 다시금 되돌아온 그녀의 앞으로의 삶이 희망적이고 새 생명이 있기에 더 기대가 된다. 청색인간의 피를 물려 받았지만 조상과 어머니와 단절된 그녀가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고 만들어 가는,새 생명의 잉태가 모성애를 품은 사막이어서 더 행복인지 모르겠다.소설을 읽는데 속도가 나지 않아 조금은 조급하기도 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읽다보면 한편의 시를 읽듯,한장의 정교한 그림을 보듯 사막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조상의 이야기는 왼쪽 페이지가 약간 들어가게 하는 정교함으로 현실과 구분 지어 놓기도 하는 세세함 속에 정말 정교하게 짜여진 한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본 듯한 느낌은 비단 나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작가를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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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문장이란 말을 별로 믿지 않았다. 소위 아름답다는 말이 가진 허구성때문에, 또는 아름다움을 빙자해 치장에 급급한 속알맹이가 허술한 글들때문에 그랬다. 게다가 너무 아름다움에 신경쓰다보면 글에 힘이 빠져 지겹기 마련이거든. 오히려 찰지고 간이 섬뜩할 만큼 가려운데 팍팍 긁어주는 글이 진짜 참글이라고 믿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읽어내려가는 순간 미사여구에 신물내기로 유명한 내가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부드러운 글이 모두 무뇌형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 들기 시작했다. 앞 부분 누르의 이야기에서 적어도 내게는 문학의 또다른 가능성, 아니 문학자체에서의 본연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등한시한. 랄라의 이야기는 질투와 시기와 폭력이 난무하는 복잡한 현대사회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랄라가 사는 곳은 현실적으로는 20세기말이고 또 21세기의 느낌을 얻지만 그녀의 정신과 마음이 사는 곳은 고요하고 강력한 원형의 세계이다. 굳이 자연이란 말을 쓰고 싶지는 않은 것이 자연이란 현대문명에 반하는 의미라기보다 그저 인간이 몸담고 있는 배경이라는 생각이므로 현실적인 랄라의 환경역시 자연이라고 보고싶은 이유에서다. 때문에 랄라의 생각은 자연적인 것조차도 초월하는 '원래 그랬던' 인간종족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그녀의 조상 사막의 청색인간은 우리 모두가 돌아가고 싶은 이상향이다. 사실 기독교 문명이 다른 문명에 끼친 좋은 영향 못지 않게 폐해와 악영향을 이리도 조심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평화적으로 속삭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때는 20세기 초반, 곳은 아프리카북부의 사막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은 지금 지구촌 어느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너무 커서 사회적 파장이 어마어마할 수도 있고 내주변의 지리멸렬한 수준일 수도 있지만 폭력은 상처를 남기고 혼돈을 일으킨다. 이 작가의 미려한 간접화법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과연 지금 여기에서 약자가 누구인가를 환히 내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소설에서 약자의 위치에있는 자, 핍박당하는 자 스스로는 결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너무나 강하고 온건하고 맑으며 뛰어난 공평성의 혜안을 가진 자이다. 그래서 다음 세상의 평화에 중요한 주춧돌이 될 사람이다. 작가의 이상을 좇아 우리도 따라가면 오물이 묻지 않은 진짜 '아름다운' 세상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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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르 클레지오'의 "사막" 200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사실 이 책을 읽는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 '아나톨 프랑스'의 "펭귄의 섬"을 읽을 때도 역시 그러했지만 아직도 노벨 문학상 수상작들은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혹시라도 서평을 잘못 작성하여 '르 클레지오'와 아울러 문학을 사랑하고 아끼는 많은 분들께 누가 되지는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저 책을 읽으며 느꼈던 느낌을 고스란히 적어보려 한다.
소설을 읽기 전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 표지의 이미지였다. 한참동안 눈길을 머물게 했던 표지 이미지, 한 장의 이미지를 통하여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과 아울러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사막에 대하여 무엇인가 끊임없이 드러내려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동시에 엿볼 수 있었 던 것 같다.
미지에 가까운, 황폐하기 그지없는 사막과 그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문명화된 도시인들 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유라는 것을 어렴풋 느낄 수 있었던것 같다. 문명의 이기 속에서 구속당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애처롭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사막 생활에 대한 동경 까지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물을 관찰하고 느끼는 작가의 눈이 예사롭지 않음이 장면장면 잘 묘사되어 있는듯한 느낌 을 수시로 느낄 수 있었다. "사막"을 읽고 있으면 주위의 어지럽던 일상들을 잠시 잊고 소설 속의 현장에 뛰어들어 함께 그 장면들을 즐기고 아울러, 소설 속의 인물들과 함께 어울려 마치, 장면 속의 실존 인물이 되어 동화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듯 하다. 불어오는 바람과 부딪치는 파도의 노랫소리와 속삮임을 통해 잠자고 있던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듯 느껴지기도 한다.
