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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태기에 빠질 때면 작가님의 글을 읽는다.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거나 특별한 문체를 자랑하는 글도 좋지만 일상의 신산함이 몰입을 방해할 때는 겨울날 아랫목 같은 선생님의 글이 제격이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2002년에 출간된 에세이집 <두부>. 여기 실린 스물 세편의 산문은 고향의 추억, 전쟁의 상흔, 후안무치한 권력자에 대한 비판, 2002년 월드컵의 소회, 아치울 마을의 생활, 글을 쓰게 된 계기 등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다. 선생님의 글은 이북의 고향이야기를 할 때 유난히 신명난다. 개성의 음식, 주택, 사람들. 어릴 적 떠났으니 잊힐만한데도 등장하는 고향의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해진다.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으니 참신한 맛은 없지만 언제나 마음의 안식처였기에 놓여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편안한 글 중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해방 후 국어교육과 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부분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은 나중에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중일전쟁이 한참 승승장구할 때였고, 조선사람도 똑같이 천황의 백성임을 무슨 시혜(施惠)처럼 강조하면서 철저하게 조선어 말살정책을 쓸 때였다. 그러나 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에서도 조선어를 가르쳤고, 계집애는 학교에 안 보내는 구식 가정에서도 시집가기 전에 어떡하든 한글은 가르쳐서 보냈다. 일본말이 국어이던 때도 조선말 문맹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리말로 된 시나 소설이 꾸준히 읽힐 수 있었고, 우리말로 된 문학은 당연히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 내가 일본말 잘한다는 표시인 벚꽃 문양 뱃지를 가슴에 달고 비로소 어깨 펴고 다닐 때도, 조선사람의 의식을 움직이는 중요한 힘은 어느 구석에선가 조선말을 끝까지 부둥켜안고 그걸로 이야기나 노래를 만든 사람들로부터 왔던 것이다. 끝까지 조선말을 포기하지 않고 문학을 한 사람들 말고 한글학자의 공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에 의해 조선말은 박해받고 묻혀 있는 동안에도 발전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p.183)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한글과 우리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때라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사연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동안에도 어딘가에서 모국어를 갈고 닦은 분들과 모국어로 글을 쓴 이들과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이 있어 말과 글이 지켜질 수 있었고 진정한 해방을 맞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세계시장에서 상을 타고 싶어서든 선을 보이고 싶어서든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우선 영어와 같은 국제어로 번역이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동안 우리가 꾸준히 배출한 외국문학 전공자들이 그 일을 안 해준 건 아니다. 그들은 외국문학을 우리말로도 옮기고 우리 문학을 외국어로도 옮기는 쌍방통행을 했다. 그러나 우리 문화와 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한 외국인이 제 나라 말로 우리 문학을 옮긴 예는 극히 드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온 좋은 번역이 다 그러하였듯이, 번역은 번역된 말을 모국어로 하는 번역자가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우리가 초창기에 말도 안 되는 조잡한 번역에서도 열심히 뭔가를 배웠고, 결국에는 그게 득이 되었듯이 우리 문학도 조잡하게라도 수적으로 많이 번역되는 게 수라고 말하는 소리도 더러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때 굶주렸으니까 맛 같은 거 따지지 않고 왕성하게 먹고 소화해냈지만 배부른 자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 낯선 변방의 언어를 주목하게 하려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 (p.195) 이번 경사를 예견한 듯한 번역에 대한 선견지명이 돋보인다. 한강 작가의 작품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데 영국인 번역가의 공이 컸다고 들었기에 외국인이 자국의 언어로 제대로 된 번역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대단해보인다. 여러 해외 학회와 포럼의 경험으로 문화강대국의 진면목을 체험하고 세계 속 국문학의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신 분이라 해법 또한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노년에 아치울 마을에서 쓴 산문집이라기에 어느 정도 세상사와 거리를 두고 인생을 조망하는 작품이 아닐까 기대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글은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관심사를 넘나들며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더 이상 신작을 만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이토록 부지런히 일생을 문학으로 펼쳐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두부 #박완서 #박완서에세이 #창작과비평사 #책리뷰 #에세이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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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먹거리다. 거기다 감옥에 갔다 나오는 사람에게 꼭 먹이는 것 또한 두부다.
