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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대한 상세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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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가운데 한 권인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만화로 소개한 책이다. ‘창조적 진화‘를 읽으려면 먼저 기계론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계론은 자연 현상과 사회현상을 기계처럼 돌아가는 법칙에 의거해 설명하려는 생각이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세계를 변하지 않는 기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 뒤 모든 현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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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가운데 한 권인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만화로 소개한 책이다. ‘창조적 진화‘를 읽으려면 먼저 기계론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계론은 자연 현상과 사회현상을 기계처럼 돌아가는 법칙에 의거해 설명하려는 생각이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세계를 변하지 않는 기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 뒤 모든 현상을 이 기본 요소들의 결합으로 설명하려는 방식이다. 기계론은 모든 현상에서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다. 기계론에서 시간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시간에 관계 없이 법칙은 적용되기 때문이다. 법칙이란 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시간은 생명의 지속(持續)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생명과 과학은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생명은 창조하는 힘이고 과학은 단순한 모방이다. 변화의 가능성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창조적 진화가 나오게 된 배경은 스펜서의 진화론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스펜서는 다윈보다 먼저 적자생존, 생존경쟁 등의 개념을 사용한 학자다. 다윈은 생물 진화론자, 스펜서는 사회 진화론자다. 베르그송은 스펜서의 진화론이 갖는 문제를 이미 진화가 이루어진 것을 사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보았다. 베르그송은 진정한 진화는 직접 그림을 그릴 때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베르그송 철학을 이해하려면 생명과 생명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구체적 형태를 갖기 위해 물질 속에 들어간 것이 생명체다. 생명체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지만 생명의 참된 성질은 물질적 욕구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

 

베르그송을 윌리엄 제임스와의 관련하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인간 생활을 끊임 없는 적응 과정으로 파악한 제임스는 인간 의식도 하나의 과정이나 흐름으로 보았는데 이는 생명을 창조적 과정 속의 흐름으로 본 베르그송 사상과 흡사하다. 지속(持續)하는 것은 항상 전체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흘러가는 물처럼 끊을 수 없다는 의미다. 물은 고정과 정주(定住)를 거부한다.

 

지속하는 시간은 생명의 시간이고 지속하지 않는 시간은 시계의 시간을 말한다. 진주 목걸이를 이어주는 줄이 지속하는 전체 시간에 비유될 수 있다. 과학은 시계의 시간으로 모든 계산을 한다. 지속과 변화는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창조를 의미한다.

 

과학에서는 설탕물을 농도, 밀도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지만 설탕물이라는 전체 속에서 설탕과 물은 서로 뒤섞여 있다. 물질적 대상들도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연속적인 흐름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물론 우리는 그런 점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생명은 지속의 특징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의 진화는 지속의 과정을 통한 창조적 진화라 할 수 있다. 과학은 반복 가능한 것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반복 가능한 것을 객관성이라 한다. 기계론과 같은 것이 목적론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이 현재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론의 과거가 목적론의 목적으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적론도 기계론처럼 생명의 자유로운 창조능력을 부정한다. 기계론이나 목적론은 미래를 예측하려는 눈물 겨운 노력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신은 그 자신 안에, 그 자신의 본성 속에 그를 구성하는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기에 생산할 필요가 전혀 없다.”(’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참고)

 

진화를 적응 과정으로 보는 견해는 두 가지다. 정향 진화론과 다윈 진화론이다. 전자는 진화가 생존에 불리해도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계속 그 방향으로 나간다고 본다. 너무 긴 공작의 꼬리나 아일랜드 큰사슴의 큰 뿔이 대표적이다. 정향진화론은 외부 조건이 생명체의 변화를 직접 일으킨다는 직접적 적응을 주장한다. 후자는 외부 조건이 생존에 유리한 변이들을 선택하고 불리한 변화는 도태시킨다는 간접적 의미의 적응을 주장한다.

 

베르그송은 가리비조개 등의 연체동물의 눈과 척추동물의 눈을 설명한다. 두 동물은 전혀 다른 종인데 눈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베르그송은 이런 유사성이 나타나는 것을 생물 종들이 동일한 근원을 가지며 이 근원이 하나의 폭발적 힘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고전의 유혹 3‘ 177, 178 페이지) 눈과 같은 기관에서는 두 가지 두드러진 점이 있다. 구조의 복잡성과 기능의 단순함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엘랑 비탈이 진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철학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의 약동하는 힘을 화약이 폭발하는 힘에, 그에 저항하는 물질의 힘을 화약의 폭발에 저항하는 탄피의 힘에 비유했다. 생명의 진화는 자기 안에 지닌 생명의 약동하는 힘과 그것에 저항하는 물질의 힘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베르그송은 동물과 식물을 명확히 구분해주는 기준은 없다고 보았다.

