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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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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의 사회학』이라는 책으로 보다 넓은 독자를 확보한 노명우 교수가 2008년에 쓴 책이다. 프로네시스라는 출판사는 웅진의 인문사회 임프린트로, 꽤나 좋은 책을 많이 냈는데 지금은 없어진 모양. 나는 이 책을 웅진 기획전 할 때 권당 3,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샀더랬다. 지금은 도서정가제 실행 이후로 불가능해진 아, 그 시절. 도서정가제가 실시된 지 벌써 1년이 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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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의 사회학』이라는 책으로 보다 넓은 독자를 확보한 노명우 교수가 2008년에 쓴 책이다. 프로네시스라는 출판사는 웅진의 인문사회 임프린트로, 꽤나 좋은 책을 많이 냈는데 지금은 없어진 모양. 나는 이 책을 웅진 기획전 할 때 권당 3,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샀더랬다. 지금은 도서정가제 실행 이후로 불가능해진 아, 그 시절. 


도서정가제가 실시된 지 벌써 1년이 넘었으니, 이 책을 사두고 꽤나 오랫동안 방치했다는 의미다. 뒤를 확인해 보니 내가 산 것은 2012년 9월 5일 6쇄본이니, 책이 나온 지 상당히 오래 지난 뒤에야 첫 독자를 만남 셈. 


이 책은 제목처럼 텔레비전에 관해 다룬다. 저자인 노명우 교수는 독일에서 공부한 사회학자. 많은 사회학자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 책에서 느껴지는 향기는 게오르그 짐멜이다. 짐멜은 비록 학계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그의 장기는 대중 친화적인 필체로 미시적인 현상에 관해 다루기인데, 그래서인지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도 비사회학 전공자가 보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짐멜에 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의 작업에서 또 하나 특징은 '다층적 분석'이다. 그는 진/위 선/악으로 제단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적 현상에 관해 다양한 층위를 벗겨내려고 할 뿐, 이분법으로 보지 않으려 한 게 짐멜의 사회학.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을 꿰뚫는 인식 역시 짐멜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텔레비전은 좋다, 나쁘다를 논하기보다는 텔레비전이 어떠한 맥락에서 등장했고, 어떠한 효과를 가져 왔으며, 그 효과 중에 이러한 면도 있고 저러한 면도 있다. 미래 텔레비전의 운명은 이렇게 전개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정도가 이 책이 품은 내용이다. 참고로 목차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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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 텔레비전 카드, 학자가 되다


ON 텔레비전을 켜다

1.매개된 삶은 인간의 운명이다

2.이미지와 텍스트의 경쟁 시대

3.누가 스크린을 살해했는가


VOLUME 텔레비전과 포드주의

1.포드주의의 학습장

2.볼륨 장치와 매스 커뮤니케이션

3.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경제학


CHANNEL 텔레비전과 모더니티의 시공간

1.채널, 거대한 일방통행로

2.사적 공간에 공적 공간이 침투하는 길

3.시청자가 호명당하는 통로

4.거실 속의 외부 세계

5.거실로 모더니티의 시간이 쏟아지다


OFF 텔레비전을 끄다

1.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나타내는 문화적 징후들

2.뉴 미디어, 상충하는 의사소통 형식

3.왜 오프 버튼을 찾아내야 하는가


에필로그 - 텔레비전 시대, 살 것인가 살아질 것인가

미주

도움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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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책이 나온 지 8년이 지났고, 그간 미디어 환경이 많이 변했다. 하여 뉴미디어와 텔레비전의 미래를 논한 4장 부분은 개정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쉽지는 않은 듯. 프로네시스가 없어졌고, 팔릴 만큼 팔린 책이지만 지금 미디어 환경에서 화제는 텔레비전이라기보다는 다른 뉴미디어인지라 꼭 개정해야 할 시대적 당위성은 부족한 터. 노명우 교수님이 얼마나 이 책에 애정을 가졌는지가 개정판이 나올지 안 나올지를 결정할 듯.참고로 이 책의 종이책은 절판 또는 품절이라 구하기 힘들고 전자책은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바이백은 매입 불가 상품이고나 ㅠㅠ 그냥 기증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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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메모)