[ 두부는 콩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이나 다시는 콩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두부는 다시는 옥살이하지 말란 당부나 염원쯤 되지 않을까. ] p29~30
두부는 다시 콩으로 돌아갈 수 없다니... 감옥에 다시 가지 말라고 먹이는 걸로 알고는 있었지만 두부에 대해 저렇듯 풀이해놓으니 왠지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두부를 통해 권력자를 예리하게 비판해놓은 글은 곱씹어 읽어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마어마하게 큰 죄를 짓고도 뻔뻔한 권력자들이 반드시 보았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더라도 꼭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식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두부를 먹으며 두부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며 말이다.
가족 이야기로 시작한 글은 두부를 통한 권력자에 대한 솔직담백예리한 비판과 아치울, 건강, 그리고 구형으로 예찬한 월드컵, 쓰고 있는 글과 내내 사용해오고 있는 언어와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 이 세상을 떠날 때 새가 되고 싶다는, 꼭 새가 아니어도 비상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이어진다.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두부지만 나목으로 궁금했던 박수근 화백에 관한 것도 있다. 어찌보면 소설 나목의 숨겨진(?) 비화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에세이는 이처럼 궁금했지만 소설로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이야기를 가끔 슬쩍 엿볼 수 있고 새롭게 알게 된다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늘 읽고 또 읽어도 산과 들, 나무와 꽃, 자연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보아도 정겹고 꽃을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글이 참 아름답다.
그리고 읽다가 왠지 웃음도 나고 재밌었던 얘기는 바로 이 대목이다.
[ 살아 있는 동안 글을 못 쓰게 되는 게 더 괴로울까, 남의 글을 못 읽게 되는 게 더 괴로울까, 자문해본 적이 있는데 대답은 늘 후자 쪽이다. 몸을 비스듬히 될 수 있는 대로 편안하게 하고, 재미있는 책에 푹 빠져들기도 하고 왜 썼는지 모르겠는 재미없는 책은 휙 내던져버리기도 하는 맛이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지루할까. ]p192
그렇긴 하지만 공부삼아 한 독서라는 이야기에선 조금 의외다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떤 독서를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분명 재미, 관심, 흥미 위주의 독서이긴 한데 때론 공부가 되기도 하니... 그러고 보면 전혀 읽지 못하는 분야를 읽어보겠다고 생각만한 채 여태 실천으로 옮기진 못하고 있기도 하다. 새해가 된 만큼 이번엔 꼭 실천해보아야겠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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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늘 꽂아 두기만 했던 책을 오래간만에 우연하게 빼들고 읽게 되었다.박완서님이 책은 한곳에 죽 꽂아 두고 한 권 한 권 요즘 파블숙제로 읽어 나가고 있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이 책은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쓴 수필 23편을 모아 놓은 책이라 '2002년 월드컵' 이야기도 나오기도 하여 그 때를 기억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난 작가들의 장편도 좋아하지만 수필이나 단편도 무척 좋아한다. 이런 수필집을 읽다보면 저자의 삶의 일부분을 훔쳐보는 느낌이 들고 좀더 저자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어 친근감이 있고 좋다.이 책도 그렇게 읽었다. 다른 책에서 읽어서 알고 있는 있는 내용이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참 맛깔스럽게 풀어 낸 수필을 읽다보면 '삶이 곧 글이고 소설'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러나 나는 나도 모르게 툭하면 옛날타령을 하고 있었다. 옛날 식으로 무친 가지나물과 호박나물, 흰죽과 육젓, 고약처럼 까만알이 잔뜩 든 민물게장.이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식욕의 차원이 아닌 정신적인 갈망 같은 거였다.
