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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오후 3시에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요? 오후 세 시는 “무언가를 하기에는 언제나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간이다”라고 장 폴 사르트르는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하던 일이나 잘 마무리하라는 충고가 되나요?
<오후 3시>는 파리 정치학 연구소(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시앙스 포에서 강의하고 있는 철학교수 라파엘 앙토방의 철학적 에세이입니다. ‘지금은 아직 동도 트지 않는 새벽이다’라는 시점을 적은 글 ‘정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하루의 시간에 대한 사유를 적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제는 아주 다양한데,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한 단상, 몇 차례 등장하는 아들과의 대화 등을 보면 철학이야말로 일상에서 사유의 단초를 얻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게 있어 들뢰즈란 공포이고, 좌파 중의 좌파이며, 보라색 스웨터이고, 누런 치아이다. 내게 드뢰즈란 바로 이슬람인 것이다. 들뢰즈. 이는 곧 구시대의 악몽이다.(70쪽)’라고 적을 정도로 거칠 것 없는 필체에서 저자의 직설적인 면모를 읽을 수 있습니다.
10시에는 산책을 하면서 아들 오렐리앙과 함께 갔던 바닷가를 떠올립니다. 부자간의 대화 역시 직설적입니다. 시간을 건너뛰어 3시입니다. 표제가 되기도 한 ‘오후 3시’라는 제목의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후 세 시. 태양이 죽음처럼 뜨겁게 타오른다. 섬들은 안개 속에서 떠다니는 것만 같고, 어디선가 매미 냄새와 풀 냄새가 난다. 달콤한 낮잠을 잘 시간이고, 부른 배가 꺼지도록 연거푸 담배를 피울 때이다. 오후 세 시란 한여름처럼 지치고 나른하게 만드는 시간이다.(75쪽)” 오후 3시에 무언가를 하지 않고 사유에 매달리다보면 이렇게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그 나른한 시간에 저자는 에콜 노르말(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 답안작성을 마감하는 순간을 두고 감독자의 눈치를 보던 이야기에 이어, 교수자격 시험의 제목으로 나왔던 ‘단일자의 인식’으로 화두가 옮겨갑니다. 결국 오후3시의 화두는 ‘단일자’로 고정되어갑니다.
오후3시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 ‘영원한 장켈레비치’에서 저자는 오후3시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그리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오후 세시. 나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포만감을 느끼며 폐 속 가득 시커먼 연기를 채워넣었다. 그러고는 하늘이 낮게 가라앉은 밖으로 나와 국립시청각연구소의 작은 골방을 찾았다(95쪽)’ 장켈레비치교수를 만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널리즘을 택할 것익가, 아니면 철학을 택할 것인가로 고민하던 시기에 도움을 얻었던 순간이었나 봅니다.
그의 선택은 저널리스트인 아버지와는 달리 철학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 때문이었을까요? ‘철학은 이성적으로 따지고 생각하기 전에 울림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철학은 관념들을 유연하게 하고, 개념들을 구체화시키며, 순간의 지혜를 메아리로 퍼뜨린다.(104쪽)’
저녁 7시에는 무슨 일을 하나요? ‘세이렌의 유혹’이라는 제목의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녁 일곱시다. 태양이 길게 누운 대지에 바람이 분다. 파도는 치맛자락처럼 둥글게 말려 휩쓸려가고, 바다는 살랑살랑 애무하듯 부딪는 요트에서 천천히 멀어져가고 있다.(131쪽)’ 그렇습니다. 일곱시는 사랑을 하기에 좋은 시간인가 봅니다. 이어지는 7시에 관한 글 ‘세상의 침묵’에서는 화자의 시점이 5월임을 알려줍니다. 역시 아들 오렐리앙이 등장합니다. 정체성에 관한 열띤(?) 논쟁이 이어지고 사유는 신을 거쳐 철학으로 이어집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답은 철학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침묵하고 있다. 맹목적인 직관만이 우연의 일치들에 놀라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세상의 침묵이 그 우연에 대한 증거이다.(141쪽)’
아버지는 ‘네가 문학이 아닌 철학을 선택했던 날, 넌 바보가 된 거란다’라고 놀렸다고 하지만, 저자는 열세 살부터 의사놀이하듯 철학놀이를 하면서 개념을 주물렀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개념을 어떻게 주무를 수가 있죠? 그런데도 저자는 ‘철학은 아이의 장난’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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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운대'여서 였던가? 강예원이 김민기에게 "오후 3시는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고, 늦었다고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라고 하는 대사가 있었다. 그 대사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잠깐 들른 도서관의 인문과학 분야에서 찾은 이 책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후 3시'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간" 프랑스 사상가였던 '장 폴 사르트르'가 한 말이었다.