 

모든 생명체들은 초보적인 형태든 잠재적인 형태든 본질적인 특징들을 공유한다. 거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식물, 동물, 이성의 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물질성을 지배하는 질서라면 올라가는 것은 생명의 질서다. 여기서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사선(斜線)을 거슬러 오르는 노력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나는 엘랑 비탈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를 본다.

 

m******1 2020.04.1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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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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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을 읽을 때 기독교세계관에 비추어 검증을 해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 유대인이었고 심정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였을 베르그송은 세계에 대해, 진화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모든 것은 '기억'과 '상상'이라고 강의하셨던 교수님 강의를 이번 학기에도 신청했다. 1, 2, 3학기 내내 듣는 셈이다. 실라버스를 보는데 쓰고 싶은 논문과 연관관계도 있어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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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을 읽을 때 기독교세계관에 비추어 검증을 해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 유대인이었고 심정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였을 베르그송은 세계에 대해, 진화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모든 것은 '기억'과 '상상'이라고 강의하셨던 교수님 강의를 이번 학기에도 신청했다. 1, 2, 3학기 내내 듣는 셈이다. 실라버스를 보는데 쓰고 싶은 논문과 연관관계도 있어보이고 지난 학기에 궁금한 상태로 접어두었던 뇌에 대한 문제도 다루어질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입문하는 의미에서 최대한 쉬운책부터 골라보았다. 참 좋은 학습만화들이 많은 것 같다. 평범한 수준의 어린이는 좀 이해하기 힘들지 몰라도 시간에 쫓기는 중고등학생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보이는 시리즈이다.

 

분명 베르그송은 세계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스펜서나 다윈이 말하듯 우연히 적자생존에 의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엘랑비탈에 의해 창조적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근대 이후 주류패러다임이 되어버린 과학주의에서는 한발자국 떨어져있다는 점에서 베르그송의 생각을 읽기가 한결 편했다.

 

광물과 생물이 다른 이유는 의식 유무의 차이 때문이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설명되는 물질의 영역은 과학에 맞닿아 있다고 이해했다. 근대 이후 과학주의적 패러다임은 물질의 영역 반대편에 있는 의식과 생명의 세계를 없는 것처럼 여겼다. 스펜서와 다윈의 진화론 역시 결과를 놓고 과정을 인과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점에서 과학주의에 종속되어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엘랑비탈이라는 생명의 에너지는 과학에서처럼 법칙을 전부 설명할 수 없는 창조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와 쉴러의 생각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도덕적일 수 있는 예술적 삶의 가능성에 대해 찾고 있기에 베르그송이 말한 자유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이 갔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그러한 자유에서 타율적인 도덕이 아닌 자유로운 도덕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책에는 인간이 물을 마시고 싶을 때 마음대로 마시는 것과 참고 마시지 않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베르그송은 후자가 더 자유롭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물질의 필요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참을 수 있다'는 부분에서 의식과 생명이 가진 자유를 보았다. 물질의 필연성을 넘어서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영역은 과학에서처럼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 삶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번 학기 교재인 "창조적 진화"보다도 베르그송이 자신의 사상을 보완하기 위해 말년에 썼다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 가장 관심이 간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o****2 2011.03.07.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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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자 하는 열망이 눈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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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르그송을 택한 이유 러셀의 철학사를 보아도 의미, 인생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 캠벨은 의미 중요하지 않다. 매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떨림을 느끼면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반면 의미를 아주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빅터 프랭크 같은 사람. 의미를 찾아야겠다.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하는 목적론자들이다. 반면에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눈이 없던 상태에서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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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르그송을 택한 이유

러셀의 철학사를 보아도 의미, 인생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 캠벨은 의미 중요하지 않다. 매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떨림을 느끼면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반면 의미를 아주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빅터 프랭크 같은 사람. 의미를 찾아야겠다.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하는 목적론자들이다. 반면에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눈이 없던 상태에서 무언가에 부딪치면 그것이 열망을 낳고 그 열망이 쌓이고 진화하면 눈이 생긴다고 믿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사고를 즐기고 그 것을 통해 나를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즐기지 못하면 책을 읽는 효과가 없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6기 연구원 5월 오프 수업 사부님 코멘트 중에서