저자는 '박적골'에서 살았던 어린시절을 기억속에 고스란히 저장해 놓고 그것을 야금야금 꺼내어 글 속에 녹여 냄으로 하여 더욱 글을 맛깔스럽게 하면서도 어쩜 그렇게 세월이 흘러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는지 글을 읽으며 늘 놀란다. 기억이란 시간이 흐르면 빛바래게 마련인데 그의 기억속에서는 늘 생생하게 어제일처럼 빛난다.그것이 늘 글에 모든 것을 담아 두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도 해본다. 저자는 어린시절 부족함이 없이 살았던 박적골을 생각하며 나이가 들어서 그와 비슷한 곳에서 살고 싶어하여 아파트에서 산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여 화단을 가꾸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에도 다니고 나물도 캘 수 있는 아치울에서 여유롭게 살아간다. 다른 것이 여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여유로운,어린시절의 박적골과 비슷한 느낌의 집을 일구며 살아가는 일상이 행복으로 그려진다.
아치울 마당의 꽃들도 첫해만 씨를 뿌렸고,그 이듬해부터는 내 유년의 뒤란에 아무렇게나 피던 꽃들처럼 그 자리에서 저절로 돋아나게 됬다.그러나 이름만 같을 뿐 옛날 꽃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게 조금씩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옛날 꽃들은 다 수수한 홑겹이었는데 요새는 채송화도 백일홍도 한련도 다 겹으로 피고, 송이도 크고 빛깔고 현란하다. 옛날보다 더 보기 좋게 종자가 개량된 것 같은데, 내 소원은 화려하거나 신기한 꽃이 아니라 마음 붙일 수 있는 꽃이다.
이 책은 그가 함께 어울리던 아치울 친구와 같은 화가와 함께 작업을 하려 했던 것인데 그녀가 그만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계획한대로 나오지 못하고 수필집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그림과 함께 였다면 얼마나 더 멋진 책이 되었을까? 박적골에서는 할아버지가 있던 공간과는 다르게 그의 방이 있던 뒤란은 그야말로 '꽃천지'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 백일홍...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사람이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씨가 떨어져 나고 자라고 꽃 피고 지고.그런 뒤란을 보며 자란 저자는 그 속에서 고향의 아름다움을 더 간직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하여 그 때의 꽃들로 화단을 가꾸고 싶어 그야말로 옛날꽃이라 할 수 있는 꽃을 발견하게 되면 씨를 받아 화단에 심고 가꾼다. 텃밭을 일구기도 했지만 아치울에 오는 채소장사 아저씨가 싸게 주시는 것이 더 좋은 듯 하기도 하고 텃밭에 심으면 벌레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많으니 아마도 꽃을 더 심게 되지 않았을까.흙을 일구고 꽃을 가꾸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시간을 가지며 살아가는 아치울 이야기와 그와 함께 하는 세상 이야기는 늘 느끼는 것이지만 맛깔스러우면서도 늘 담백한 밥상을 한 상 받는 느낌이다.
책의 제목인 [두부]는 전 전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로 해서 그가 많은 이들에게 두부를 먹게 했지만 그는 감옥에 갔다 나오면서도 '두부'를 먹지 않는 일을 만들고 만다.내가 알기로 감옥에 다녀오면 제일 먼저 두부를 먹게 하는 것은 예전에는 콩이 귀했고 더불어 소금도 귀하니 사찰과 같은 곳에서만 두부를 할 수 있어서 귀한 음식이었던 두부였기에 감옥에 다녀오면 귀한 음식인 두부를 먹인 것이 굳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읽었는데 다른 이들에게 또 그도 감옥을 다녀오고도 두부를 먹지 않았지만 어느 음식점에서 '두부'를 먹는 이들의 풍경을 접하며 맛깔스런 글로 풀어낸다. 저자의 눈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하여 세상을 보는 이야기로 전환을 하면서 날카롭게 냉철하게 때론 꼬장꼬장한 노인네처럼 꼿꼿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의 글이 살아 있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의 삶은 모두가 그야말로 '글이며 문학'으로 승화하여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그리고 '2002'년 월드컵을 다시금 글 속에서 만나는 느낌은 야릇하기도 하고 의미를 모를 쾌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무얼까? 그 시간이 벌써 십년이란 시간이 더 지났다는 것이 깜짝 놀라게 한다.거리와 나라를 온통 붉게 물들였던 것이 어제일처럼 생생한데 시간은 이렇게 빨리 흘러서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내가 처해 있는 그 순간에는 무척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지나고 하면 점점 작아져 버리는 빛바랜 사진 속의 추억처럼 한 점이 되어 가물가물 스러져 가는 촛불처럼 빛나기만 하니 그 기억속 추억을 따라 한바탕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나 또한 어린날의 그 추억속을 거닐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어 정말 기분 좋게 읽었다.