텔레비전은 전통적인 엘리트와 민중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오히려 텔레비전은 엘리트와 민중을 모두 '대중'이라는 기호로 흡입한다. (중략) 벤야민은 동일성 있게 학자/전문가로서의 삶을 유지했다. 그가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그 당시 노동자가 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과 분명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와 대학교수가 여가를 보내는 방식은 텔레비전 시청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26쪽)


하나의 미디어가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선택권이 없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미디어 선택이 아니라, 미디어 적응이다 (45쪽)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 대중화되기 이전, 이미지와 문자는 서로 대립하는 상쟁의 관계였다. 텍스트(문자)가 귀족적이고 선형적인 코드를 대표한다면, 이미지는 민중적이고 비선형적인 코드의 대변자였다. (58쪽)


기술적으로만 보자면 텔레비전은 영화 기술의 계승자이다. (중략) 영화관이라는 공간 속에 관람자의 사적 영역은 구축될 수 없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처음부터 사적 공간에서 응시된다. (95쪽)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충분한 임금과 여가 시간을 받은 노동자들이 더이상 노동조합을 기웃거리지 않고 쇼핑센터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듯, 포드주의의 확장은 계급을 소비자로 분해시키는 고강도 처방이었다. (102쪽)


텔레비전은 그 자체로 포드주의적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영화는 산업이면서 예술이라는 애매모호한 성격을 지니지만 텔레비전은 그렇지 않다. 텔레비전은 처음부터 산업적 성격이 분명했다. (Debray, 『이미지의 삶과 죽음』, 시각과언어, 1994, 362쪽) 텔레비전은 대량소비를 전제로 만들어진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대량소비는 시청률로 측정된다. (중략) 자동차 회사가 잘 팔리지 않는 모델을 폐기하고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는 것처럼, 시청률이 떨어지면 방송국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시장에 내놓는다. (105쪽)


텔레비전을 지배하는 이념은 정치에서 경제로 바뀐다. 텔레비전만큼 경제적 이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미디어는 없다. (중략) 텔레비전은 밑 빠진 독과 같다. 때문에 텔레비전은 정치를 숭상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은 경제를 숭상한다.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탈정치화는, 정확히 말하면 경제 지향적 태도의 확산이다. 이런 의미에서 텔레비전은 신자유주의의 예고편과 유사하다. (109쪽)


매해 반복되는 자연재해 특별방송은 재난방송이 방송되는 지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운명 공동체라는 느낌을 부여한다. 재난방송은 재난을 극복하거나 예방하는 효과가 거의 없다. 재난방송은 이미 사건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중계된다. (중략) 텔레비전을 매개로 한 집합적 정서 공유는 텔레비전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163쪽)


사회적 삶은 전적으로 재현의 문제이다. 개인의 사회적 삶에 관한 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극단의 과잉과 결핍으로 양분된다. 과도하게 사회적 삶을 얻은 사람들, 그들은 이른바 유명인이다. 정치인이든, 문필가든, 스포츠 스타든, 연예인이든 몇몇 소수의 사람들은 과도한 사회적 삶을 얻는다. 그들은 과잉으로 재현된다. 반면 그 소수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잉으로 재현되고 있지 못하다. 그들에게 재현은 이벤트다. 유명인들에게 재현의 빈번함은 스트레스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재현은 일생일대의 사건이다. (166쪽)


텔레비전이 등장하고 난 이후 타인의 재앙을 가장 안전한 거실에서 구경하는 습관이 형성되었다. 손택의 주장처럼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 구경은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 (175쪽)