"사막"의 저자인 '르 클레지오'는 소설을 통하여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 들에게 적지 않은 그릇된 통념들에 대한 일격을 가한다. 통속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생각들에 대하여 거침없이... 많은 문학작품들이 그러 하겠지만, 이 책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버리는듯 하다. 사소한 사물 하나하나를 세부적인 묘사를 통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우려 하였 지만, 오랜 시간 동안 내용을 연결 지으려 반복하고 또 반복하기를 수 차례나 되풀이 했다.
슬픔과 기쁨, 환희와 쾌락, 아픔 등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교차되어 지났지만 가장 강력하게 뇌리에 남겨진 것은 다름 아닌 '자유'가 아닐까 결론 지어보고 싶어진다. 볼모지에서 거친 모래바람 속에서 온몸을 내맡기며 자유를 만끽하는 랄라를 통해서, 인간의 언어는 모르지만 눈빛과 침묵으로 소통하는 하르타니를 통해서...
무언가 답답한 생각이 드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성급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사막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자유를 느끼고 휴식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좋은 작품을 출판해주신 '문학동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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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 하늘, 땅은 회색과 황토색으로 지평선까지 뻗어있다. 가벼운 바람의 떨림도 들리고 메마른 계곡을, 붉은 바위 위를 맨발로 거침없이 달리는 아이. 대기는 향기로 가득 차 있고 그 향기는 움직이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교차하고 서로 섞이며 흩어진다. 두려움의 냄새를 피우는 작은 동물들, 뜨거운 모래 위에 반사되는 햇빛,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모래언덕. 발이 찢어지는 듯한 상처에 닿는 고통도 고통이 아니다. 랄라와 하르타니는 그런 사막이 집이고 고향이고 삶이다.
그런 고요한 사막의 모래 위를 오래 전에 사람들이 걸어갔다. 광야에 하늘은 끝간데를 모르고 뻗어있고 모래가 날리는 가운데 사람들은 걷기만 했다. 사막을 온 몸으로 살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사막의 투사들이었다. 물눈동자인 마 엘 아이닌 그리고 청색인간들 그들이 무적의 투사들이었다. 물도 귀하고 먹을 것도 귀했지만 믿음만은 강했던 부족, 말벌과도 파리와도 함께 더불어 사는 삶, 금도 뱀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바로 그곳이다. 그런 사막의 땅에서 쫓겨나 그들은 북으로 북으로 걸어야했다.
<그곳이 바로 그들의 진정한 세계였다. 금속과 시멘트의 도시가 아닌, 이 모래, 이 돌, 이 하늘, 이 태양, 이 침묵, 이 고통은 샘이 흐르는 소리와 인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그들의 소리였다. 자연의 질서만이 군림하는 이곳 사막에는 모든 것이 가능했고,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의 주변을 한 점 그늘도 없이 걸어갔다.>
문장마다 시가 넘쳤다. 사막의 모래가 날리고 그 모래와 함께 자연의 향기가 퍼졌다. 이와 함께 두 가지 스토리가 병행적으로 우리를 대사막으로 이끌어갔다. 누르가 보는 옛날 옛적의 사막의 투사들의 이야기와 랄라가 끌고 가는 이야기, 바로 이 두 가지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적인 문장이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건조하게 눈을 아리게 하고 가슴을 후벼 파기도 했다. 이들의 침묵의 고통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읽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럽고, 불안과 동정심을 가장 불러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들의 침묵이었다. 말을 하는 자도 노래 부르는 자도 없었다. 우는 자도 신음하는 자도 없었다. 남자들, 여자들, 발이 피투성이가 된 어린아이들, 모두 패배자처럼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전진하고 있었다. 단지 모래를 밟는 그들의 발소리와 헐떡거리는 짧은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허리에 맨 짐 보따리를 추켜올리고, 마치 폭풍우에 스러지는 이상한 날벌레들과도 같이 천천히 간격이 벌어져갔다.>
이런 사막에서 살던 랄라에게 마르세이유라는 거대한 도시는 이상한 곳이기만 하다. 도시는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기’ 때문이다. 온갖 문명이 있고 자동차와 전기가 있지만 랄라에겐 공허와 비탄과 배고픔의 두려움이 있는 곳이다.