나 또한 어린시절에는 꽃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뒤란엔 늘 꽃들이 가득했다.그야말로 시골스런 꽃들인 봉숭아 도라지 함박꽃 호랑나비 백합 맨드라미 분꽃... 봉숭아가 피는 여름엔 손가락마다 봉숭아 꽃물을 들여야 그 시간을 보낸 듯 하기도 했지만 앵두나무에 앵두가 익어갈 때는 한바탕 앵두나무에 매달려 앵두를 따먹어야 했고 호랑나비 꽃이 화려하게 필 때는 씨를 따서 여기저기 던지는 재미에 빠지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고 도라지꽃이 뒤란 가득 필 때는 얼마나 이쁜지.그 기억을 잊지 못해 지금 우리집 베란다 화단엔 도라지를 심어 여름이면 도라지꽃을 보고 있다. 어쩌면 기억이란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지만 그 속에서 놓여나질 못하게 매두기도 하는 듯 하다.글롤 풀어내고 내 속에서 풀여낼 수 있다는 '추억과 기억'의 어린시절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그런면에서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아이들이나 나 또한 감사한 일이라고 본다. 도시와는 다른 여유로운 기억을 가졌으니 말이다.
저자가 풀어내는 아치울 이야기는 우리가 나이가 들어 노년에 살고 싶어하는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담장안에 매화나무 한 그루 살구나무 한그루 심어 가꾸고 화단엔 봉숭아꽃 채송화꽃 맨드라미 과꽃 분꽃 흐드러지게 피어 꽃 속에서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며 그 시절을 추억하며 자연을 즐기며 사는 삶이란 누구나 꿈꾸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자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보태져서인가 다른 소설 보다도 더 친숙하고 친근감 있으며 더욱 맛깔스런 밥상을 받고 있는 행복함으로 읽었다. 가끔 가끔 글 속에서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우리말이 나오기도 해서 더 기분 좋은 글이기도 하고 이젠 더이상 이런 글을 만날 수 없어서일까 감추어 두고 몰래 꺼내어 혼자 야금야금 그 행복을 누리고 싶은 글이기도 하다.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울집 베란다에 도라지꽃이 활짝 피었는데 이 책을 만나 어린시절 고향의 추억을 생각하며 더 맛깔스럽게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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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청소년시절에 선생님되시는 분들께 편지를 쓰면 받은 분들은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초등시절에는 교대부속인지라 한달동안 함께보낸 교생선생님들께 편지를 쓰면 반에서 답장를 받는 학생들중 몇안되는 아이들속에 내이름도 꼭 들어 있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몇번 더 편지를 주고 받다가 교생선생님은 방학이 되면 만나서 맛난 것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주었다. 물론 나와 기질적으로 잘 맞는 선생님들 이야기고 또 그런 분들께 편지를 썼기에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한 반에 11명의 선생님들이 우루루 교실 뒷켠에 책상을 줄지어 놓고 한달을 함께 생활했으니 나의 선택의 폭은 무엇보다 넓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학에 들어가기전에 서울에 계신 선생님께 공부를 두번 정도 하다가 금지령과 함께 더이상 공부할 수 없게 되었을때도 나는 서울의 선생님께 편지를 올렸고 내가 학력고사를 치고 좋은 성적을 가지고 서울에 다시 찾아갔을때 선생님은 웃는 얼굴로 만나 주셨다. 그래서 나는 기존의 사숙한 다른 아이들과 별도로 선생님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지방에서 배웠던 선생님께 편지를 드리고 나중에 방학때 그 선생님을 뵈면 선생님 인상이 아주 밝으셨던 기억이 난다. 뿐아니라 영문과를 나왔던 사모님마저 내편지를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시면서 내 글을 칭찬해주셨다. 사실 나는 특별하게 글을 잘 쓰려고 애써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내가 느낀 바를 조금은 평범하지 않게 솔직하게 쓰곤 했다. 내 글쓰기 수업은 초등 5학년때 국어과 선생님 한 분이 방학때 작문글이 쓰인 괘도를 무작정 외게 하면서 민감하게 시작된 것같다.
