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최후의 월계관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목표를 향해 인간적인 노력으로 매진한 자의 것인가, 아니면 선천적으로 선택받은 자의 것인가? 이 작품보다 훨씬 앞서 시작하였으나 비슷한 시기에 끝낸 작품으로서 작가스스로가 '가장 오랜 연인'이라고 칭한 <아르미안의 네="" 딸들(일명a4)="">에서 철저한 운명론자임을 보여준 작가 신일숙의 답변은 이 작품 <리니지>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여, 운명론에 철저히 반대하는 운명개척론파(?)독자들의 원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그를 증명이나 하듯이, 이 작품은 제목부터가 '혈통(Lineage)'이다. A4에서 로고스의 세계-즉 인간계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철혈이성의 소유자인 첫째딸 레-마누아와 이에 대립되는 인물, 인간의 이성으로 해명되지 않는 미토스의 세계를 상징하는 막내딸 레-샤르휘나(일명 '샤리')는 둘다 모계사회인 아르미안의 37대여왕을 어머니로 둔 자매이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샤리의 아버지는 신과 인간의 혼혈이고,(이러한 캐릭터는 <리니지>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달의 요정인 어머니와 인간의 아버지사이에서 태어난 기사 질리언,인간의 어머니와 나무의 정인 아버지를 둔 마법사 하딘등)이 사실은 선천적으로 탁월한 초능력등 샤리의 불가사의한 특징들을 설명해주기 충분하다.
그러나 <리니지>에서는 탁월한 통치력을 지닌 현명한 왕을 조부로,그의 딸인 공주를 모친으로,용맹함과 인품을 갖췄던 구국영웅을 부친으로 둔-그야말로 자랑할 만한 혈통을 지닌 왕자와 그에 비하면 모든 점이 대조될 만한-초야권이라는 짐승같은 관습에 의해 태어난, 아니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농노출신의 '반왕'을 대립시켜 '혈통'의 문제에 대해 보다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빛나는 붉은 머리칼에 어머니를 닮은 '황금빛 혜안'을 가진 왕자와 마치 A4의 에일레스(전쟁과 파멸의 신으로서 차디찬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음)가 부활한 듯한 '흑발냉미남' 반왕-이 두 인물은 외모부터가 빛과 어둠,양지식물과 음지식물을 연상케하며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A4에서 자신을 일방적으로 사랑해주는 멋진 조연들이 기꺼이 치뤄준 '운명적인' 희생을 통해 종국엔 큰 언니인 마누아로부터 '운명적으로' 불새의 관을 넘겨받게되는(정확히 말하면, 마누아는 인간이 씌워주는 불새모양의 관을 받았지만 샤리에게는 황금으로 만든 불새가 날아가서 머리위에 앉았다-이역시 상징적인 장면)신적인 캐릭터,레-샤르휘나는 인간인 독자들에게 그다지 공감을 받지는 못했다.
그녀의 모든 성격적 장점-언니인 여왕에 의해 사막으로 추방당할 때 누구를 원망하지도 용기를 잃지도 않는 낙천성과 온유함 등-에도 불구하고. 네 자매중 위 세 언니의 장점-여왕으로서의 첫째,아름다움으로서의 둘째,외유내강성품으로서의 셋째-를 모두 합쳐놓은 듯한 이 '완벽한'주인공은 귀엽고 털털한 성격으로도 그 완벽함을 극복(?)하지 못하여 인간적인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한 케이스인데,작가는 이 캐릭터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었는지, <리니지>에서 좀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부활시켜놓았다. 그가 바로 붉은 머리의 데포로쥬왕자이다.
"그는 비유하자면 태양같은 타입의 인간입니다. 얼핏 뛰어난 구석이 없어보이더라도-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그런 형이죠. 특히나 인간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아주 탁월합니다. 이것은 지도자로서의 기본 조건이지요."(데포로쥬왕자의 스승인 군터가 마법사 하딘에게 왕자에 대해 평하는 대사中)
"성격의 부드러움이나 후덕한 마음씨,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음...소년다운 정열. 이런 성격들은 일견 그를 유순하고 평범한 소년으로 보이게 하지만...실제로 그는 본질적으로 강한 것 같다."