게오르그 짐멜이 이 이미  「대도시와 정신 생활」에서 간파했듯, 메트로폴리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정신 상태가 있다. 메트로폴리스 거주민들의 독특한 정신 상태는 시간 감각에서 절정을 이룬다. 메트로폴리스 거주민들에게는 어슬렁거림이 없다. (중략) 모더니티의 시간 논리는 메트로폴리스 거주민에게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농촌 거주민도 대도시 거주민과 유사한 정신 상태를 보인다. 텔레비전은 메트로폴리스와 농촌의 차이를 의미 없게 만든다. 텔레비전을 켜는 순간 대도시든 한적한 산촌이든 상관 없이 모더니티의 시간 구조가 거실로 쏟아진다. (181쪽)


과장은 금물이다. 가능성은 가능성일 뿐이다. 웹 기반 의사소통망은 촛불시위와 같은 특별한 정세에서만 힘을 발휘할 뿐이다. 웹 기반 의사소통망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시기가 끝나면, 텔레비전은 다시 개인들의 일상을 제압하는 막강한 능력을 보여준다. 텔레비전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215쪽)


텔레비전을 당장 꺼야 하는 이유가 텔레비전에 침투한 상업성 때문이라고 지적한다면 그건 너무나 근본적인 이유를 든 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상업성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은 없다. (중략) 텔레비전은 바보상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대중의 취향을 하양 평준화시키기 때문에 꺼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문화 보수주의자라는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문화의 하향 평준화는 비단 텔레비전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다. (중략) 텔레비전을 꺼야 하는 이유는 텔레비전에 내재된 상업성 때문도, 텔레비전이 바보상자이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바로 텔레비전이 외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시청자가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끄기'는 부재하는 응답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222~223쪽) 

YES마니아 : 플래티넘 l****i 2016.04.26.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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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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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금 시대의 텔레비전은 우리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에 이르렀다. 텔레비전은 사회의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어있는지 보여주고, 대중문화를 선도해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많이 발달해서 텔레비전이 예전만큼의 파급력을 가지진 않지만 여전히 막강한 미디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텔레비전에 대해서 살펴보는 행위는 분명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될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내용보기

이제 지금 시대의 텔레비전은 우리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에 이르렀다. 텔레비전은 사회의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어있는지 보여주고, 대중문화를 선도해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많이 발달해서 텔레비전이 예전만큼의 파급력을 가지진 않지만 여전히 막강한 미디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텔레비전에 대해서 살펴보는 행위는 분명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노명우 교수님의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은 텔레비전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 사회학적으로 해석한 글이다. 이 글을 다 읽고 난후 텔레비전에 나오는 방송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좀 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었다.

 

미디어의 홍수속에 살고 있는 지금 시대에 꼭 읽어 보아야 할 책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k*****3 2015.08.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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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장자에 대한 대안 없는 흥미로운 진단
"바보장자에 대한 대안 없는 흥미로운 진단" 내용보기
제목이 적당하다. 말 그대로 텔레비전은 우리의 가족이다. 우리 부모들은 텔레비전은 교육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자식들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만 보지 말아야 한고 어른들은 봐도 된다는 단서가 달려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은 말한다. 텔레비전이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이라는 일방적 권력을 어떻게 민주화 시킬 것인가가 문제다.
"바보장자에 대한 대안 없는 흥미로운 진단" 내용보기

