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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化는 이 책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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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전기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체 게바라 평전"을 권하는 운동권 선배와 "빌 게이츠"를 권하는 어머니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여기서 "목적의식"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전기가 교훈을 담고 있다고 배워왔지만, 전기의 가장 큰 특징은 교훈이 아니라 교화이다. 바로 "목적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전기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우리가 푸코의 전기를 꺼내들 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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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전기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체 게바라 평전"을 권하는 운동권 선배와 "빌 게이츠"를 권하는 어머니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여기서 "목적의식"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전기가 교훈을 담고 있다고 배워왔지만, 전기의 가장 큰 특징은 교훈이 아니라 교화이다. 바로 "목적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전기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우리가 푸코의 전기를 꺼내들 때, 이 행위 역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기는 "교화"하려 하고, 우리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미셸 푸코]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교화"를 걷어버리고, 왠지 우리의 "의도" 또한 걷어버리려는 듯 보인다. 이제 푸코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꺼내든다면, 당신은 오히려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의 인생과 정면으로 맞닥드릴 준비가 되었다면, 책장을 넘겨라. 그러나, 단단히 마음을 먹는 것이 좋다. [미셸 푸코]는 첫머리부터 우리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수많은 인물들의 나열과 철학적 언어의 직접적인 사용은, 책장을 채 몇장 넘기지도 못한 독자의 숨통을 벌써부터 턱턱 막히게 만든다. 기자이자 치밀한 전기작가인 디디에 에리봉은 푸코의 생과 철학의 궤적을 촘촘히 엮어나간다. 푸코가 사망하기까지 5년여 동안 푸코의 삶을 추적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한 디디에 에리봉은 또 한명의 ''''수집가''''이며, ''''작가''''이며, ''''주석가''''이다. 장애물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온 난해한 개념들을 무사히 헤치고 넘어왔다 하더라도, 우리는 곧 혼란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개념의 장애를 넘어서고도, 우리가 또다시 안개 속에 갇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푸코라는 인물의 모습을 손에 잡을 수 없는가? 이 안개는 작가의 의도인가? 혹은 작가의 무능력인가?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무능력인가? 일반적으로 전기작가는 한 인물의 (강조하고 싶은) 몇몇 특징과 성향을 추출해서, 그것으로 그의 인생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더 나아가 이렇게 확립된 일관성을 확대하여 인물 일대기의 부분부분에 그것을 역으로 적용시키기 마련이다. 특히, 美化와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전기라면, 이것은 책의 전면에 뻔뻔스럽게 등장한다. 결국 일반적인 전기는 "생략과 강조가 야기하는 왜곡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창조행위이다." 그러나, [미셸 푸코]의 전기작가인 디디에 에리봉은 -푸코에 대한 깊은 애정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략을 버린다. 그는 오히려 푸코의 인생에서, 그의 업적과 지인들의 긍정적인 평가 뿐만아니라, 오류와 부정적인 평가까지 모두 나열한다. 그리고, 그의 행적을 꼼꼼하게 뒤쫗고, 그의 저서 및 논문, 기고문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2차문서, 그의 편지등등 빠짐없이 나열해 놓는다. 우리는 어린 시절 읽었던 "이순신"과 "링컨"의 전기에 익숙해 있음으로, 그리고 디디에 에리봉의 이러한 전략 탓에, 푸코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쉽게 길을 잃는다. 어린시절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 가장 좌파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이었지만, 의사인 아버지 덕분에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었고, 이란의 호메이니를 지지한 것으로 두고두고 비판세력의 입에 오르내렸던 푸코. 푸코의 완벽한 철학서에 매료되었던 독자라면, 전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푸코의 오류에 실망할 지도 모를 일이다. 어째서, "푸코"를 "링컨"처럼 미화할 수 없었던가. 저자는 왜 푸코의 삶을 그토록 낱낱히 파헤쳐 버렸는가.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푸코 자신의 저작들이 극도로 미시적인 연구방법의 산물이라는 사실에서 디디에 에리봉의 의도를 엿볼수 있다. 푸코는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성찰"만으로 자신의 연구결과를 얻어내는 기존의 철학 방식과의 단절을 시도했다. 철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새로운 방식. "전통적 철학의 경전적 텍스트를 버리고, 탐정소설이나 개혁안들을 ''''샅샅이 뒤지며''''" 그 곳에서 "진짜로 의식적이고 조직적이고 반성적인 전략"이 어떻게 숨어있는지를 찾아내는 작업. 이러한 작업이 바로 푸코의 작업방식이었다. 그리고 디디에 에리봉은 바로 "푸코적인 연구방법"과 "푸코적인 글쓰기"를 그대로 채용해서 푸코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존경." 즉, 디디에 에리봉이 푸코의 오류들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은 오히려 푸코에 대한 존경을 뜻하는 것이다. 푸코의 철학(적 방식)을 그대로 푸코의 인생에 적용시키기!! 푸코에 대한 애정을 깊이있게, 그리고 동시에 "정확하게" 표현하기. 이보다 더 "푸코의 전기에 어울리는 방식"이 또 있을까. 푸코가 살아있다면 -자신의 오류를 그대로 노출시켰음에도-, 그는 분명 이 전기가 마음에 들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푸코에 대한 노출주의"는 또 다른 효과를 가지는 데, 그것은 바로 푸코에 대한 고정관념을 걷어내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정관념"이란 "단 하나의 단어나, ''''~주의''''로 표현되는 푸코"를 의미하는 데, 이것은 푸코의 삶이나 철학과도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푸코는 살아 생전에 "구조주의자 푸코"라 불리길 극도로 싫어했다. 구조주의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제로 그의 철학은 구조주의라고 불릴울 수 있는 많은 혐의를 가지고 있다. 들뢰즈 역시 "레비-스트로스, 라캉과 함께 알튀세르, 푸코를 나란히 " 구조주의자라 언급했다. 하지만, 푸코는 "구조주의자 푸코"라 불리길 거부했다. 한 단어로 표현되는 철학은 "수많은 생략과 왜곡"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때문에 에리봉은 푸코의 전기에서 그의 인생중 특정부분을 강조하거나, 생략하는 방식을 피했던 것이 아닐까. 푸코의 전기에서 "푸코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푸코를 푸코에 적용하여, 존경을 나타내는 것". "저기에 현대 철학이 앉아있다"라는 찬사를 받은 천재 철학자의 인생을 느껴보라. 그도 역시 오류를 범하고, 또한 (중요한 철학적) 족적을 남기고, 다시 자신의 족적을 지우는 인간이다. 그가 죽은지도 어느덧 20여년이 흘렀지만, 나는 뒤늦게 그를 알았고, 뒤늦게 인사한다. "굳바이 푸코..."

