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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전기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체 게바라 평전"을 권하는 운동권 선배와 "빌 게이츠"를 권하는 어머니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여기서 "목적의식"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전기가 교훈을 담고 있다고 배워왔지만, 전기의 가장 큰 특징은 교훈이 아니라 교화이다. 바로 "목적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전기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우리가 푸코의 전기를 꺼내들 때, 이 행위 역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기는 "교화"하려 하고, 우리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미셸 푸코]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교화"를 걷어버리고, 왠지 우리의 "의도" 또한 걷어버리려는 듯 보인다. 이제 푸코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꺼내든다면, 당신은 오히려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의 인생과 정면으로 맞닥드릴 준비가 되었다면, 책장을 넘겨라. 그러나, 단단히 마음을 먹는 것이 좋다.
[미셸 푸코]는 첫머리부터 우리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수많은 인물들의 나열과 철학적 언어의 직접적인 사용은, 책장을 채 몇장 넘기지도 못한 독자의 숨통을 벌써부터 턱턱 막히게 만든다. 기자이자 치밀한 전기작가인 디디에 에리봉은 푸코의 생과 철학의 궤적을 촘촘히 엮어나간다. 푸코가 사망하기까지 5년여 동안 푸코의 삶을 추적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디디에 에리봉은 또 한명의 ''''수집가''''이며, ''''작가''''이며, ''''주석가''''이다.
장애물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온 난해한 개념들을 무사히 헤치고 넘어왔다 하더라도, 우리는 곧 혼란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개념의 장애를 넘어서고도, 우리가 또다시 안개 속에 갇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푸코라는 인물의 모습을 손에 잡을 수 없는가? 이 안개는 작가의 의도인가? 혹은 작가의 무능력인가?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무능력인가?
일반적으로 전기작가는 한 인물의 (강조하고 싶은) 몇몇 특징과 성향을 추출해서, 그것으로 그의 인생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더 나아가 이렇게 확립된 일관성을 확대하여 인물 일대기의 부분부분에 그것을 역으로 적용시키기 마련이다. 특히, 美化와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전기라면, 이것은 책의 전면에 뻔뻔스럽게 등장한다. 결국 일반적인 전기는 "생략과 강조가 야기하는 왜곡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창조행위이다."
그러나, [미셸 푸코]의 전기작가인 디디에 에리봉은 -푸코에 대한 깊은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략을 버린다. 그는 오히려 푸코의 인생에서, 그의 업적과 지인들의 긍정적인 평가 뿐만아니라, 오류와 부정적인 평가까지 모두 나열한다. 그리고, 그의 행적을 꼼꼼하게 뒤쫗고, 그의 저서 및 논문, 기고문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2차문서, 그의 편지등등 빠짐없이 나열해 놓는다.
우리는 어린 시절 읽었던 "이순신"과 "링컨"의 전기에 익숙해 있음으로, 그리고 디디에 에리봉의 이러한 전략 탓에, 푸코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어린시절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 가장 좌파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이었지만, 의사인 아버지 덕분에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었고, 이란의 호메이니를 지지한 것으로 두고두고 비판세력의 입에 오르내렸던 푸코. 푸코의 완벽한 철학서에 매료되었던 독자라면, 전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푸코의 오류에 실망할 지도 모를 일이다. 어째서, "푸코"를 "링컨"처럼 미화할 수 없었던가. 저자는 왜 푸코의 삶을 그토록 낱낱히 파헤쳐 버렸는가.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푸코 자신의 저작들이 극도로 미시적인 연구방법의 산물이라는 사실에서 디디에 에리봉의 의도를 엿볼수 있다. 푸코는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성찰"만으로 자신의 연구결과를 얻어내는 기존의 철학 방식과의 단절을 시도했다. 철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새로운 방식. "전통적 철학의 경전적 텍스트를 버리고, 탐정소설이나 개혁안들을 ''''샅샅이 뒤지며''''" 그 곳에서 "진짜로 의식적이고 조직적이고 반성적인 전략"이 어떻게 숨어있는지를 찾아내는 작업. 이러한 작업이 바로 푸코의 작업방식이었다. 