제목이 적당하다. 말 그대로 텔레비전은 우리의 가족이다. 우리 부모들은 텔레비전은 교육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자식들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만 보지 말아야 한고 어른들은 봐도 된다는 단서가 달려 있지만 말이다. 이 책은 말한다. 텔레비전이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텔레비전이라는 일방적 권력을 어떻게 민주화 시킬 것인가가 문제다. 일방적 권력 작용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방법론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아쉬운 것은 저자는 이런 흥미로운 질문에 대해, 답변은 이 책으 범위를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 책을 짚어 드는 독자들이 가지는 목적은 텔레비전이 뭔지 아는 것 보다는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한다고 봤을 때, 마지막에 언급된 저자의 뜻밖의 주장은 당황스럽다. 다만, 노예가 스스로 노예라는 것을 안다면 그 때 부터는 노예가 아니라는 낯 익은 언급을 떠 올린다면 이 책이 별 네 개를 받아도 그리 욕 먹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이런 언급을 인정한다면 이 책은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텔레비전은 우리 삶을 규정해 왔다. 우리는 어느새 시간 조차도 텔레비전이 쏘는 근대적인 시간 관리에 의해 살아 왔다. 더구나 텔레비전은 정치성을 넘어 경제적 마귀가 되고 말았다. 국가에 의한 소수 독점으로 시청자의 정치적 노예와 경제적 노예라는 두 가지 질곡에 사로잡히게 됐다. 저자는 이런 논의를 다양하고 쉽게 설명한다. 텔레비전은 포드주의의 새로운 상징이다. 대규모로 프로그램을 쏘고 대규모로 소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소비 자체가 노동의 가치를 산출한다. 시청자들은 자신이 휴시식을 취하기 위해 행하는 시청이 노동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알면 어쩌겠는가? 안다고 텔레비전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자본주의의 외부로 벗어날 자신이 있는가? 더구나, 우리가 텔레비전을 보는 거실이라는 사적인 공간은 브라운관에서 쏘는 공적인 전자파에 의해 지배되었고, 관리되었다. 푸코말대로 아주 정교하게 권력에 의해 '훈육'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이 텔레비전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까? 글쎄, 내가 보기에는 회의적이다. 국가가 가만히 있겠는가? 아니면, 대안적이며 진보적인 텔레비전 방송국의 설립. 그것도 문제다. 대안적이며 진보적이라는 아주 일시적으로만 의미를 갖는 말을 위한 방송국의 설립은 또 다른 텔레비전의 노예 말고 무엇이겠는가.

 

저자는 일방적 침묵이 아니라 말을 걸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 걸기의 구체적 모습과 효과는 그리 선명하지 못하다. 텔레비전의 자장 내에서 텔레비전이 쏘는 권력 질서를 벗어나 말을 거는 것이 가능할 지 의문이다.

 

나와 너 우리의 친구 텔레비전에 대한 아주 쉽고 흥미로운 관찰이었다.

g********m 2009.05.18. 신고 공감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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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또하나의 가족 - 우리 이제 말을 하자-
"텔레비전 또하나의 가족 - 우리 이제 말을 하자- " 내용보기
텔레비전, 그리고 책.. 나의 삶에서 뗄 수 없는 휴식시간의 양대산맥. 마치 근육이 수축 되고 이완 되듯이. 책이 수축된 근육처럼 단단함과 알참을 준다면, 티비는 이완된 근육처럼 편안함과 릴렉스를 준다. 근육은 이완없이 수축할수 없고 수축 없이 이완될 수 없듯이 나에게 티비와 책은 상보적인 관계이므로,통설처럼 회자되는, '바보상자이며, 티비가 책을 멀게 한다' 는  양립불가능
"텔레비전 또하나의 가족 - 우리 이제 말을 하자- " 내용보기
텔레비전, 그리고 책.. 나의 삶에서 뗄 수 없는 휴식시간의 양대산맥. 마치 근육이 수축 되고 이완 되듯이. 책이 수축된 근육처럼 단단함과 알참을 준다면, 티비는 이완된 근육처럼 편안함과 릴렉스를 준다. 근육은 이완없이 수축할수 없고 수축 없이 이완될 수 없듯이 나에게 티비와 책은 상보적인 관계이므로,통설처럼 회자되는, '바보상자이며, 티비가 책을 멀게 한다' 는  양립불가능 논리는 공감할 수 없었다. 티비는 티비대로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스스로를 텔레비전 키드라고 일컬으며, 티비의 영향 아래에서 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오히려 바보상자라고 비판하며 거부하는 태도를 버렸다. 일단, 티비를 끄라끄라 잔소리를 하며 바보상자이다, 뇌가 거의 운동하지 않는다는 등의 접근과는 다르게, 좀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눈길을 끌었다. 이 책은, 바보상자라고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대신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티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에 대해  성찰적 태도로 조명하고 있다. 필자는 어떤 대답을 할까? 들어가보자.  