[인상깊은구절]
언제나 그렇듯이 푸코는 이 역사적 조사를 자기 혼자서 직접 할 생각이었다. 그의 역사연구 방법은 그런 것이었다. 즉 어떠어떠한 문제나 어떠어떠한 시기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자신이 직접가서 보는 식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마도 푸코가 철학적 사유방식에 도입한 가장 큰 단절일 것이다. 한 인터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사변적'''', 이론적 성찰은 역사에 대해서 소원한, 어쩌면 약간 오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철학자들은 생생하고 ''''정밀한'''' 일차자료로 간주되는, 그리고 가끔은 매우 수준이 높은 역사서를 읽고는 잠시 성찰한 후 자신이 직접 얻은 것이 아니 진실과 의미를 거기에 부여하기 일쑤였다. 다른 사람의 연구성과를 자유스럽게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게 용납되는 관행이었다. 너무나 손쉽게 용납되었으므로 그 누구도 이미 되어 잇는 연구결과를 기초로 자신이 연구를 한다는 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우무런 부끄러움없이 그것을 인용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YES마니아 : 로얄 k**n 2004.02.06.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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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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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책은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푸코"이다. 푸코에 대해서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랜만에 푸코에 관한 책을 읽게 되는것 같다.물 론 이 책은 푸코의 사상이 아니라 그의 생애에 관한 책이다. 학교 생활도 끝나가는 와중에 어려운 책을 읽어도 머리가 복잡해져서 잘 읽혀지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서 나름대로 편하겠다라고 생각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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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읽은 책은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푸코"이다.
푸코에 대해서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랜만에 푸코에 관한 책을 읽게 되는것 같다.

물 론 이 책은 푸코의 사상이 아니라 그의 생애에 관한 책이다. 학교 생활도 끝나가는 와중에 어려운 책을 읽어도 머리가 복잡해져서 잘 읽혀지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서 나름대로 편하겠다라고 생각되는 푸코의 전기를 선택하게 되었다[원래는 "라깡과 현대 철학"을 읽을 예정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하지만 좋은 끝맺음이 되기를....