그리고 디디에 에리봉은 바로 "푸코적인 연구방법"과 "푸코적인 글쓰기"를 그대로 채용해서 푸코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존경." 즉, 디디에 에리봉이 푸코의 오류들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은 오히려 푸코에 대한 존경을 뜻하는 것이다. 푸코의 철학(적 방식)을 그대로 푸코의 인생에 적용시키기!! 푸코에 대한 애정을 깊이있게, 그리고 동시에 "정확하게" 표현하기. 이보다 더 "푸코의 전기에 어울리는 방식"이 또 있을까. 푸코가 살아있다면 -자신의 오류를 그대로 노출시켰음에도-, 그는 분명 이 전기가 마음에 들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푸코에 대한 노출주의"는 또 다른 효과를 가지는 데, 그것은 바로 푸코에 대한 고정관념을 걷어내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정관념"이란 "단 하나의 단어나, ''''~주의''''로 표현되는 푸코"를 의미하는 데, 이것은 푸코의 삶이나 철학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푸코는 살아 생전에 "구조주의자 푸코"라 불리길 극도로 싫어했다. 구조주의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제로 그의 철학은 구조주의라고 불릴울 수 있는 많은 혐의를 가지고 있다. 들뢰즈 역시 "레비-스트로스, 라캉과 함께 알튀세르, 푸코를 나란히 " 구조주의자라 언급했다. 하지만, 푸코는 "구조주의자 푸코"라 불리길 거부했다. 한 단어로 표현되는 철학은 "수많은 생략과 왜곡"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때문에 에리봉은 푸코의 전기에서 그의 인생중 특정부분을 강조하거나, 생략하는 방식을 피했던 것이 아닐까.
푸코의 전기에서 "푸코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푸코를 푸코에 적용하여, 존경을 나타내는 것". "저기에 현대 철학이 앉아있다"라는 찬사를 받은 천재 철학자의 인생을 느껴보라. 그도 역시 오류를 범하고, 또한 (중요한 철학적) 족적을 남기고, 다시 자신의 족적을 지우는 인간이다. 그가 죽은지도 어느덧 20여년이 흘렀지만, 나는 뒤늦게 그를 알았고, 뒤늦게 인사한다. "굳바이 푸코..." [인상깊은구절] 언제나 그렇듯이 푸코는 이 역사적 조사를 자기 혼자서 직접 할 생각이었다. 그의 역사연구 방법은 그런 것이었다. 즉 어떠어떠한 문제나 어떠어떠한 시기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자신이 직접가서 보는 식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마도 푸코가 철학적 사유방식에 도입한 가장 큰 단절일 것이다. 한 인터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사변적'''', 이론적 성찰은 역사에 대해서 소원한, 어쩌면 약간 오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철학자들은 생생하고 ''''정밀한'''' 일차자료로 간주되는, 그리고 가끔은 매우 수준이 높은 역사서를 읽고는 잠시 성찰한 후 자신이 직접 얻은 것이 아니 진실과 의미를 거기에 부여하기 일쑤였다. 다른 사람의 연구성과를 자유스럽게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게 용납되는 관행이었다. 너무나 손쉽게 용납되었으므로 그 누구도 이미 되어 잇는 연구결과를 기초로 자신이 연구를 한다는 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우무런 부끄러움없이 그것을 인용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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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책은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푸코"이다.
"미셸 푸코 上, 下" 를 다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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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칙적으로는 대부분이지만 실재로는 어떤 특별한 경우에, 그 사람의 생각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읽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푸코에 대한 나의 각별한 애정을 재확인했다. 내가 이미 (번역된) 그의 책을 다 읽어보았고, 또 그의 이론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디디에 에리봉의 이 책은 재미있다. 푸코의 카리스마를 직접 옆에서 이야기 듣는 기분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사실 푸코의 '담론', '언표' 개념이나 구조주의적 성격, 그리고 꼼꼼한 글쓰기의 형식을 그의 주저만으로 만나면 상당히 딱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사물'은 프랑스에서 빵처럼 잘 팔렸다니 신기하다. 이 책은 푸코의 그런 인기를 또한 보여주며 사유세계만큼 실천 속에서 살았던 그와 프랑스 지성사를 보여준다. 일단 그의 주저를 읽다가 난감해지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처음부터 이 책만을 읽으면 푸코 사유의 정수를 이해하고 음미하는데 쉽게 지칠 수도 있으니까. 푸코를 즐기자. 즐기다보면 그의 말이 이해되고 더 새로운 지점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