"현명한 데컨 왕이라 불린 왕자의 조부는 중후한 통치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끊임없는 외세의 시달림 속에 그 빛이 바랬었고, 영웅 듀크데필의 용맹함은 나라를 구하긴 했으나, 왕으로서의 기품과 정치력을 겸비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그를 내 왕으로, 주군으로 선택했던 그 때 느낀 그 빛...그것은 왕휘였다. 왕자여-그대가, 내가 그리고 아덴이 바라던 이상의 왕인가? 노력하여 그렇게 보이게끔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빛의 왕자인가?"(데포로쥬왕자의 제1수호기사인 질리언이 왕자에 대해 생각하며 혼자 읊조리는 대사中)
"촌뜨기라고 봤더니 역시 뭔가 있어. 이상하단 말야.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었지만...대단한 미남도 아니고 투박한 편에 속하는 타입인데...뭔가 빛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왠지 눈길이 간단 말이야."(데포로쥬왕자의 약혼녀이자 제 3수호기사인 이실로테공주가 왕자의 정체를 모르는 채 그에 대해 생각하는 대사中)
이러한 왕자 주변인물들의 평가들은, 빼어난 미남도 아니고 유순하고 털털해보이나 웬지 무시할 수 없는(한 마디로 외유내강형의)왕자가 결국에는 반왕을 물리치고 왕좌를 되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왕자에 대한 평가운데 <리니지>의 주제가 가장 잘 녹아있는 것은, 상인출신 영주의 아들 쥬드 기란의 다음과 같은 대사이다.
"스승도,검도,기술도,그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실력의 차원이 다르다는 그런 느낌...그것은 보이지 않는 섬광같은 화살이 제 심장을 꿰뚫고 지나간 것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아하- 이 사람은 근본부터가 나와 다르구나. 나는 백년이 걸려도 잡지 못할 그 무언가를 이 사람은 이미 가지고 있구나- 그것이 바로 혈통이란 것일까요?"
상인출신인 기란영주의 수완은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 최고의 기사로서의 영예를 아들인 쥬드를 통해 얻으려고 하였다.(이것은 소위 부르주아들이 노블레스계층에 영입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과 흡사하다. 형태만 좀 다르다뿐이지 현대사회에서도 존재한다) 그러나,상인인 아버지를 둔 젊은 쥬드 기란은 구국영웅 듀크 데필의 피를 이어받은 왕자 데포로쥬에게 이렇게 '기가 눌려' 아버지의 기대이자 자신의 꿈이기도 한 '최고의 기사'를 포기한 채 상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고, 또 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다. 작가는 이를 통해 장사꾼의 자식은 장사꾼, 군인의 자식은 군인밖에 될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쥬드 기란과 같은 예로만 그쳤다면 작가는 아마 독자들의 그러한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리니지'에는 선천성(대표적인 것으로 신분)을 극복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다. 농부출신으로 기사작위를 수여받은 의리의 기사 발센(그는 정말 말 그대로 '의리'의 기사이다. 친형제도 아닌,의형 듀크 데필의 아들인 데포로쥬왕자를 지키기 위한 가족전체의 희생은, 그야말로 만화니까 가능한(?)얘기가 아닐까)을 비롯하여 발센의 아들 아툰과 엘모어의 코렌공주와의 신분을 뛰어넘은 연애와 결혼, 초반부에는 냉정하고 무심했으나 데포로쥬의 기품에 감화되면서 점차 따뜻하고 인간적인 면을 보이기 시작하는 요정의 기사 질리언(이건 성격변화인지,감추었던 면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건지 솔직히 알 수 없지만),'여자라는 이유만으로'크고 작게 주위와 충돌을 빚는 이실로테공주의 남자못지않은 씩씩함과 대담함...이러한 요소들이 독자에게 흐뭇함과 따스함을 선사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훌륭한 소품들로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리니지>가 훌륭한 것은 독자가 모든 인물들의 입장을 제각기 한 번쯤은 생각해볼 수 있게끔, 즉 등장인물들 모두를 이해할 수 있게끔 설정한 작가의 세심한 배려다. 즉 아무리 나쁜 짓을 하는 주인공이라도, 비난하기 이전에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또는 할 수밖에 없는지?)돌아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먼저 이해하고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한다. 대표적으로 가장 어리석고,못나고,추잡한 짓을 도맡아하는 반왕의 씨다른 동생 마팅겔의 경우, 우선 외모에서부터(아무리 아버지가 다르기로서니 형제의 미모차이가 어쩜 그리도 심한지? 다른 건 제쳐두고라도...ㅋㅋ)작가나 독자나 털끝만큼도 애정이 안가는 캐릭터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모든 부정적인 측면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도무지 관련이 없다.