<랄라는 이런 거지들을 볼 때나 아니면, 가슴팍에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못생긴 젊은 여인이 큰길 모퉁이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조여든다. 그녀는 두려움이 무언지 예전에는 잘 몰랐다. 왜냐하면 그곳, 하르타니와 함께 있던 곳에서는 뱀이나 전갈, 때때로 밤에 그림자 속에서 손짓하는 나쁜 귀신들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허와 비탄과 배고픔의 두려움이 있다.>
랄라는 결국 노래를 부르며 대사막으로 돌아간다. 그 옛날의 노래, 아암마가 불러주던 노래, 그녀의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이다. 그 노래는 건조한 모래사막을 자연의 향기로 깨우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노래이다. 그래서 그 노래는 생명의 노래이고 사막의 노래이다.
<어느 날엔가는, 까마귀가 흰 새가 되고, 바다가 마르리, 선인장 꽃속에서 꿀을 찾으리라. 아카시아 가지들로 잠자리를 만들리라. 어느 날, 오, 어느 날엔가는, 뱀 입 속에도 독이 사라지고, 총알을 맞아도 죽지 않으리. 그러나, 그날 나는 내 사랑을 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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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의 이름을 알게된 건 순전히 노벨문학상 덕분이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노벨문학상에 그리 관심이 많았던건지, 단지 불황 탓인지 인터넷 쇼핑몰마다 르 클레지오 타령이라 얼결에 몇 권 사 들였다. 구간인 책들은 거의 반값에 팔기도 하더만 이 책은 절판되고 새로 출간된 '신간'인 탓에 몇달간 침만 바르고 있었더랬다. 신간 소설을 사기엔 뭔가 아까웠던 탓에. 이럴땐 가끔씩 술 마시고 질러주는게 필요하다. ^^ 덕분에 보관함에 갇혀있던 신간들이 뭉텅이로 탈출 성공.
'황금물고기'나 '우연'의 주인공처럼 이 책의 주인공도 어딘가 신비한 소녀다. 자연 - 다른 생명과 교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결코 기죽지 않는 당당한 카리스마를 가진. 그리고 뼛속까지 자유로운 소녀. 그들에게 도시/도시사람들은 생명력을 잃은 무미건조함, 숨막힐듯한 답답한 감옥들이다. 그들은 언제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고, 그렇기에 더욱 다가오는 순간들에 몰입할 수 있다. 과거/현재에 얽매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는 자유로움.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생명력. 이런 책들을 읽다보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들처럼 나도 자질구레한 일상의 고민따윈 잊어버리고 무언가게 홀릴 수 있을까? 몇시간이고 웅크리고 앉아서 바람의 노랫소리, 파도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까?
르 클레지오의 문체는 '펜카메라'라는 평을 듣는다고 한다. "카메라로 찍은 듯 객관적인 서술로서 묘사하지만 일상의 눈으로는 발견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그려낸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확실히 그의 문장은 짧고 건조하다. 물이 뚝뚝 듣는듯한 직접적인 감정표현은 거의 없고 대부분 감정을 '묘사'해낸다. 마치 막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현재시제는 '묘사'의 느낌을 더욱 살려준다. (이 책은 주인공 '랄라'의 현재 이야기와, 수십년 전 '문명인'들에게 말살당한 그녀 부족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다. 랄라 이야기는 전부 현재시제고, 그녀 조상 이야기는 일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과거시제다.) 무심한듯한, 하지만 세세한 묘사를 더듬다 보면 어느새 장면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몽환적인 분위기.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들어도 좋을듯한.
랄라의 조상은 청색 인간. 몇 달 동안을 사막에서 지내도 배고프거나 목마른 표정이 없는, 사막의 태양에 화상을 입지도 않는 투사들이다. 그들의 지도자가 약속한 땅을 향해 시작도 끝도 없이 떠도는 사람들. 유럽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하나 둘 씩 스러져가는 부족들. 꿈속에서처럼 나타나고, 꿈속에서처럼 사라진 그들. 사막에서 태어난 랄라는 사막 한가운데서 거센 모래바람에 몸을 내맡기며 자유와 행복을 느낀다. 문명인들은 사막의 유목민을 내쫓고 사막을 정복하지만 도시 속 문명인들은 더이상 생명력이 없다. 쫓기듯 도시로 흘러든 랄라는 습관처럼 그들의 생활에 적응하지만 이내 미련없이 사막으로 떠난다. 그녀 눈에 비친 도시인들은 삶을 잃은 노예들일 뿐이다. 랄라가 내뿜는 충만한 생명력에 홀리듯 빠져드는 사람들.