 

"미셸 푸코 上, 下" 를 다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읽게 되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늦게 읽었다고 생각한다.
좀더 빨리 읽을껄... 하는 아쉬움이 있다.
푸코의 삶에 대해서도 매력적인 느낌도 들지만... 그의 주변에 인물들도 사려깊게 서술하는 내용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푸코의 철학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으면서 그의 곁에 있었던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 라깡 등등 자세한 설명은 아니지만 각각의 인물들의 면모를 확인 할 수있었다.
현대 프랑스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이 책부터 읽는 것이 좋을것 같다.

y*******o 2007.08.0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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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성의 철학자 그 고통과 투쟁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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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성의 철학자, 그 고통과 투쟁의 삶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광인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 미셸 푸코 ⓒ2003 차재업'푸코'라는 이름은 참 다층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라는 소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라마 크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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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성의 철학자, 그 고통과 투쟁의 삶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광인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 미셸 푸코
ⓒ2003 차재업
'푸코'라는 이름은 참 다층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라는 소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라마 크리슈나'와 같은 요가 명상가로서의 '샤를 드 푸코'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는 철학자로서의, 사회운동가로서의 푸코는 보지 못하고, <성의 역사>의 푸코만 떼어내 윤리적 인문학자로서의 푸코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철학자, 정치학자로서의 푸코를 영유하는 방식도 사람들에 따라 너무나 편차가 심하다. 어떤 이는 그에게서 무정부주의자를 발견하고, 어떤 이는 위장된 마르크스주의자를 발견하며, 또 다른 이는 노골적인 반(反)마르크스주의자를 찾아내기도 한다.

실제로 사르트르는 푸코의 <말과 사물>을 "부르주아지가 마르크스에 대항해 세울 수 있는 마지막 장벽"이라고 혹평했다. 물론 이것은 <말과 사물>에 대한 사르트르의 몰이해에 근거한 비난에 불과한 것이긴 하지만. 또 사르트르와는 다른 차원에서 데리다와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지적 논쟁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푸코는 드골주의의 선전자이자이자 동시에 교활한 신자유주의자라는, 푸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비판을 받기도 했다.

▲ 1975년 9월 22일, 11명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스페인 정부에 항의하기위해 마드리드로 갔던 푸코와 지식인들이 스페인 정부로부터 추방당한후 루아시 공항에 내려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2003 차재업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의 죽음(1984년)은 보수 부르조아 언론이 보기에는 또 하나의 정치적 가십거리로 이용하기 딱 좋았던 재료이기도 했다. 당시 세상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에이즈'라는 병명을 두고서 말이다. 분명 우리는 학자로서의 푸코를 기억해야 하겠지만, 그는 평생을 '마이너리티'를 위한 저항의 현장에서 보낸 실천가이기도 하다. 곧 푸코는 명시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 어떤 정치적, 이념적 깃발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정치적 반대자, 노동자, 죄수, 이민자, 동성애자(그 자신도 동성애자였다)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핍박 받는 곳에 늘 저항적 태도로 일관했던 '투사'였던 것이다..

'저기 푸코가 있다.'

기자 출신의 저자 디디에 에리봉은 이런 푸코의 삶을 치밀한 자료를 토대로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실제로 에리봉은 푸코가 죽기 5년 전부터 푸코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그의 삶을 기록해왔던 터이기도 했다). "저기 푸코가 있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을 만큼 푸코는 68년 5월 혁명 이후 84년 에이즈로 사망하기까지 '언제나' 거리에 있었다. 스페인, 폴란드는 물론 브라질이나 이란 등지를 무시로 드나들면서 이민자 운동, 감옥정보그룹, 사형제도 폐지, 동성애 권리 투쟁 등 그 자신이 필생의 과제로 연구하던 근대권력의 폭력성에 맞서 온몸으로 싸웠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과 사물>을 펴낸 뒤 맑시즘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사르트르와 실천의 현장에서 모든 종류의 반파시즘 투쟁을 함께 하는 장면은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논쟁은 논쟁이고 실천은 실천이었던 것이다. 8~90년대 대한민국의 소위 운동권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감동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1972년 11월 27일, 이민자를 지지하는 데모를 벌이는 푸코(마이크를 든 사람).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사르트르다.
ⓒ2003 차재업

현대 유럽 지성사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천재철학자 푸코와 이민자, 죄수, 동성애자 등의 온갖 이질적 존재들과 함께 거리의 바리케이드 위에 서 있는 투사 푸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런 푸코의 이론적, 실천적 이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광기의 역사>에서 <감시와 처벌>에 이르는 동안 푸코가 파헤치고 있는 '근대'라는, 우리가 흔히들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서구 근대사회의 폭력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주류사회의 통제 메카니즘