참으로 어정쩡한 오후 3시. 왠만해선 약속시간으로도 잘 잡지 않는 오후 3시. 늦은 점심을 먹기도, 이른 저녁을 먹기도, 그렇다고 차를 마시기도 그런, 애매모호하고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지 않는 시간. 학생들에게도 직장인들에게도 심지어 백수에게도 오후 3시는 지루하기만 한 이 시간을 다들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그리고 나의 오후 3시를 돌아본다. 지금은 이런 꿈같은 행복을 누리진 못하지만 예전엔 가끔은 나또한 먼저 잠든 엄마 옆에 살포시 누워 달콤한 낮잠을 취할 때도 있고, 어떤 날엔 달달한 마끼아또를 손에 쥐고 세상을 다 가진냥한 마음으로 편하게 책을 읽기도 하고, 어떤 날엔 밥 벌이에 충실하기도 하고, 어떤 날엔 지루하게 시계를 쳐다보며 빨리 창밖이 어두워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또 가끔씩은 꼬마마냥 엄마에게 몹쓸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는 그런 시간. 오후 세시.
역자의 글을 읽어보니, 라파엘 앙토방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프랑스에서는 활동이 활발한 젊은 철학자이며, 철학과 교수이다. 현 사르코지의 아내인 모델 브루니 여사의 10살 연하의 전 남친으로 더 유명하단다.(그들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다는...)
어째 읽는 내내 사르코지를 대놓고 인용하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구나.. 싶었다.
이 작고 얇은 '오후 3시'라는 책은, 작가의 일상의 이야기들을 프랑스의 여러 철학자들이나, 소설가 혹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외국 철학자들의 이야기로 풀어나갔다.. 이 한편 한편 단편적인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유년시절부터 시작되며 그의 인생에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의 대표는 수많은 철학자가 아닌 아버지였다. 프랑스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비평가, 작가라는 많은 타이틀을 가졌던 장 폴 앙토방의 아들인 작가는 어려서부터 저명한 사람들을 남들보다 쉽게 만났으며, 그들 사이로 거리낌없이 스며들어 공존할 수 있었기에, 그가 철학교수가 되었다는 일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작가가 17살에 철학 강의를 들을 때 느꼈던 감정을 읽어보면, 그의 철학적인 성향은 타고났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현교육 실정으로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 어느 누구도 수업을 듣다가 이런 느낌을 받는 17세의 학생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조각가가 끌로 나무를 파가듯이 손가락 마디마디 힘을 주고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빛의 광채들을 종이 위에다 끌어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슴으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솟구쳐올랐다. 보도에 투명한 햇살이 비치듯, 정신이 환히 깨어나는 듯 했다. 이런게 바로 철학을 하며 사는 삶이다. 신이 없는 비참한 인간 조건에서 자유를 얻은 것만 같은 아찔한 현기증이었다. 마치 달콤한 광기와도 같았다. 정신이 얼얼했던 그 아침,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은 바로 축복받은 날이라는 것이었다. 물을 뒤집어쓰고 샤워를 하다가 문득 굉장한 비밀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손을 내뻗은 오묘한 기분이었다. - p.31
모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성향이 다른 철학자들을 나열하지만 모든 인생의 이야기의 결론은 ' 무(無)'로 도달한다.
실행에 옮긴다는 건 실행에 옮긴 순간부터 모든 걸 완전히 뒤바꾸는 예측불허의 무(無)를 초래한다. - 베르그송 -
무(無)에 대한 관념은 근면한 인간의 특성이 아니다. 고된 일을 하는 자들은 그들 삶의 잔해가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 재고 있을 시간도, 그럴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가혹하거나 하찮거나 그들은 고면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갈망한다. 희망이 노예들의 미덕이기를. - 에밀 시오랑-
담배를 예찬하고, 커피를 즐기며 옛애인을 회상하고 아들 오렐리앙과 답이 없는 대화를 하는 그는, 인생에 있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에 대해 고찰이라 해야할까? 철학자답게, 한구절 한구절 모두 철학적이지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현실에 맞닥들여지기에 꽤 설득력있으며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철학이라면 난해해서 꺼려했던 나조차도, 이 젊은 철학교수의 문체에 사로잡혀, 철학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일까 하는 예찬까지 하게 된다. 사르트르, 니체, 칸트,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등의 삶과 그들의 주옥같은 명언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글에 대한 설득력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정말 생각이 깊은 한 사람의 독특하고도 신비스러운 일기장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문체를 닮고 싶다.
