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 위의 아이들'의 작가 구드룬 파우제방의 작품이다. '나무 위의 아이들',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등 시사적인 주제로 교육적 효과까지 누리는 작품들을 쓰는 작가라는 인식 때문에 '거인 산적 그랍쉬와 땅딸보 부인'이라는 코믹한 제목과 작가의 이미지가 살짝 낯설었다. 그런데 이 책. 무척 감동스럽다. 여든이 다된 노작가의 관록이 고스란히 담긴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었다.
거인 산적 그랍쉬.
거인이며 산적이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무식하며 박쥐똥이 쌓여있는 아주 지저분한 동굴에서 살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에 상당한 즐거움을 느끼고 경찰이 자신을 잡지 못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총으로 사람을 위협하며 도둑질을 해도 정작 사람을 죽인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 그에게 부인이 생긴다.
땅딸보 부인 올리.
그랍쉬의 허리 정도까지의 키를 가진 올리. 숲속에서 길을 잃어 그랍쉬를 만났고, 그랍쉬를 무서워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올리는 그랍쉬의 순수함을 알아봤고, 그랍쉬를 좋아하게 된다. 돼지저금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돼지 콧구멍을 그리는 일을 싫어했고, 예민하고 고약한 성격의 헤드비히 이모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던 차에 그랍쉬에게 자신을 이모집에서 훔쳐가달라고 한다. 하여 그랍쉬의 아내가 된다.
그랍쉬와 올리가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된 이후부터 이 책의 진가가 발휘된다. 이 책이 진정 동화책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부부가 겪게되는 모든 물리적, 심리적 상황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면,
1.쾌적한 환경을 좋아하는 올리는 동굴을 깨끗이 청소하고, 박쥐들도 모두 동굴 밖으로 쫒아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랍쉬는 오랜 세월 박쥐가 자신의 대화 친구였고 박쥐똥이 떨어지는 것도 익숙한 일이어서 박쥐를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올리가 그랍쉬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여 박쥐를 내쫓지 않는 걸로 결정한다.
2. 위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그랍쉬를 씻게 하려하나 그랍쉬는 씻지 않으려한다. => 올리에 잔소리에 승복하고 폭포에서 씻으며 이 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랍쉬.
3. 그랍쉬의 도둑질이 싫은 올리는 언젠가는 도둑질을 못하게 하려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걸 못하게 하면 안되니까 점차적으로 줄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결국 나중엔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되지만 도둑질을 좋아하는 그랍쉬는 산적생활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러다 인생의 황혼기에 그랍쉬는 가끔씩만 도둑질을 하겠다고 하고 올리는 아들과 지인의 집만 도둑질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나중에 다시 돌려주면 되니까. => 도덕적, 윤리적인 것을 떠나 서로가 좋아하는 일을 인정해주는 모습.
4. 아이를 낳고 먹고 사는 일에 치이고, 생활에 치이면서 잔소리가 심해지는 전형적 아내의 모습으로 변화는 올리의 모습.
5. 동굴이 습하고 아이를 기르기에 적합지 않다고 생각하여 동굴 밖에 집을 짓자는 올리의 의견에 처음에는 반대하지만 태어난 아이를 생각하여 마음을 바꾸고 동굴 앞에 집을 짓는 그랍쉬 => 아빠로서 가장으로서 자신의 삶 일부를 포기하는 모습. 등등.
그랍쉬와 올리 부부의 모습은 현실 부부의 모습과 부모가 되면서 바뀌게 되는 마음상태 등을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녹여 냈다. 어른이라면 올리와 그랍쉬의 현실 부부의 모습이 얼마나 디테일하게 그려졌는지 알것이다. 또 하나 작가의 관록이 느껴지는 장면은 아타 할머니의 죽음 장면이다. 아타 할머니는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그랍쉬가 독버섯을 먹고 죽었다고 생각하여 올리가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들어가 눕는다. 그리고 파티처럼 모두가 구덩이 주위에 모여서 아침식사를 함께 한다.