▲ 1971년 르몽드지 기사. "미셸 푸코가 경찰에 항의하다"라는 제목.
ⓒ2003 차재업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 이성의 성립과정은 눈물겨울 정도의 폭력이 수반되어 있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감시와 처벌>의 분석에 따르면 17세기 파리 시민 100명당 1명 꼴로 정신병원이라는 거대한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어 길들여지는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이들이 감금되어진 이유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에 포섭되어지길 거부하는 '부랑자'라는 것이었다. 곧 경작할 농토를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정'을 거쳐 빼앗긴 중세의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집시처럼 부랑자가 되고 이것은 근대 부르조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려 먹을 노동력 부족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을 잡아들여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곧, 떠돌지 말고 가족을 이루어 노동력 재생산의 구조를 이루고 먹고 살 만큼이라도 주는 대로 받고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한다는 그 '잘난' 도덕으로 길들여지는 과정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이렇듯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 이후에 확립된 사회통제 메커니즘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도덕, 새로운 메카니즘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도덕이라는, 윤리라는 이름 뒤에 숨어있는 사회적 위선이라는, 사회적 업압(장치)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주류 사회의 '사회통제 메커니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고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옥이나 군대, 경찰 등 눈에 보이는 억압기제의 문제보다는 사회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기검열'이라는 세뇌교육의 집요함 같은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기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존재. 곧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과 규칙에 길들여짐으로써 생성되는 무의식적 자기 검열.

▲ 1978년 1월, 베를린의 한 집회에서.
ⓒ2003 차재업
마치 기계장치처럼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이런 통제 메커니즘을 푸코는 '생체권력'이라고 부른다(미셀 푸코, <성의 역사1:앎의 의지>). 이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개개인의 의지와 사고를 규칙과 규율에 따르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주체' 내지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이렇게 '생산된' 주체들은 마치 자기 자신이 가장 합리적이고 평균적인 사고를 하는 존재들로 인식되어지게 된다고 한다.

하여 이 범위를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자로 간주되어 '아웃사이더'로 낙인 찍히고, 이들 아웃사이더들은 주류사회에서 배척되고, 심하면 감금되어 인간으로 '갱생'하는 처벌을 받기도 한다. 적어도 이 '아웃사이더'의 존재는 우리 사회와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암적인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근대사회의 모습, 곧 몇 백년 전의 역사자료에서 보여지는 것을 질료로 삼아 눈 앞의 현실문제에 연결하는 천재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푸코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그가 왜 '감옥반대운동'이나 '동성애자 권리 운동' 등 당시 주류 좌파세력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아웃사이더적 실천들에 깊숙히 개입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1983년 자기 서재에서.
ⓒ2003 차재업
어쨌던 푸코의 세계는 온갖 해석을 허용하되 어떤 하나의 해석적 틀도 거부하는 '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푸코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엄밀히 말해 '푸코의 세계'가 아니라 '푸코들의 세계'다. 예컨대 들뢰즈의 푸코 해설서가 통용되는 방식인 <들뢰즈의 푸코>처럼(지난 번에 소개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역시 이와 같은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디디에 에리봉의 푸코 전기 <미셸푸코>는 이러한 투사로서의 푸코,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서의 '예술작품' 같은 푸코의 삶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삶이나 철학과는 달리 결코 무겁지만은 않은 필체로 또 하나의 푸코(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한 번쯤 빠져들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그런 세계이다.
디디에 에리봉, <미셸 푸코> (上 下), 박정자 역, 시각과언어(1995)

위 사진들은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한 상명대학교 불어교육과 박정자 교수의 홈페이지(http://deer.sangmyung.ac.kr/~cjpark/)에서 양해를 구하고 인용한 것들입니다. 박 교수의 홈페이지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푸코-데리다' 논쟁 등 푸코와 사르트르에 관해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서평입니다)
m******7 2007.09.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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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그를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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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는 대부분이지만 실재로는 어떤 특별한 경우에, 그 사람의 생각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읽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푸코에 대한 나의 각별한 애정을 재확인했다. 내가 이미 (번역된) 그의 책을 다 읽어보았고, 또 그의 이론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디디에 에리봉의 이 책은 재미있다. 푸코의 카리스마를 직접 옆에서 이야기 듣는
"푸코, 그를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기회." 내용보기
원칙적으로는 대부분이지만 실재로는 어떤 특별한 경우에, 그 사람의 생각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읽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푸코에 대한 나의 각별한 애정을 재확인했다. 내가 이미 (번역된) 그의 책을 다 읽어보았고, 또 그의 이론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디디에 에리봉의 이 책은 재미있다. 푸코의 카리스마를 직접 옆에서 이야기 듣는 기분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사실 푸코의 '담론', '언표' 개념이나 구조주의적 성격, 그리고 꼼꼼한 글쓰기의 형식을 그의 주저만으로 만나면 상당히 딱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과 사물'은 프랑스에서 빵처럼 잘 팔렸다니 신기하다. 이 책은 푸코의 그런 인기를 또한 보여주며 사유세계만큼 실천 속에서 살았던 그와 프랑스 지성사를 보여준다. 일단 그의 주저를 읽다가 난감해지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처음부터 이 책만을 읽으면 푸코 사유의 정수를 이해하고 음미하는데 쉽게 지칠 수도 있으니까. 푸코를 즐기자. 즐기다보면 그의 말이 이해되고 더 새로운 지점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e****l 2003.05.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