장황하게 내 얘기가 길어진 것은 박완서라는 작가의 글쓰기가 바로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모습과 맞아 떨어짐을 설명하고 싶어서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대단한 위치에 있는 노 작가분을 평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보통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비주의는 이 작가에게 더이상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괜히 작가인척 글쓰는 사람인 척 하는 모습이 이 소설가의 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무지 일상적이고 누구나 공감가능한 접근방식에 노골적이고 솔직담백한 묘사에 이 작가의 노련한 사물의 파악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편안하게 읽되 적지적소의 파지력이 돋보인다.
이 두부란 수필집에는 작가가 아차산 기슭으로 이사간 이후 무렵에 쓴 글들이 들어있다. 에세이는 소설보다도 군더더기가 있어보이고 장황하니 생각이 스치는 대로 쓰여진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앞뒤가 잘 들어맞고 리듬감있는 문장은 여전히 친숙함을 불러 일으킨다. 하도 반복해서 들어서 이젠 다 욀 정도가 된 이 작가분의 젊은 시절 애기는 좀 지루하기도 하지만 이 분이 실재한 일이 아니면 제대로 잘 쓰지 못하는 유형인데다가 결코 위선하고는 거리가 먼 스타일이라 또 들어도 그리 언짢지 않다. 솔직 담백하지만 찹살떡같은 찰기와 생기가 늘 자리하는 글매가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이상이어서 더 솔깃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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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년이 훌쩍 지나버린 책이지만 어쩌다가 내 손에 이제서야 들어왔고 잠깐 읽으려고 했던 것이 그만 손을 못놓고 한달음에 다 읽어버렸다. 이런 수필들은 조금씩 읽어야 제맛일텐데 다 읽고나니 그만 아쉬워지고 말았다. 점점 박완서님의 생활속 이야기들에 크게 공감을 하고있는 나를 보면 내가 벌써 70세쯤 된 정서인가싶어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지만 그게 나만의 일은 아닐터라고 애써 자위해본다.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2부의 아치울 통신이 가장 편하고 재미있게 그리고 또 슬프게 읽었다. 이 책을 구성하게 된 이유 또한 나이 차이 많이나는 동네 친구인 화가와 책을 같이 내려고 했었다는데 그만 화가 손혜경이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원하던 책의 형태가 아니고 이렇게 나왔는가보다. 나도 그런 동네에 가서 이웃과 보조맞춰 그렇게 살고싶은 마음을 가득 품고있어 더욱 이 글들이 좋았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번 여러편에서 읽어 이제 개인사도 거의 욀 정도지만 그래도 표현을 달리하여 자꾸 이야기해도 또 푹 빠져 그걸 읽고있는 걸 보면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만은 확실해보인다. 게다가 그 속에 녹아있는 박완서님의 심성 자체가 왠지 나랑 비슷해보여서 나도 나이 더 먹으면 그렇게 살고싶다는 바램도 가져본다. 내나이때쯤 처음 글을 쓰신 분이어서 더욱 그런 생각들이 깊어지는가보다. 고등학생 시절 소설로 만나던 박완서님과 지금 나이드신 상태에서 써내려간 글로 만나는 박완서님이 서로 같은 느낌이 아니라는 것도 참 재미있다. 예전에는 소설 내용만 읽었는데 이제는 진짜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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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라는 작가를 생각할때 가끔 그녀가 일흔이 넘은 노작가라는 사실에 놀랄때가 있다. 그도 그럴것이 마흔이 되어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그녀의 작품이 나이에 비해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일것이다. 이 작품은 노년에 들어 작가가 생각하게 되는 많은 것을 들려주고 있다. 크면서 고향을 떠나 휴전선으로 갈라져 다시는 돌아갈수 없는 고향을 그녀는 남편도 떠나고 자식도 모두 출가시킨후 정착한 동네인 아치울에서 찾고 있다. 