사부님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전율이 있었다. 베르그송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5개월만에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다시 읽으면서 유독 그의 이름에 오래 머물렀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러셀이라는 필터와는 맞지 않는 피사체였다. 러셀의 어깨위에 앉아 수십명의 철학자들과 눈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안도감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만은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충동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를 직접 만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천페이지가 넘는 서양철학사의 잔상이 가시지도 않은 혼미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을까? 서점에서 만난 베르그송은 나와의 독대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언어를 직접 이해하기엔 내공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만화로 일는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이었다.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는 언어로 고전을 풀어낸 만화책. 처음엔 너무 쉽게 가는 건 아닌가 찝찝하기도 했으나 책을 마친 지금의 기분은 상쾌하기만 하다. 여러 전문가들의 손을 잡고 만나기는 했지만 <창조적 진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둘러본 나는 책을 펴기 전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직은 분명히 내 언어로 표현할 정도로 숙성시키지는 못했지만 혼자서가겠다고 고집했더라면 결코 맛보지 못했을 공기가 아니었을까?

YES마니아 : 골드 m*****5 2011.06.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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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과 베르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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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종의 기원’과 ‘창조적 진화’를 읽고 ‘진화’에 대해 써 보라는 엄마의 지시가 떨어졌다. 진화에 대해 쓰라는 건지 진화론에 대해 쓰라는 건지 엄마가 말한 것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평소에 진화와 진화론을 구분하면서 살지 않는 엄마의 생활을 근거, 엄마가 진화=진화론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고 가정하여 이 글을 쓴다. 사실 진화에 대해 쓰려면 나도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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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종의 기원’과 ‘창조적 진화’를 읽고 ‘진화’에 대해 써 보라는 엄마의 지시가 떨어졌다. 진화에 대해 쓰라는 건지 진화론에 대해 쓰라는 건지 엄마가 말한 것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평소에 진화와 진화론을 구분하면서 살지 않는 엄마의 생활을 근거, 엄마가 진화=진화론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고 가정하여 이 글을 쓴다.


사실 진화에 대해 쓰려면 나도 진화론자들만큼 지질학이나 생물학, 화학, 생화학 등 여러 가지 학문을 통달해야 한다. 진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진화론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외에 다른 사람들이 진화에 대해 글을 썼다면 그것은 진화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진화론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진화에 대해 쓴다는 것은 수많은 근거와 사례에 자신의 과학적 혹은 수학적 논리를 더하여 진화를 증명하는 것이고 진화론에 대해 쓴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거나 거론되고 있는 진화론의 일부를 자기만의 색깔을 입혀 더 쉽게 설명하거나 의견을 다는 것이다. 둘 다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창조하는 쪽이고 후자는 모방하는 쪽이다. 나는 다윈과 배르그송의 책을 읽고 진화에 대해 쓰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다윈과 베르그송의 진화론에 대해서 쓰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지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건 말았건 관심이 없지만 할머니와 엄마의 ‘force'와 나의 순진함에 의해 성경에 세뇌? 되었던 나는 진화론이 은근히 꼴사나웠다. 그래서 한국창조과학회와 진화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양쪽 의견을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물론 그때는 창조론이 옳다는 가정아래 진화론에 관한 책을 읽었으므로 진화론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렸다고 할 수 없다.