 

티비 리모컨에 빗댄 구성은

텔레비전을 켜다 on /

텔레비전과 포드주의 volume /

텔레비전과 모더니티의 시공간 channel/

텔레비전을 끄다 off/

이렇게 4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부분에서 내가 주목한것은, " 우리는 티비 없이는 살수 없는 시대에 놓이게 되었다." 는 것이다.  하나의 미디어가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그 사회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선택권이 없고 적응의 문제만이 남는다. 문자가 환경미디어가 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신문이 환경미디어가 되면서 브루주아의 시민혁명이 일어났듯이, 문화적 형식을 획득한 티비는 환경미디어가 된다.

 

두번째 부분에서 주목한것은, '리모컨을 들었을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볼륨을 높이고 줄이는 것뿐이다.' 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티비의 비대칭적 소통구조로 인해 시청자의 무능을 전제로 하며 송신 기능이 없다. 또한, 티비는 포드주의의 학습장이며 포드주의적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티비는 시청자에게 광고를 판다. 티비를 통해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를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시청자는 동일한 상품을 소비하는 대규모 인간의 덩어리의 일부로 편입된다. 광고에 노출 되는 소비자는 소비주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탈 정치화되었던 대중은 티비를 만나면서 소비자로 전락한다.

 

세번째 부분에서는, '우리는 티비의 규칙과 규율을 학습하고 티비가 구축하는 세계속으로 편입한다'.는 점이다. 티비의 천재성은 광고에서 빛난다. 멜로드라마를 보다가 심각한 뉴스로 전환을 해도 우리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현실과 환상을 오고가기 사이에는 광고가 있다. 이처럼 객관모델과 주관모델을 천재적으로 결합하는 미디어는 없다.

 

또한 티비는 우리의 사적공간에 침투하여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우리는 방안에 가만히 앉아 티비를 본다. 티비 이전시대에 사적 공간이 전제되고 공적공간이 형성되어 정치로 발전하는것과 다르게 티비는 사적공간으로 침투하여 일방적으로 점령하고 이는  전체주의를 낳는다. 따라서, 시청자는 붉은 악마로, 국민으로, 호칭당한다. 생방송중계를 보면서 재난 방송을 보면서 서로 같은 방송과 장면을 공유하는 공동운명체가 된다. 

 

티비에 등장했다는 것은 가치있고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사실 자체보다 카메라 앵글과 전파를 타면서 재현될 뿐이다. 사실은 재현되지않으면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다. 실례로 이탈리아의 한 정치가는 부패스캔들로 물의를 빚었지만 방송을 장악함으로 인해 총리로 복귀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방송통신위원회가 대통령 소속으로 자리매김하고, 공영방송의 민영화를 시도하고 방송법을 개정하려 시도하면서 방송장악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과 유사하다. 이처럼 재현의 힘을 가진 티비, 방송의 위력은 대단하다.

 