마팅겔은 반왕 아스테어-켄 라우헬이 귀족행세를 하기위해 이복형 아리아드를 살해하던 바로 그 날, 비밀유지를 위해 그 자신도 형인 반왕에게 살해당할 뻔할 순간,마녀 케레니스로 인해 살아나지만 자신의 몸에 깃든 그녀로 인해 생체에너지를 빼앗긴다. 반왕의 행운과 야망실현은 바로 이 마녀 케레니스와의 만남으로 시작되지만, 반대로 마팅겔의 진정한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 때부터 마팅겔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엇인가에 홀린 것같은'상태로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의 악행을 멈출 수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악행자체가 합리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리니지>에서 가장 핵심적인 캐릭터는, 초야권이라는 부도덕한 관습으로 인해 영주와 농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 이복형과 자신의 과거를 아는 모든 이(그 가운데엔 친부모도 있다)를 살해한 후 영주의 적자인 이복형의 행세를 하며 과부가 된 왕비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국은 왕관까지 차지한 '반왕,아스테어-켄 라우헬'이며 그와 같은 축에 있는 마녀 케레니스이다.
'결국은 상대편을 항상 자기편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데포로쥬왕자와는 상대적으로 반왕 켄 라우헬은 왕이 된 후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이례적으로 영토를 넓혀갔으나, 오히려 나라안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졌고 또 그의 차가운 성품으로 인해 민심을 잃고 점차 고립되어만 갔다. 그가 왕이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두 여자-데포로쥬의 어머니인 왕비와 마녀 케레니스-만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또 단 한 사람의 신하만은 기사로서의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지만, 그의 실체를 알고서도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마녀뿐이었다.
이 반왕이란 인물의 어둡고 고독한 기질은 우선 그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또는 대상이 없다는 것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도무지 없어보인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데포로쥬의 어머니인 왕비 가드리아에 대한 진심도, 마녀 케레니스에 대한 진심도 그가 죽을 때까지 파악할 수가 없다. 두 여자를 그저 자신의 야심을 위해 희생양으로 삼은 것인지? 아니면 결과적으로 이용하기는 했지만 마음 한 켠에나마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진심은 그의 차디찬 표정에 가려져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는다.
후반부에 반왕의 적인 데포로쥬와 싸우다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찾아와 '거짓이라도 좋으니 사랑했다고 말해달라'며 애원하는 케레니스에게 반왕은 전에 없던 다정한 말투로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만 그것이 단지 자신을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이에 대한 예우일 뿐인지, 진심인지도 독자는 알 수 없다.
결국 검은 용(반왕)과 붉은 사자(데포로쥬 왕자)의 정면대결이 벌어지고, 사투끝에 반왕의 죽음으로 데포로쥬가 왕관을 되찾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약혼녀 이실로테공주와 결혼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는 것은 여느 동화와 같은 결말이기는하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반왕이 죽었다고 해서 그가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상깊은구절] 나의 아스테어...천한 노예로 태어났지만
어느 귀족보다도 꼿꼿이 하늘을 향해 머리를 세운 사람...
지상 최고로 교만스런 남자...
그런 당신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웠어...
그러나 무너지는 당신도 아름답군요...
-사랑하는 반왕 켄-라우헬의 품에 안겨 죽으며
마지막으로 읊조리는 마녀 케레니스의 대사-리니지>리니지>리니지>리니지>리니지>리니지>리니지>아르미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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