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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가운데 한 권인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만화로 소개한 책이다. ‘창조적 진화‘를 읽으려면 먼저 기계론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계론은 자연 현상과 사회현상을 기계처럼 돌아가는 법칙에 의거해 설명하려는 생각이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세계를 변하지 않는 기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 뒤 모든 현상을 이 기본 요소들의 결합으로 설명하려는 방식이다. 기계론은 모든 현상에서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다. 기계론에서 시간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시간에 관계 없이 법칙은 적용되기 때문이다. 법칙이란 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시간은 생명의 지속(持續)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생명과 과학은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생명은 창조하는 힘이고 과학은 단순한 모방이다. 변화의 가능성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창조적 진화가 나오게 된 배경은 스펜서의 진화론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스펜서는 다윈보다 먼저 적자생존, 생존경쟁 등의 개념을 사용한 학자다. 다윈은 생물 진화론자, 스펜서는 사회 진화론자다. 베르그송은 스펜서의 진화론이 갖는 문제를 이미 진화가 이루어진 것을 사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보았다. 베르그송은 진정한 진화는 직접 그림을 그릴 때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베르그송 철학을 이해하려면 생명과 생명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구체적 형태를 갖기 위해 물질 속에 들어간 것이 생명체다. 생명체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지만 생명의 참된 성질은 물질적 욕구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
베르그송을 윌리엄 제임스와의 관련하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인간 생활을 끊임 없는 적응 과정으로 파악한 제임스는 인간 의식도 하나의 과정이나 흐름으로 보았는데 이는 생명을 창조적 과정 속의 흐름으로 본 베르그송 사상과 흡사하다. 지속(持續)하는 것은 항상 전체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흘러가는 물처럼 끊을 수 없다는 의미다. 물은 고정과 정주(定住)를 거부한다.
지속하는 시간은 생명의 시간이고 지속하지 않는 시간은 시계의 시간을 말한다. 진주 목걸이를 이어주는 줄이 지속하는 전체 시간에 비유될 수 있다. 과학은 시계의 시간으로 모든 계산을 한다. 지속과 변화는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창조를 의미한다.
과학에서는 설탕물을 농도, 밀도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지만 설탕물이라는 전체 속에서 설탕과 물은 서로 뒤섞여 있다. 물질적 대상들도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연속적인 흐름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물론 우리는 그런 점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생명은 지속의 특징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의 진화는 지속의 과정을 통한 창조적 진화라 할 수 있다. 과학은 반복 가능한 것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반복 가능한 것을 객관성이라 한다. 기계론과 같은 것이 목적론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이 현재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론의 과거가 목적론의 목적으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적론도 기계론처럼 생명의 자유로운 창조능력을 부정한다. 기계론이나 목적론은 미래를 예측하려는 눈물 겨운 노력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신은 그 자신 안에, 그 자신의 본성 속에 그를 구성하는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기에 생산할 필요가 전혀 없다.”(’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참고)
진화를 적응 과정으로 보는 견해는 두 가지다. 정향 진화론과 다윈 진화론이다. 전자는 진화가 생존에 불리해도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계속 그 방향으로 나간다고 본다. 너무 긴 공작의 꼬리나 아일랜드 큰사슴의 큰 뿔이 대표적이다. 정향진화론은 외부 조건이 생명체의 변화를 직접 일으킨다는 직접적 적응을 주장한다. 후자는 외부 조건이 생존에 유리한 변이들을 선택하고 불리한 변화는 도태시킨다는 간접적 의미의 적응을 주장한다.
베르그송은 가리비조개 등의 연체동물의 눈과 척추동물의 눈을 설명한다. 두 동물은 전혀 다른 종인데 눈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베르그송은 이런 유사성이 나타나는 것을 생물 종들이 동일한 근원을 가지며 이 근원이 하나의 폭발적 힘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고전의 유혹 3‘ 177, 178 페이지) 눈과 같은 기관에서는 두 가지 두드러진 점이 있다. 구조의 복잡성과 기능의 단순함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엘랑 비탈이 진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철학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의 약동하는 힘을 화약이 폭발하는 힘에, 그에 저항하는 물질의 힘을 화약의 폭발에 저항하는 탄피의 힘에 비유했다. 생명의 진화는 자기 안에 지닌 생명의 약동하는 힘과 그것에 저항하는 물질의 힘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베르그송은 동물과 식물을 명확히 구분해주는 기준은 없다고 보았다.
