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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흐르는 영지물 가운데 명성이 높은 작품이 있으니, 그 이름 아로스 건국사다. 4권까지 읽어본 바로는 확실히 뛰어난 글이지만 내가 기대하던 방향성과는 엇나가고 있기에... 수작이라 부르기엔 아주 약간, 주저하게 되는 면이 있다. 분명 500자를 예상하고 시작했거늘 너무나 길어진 감상글에 어이가 없다. 그만큼 할 이야기가 많은 작품이라는 뜻일 것이다.
1. 리얼리티
아로스 건국사는 현실감각이 매우 뛰어나다. 영지물에 있어서 이 이상 가는 장점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작가는 군사학, 행정학, 정치경제 및 중세사 등에 두루 조예가 있는 걸로 보이고 그것을 글 안에 거침없이 녹여내고 있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작가의 '정치적 마인드'다. 부처 간의 알력과 미묘한 국제 정세를 묘사하는 솜씨는 일품이고, 순간 순간 고위층 인물들의 행동과 판단은 무릎을 탁 칠 정도로 리얼리티가 넘친다. 협상 과정의 묘사는 이제껏 장르 소설에서 본 적이 없을 정도.
뿐만 아니라 세세한 계산과정이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제시되고, 철저하게 예산에 근거해서 경제활동이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직접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며 각종 스태터스를 열람하여 고심한 끝에 판단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2. 스피드
시속 200km가 누군가에겐 느긋한 속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어질어질한 속도일 것이다.(개인적으로는 후자다) 아로스 건국사는 기름기를 철저히 짜낸 진행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기분 좋은 담백함으로 다가올지 정신없는 질주로 다가올지는 읽는 이에게 달렸다.
아로스 건국사의 스토리 진도가 빠르냐 하면, 나에겐 꼭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4권까지 스토리를 요약해버리면 정말 간단하게 끝난다. 하지만 전혀 군살이 없고 다양한 사건을 다양한 각도에서 끊임없이, 간단명료하게 제시하므로 '속도감'은 굉장하다.
이런 비교는 어떨까. 자동차를 타고 갈 때는 시동걸기, 엑셀/브레이크 밟기, 기어변속, 신호 정지 등등이 '사건'이 될 것이다. 100km를 가도 사건이 몇개 안된다. 반면 달리기를 한다면?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이 모두 사건이다. 직접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까.
여타 영지물이 빠른 속도로 달리며 중요한 부분만 적당히 묘사한다면, 아로스 건국사는 직접 몸으로 뛰며 걸음걸음을 모두 그려낸다. 간결하고 담백하게, 하지만 많은 사건을 세밀하게 보여주기에 느껴지는 속도감. 그게 아로스 건국사의 스피드가 아닌가 싶다.
3. 건조와 담백
교과서에서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소개할 때 소박함이 장점이니 하는 이야기가 많다. 좋게 보아주면 소박함이고 나쁘게 보면 초라함이다. 아로스를 좋게 보면 담백한 글이 되겠고, 나쁘게 보면 무미건조한 글이 되겠다.
아로스 건국사는 각 사건, 각 장면에 거의 같은 가중치를 두고 있는 듯 하다. 마치 역사연표를 보듯 모든 사건이 담담하고 간결하게 서술될 뿐이다. 앞서 한 것처럼 달리기에 빗대보자면, 모든 걸음걸음은 같은 한걸음일 뿐이라는 느낌이다. 조깅하다 아는 사람 만나면 잠시 멈춰 서서 이야기도 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넋을 잃기도 하고, 피곤하면 길가에 앉아서 땀을 닦고 물을 마시며 쉬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호흡조절 해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페이스로 달릴 뿐이다.
장르소설 독자에게는 어느정도 공통적인 기대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로맨스라던가, 강해지는 과정에서의 대리만족이라던가, 위세를 떨치고 만인의 추앙을 받는 모습을 보며 감정이입한다던가, 잔꾀로 이득을 보며 주인공과 같이 킬킬대고 싶다던가. 다양한 기대가 있겠지만, 어쨌든 자신이 좋아하는 이런 장면이 나오면 조금 더 비중을 두어주길 바라는 게 사람 맘이다.
