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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가 ‘경계 넘기를 가르치기’(원서 출간: 1994년)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신에게 글쓰기는 진지한 작업인 반면 가르치는 일은 그리 진지하지는 않지만 생계를 꾸리려면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고. 물론 훅스는 후에 흑인 초등학교에서 혁명으로서의 학습을 경험한 것 등을 통해 교육에 대한 진전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훅스에 의하면 그 이후 교육은 정보 자체만으로 국한되어 버렸다. 삶의 지침이나 방향과는 무관한 내용이 된 것이다. 훅스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정보를 외우고 그것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은행 저금식 교육이라는 것이다. 훅스는 비판적인 사상가가 되려 했다. 훅스는 해방으로서의 교육을 제시한 파울로 프레이리에게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그를 서슴 없이 비판하기도 했다.(12 페이지.) 훅스는 자신의 두 스승으로 파울로 프레이리와 베트남 승려 틱낫한을 든다. 프레이리의 공동 노동이란 개념은 틱낫한의 참여 불교에서 주장된 것으로 묵상과 실천을 함께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훅스는 자신의 교육 실천은 반식민주의적, 비판적, 페미니스트 교육학이 계몽적으로 상호 작용함으로써 발생했다고 말한다. 훅스에 의하면 경계 넘기는 교육을 자유의 실천으로 이끄는 움직임이다. 훅스가 비판하는 것은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학업을 통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면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되는 현실이다. 훅스는 몸, 마음, 정신의 분리가 아닌 통합을 강조하는 철학적 관점으로 학습에 접근하자 대부분의 교수들이 절대 반대하거나 경멸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전한다.(27 페이지) 훅스는 교육이 자유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학생에게만 참여하고 고백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을 기억할 부분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치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것은 바람직한 내용을 통한 성장이어야 한다. 순종이 아닌 자유를 실천하는 방법을 배우는 교육이어야 하는 것이다. 훅스의 청소년기는 인종 차별이 폐지되었지만 적개심, 갈등, 분노, 패배로 가득찬 시대였다. 그런 와중에 훅스는 백인 남학생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인종 간의 경계를 넘는 우정은 문제이고 더욱 남녀간의 우정은 전례가 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훅스가 맞서 싸우는 것은 백인과 흑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사회, 경제적 차별이다. 훅스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관점에 인종, 성, 계급에 대한 인식을 포함시키려 하지 않는 이유는 교실을 통제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감정과 열정을 자제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51 페이지) 이에 반해 훅스는 자신이 학생들의 목소리를 존중해주는 교실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그 점이 학생들의 무한히 많은 피드백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훅스가 행하는 교육은 인종과 성, 계급을 아우르는 교육이다.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독자로 살아온 훅스는 상처 때문에 이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며 테리 이글턴의 말을 인용한다. 어린이들은 아직 사회의 관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 받지 않았기에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강력한 질문을 제기하려 한다는 것이다.(76, 77 페이지) 훅스는 이론화 즉 우리의 살아 있는 경험이 자기 회복 및 집단 해방의 과정과 근본적으로 연계되었을 때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78, 79 페이지) 훅스는 인종과 젠더에 초점을 맞춘 페미니스트 학문에 문제가 존재한다고 말한다.(98 페이지) 훅스는 토론이 개인의 경험과 연관됨으로써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활성화 된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학생들도 있음을 지적한다.(109 페이지) 인종 차별이 폐지되었지만 적개심, 갈등, 분노, 패배감 등으로 가득찬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말한 훅스는 노예제가 폐지되었어도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간의 관계가 긍정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한다.(121 페이지) 훅스는 백인 여성들은 흑인 여성을 연구하는 작업 즉 한때 무의미하다며 폐기했던 연구에 의존하여 다시 학문에서 하녀 - 주인 패러다임을 재생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29 페이지) 훅스는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을 끊임 없이 표현만 하고 이런 감정을 넘어 새로운 차원에서 접촉을 모색하려 하지 않는다면 포용적인 페미니스트 운동을 구축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실패할 것이라고 말한다.(136 페이지) 훅스는 우리가 차이와 복잡성을 존중해줄 수 있는 여성의 공간을 만든다면 정치적 연대에 기반을 둔 자매애가 생겨날 것이라 말한다.(137 페이지) 훅스는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관여하고 흑인 해방 투쟁에 참여하기에 인종과 젠더의 이슈를 흑인의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적절한 방법을 안내해주어야 하며 그 질문에 의미 있는 답변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139 페이지) 훅스는 인상적인 말을 한다. 살아남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를 우리의 존재 및 육체에 익숙해지지 않는 체계 안에 존재하는 몸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165 페이지) 훅스는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비주류이자 억압받는 집단의 일원으로, 관행화된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와 계급 엘리트주의의 희생자로 인식한 자신이 가르치는 태도가 억압하는 자의 위계를 강화시킬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다고 말한다.