그 아치울에서 들려주는 그녀의 노년 이야기는 역시 일상에 지쳐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향의 포근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흙을 밟으면서 아차산을 오르는 이야기며, 마당 가득 피어있을 토종 꽃 이야기며, 나이 일흔에 불태우는 축구에 대한 열정은 사람 사는 따듯한 향내를 가득 담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특히, 어린 시절 이야기는 역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읽었던 재미있는 일화들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흐르는 세월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 이치거늘.. 어느덧 죽음에 한발자국씩 다가가고 있음을 느끼는 노작가의 마음은 독자를 안타깝게 한다. 세월이 점점 흐르고 이 따스한 노작가의 이야기를 다시는 들을수 없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마지막 이야기 ''모두모두 새가 되었네''처럼 그녀의 많은 작품 역시 한마리의 새가 되어 일상이라는 하늘에 한줄기 희망으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상깊은구절] 지구도 신이 찬 공이 아닐가. 지구를 신이 찬 가장 멋진 공, 또는 신의 시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지구인의 오만일 테지만, 공이라는 형태를 최초로 만들어낸 이가 즉 신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그 완벽성 때문이다. 구형의 표면에선 아무데나 자기가 선 자리가 중심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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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 아픔과 즐거움이 한꺼번에 보이는 책이다. 나도 나이를 먹고, 이 작가의 나이만큼 되었을 때, 작가처럼 생각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가 생겼으면 좋겠다. 작가처럼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영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감히 바랄 수 있는 성질이 못되고, 그저 생각만이라도 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편협되고 고집센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이 나온지 6년이 지났고, 실제로 작품들은 1998년부터 2001년에 걸쳐 쓰신 글이다. 그렇다면 지금 작가의 연세에 비해 10년이 더 젊었을 때이고, 시대도 10년 전인데, 흘러 지나가버린 한탄이라고 할 수만은 없고 여전히 지금 상황에 적용되는 가르침들이 펼쳐져 있으니, 지난 10년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작가가 70대에서 80대로 건너오는 동안, 나는 30대에서 40대로 건너왔는데, 왜 이토록 부끄러움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결코 헛살지는 않았을 텐데.
마리에띠님의 리뷰를 보고, 안 읽은 책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찾아 읽었는데, 뭐하느라 그 동안 이 책을 놓쳤나 싶기도 하고. 어쩌면 이렇게 긴 호흡으로 자신에 대한 반성도 잘하시고 철없는 젊은이들을 나무라기도 잘 하시는지.
내가 이 작가의 글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무작정 자신과 남과 세상에 대해 넓어지는 듯한 가식을 보여 주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환갑을 넘기고 70이 되고 80이 되어도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기본적인 욕구나 이기심, 편견과 아집을 없앤 척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솔직하게 다 보여주신다는 점이다. 그게 왜 좋을까, 그게 왜 마음에 드는 것일까.
솔직하게 욕심 부리고, 그 욕심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도 털어 놓으시고, 또 무조건 용서 안 하시고, 미운 놈 그 무엇 때문에 밉다 하시고, 그럼에도 좋은 사람의 좋은 점을 끝없이 배우겠다 하시는 진행형으로서의 삶을 사랑하시는 작가.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높이에서 독자를 내려다보며 쓰신 글이 아니라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같은 높이로, 혹은 더 낮은 곳에서 보살펴 주시는 듯한 마음으로 적어 놓으신 글들.