아로스 건국사에는 그런 모습이 없다. 연애, 결혼, 수련과 깨달음, 승리와 패배, 영광의 순간들이 밀을 사고파는 거래와 별다른 차이 없이 다뤄진다. 이것이 건조함이 되느냐 산뜻함이 되느냐는 개인의 판단이겠으나, 내가 볼 때는 지나친 다이어트가 아닌가 싶다.
살을 빼서 슬림해지는 건 좋지만 가슴과 엉덩이 살까지 빠지면 안되지 않을까? 배흘림기둥 같은 몸매를 S자로 바꾸려는 거지 일자몸매 만들려는 건 아니지 않은가.
4. 무엇이 다른가
사실 다른 점은 위에 써놓았다. 이 소제목은 '이런 이런 점은 똑같은데 뭐가 다른가'의 준말이다. 아로스 건국사는 많은 부분 차별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크게, 아주 크게 한번 살펴보자.
레미레스라는 주인공이 시골 영지에 내려가서 뛰어난 능력으로 영지를 발전시킨다는 이야기다. 그 성장동력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 동력은) 영지 옆에 있는 거대한 미개척 대지이며, 또 하나는 주인공의 절대적인 무력이다. 특히 레미레스의 무력은 점점 오버파워가 되어가고 있고, 후반으로 갈수록 그 비중이 커지고 있다.
영지물에 흔히 쓰이는 게 아무도 몰랐던 앞산의 미스릴 광산, 뒷산의 드래곤 친구, 옆산의 드워프, 이웃의 비옥한 영지를 가진 멍청한 영주, 혁신적인 물품 생산 등이 있다고 하자. 요즘은 이런 공식에서 벗어난 작품들도 많지만 일단. 아로스는 그런 잡다한 이점 대신에 '거의 무한한 확장가능성을 지닌 미개척 대지'를 갖고 있는 것 뿐이다.
그와 동시에 오러를 뿜어내는 소드마스터이며, 수백년간 미답의 영역이던 8서클 마법사이기도 하다. 아로스 세계관의 파워밸런스에 비춰보자면 먼치킨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주저도 있을 수 없다. 거의 일인제국 급이다. 초반에는 레미의 힘이 미약했기에 다른 부분에 무게가 실렸지만 갈수록 레미의 힘에 의존하는 부분이 커지고 있다.
시작부터 주어진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거대한 이점, 절대적인 주인공의 무력에 기대는 전개, 이 두가지는 일반적인 영지물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아로스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재료를 썼지만 요리사가 워낙 뛰어나서 한차원 높은 맛을 낸 경우라고 할까.
5. 유감
다만 아쉬운 것은 놀라운 리얼리티를 지닌 세계를 구성해놓았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무시할 만한 힘을 주인공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먼치킨이란 게 무엇인가. 기존 세계관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파워밸런스를 무너뜨리는 존재가 먼치킨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레미레스는 명실상부한 먼치킨 그 자체다.
레미레스가 처한 상황을 볼 때 그정도 무력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레미레스는 주변에 적으로 가득하고, 일개 영주인 레미가 평범한 힘으로 그런 상황을 이겨낸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그것은 주객전도가 아닐까. 애초에 견제를 당하게 된 것은 그가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서다.
아로스의 리얼리티는 정말 놀랍다. 1권을 접했을 때 나에게 아로스의 세계는 조약돌 하나까지 선명한 총천연색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권수가 거듭될수록 그 빛은 점점 바래지고, 단순한 배경으로 흐려져가는 듯 느껴진다. 세계 그 자체를 무시할 수 있는 무력 앞에서 잘 짜여진 세계관은 어느 정도의 의미를 지닐까.
심혈을 기울여 누에에서 실을 뽑아 짜낸 비단이기에, 한땀한땀 정성들여 아름다운 자수가 놓여지길 기대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 아크릴 물감으로 슥슥 그려버리는 것은 너무나 아쉽지 않은가.
6. 총평
아로스 건국사는 뛰어난 작품이다. 스피디한 전개, 놀라운 디테일, 경이로운 현실감각. 엉성한 영지물에 질린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강력 추천작이다. 하지만 입맛이 까다로운 독자에게 자신있게, 내 이름을 걸고 권할 수 있는가 하면... 그건 자신이 없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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