모든 생명체들은 초보적인 형태든 잠재적인 형태든 본질적인 특징들을 공유한다. 거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식물, 동물, 이성의 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물질성을 지배하는 질서라면 올라가는 것은 생명의 질서다. 여기서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사선(斜線)을 거슬러 오르는 노력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나는 엘랑 비탈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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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을 읽을 때 기독교세계관에 비추어 검증을 해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 유대인이었고 심정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였을 베르그송은 세계에 대해, 진화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모든 것은 '기억'과 '상상'이라고 강의하셨던 교수님 강의를 이번 학기에도 신청했다. 1, 2, 3학기 내내 듣는 셈이다. 실라버스를 보는데 쓰고 싶은 논문과 연관관계도 있어보이고 지난 학기에 궁금한 상태로 접어두었던 뇌에 대한 문제도 다루어질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입문하는 의미에서 최대한 쉬운책부터 골라보았다. 참 좋은 학습만화들이 많은 것 같다. 평범한 수준의 어린이는 좀 이해하기 힘들지 몰라도 시간에 쫓기는 중고등학생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보이는 시리즈이다.
분명 베르그송은 세계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스펜서나 다윈이 말하듯 우연히 적자생존에 의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엘랑비탈에 의해 창조적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후 주류패러다임이 되어버린 과학주의에서는 한발자국 떨어져있다는 점에서 베르그송의 생각을 읽기가 한결 편했다.
광물과 생물이 다른 이유는 의식 유무의 차이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설명되는 물질의 영역은 과학에 맞닿아 있다고 이해했다. 근대 이후 과학주의적 패러다임은 물질의 영역 반대편에 있는 의식과 생명의 세계를 없는 것처럼 여겼다. 스펜서와 다윈의 진화론 역시 결과를 놓고 과정을 인과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점에서 과학주의에 종속되어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엘랑비탈이라는 생명의 에너지는 과학에서처럼 법칙을 전부 설명할 수 없는 창조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와 쉴러의 생각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도덕적일 수 있는 예술적 삶의 가능성에 대해 찾고 있기에 베르그송이 말한 자유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이 갔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그러한 자유에서 타율적인 도덕이 아닌 자유로운 도덕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책에는 인간이 물을 마시고 싶을 때 마음대로 마시는 것과 참고 마시지 않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베르그송은 후자가 더 자유롭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물질의 필요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참을 수 있다'는 부분에서 의식과 생명이 가진 자유를 보았다. 물질의 필연성을 넘어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영역은 과학에서처럼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 삶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번 학기 교재인 "창조적 진화"보다도 베르그송이 자신의 사상을 보완하기 위해 말년에 썼다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 가장 관심이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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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르그송을 택한 이유 러셀의 철학사를 보아도 의미, 인생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 캠벨은 의미 중요하지 않다. 매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떨림을 느끼면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반면 의미를 아주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빅터 프랭크 같은 사람. 의미를 찾아야겠다.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하는 목적론자들이다. 반면에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눈이 없던 상태에서 무언가에 부딪치면 그것이 열망을 낳고 그 열망이 쌓이고 진화하면 눈이 생긴다고 믿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사고를 즐기고 그 것을 통해 나를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즐기지 못하면 책을 읽는 효과가 없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6기 연구원 5월 오프 수업 사부님 코멘트 중에서 사부님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전율이 있었다. 베르그송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5개월만에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다시 읽으면서 유독 그의 이름에 오래 머물렀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러셀이라는 필터와는 맞지 않는 피사체였다. 러셀의 어깨위에 앉아 수십명의 철학자들과 눈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안도감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만은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충동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를 직접 만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천페이지가 넘는 서양철학사의 잔상이 가시지도 않은 혼미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을까? 서점에서 만난 베르그송은 나와의 독대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언어를 직접 이해하기엔 내공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만화로 일는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이었다.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는 언어로 고전을 풀어낸 만화책. 처음엔 너무 쉽게 가는 건 아닌가 찝찝하기도 했으나 책을 마친 지금의 기분은 상쾌하기만 하다. 여러 전문가들의 손을 잡고 만나기는 했지만 <창조적 진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둘러본 나는 책을 펴기 전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직은 분명히 내 언어로 표현할 정도로 숙성시키지는 못했지만 혼자서가겠다고 고집했더라면 결코 맛보지 못했을 공기가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