담배를 예찬하는 글을 담배를 끊으려는 담배를 버리는 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버렸던 담배를 다시 주워담기까지 할 정도의 설득력있으며 매력있다. 심지어 담배 냄새를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나조차도 '아~ 담배 피는 이유가 모두들 그런거였던건가'하며 담배에 대한 편견을 아주 잠시나마 잊게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필터를 빨았다. 빨아들이는 숨결이 정지된 것처럼 담배 맛이 좋았다. 이렇게 혼자 담배를 피울 때의 편안함을 누가 알까. 담배는 저마다 유혹의 눈빗을 보낸다. 담배가 타는 동안은 짧은 바캉스처럼 잠시 동안의 휴가를 보낼 수 있고, 지친 의식을 잠시 유배시킬 수 있다. 담배를 피운다는 건, 수평선 위에 모래시계를 갖다놓는 일이다. 담배는 신성한 막간이고, 불성실한 기쁨이며, 다섯 손가락이 옹호하며 기다림에 지친 남자를 달래주는 여섯 번째의 손가락이다. 담배란 일상 속에서 숱하게 시간을 죽이길 바라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특권인 것이다. 담배 때문에 살아갈 날이 줄어든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p21
제목과 같은 작가가 표현한 '오후 3시'는 글을 읽는 내내 상상이 되었다. 그 작가들이 눈이 풀리고 추레한 몰골들로 하릴없이 길을 걸어다니는 그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지루하기만 한 오후 3시가 그의 책 한권을 다 읽고 나선 이유없이 좋아졌다.
오후 세 시다. 태양이 죽음처럼 뜨겁게 타오른다. 섬들은 안개 속에서 떠다니는 것만 같고, 어디선가 매미 냄새와 풀냄새가 난다. 달콤한 낮잠을 잘 시간이고, 부른 배가 꺼지도록 연거푸 담배를 피울 때이다. 오후 세 시란 한여름처럼 지치고 나른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p75
세시는 오후의 시작을 알린다. 하루중 어느 쪽에서 봐도 중심인 시각이다. 그 시간이 되면 글을 쓰는데 실패한 작가들은 할 일이 없어지는 반면, 기자들은(그들은 낮의 기자들이다) 이미 반쯤 기사를 마친 상태다. 사라트르가 말하듯이, 오후 세시는 "무언가를 하기에는 언제나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간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리다 눈이 모래주머니처럼 무거워져 자꾸 눈꺼풀이 내려앉는 자정과도 같은 시간이다. 오후 세 시다. 덧문들이 내려진다. 세 시란 담배꽁초가 쌓이는 요구르트 통이고, 텅 빈 냉장고이며, 식은 커피이고, 뜨거운 코코아이다. 그 시각이 되면 약물을 복용하지 않은 자전거 경주 선수처럼 작가들은 맥이 빠지고 우울해진다. 그래서 작가는 거리로 나가 신문을 사들고, 길에서 하릴없이 건물들을 살펴보고, 이가 상하고 심장이 터질 정도로 담배를 피워댄다. 외출을 한 후 침울해져서 집으로 돌아와 방안을 뱅뱅 맴돌며, 더위로 땀을 뻘뻘 흘리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열기가 식을 밤을 기다린다. 그때가 되면 낮의 시간들을 속죄하고, 밤의 늑대가 되는 고귀한 특권을 누리게 될 테니까. p76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싶은데, 난해할 것만 같아 엄두가 나질 않는 이에게 젊은 철학교수가 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그의 주옥같은 문체에 많은 이들이 푹 빠져들기를 바라며... 너무 많은 좋은 글들이 넘쳐흘렀지만, 그것을 다 발췌하면 그 책을 접한 이들에게 예의가 아니기에 몇 개의 행간만 적어야겠다.