타고난 유목민 하르타니 역시 멋진 캐릭터다. 인간의 말을 모르지만 사막의 생명들과 소통할 수 있는 목동. 그와 랄라는 눈빛으로 소통하고 침묵으로 충만해진다. 랄라와 하르타니의 사랑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중 하나다.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 없이도 충분히 그 떨림이 전해져 마음한쪽이 설레고 따뜻해진다. 르 클레지오 소설(황금물고기, 우연)에서 묘사되는 사랑-섹스 장면은 늘 조금은 신비스럽고 몽환적이다. 끈적이는 단어 하나 없이. 귀에 감겨드는 달콤한 음악처럼. 사막 한가운데 나란히 누워, 쏟아지는 별빛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소년과 소녀. 말하지 않아도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감정들.
광활한 자연속에 내던져진 사람들. 정복하려고 하지도 않고, 정복할 수도 없는 거대한 힘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순응하며 오히려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 도시속 현대인들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소통 방식들. 이런 류의 글을 읽을때마다 현대인들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생각한다. 죄인의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는. 판타지 같은 몽환적 분위기에 빠져드는 건 우리 마음속에 각인된 어떤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충만한 삶에 대한 그리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찾지 못할 삶에 대한. 언제든지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엔 너무나 소심하고 용기가 부족한 탓에 오늘도 우리는 꿈을 꿀 뿐이다.
우리에게 '사막'이란 단어가 '모든것이 메말라 버린 불모의 땅'인 까닭은, '문명인'들이 정복하지 못한, 결코 정복되지 않을 자연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막이 잉태한 생명들에게는 그곳이야말로 충만한 힘의 원천이다. 랄라에게 사막이 그러하듯이...오늘도 우리는 얼마만큼의 생명력을 죽이며 살아가게 될까?
사족 : 처음 받아들땐 별로 못느꼈는데. 다 읽고 덮을땐 유난히 표지가 거슬린다. 어딘가 "뽀뽀뽀"스러운 분위기랄까. 이 책에서 그려지는 사막과 소녀, 그리고 태양 혹은 달-빛은 무언가 신비하고 경건한 '생명의 원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표지는 너무 발랄하잖아. 이건 사막이 아니라 무슨 '세트장'에 큰 백열전구를 설치해 놓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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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아이들이 읽으면 좋겠다 싶어서 산 책 '발라아빌루'... 참 아름다운 이야기구나~ 생각했었는데, 책 말미에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가 쓴 '사막'이라는 책 중간에서 발췌를 했다는 말에 허겁지겁 인터넷을 뒤져서 손에 넣은 책.. '사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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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간문에 문학서적을 읽었다. 읽고 싶은 욕망에 찾게되었으면서도 쉽사리 시작하지 못했던 나의 독서는 중반을 넘어가며 책의 매력을 알아간다.
나름 많은 독서량을 자부하면서도 아이들과 함께하는 나의 독서활동은 정보를 전달하거나 아이들관련 분야에 치중하고있었다. 그렇게 쉽고 당장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분야의 책을 만나다보니 많은 사고를 요하게되는 문학서들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며 올해는 꼭 한번 챙겨보리라 벼르던중에 사막을 만났다. 그렇게 나의 욕구에 기인해 만났건만 쉽사리 잡아지지가않았다. 빼곡히 쓰여진 글자를 바라보면서도,어렵게 시작했건만 작가의 상상력을 천천히 음미해야하는만하는 언어적 유희를 만나면서도 역시 나에게 문학은 넘 어려워 푸념어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정복당하지 않을듯했던 사막을 난 정복했다. 그리고 내나름의문학적 참맛을 느꼈다. 오래간만에 맛본 희열이었다. 전설속 청색인간의 후예이자 고아인 랄라 그녀는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자연에 동화된 삶을 살아간다. 모래와 별이 좋고 양을 사랑하고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다.
그렇게 그녀가 바로보는 사막의 모습은 시간이 정체된듯 한없이 느리게 펼쳐진다. 끝을 알수없는 사막만큼이나 르 클레지오라고하는 작가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랄라가 살고있는 공간과 시간속으로 끌고간다. 하지만 영원히 머무를것같았던 그 공간을 떠나는 랄라와 함께 나도 사막을 건넜다. 그리고 새로이 마르세유라는 도시에 또아리를 틀어버린다.