당시 내가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몰랐던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의견이 있고 서로 대립한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진화론은 진화론자끼리, 창조론자들은 창조론자끼리 요즘말로 ‘팀 kill’ 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는 진화론은 A, 창조론은 B라고 결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아주 다르다. 지금 나는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각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근거와 자료, 논리와 논박이 있어서 이것을 통달한다는 것은 전문가라도 불가능 하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은듯하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이모저모 따질 실력은 안 되지만 그래도 진화론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창조론은 진화론이 틀렸다고 트집만 잡고 -여기 까지는 좋은데 - 진화론이 틀렸으니 창조론이 옳다, 할렐루야 아멘 쿵짜작 ....... 뭐 이런 식이다. 너무 설득력이 없다. 대부분 진화론이 틀렸다는 증거는 엄청 많이 써놓고는 자기들이 왜 옳은지에 대한 근거는 없다. 내가 그들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그들은 창조론자가 아니라 진화론 비평가들이다. 일종의 현대적 소피스트라고도 할 수 있다. 괜히 진화론에 먹칠을 해서 별 볼 일 없는 창조론을 괜히 부각시켜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반면 진화론은 다르다. 진화론 역시 수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을 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가장 큰 뼈대는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다. 바로 생물은 진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창조론자들 중에서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도 많다. 역시 진화론자 중에서도 화석을 위조해 가면서 진화론을 옳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록 그럴지라도 진화론자들은 생물의 특성에 대해 연구해 가며 인류에게 공헌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을 비판만 할 뿐 그들 스스로 값진 과학적 지식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그 어떠한 것도 100% 동의 하지는 않지만 진화론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보통 진화론은 다윈이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있기 훨씬 전부터 있던 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처음 체계화 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우리가 진화론 하면 다윈을 떠올리는 이유는 다윈이 그것을 증명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진화론의 핵심은 생물이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다윈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생물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생물은 도태된다고 주장했다. 생물은 자주 쓰는 것은 발달하고 잘 안 쓰는 것은 퇴화한다는 가정 아래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주 쓰는 것과 잘 안 쓰는 것이 바뀌게 된다. 또한 생물은 언제나 변종이 만들어진다. 보통 변종은 안 좋은 돌연변이로서 도태되지만 바뀌는 환경에 알맞게 변이된 변종은 살아남는다. 가령 발을 많이 쓰던 A종이 손을 많이 써야 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발을 많이 쓰던 애들은 도태되고 손을 많이 쓰는 애들이 먹이, 짝짓기, 생존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해 진다. 이리하여 발을 많이 쓰는 A종의 유전자는 후손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고 손을 많이 쓰는 B종의 유전자가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결국 A종 -조상- 은 도태되고 B종 -후손- 이 번성한다. 혹은 A라는 종이 매우 번성하여 매우 넒은 지역을 차지했을 때 조상들이 살던 곳과 다른 환경에 접한 A라는 종들은 B,C,D,E,F,G 라는 수많은 변종으로 변해 살아남는다. 그리하여 A라는 종과 함께 B,C,D,E,F,G 라는 변종이 함께 살아가게 된다.

이 외에 수많은 사례들과 반증 그리고 반증에 대한 반증 들이 있지만 그것은 제외하고 싶다. 그 많은 것을 다 쓴다는 것은 내가 또 하나의 종의 기원을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진화론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직감으로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 은 잡히는데 도무지 논리로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 사람의 진화론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철학에 가깝다. 생명철학이라고 불리는 이 철학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서 더욱더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론인가보다. 그는 진화가 일어나는 데 다윈과 마찬가지로 환경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생명체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이 진화를 일으킨다고 주장하였다. 만일 환경이 변화하여 생명체가 변해야 한다면 생명체를 변하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은 환경이 아니라 생명체 내부에 존재하는 변화할 수 있는, 예측이 불가능한 힘 - 이 사람은 이것을 ‘엘랑 비탈’ 이라고 부름 -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책 제목을 창조적 진화라고 했나보다. 생명이 창조하는 진화.


 여기 까지는 이해가 쉬웠다. 그런데 그 외의 다른 것이 매우 난해했다. 원본을 보지 않아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만화책이 원본을 99% 이상 반영했다고 가정하면 그는 이 책에서 진화와 함께 생명성과 인간이 학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도 함께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생명과 물질이 있었는데 생명이 형체를 갖추기 위해 물질을 빌려 생명체가 되었다. 그래서 생명체 안에서는 물질과 생명의 일종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생명은 물질로부터 더 많이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고 물질은 그 반대로 행한다. 그래서 생명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물질에게 에너지-비결정성-을 주고 자유를 얻는다. 식물이 가장 덜 자유롭고 그다음이 동물 그 다음이 인간이다. 이 비결정성이라는 것은 신경세포의 발달에 의해 결정된다. 이리하여 의식이라는 것이 생기는데 의식 안에는 이성과 직관이 있다. 이성은 물질을 분석하고 나누는데 유리하고 직관은 물질세계를 넘어선 생명의 세계와 소통하는데 필요하다. 이성 안에도 직감이 있고 직감 안에도 이성의 성질이 있어서 이 둘은 함께 가야 하는데 인간은 직감을 무시하고 이성만을 중시한다. 그리하여 이성의 한계로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이성의 잣대로 재려고 하는 교만을 부린다. 뭐 이러쿵저러쿵 해서 그는 생명에 관한 것 -진화는 그 중 일부- 을 이성과 공식, 법칙으로  만들어 내려는 인간의 시도를 교만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생명의 힘을 무시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것들을 보았을 때 다윈은 생명의 진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분석’하려는 타입이었다. 반면 베르그송은 ‘분석’의 힘을 존중했지만 ‘분석’ 을 전부로 생각하고 생명의 그 엄청난 가능성을 인간의 좁고 편협한 ‘분석’안에 가두는 것을 어리석고 교만한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윈은 훌륭한 과학자로 베르그송은 훌륭한 철학자로 평가하고 싶다.


s*******e 2009.05.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