이대로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 배우고 싶다는 가르침을 주시는 몇 안되는 분이시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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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님의 블로그에 갔다가 따라 읽게 된 책이다. 십 대에 무협지에 매몰되었던 것처럼 지금은 너무 역사책만 읽어낸다 싶었기에, 박완서 선생의 글이라면 편안히 독서의 방향을 돌려볼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사실 박완서 선생의 책은 중1때 처음 읽었으니 내게는 나관중과 김용에 버금가는 오래된 작가다. 그 때 “윤독도서(輪讀圖書)”라는 것이 있어 반마다 각기 다른 책 한 권을 모두 구입하게 하고, 달마다 옆 반과 바꿔가며 읽었다. 우리 반이 구입한 책이 “꼴찌에게 갈채를”이었고 “갈매기의 꿈”, “꽃들에게 희망을” 등과 바꿔 읽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지금도 윤독도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기억을 떠올리며 도서관에서 책을 뽑아들었다.
선생의 글은 여든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한다. 주변에 대한 맑은 통찰에 공명하게 되고, 스물도 웃게 하는 필력이 새롭게 다가온다. 물론 모든 젊음이 화창할 수 없듯이 노년 역시 선생처럼 모두 아름다울 수 없으리라. 내가 아침마다 지하철에서 목도하는 어르신들의 모습 - 선반 위의 무가지를 가로채다시피 모으시는 절박함 - 으로부터 느끼는 몫만큼.
계속 선생의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한편 죄송스럽지만, 그럼에도 “백정질도 사각모 쓰고 배운담”과 같은 근대 수의학과 전통적 직업관이 원색적으로 충돌하는 재미난 “옛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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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라고 정확히 이유를 대지는 못하겠지만, 박완서라는 작가는 다른 여성작가들이 주는 나와 다른 性으로써의 이질감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매우 편하게 읽히는데, 그건 물론 작가의 통달하다시피 한 세목에 대한 감각과, 보편적인 공감대의 추억과 생활에 대한 작가의 쪽집게 같은 관찰의 덕분이다. 소설이 아닌 이 산문집에서도, 작가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싱아...''에서 보여주었던 추억에의 묘사와, ''마른꽃'' 등에서 보여준 세속적인 현실감각은 읽는 즐거움이 크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게 조금은 눈에 드러나는 것같아 아쉽다. 그건 ''변화''만을 바란다는 얘기가 아니다. 예컨대 ''살아있는 날의 시작'' 은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읽어보고 가슴 찔려할 구석이 많은 작품이다. 물론 이 작품집은 편하게 읽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산문집''이다. 다만 거기에 박완서 예의 그 ''쏟아내는 듯한'' 위트의 속시원함이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바람이 들었다는 얘기다. 그러한 산문들도 만나볼 수 있다면, 이 작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
|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많던 싱아.. 두 권 읽고 구수한 청국장 같은 그의 글솜씨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 작품에 큰 기대를 안고 책을 폈다. 꽁트처럼 하나하나 그가 느낀것을 적어 내려가 수필같기도 하고 日記는 아니고... 月記 라고 해야할까?? 매번 느낀바를 적어 내려간 것이 바로 옆에서 글을 쓴 것을 보여주는 느낌처럼 같은 공간에서 호흡을 하는것 같았다. 이 책의 제목인 '두부'를 보며 왜 하필 두부일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폈는데, 마치 전두환씨에게 대신 두부 한 모를 던져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가 이 책으로 흰 두부 대신 종이 두부를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기성세대들의 글에는 다소 세대차가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박완서의 글을 보면 그 세대차라는 것 마저 글솜씨의 한 요소가 되고 만다. 그놈의 땅값보다는 전원적인 경치를 보며 살려는 그의 모습이며 어느 하나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의 장편소설만 보다가 이런 짤막한 수필을 읽으니니 다소 이질감같은것도 느껴졌다. 허나 이름값하는 소설가처럼 그의 글을 읽고서는 실망이라는 걸 느끼지 않았다. 이것을 읽으며 작은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다. 젊은이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