그렇게 프랑스라고 하는 문명에서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사막을 바라보게된다. 하지만 그런나와 달리 그곳은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고 있었으며 전설과 총이 대결을 펼치고 자연과 문명이 맞서고있다. 그리고 그곳은 이젠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곳을 지키던 사람들은 사라졌다. 사랑하는 하르타니의 아이를 가진 랄라가 자신의 엄마가 그러했듯 청색인간의 후예인 아이를 위해 찾아갈곳도 남겨놓지 않은채... 그곳을 지켜내야할 유목민들과 함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간 아픔을 안고있는 빈껍데기 사하라사막을 배경으로 작가는 가진것없는 고단한 사람들의 삶 문명에 맞서 옛것을 부여잡고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전하고있었다. 난 랄라의 이끌림과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의 마력에 젖어 천천히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가며 오래간만에 현란한 언어의 유희속에 풍덩 빠져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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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천천히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려워서가 아니다. 책의 리듬감이 무척 느리기 때문이다. 빨리 읽어도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는데 아무런 지장은 없겠지만, 이 책이 함유하고 있는 풍부한 자양분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할 우려가 있기 떄문이다.
좋은 책들이 항상 그렇듯이 이 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또한 읽는 도중에 읽은 과정을 즐겁게 해준다. 무척 편안한 문장으로 쉽게 해주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따라서 천천히 눈앞에 떠오르는 광경을 보면 때로는 아름다움이 때로는 슬픔이 느껴진다.
이 책은 아름다움과 슬픔, 비장함과 우아함, 광폭함과 그 모든 것을 이기는 꿈이라는 것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위에 열거한 그 모든 단어들이 표현하는 것의 합이거나, 그 모든 단어들로 제약을 받기를 거부하는 책일 수도 있다.
그렇다. 사막이란 책은 이 책을 느린 호흡으로 읽기를 마음을 먹는 사람에게 그 책을 읽는 사람만의 다양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는 책이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구수한 옛이야기는 할머니의 해소 섞인 호흡의 결을 따라가야 제대로 그 맛을 느낄수가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이 책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맛을 음미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도식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야성과 문명의 대립, 원초적 자연과 문명의 충돌, 과거와 현실의 교차, 오늘날 사람들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비판... 그런 단어들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흔한 주제들을 말하는 단어로는 이 책이 주는 감동의 유니크함을 다 포괄할 수가 없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요소들을 초월하는 하나의 큰 감동의 덩어리. 바로 그런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듯하다. 작가도 그런 흔한 대립을 감추려고 여러가지 설정을 한 흔적들이 보인다. 대립을 넘어선 상생. 그렇게 이야기 하기에도 무언가 표현이 부족한 내 언어가 안타까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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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의 <사막>이 새롭게 나왔다는 소식에 구입한 책.
예전에, 이 책을 원서로 읽은 적이 있었다. 지하철- 그것도 사람들로 가득 찬 냄새 나는 2호선 안에서. 낡은 쇳덩이에 피곤에 절은 몸을 싣고, 양복 입은 아저씨들의 술냄새가 진동하는 열차 안에서, 나는 그 책을 꺼내 아무 곳이나 펼치고 몇 페이지를 읽었었다.
그리곤 몇 문장 읽지 않았는데 나는 마치 다른 공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위의 모든 피로함, 적대적인 사람들, 불쾌한 냄새,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어느샌가 나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거센 바람을 맞으며 모래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랄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시적인 동시에 웅장한 그 언어...
그때의 기억, 몇 장 읽지 않았지만 그때의 경험이 이 책의 이미지였다.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도 당연히 읽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서로는 완독을 하지 못했기에 더욱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읽은 <사막> 역시 같은 감동을 내게 전해주었다.
전체 내용을 다 알고 나자 더욱 멋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묘사 하나 하나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스케일과 줄거리가 주는 감동 역시...
이 책에 빠져드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소설의 괴리감이 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그가 묘사하는 광경과 이미지를 그려보며 읽으면 왜 그가 노벨상을 탄 작가인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도시에서의 삶이 진저리나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이 책을 또다시 펼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는... 정말 아프리카의 한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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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의 소설을 따라잡는 시간, 그 3번째는 ‘사막’이다.
‘사막’은 가슴 아픈 소설이다.
이 소설이 프랑스에서 큰 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막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그려낸 언어는 투명하면서도 정말 아름다웠다.
좋은 소설을 봤다. 뜻 깊은 소설을 봤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소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