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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 모든 생물이 공통조상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 진화가 막대한 시간에 걸쳐 일어난다는 것을 입증하는 무수한 증거들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증거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이 증거들을 지지하는 확고한 과학적 기반을 부인하고, 그 기반에 스며 있는 인간의 모든 성취를 싸잡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에 놀라움을 넘어 분노까지 느낀다. (p.258)
이 책에서 캐럴은 DNA 증거를 통해 진화가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책의 목표는 DNA기록을 들여다보며 진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이다(P.34). 진화론을 받아들임은 생명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의미로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식의 오만함을 허물어트리는 장치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제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이라고 이름이 바뀐 화성 연쇄살인 건의 범인을 이춘재라는 특정인으로 확정하게 된 배경에는 발견된 증거물에 남은 범인의 DNA라는 결정 요소가 있다. DNA 검사 결과가 일치한다는 정보는 서로를 연결하는데 그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가 된다. 친자 증명 같은 일들도 그렇고. 그렇게 법정에서는 DNA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판결을 하게 되고 일반인들은 그 판결을 수용한다. 그런데 생명체의 탄생과 진화에 대해서는 아무리 DNA가 증거를 제공해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무리들이 있다. 캐럴은 DNA가 입증한 바를 차근차근 설명하며 부인할 수 없는 진화를 증언한다.
캐럴은 먼저 진화의 주요 구성 요소인 변이, 선택, 시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소위 적자適者를 만들기 위해 이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 부분 굉장히 재미있다.) 2장의 진화의 수학은 다소 까다롭지만 난해하지는 않게 진화를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 기본이 되는 설명이 끝나면 DNA가 밝힌 진화의 모습이 차례로 펼쳐진다. 우선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선택과 변형을 동반한 계통을 DNA 기록이 보여주는 바와 자연선택이 해로운 변화를 제거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불멸의 유전자, 즉 수많은 돌연변이의 공격을 떨쳐낸 존재이자 모든 종의 공통조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어떤 종이 완전히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는 방식과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어떻게 심화시키는 지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색각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내용은 복잡하지만 흥미진진하다. 화석화한 DNA, 즉 화석 유전자도 진화의 증거로 채택된다. 진화는 모든 걸 자꾸 개발해서 나아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환경에 따라 쓰던 기능을 안 쓰는 쪽으로 바뀌는 것도 포함함을 알게 되는 내용이다. 그리고 진화가 반복됨을 역시 증거를 들어 설명한다. 멀리 떨어진 종 사이에도 선택압에 따라 유사한 진화가 일어남을 DNA는 알려준다. DNA기록은 자연선택이 현재에 유리한 것에만 작용한다. 자연선택은 미래의 변화를 예상하여 미리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사실은 급격한 환경 변화가 발생하면 그 환경에 맞는 변화를 일으키기 전에 생명체가 멸종당할 수 있음을 말한다. 급격한 기후 변화로 인해 극지의 빙산이 놀라울 정도로 빨리 사라지는 현상이 생태계에 미칠 부정의 영향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DNA기록을 중심으로 한 진화의 증거는 명백해서 진화의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나 같은 무지렁이조차 이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캐럴의 글은 모두에게 읽히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한다.
캐럴은 9장에서 과학의 증거를 거부한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인간의 오만과 무지를 고발한다. 그런 자들에게는 진정으로 과학지식을 추구하고 적용하기보다 이데올로기와 이기심이 먼저였다(p.260). 그 사례들 중 하나는 소련의 생물학, 농업, 의학을 25년 간 지배했던 리센코에 대한 이야기이다. 리센코 이야기는 꽤 여러 번 봐서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여전히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과학의 증거가 가리키는 지점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정책을 완전히 오도함으로써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리센코의 책임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또 하나의 사례는 카이로프랙틱 치료사들의 협소한 시각이다. 그들의 세균설 반대나 백신 반대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척추에 있다는 의견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 역시 현대 과학의 성과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설이다. 이들이 예방접종을 반대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섯 가지 논증과 전술을 읽으면서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안아키도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캐럴은 진화를 부인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여섯 개의 범주로 정리하여 직접 비판한다. 이 비판은 다음의 사진 자료로 대체한다. 진화를 부인하는 자들의 말은 너무 저급하다. 그리고 그들의 사고는 인간, 그것도 선택된 일부만을 중심으로 하는 오만함으로 연결되는 문제를 낳는다. ![]() ![]() ![]() ![]() ![]() ![]() 이제 캐럴은 진화의 의미와 과학의 과정을 충실히 따르는 게 우리가 지구의 관리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p.297)지 마지막 장을 통해 살펴본다. 이 장은 앞 장에서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중점을 두었던 바와 달리 생명체의 파괴, 즉 종의 몰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진화의 과정에 대한 증거들은 현재에 적합한 개체들이 영원히 그 상태대로 존재하지 않는 조건부 상태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진화는 지금껏 그야말로 자연선택의 결과였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여러 행위가 불러오는 예기치 못한 결과는 자연스런 선택이 아니다. 상황은 급격히 변하고 있다. 캐럴은 말한다. 여러분은 진화 과정을 아는 것이 교양이나 철학의 문제일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정책의 밑바탕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p.305). 이 이후에 펼쳐지는 캐럴의 설명은 이제까지 내 알고 싶은 욕망을 채워주던 수준의 진화 이야기의 범위를 벗어나 생각이 확장되도록 한다. 제시되는 각종 데이터들은 환경의 변화가 불러일으킨 가공할 생태계의 변화, 나아가서는 인류의 멸종을 앞당길―나는 언젠가 인류가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조짐을 보인다. 인간의 영향으로 진화가 역방향으로 이루어지거나 생태계가 급격히 붕괴되는 현상을 서둘러 막지 못하면 내가 아직 살아있을 때 지옥의 불이 지상을 모조리 불태우는 일을 목도할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예상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 책을 진화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아니,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한다.
P.S. 마지막 두 장에 대한 내용을 길게 쓴 것은 앞 장들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두 장의 내용에 대한 느낌이 남달라서이다. 진화론을 왜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가르침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