네번째부분에서는 뉴미디어의 등장과 그것으로 인해 티비는 어떤 형태로 변화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티비를 정말 꺼야 하는지 왜 꺼야 하는지 이야기 하고 있다. 뉴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서, 웹과 모바일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다른 형태로 텔레비전을 만난다.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전통적인 방식과 다르게 미드와 일드를 시청한다. 의사소통 방식도 변했다. 포털 사이트 아고라에서 우리는 참여를 한다. 엘리트부터 찌질이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다. 2008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서 새롭게 드러난 것이 웹캠을 통한 현장방송이다. 우리는 더이상 방송국의 보도가 아닌, 다른형태로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실들을 볼 수 있게 되고 보면서 바로 바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티비를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티비는 오늘의 우리를 만들 사회적 부모이자 또다른 교육자이고 여전히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티비를 꺼야 하는이유는 그것이 바보상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청자가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살아갈 것인가 살아질것인가의 문제처럼, 필자는 우리가 실어증 걸린 시청자가 아닌 티비에 응답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하고 있다. 뻔한것 같지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속시원한 추천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빛을 발하는것은 위와 같은 4부분의 분석과 성찰을 통해 속시원하게 우리가 해야할 일!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담글 수는 없지 않은가. 티비 앞에서 무기력한 덩어리가 아닌, 그렇다고 부작용이 좀 있다고 우리 친구이자 교육자이다 삶의 위로자인 티비를 아예 없애 버리는 잔인한 주인도 아닌  이제 우리 말을 하자!  티비를 향해!

 

s****9 2009.02.0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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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인 텔레비젼의 소통방식을 만들어야
"민주적인 텔레비젼의 소통방식을 만들어야 " 내용보기
아마도 텔레비전 보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나 가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텔레비전은 지금까지 출현했던 매스미디어 중 가장 강력하고 모진 성격을 지진 매체가 아닐까 한다. 하긴 우리 집에서도 매일 같이 TV를 두고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지친 심신을 달래겠다면 TV전원을 켜는 아내와 기회라 싶어 읽던 책을 던져두고 달려가는 아이들을 못마땅하게 흘겨보는 내가 대립한다.
"민주적인 텔레비젼의 소통방식을 만들어야 " 내용보기

아마도 텔레비전 보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나 가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텔레비전은 지금까지 출현했던 매스미디어 중 가장 강력하고 모진 성격을 지진 매체가 아닐까 한다.

하긴 우리 집에서도 매일 같이 TV를 두고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지친 심신을 달래겠다면 TV전원을 켜는 아내와 기회라 싶어 읽던 책을 던져두고 달려가는 아이들을 못마땅하게 흘겨보는 내가 대립한다.

10여년 전에 나남에서 출간된텔레비전과 매스미디어?>라는 책에는, TV시청 시에 인간의 두뇌활동이 거의 저점까지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그래서 바보상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었지. 3년 전엔가는내 아이를 지키려거든 TV를 꺼라란 책을 아내와 돌려 읽으며 거실에서 TV를 완전히 없애려 했던 적도 있었다.

좋은 프로그램을 선별해 보자는 설득에 넘어가 안방으로 이동한 TV는 이젠 말 그대로 50인치의 PDP로 탈바꿈하여 그야말로 안방극장이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물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서적으로 힘들었던 순간을 잊게 해주고 위로해 주었던 텔레비전의 순기능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무심코 보다가 정작 중요한 시간을 흘러 보냈던 많은 기억들은 그러한 장점을 일거에 역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어떻게 해야 텔레비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 정말로 텔레비전으로부터 빼앗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에 대한 답을 TV보기를 할 때마다 되뇌었던 것 같다.

 

저자는 자신을 가르켜 텔레비전 키드라 부른다. 텔레비전을 포함한 매스미디어를 연구하는 학자로서의 비판의식과 어쩔 수 없이 TV보기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대중의 한계를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거론한 아래의 문제의식은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학자들의 관심은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에서 그 미디어 속의 프로그램이라는 작은 단위로 이동했다. ~ 나는 사라져버린 시청자의 관점에서, 관습이 발휘하는 착시 효과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텔레비전이라는 전자 창문 속에 담겨진 문화형식의 결을 발견하려 한다.” (P.30)

 

저자는 소리와 문자, 이미지,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의 출현과 그들간의 패권다툼을 고찰한 뒤, 미디어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나 분명 특정 시대마다 시대를 주도하는 미디어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러나 대량생산경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비민주주의적 커뮤니케이션을 대변하는 텔레비전은 이전의 미디어와 비교할 때 월등한 영향력을 갖는다.