삶은 닫힌 집이고, 열린 감옥이다. 또한 삶은 증거 없는 일상의 모혐이므로 본의 아니게 죄를 짓는 인간 무리들에게 진지함과 경솔함 중 한쪽을 택하게 한다. 죽음을 생각하느냐, 아니면 니콜라 그리말디의 말처럼 "휴가를 떠날 때 돌아올 순간을 생각하지 않듯이" 죽음에 대한 생각을 아예 접고 사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생이 얼마나 짧은지를 알기에 그 삶을 만끽할 규칙을 세워놓고 온전히 거기에 투신한다. 또 영원한 삶을 갈망하기에 죽기 전까지 쾌락을 저버린 채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중략) 그리말디가 말했듯이 "가장 상식적인 태도란 자신의 시선이 지평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유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척보다는 멀리, 그러나 저편 어딘가보다는 멀지 않게. p26
밀려갔다 밀려드는 파도처럼, 습관은 세상을 움직이는 의지와 표상이라는 두 동작을 동시에 일으킨다. 습관은 또 한 총체적인 것을 두루뭉술하게 뒤섞어버린다. 그렇게 삶의 유일한 본보기만을 보여주면서우주는 언제까지나 자신과 동일한 것만을 추구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습관은 존재를 잘근잘근 씹어 달리 깨닫게도 만든다. 요컨대 습관은 뜻밖의 보물 상자이기도 하고, 안일한 삶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준비하는 움직이는 무사고(無思考)인 것이다. p34
신이 없다면 어떨까. 사랑은 희미해지고, 완전함은 이 세상 것이 아니며, 천국은 매일같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다음 순간이 정말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혹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신이 죽었다면 인간은 단 한 번뿐인 생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원칙과도 같은 불확실성과 확고하게 자리잡은 의혹에 둘러싸인 채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다. 그러니 영원히 머물지 않는 이곳에 그대로 눌러있도록 하자. 신이 없다면 나날이 모든 게 새롭다. 그리고 모든 지혜는 매번 처음처럼 순간을 살아가는 기교가 담겨있다. p39
기억상실이 추억보다 덜 지성적인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아주 짧은 추억을 간직한 자아가 추억이 아예 자취를 감추어버린 자아보다 더욱 견고한 건 아니란 뜻이다. 사람들은 망각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곧 운명의 특별한 배려로 기억에서 사라진 것을 무심코 엿보는 삶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새장 속에 남아 있기로 한 동물처럼,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늘 그 기억을 되찾고자 애쓴다. 진짜 기억상실은 추억의 덩어리란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치 동굴 거주자들이 인간 사슬을 만들어 태양을 본 적이 있는 자들 가운데 하나를 동굴 깊숙이 데려가듯이, 다른 이들은 기억상실자를 도와서 그의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억상실자들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누구라도 될 수 있으며, 한 번도 자신이었던 적이 없는 그 '누군가' 또한 될 수 있는 것이다. p110
인생은 그 누구에게도 멈춰있지 않다. 죽음은 바람의 애무이며, 목적없는 출발이고, 잉태된 어둠이다. 죽음은 그 무엇도 바꾸지 않는 변모이며, 유일하게 가능한 이 세상에서 달리 사랑하는 간단한 방식일 뿐이다. 누구든 각자 새로운 질서를 갖게 될 때까지 살아간다. 그리고 삶은 희미해지면서 아련히 남는다. 모든게 변하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페소아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머물렀던 장소는 이제 네 존재 없이 그대로 남아있다. 네가 지나쳤던 거리는 널 볼 수 없는 채로 남아있으며, 네가 살았던 집에서 여전히 누군가 살고 있다. 다만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일 뿐이다. 그뿐이다."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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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시..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시간 이라는 문구를 보고 함부로 책을 판단했던 내가 경솔했다.
이 책은 철학교수의 에세이다. 평소 철학과는 거리가 멀어서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친일상에서 벗어나 한 박자 천천히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3번정도는 읽어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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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오후3시 "무언가를 하기엔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시간"
이 글귀가 그냥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내용도 무언가 인생에서의 조언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에세이였다는 것이 조금 당황스럽게 했지만, 그래도 깨달음..아니 조금은 더 무언가를 생각해 볼수있는 책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