" 참 오래 살았다. 살면서 실수도 많이 했지. 하지만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멋져지더라" (2편 p275)
죽음을 앞 둔 아타 할머니가 한 말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작가가 몇 살에 이 작품을 썼는지가 궁금해졌다. 그 나이를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감정,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다면 그려내기 쉽지 않았을 장면. 아타할머니의 죽음을 준비하는 방식이 나의 생각과 비슷하여 정말 공감하며 읽었던 장면이었다.
죽음을 축제처럼, 모두가 웃으며 사후엔 아무것도 없으니 지금여기를 잘 사는 것.
이쯤에서 나는 다시 맨 첫장 출판정보를 펼쳐보았다. 초판 2008년. 작가 출생년도 1928년. 80살에 출간한 책이었다. 그제서야 이 책의 깊이와 맛이 여느 동화와 달랐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생의 황혼기를 지나치고 있는 작가의 연륜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었기에 동화가 동화 아닌 듯 인생의 깊은 맛을 담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결말은 이렇다. 올리와 그랍쉬의 라벤호어스트 숲은 이제 나이가 들어 늙어버린 올리와 그랍쉬를 끊임없이 도와준 소방관이었던 막스, 그랍쉬의 집짓기를 도와줬던 목수 안톤, 그랍쉬 서커스단의 어릿광대였던 카지미르, 올리의 할머니인 리즈베트 할머니가 모여 살게 된다. 평생 그랍쉬를 잡으려고 했던 경찰서장 스톨첸뤼크 부부도 라벤호어스트 숲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와서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그랍쉬의 모습이 그려진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 홀로인 노인들이 라벤호어스트 숲에서 모여 서로 의지하며 각자가 잘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노년을 활기차게 보낸다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요즘으로 치면 요양원의 형태인 라벤호어스트 숲은 좀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이다. 노년의 삶, 죽음의 준비 등에 관심이 많아진 요즘이라 이 결말이 더 좋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도 모르게 책을 꼬옥 끌어안았다. 동화지만 어른을 위한 동화같은 책이었다. 정말 어른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우스꽝스럽고, 동화적인 설정이 많아도 부부의 삶, 부모의 삶, 노년의 삶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하는 책이다. 동화지만 5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책이다. 읽고 나면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나처럼 절로 책을 꼬옥 끌어안고 있는 자신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
|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말이 여기서도 딱이네요. 너무나 다른 두사람이 어찌이리도 딱인지 덥수룩한 콧염에 할 줄 아는 짓이라곤 도둑질 뿐인 거인 그랍쉬 작지만 똑부러지는 땅딸보 올리 두사람은 운명적으로 끌렸나 봅니다. 아이가 읽으며 "뭐 이래.뭐가 좋다고.." 요즘 사춘기라 만사가 뾰룡퉁 합니다. 하지만 제 눈에 두사람이 너무나 이쁘고 사랑스럽더라구요. 올리를 만나 새로 태어아게 되는 그랍쉬를 보는 기쁨 한국판 온달과 평강공부라고나 할까요. 바보와 공부..정말 다른 두사람이 만나 부부의 연을 맺듯 그랍쉬와 올리 역시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였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이어 대댇로 도둑질을 하는 그랍쉬 퉁명스럽고 덩치는 위협적인 산적 같은 그랍쉬 새침하고 바지런한 올리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티격태격 보통 새롭게 시작하는 부부들이 겪는 서로에게 맞춰가는 그런 과정을 겪어요. 그 과정에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더욱 깊어져 가지고 그 과정을 거쳐 변화가 일어나요. 그랍쉬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요. 산적으로 아무렇게나 살던 그랍쉬가 아니라 올리를 사랑하는 한남자로써 두사람의 아기를 위해 새롭게 태어납니다. 아프거나 힘든 것과는 거리가 멀것 같던 그랍쉬가 아팠을 때 옆에서 정성꼿껏 간호하고 함께 힘들어 하던 올리를 보면 서로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깊은지를 알 수 있었네요. 너무 사람만 하면 아이의 공감을 엊지 못할 수 도 있는데 그람쉬의 엉뚱한 매력과 올리의 당찬 말투가 긁읽는 재미를 더해주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