 

미디어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은 텔레비전의 온 스위치가 켜지는 순간 깨진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는 그 모든 미디어를 압도한다.” (P.73)

사적공간의 영역인 가정으로 자본주의의 광고가 물밀듯이 밀려들고 일방적인 정치적 주장들이 주입됨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의 시청자들은 무감각해 진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갖고 있는 특성 중에서 저자가 가장 경계하는 부분이 바로 단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의 속성에 있다. 멀리 확장하면 독재와 보수정치의 맥락과도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텔레비전의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한 인간들은 이 구조의 내부에서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놀라운 비대칭성이 텔레비전에 숨어있는 독이다. ~ 정치적 비난의 근거는 텔레비전에 내재된 의사소통의 비대칭성이다. 비대칭적 의사소통 형식 그 자체가 보수주의의 근원이다.” (P.115)

 

저자는 이러한 텔레비전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뉴미디어의 출현에 기대를 하고 있는데 이는 인터넷 공간을 통한 상호간 커뮤니케이션의 복원과 이를 통한 미디어 이용자들의 각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결국, 텔레비전이 현실 세계에서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개인 단위의 TV안보기 운동보다는 텔레비전이 갖고 있는 비민주적 의사소통 시스템을 개선하고 개혁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대꾸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라는 '흐름'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 ~ 응답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한 논의는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기에 내가 여기서 모든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별 프로그램의 피디가 누구인지보다는 방송사의 대표가 어떤 정치적 지향을 지니는지, 방통위의 위원이 누구인지에 시청자라는 이름 뒤에 숨은 전국민의 일상의 향방이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이 같은 의사결정의 독점 구조에 불만을 느낀다면 대꾸 능력의 회복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P.228)

 

텔레비전의 단순한 수용자로서 매몰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텔레비전의 매체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명제는 최근 방송통신관련법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보여주는 바다.

 

d****y 2009.01.18.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백남준은 이미 텔레비젼을 가ㅣ지고 놀았다!
"백남준은 이미 텔레비젼을 가ㅣ지고 놀았다!" 내용보기
글쎄 책값이 1만원 정도하는데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지 책인지 의심스럽다,   저자가 우리 일상생활에 공기처럼 파고든 텔레비젼을 가지고 여러 미디어 성찰을 했는데 내용은 그다지 신선하지는 않았다, 고대시대에 문자가 발명 되면서 이미지 그림을 밀어내고 사회적 위의를 차지하고 또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인쇄술의 발달로 신문과 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또 다른 미디어가 만들어지
"백남준은 이미 텔레비젼을 가ㅣ지고 놀았다!" 내용보기

글쎄 책값이 1만원 정도하는데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지 책인지 의심스럽다,

 

저자가 우리 일상생활에 공기처럼 파고든 텔레비젼을 가지고 여러 미디어 성찰을 했는데 내용은 그다지 신선하지는 않았다, 고대시대에 문자가 발명 되면서 이미지 그림을 밀어내고 사회적 위의를 차지하고 또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인쇄술의 발달로 신문과 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또 다른 미디어가 만들어지고 결국 지금은 텔레비젼이 온 세계를 장학했다는 관점에서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들여다 보는 이 테레비젼이라는 바보상자가 결국은 수신만있고 송신을 할 수 없는 일반통행의 독재를 일삼고 있다는 요지가 이 책의 핵심내용이다,

 

이건 이미 비디오아티스트인 백남준이 50년대에 테레비젼을 가지고 실험한 아이디였기 때문에 나한테는 별로 신선하지가 않았다,

 

텔레비젼이나 여타 미디어의 횡포나 폭력성 그리고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발전가능성을 엿보고 싶다면 비디오아티스트들의 책이나 작품들을 감삼하는 건 어떨까?

 

바로 백남준부터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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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d 2008.12.3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