(173 페이지) 새겨들어야 할 언급이다. 훅스는 진보적인 교육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소리가 있으면 교수들은 변화 즉 새로운 전략을 시도하기를 두려워하게 된다는 말을 한다.(174 페이지) 훅스는 자신이 좋은 교수가 아닐까봐 걱정하는 때가 있지만 ‘좋은/ 나쁜’이라는 이분법을 버리려고 분투하고 있다고 말한다. 교실에서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는 진보적 교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유익한다는 것이 훅스의 첨언이다.(191 페이지) 훅스는 대학 1년 때 애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시 ‘아이들 대신 책을 태우다(The burning of paper instead of Children)’을 읽은 기억을 전한다. 생명체에 대한 정치적 학대와 그에 따른 고통을 멈추게 하는 문제가 검열이나 분서(焚書)보다 더욱 중대한 이슈임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시에서 훅스는 절대 잊히지 않는 구절로 “이것은 억압자의 언어이지만 당신에게 말을 건네려면 이 언어가 필요하다.”는 구절을 든다.(201 페이지) 훅스는 열정을 경험하는 일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고 감정을 깊이 느끼는 것은 열등하다고 믿게 하는 이 사회에서는 언어를 통해 교감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특히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210 페이지) 훅스는 우리는 경계를 넘는 방법을 창의적으로 창조해내야 한다고 말한다.(217 페이지) 훅스는 에로스를 우리가 전면적으로 노력하여 자기실현을 하도록 북돋워주는 힘이며 지식을 추구하는 방법에 영향을 주는 인식론적인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자고 제안한다.(231 페이지) 훅스는 선택한 것 이상의 것을 하도록 자신을 자극하는 스승을 자신의 인생 모든 곳에서 찾으려 했으며 그런 자극을 받음으로써 진정으로 선택의 자유를 얻어 제한 없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완전히 개방된 공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훅스는 학교는 유토피아가 아니지만 배운다는 것은 유토피아가 만들어질 수 있는 장이라는 말을 한다.(244 페이지) 훅스에 의하면 교실은 그 자체로 한계가 많지만 가능성을 지닌 장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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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간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가령 교실에서 교사로서 나란 존재는 어떻게 자각이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나를 에워싼 공간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면서 시작이 될 것입니다. 학생들은 교사인 내가 아닙니다. 그들이 나에 대해 타자인 것은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타자성이 확보되는 공간, 그 분절적 공간 속에서 교사로서 나는 그들과 다른 존재로서의 행동과 생각을 요구받습니다.
그런데 관념적으로 보이는 이런 자각은 의외로 우리의 몸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그저 앵무새처럼 떠들고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교사라는 본질로 수렴될 수 있는 전부라고 한다면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학생과 교사가 위치해 있는 몸의 상태와 행동 범위 등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해방 교육에서 실질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교사가 교실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 즉 몸을 가지고 몸의 영역에서 몸을 상대하여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당신은 교탁을 떠나 교실을 돌아다닐 때 당신의 움직임이 학생들에게 매우 분명해진다는 것을 갑자기 느끼게 됩니다. 또한 면대면 관계의 가능성이 생기고, ‘자신이 말한 것’과 ‘상대방이 말한 것’을 존중하게 됩니다. p.168
물론 이 책에서 전제되는 몸은 단순한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역사적이고 정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몸에는 인종, 젠더, 계급, 직업적 지위 등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몸의 존재를 복원하고 적극 교육에 참여하는 것을 진정한 해방교육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자의 교육적 전략은 “단순히 교과 과정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수업 시간에 개인 경험을 말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실천”입니다. 실제로 저자는 모든 학생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으며, 그녀가 실천해 온 수업 방식이기도 합니다.
교사도 학생도 탈역사적이고 탈정치적인 상태로 서로 대면하게 되면 수업이라는 맥락에 열정이 생길리 만무할 것입니다.
교실에 에로스가 존재한다면 사랑도 함께 넘쳐날 것이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구별된다는 것을 철저히 학습시키면, 교실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공간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p.234
교사도 학생도 불완전하며 상처받기 쉬운 역사적 존재로서 자신의 몸 위에 각인된 역사를 공개하고 함께 나눌 때 배우고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육이 이러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흔적을 은폐하는 현실이 미국과 한국이 일치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젠더로서 인종으로서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저자가 벼려야할 정치의식은 날카로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정치적 지형도의 차이도 차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영문학 교수로서 그녀의 해방교육적 실천을 물리학과 같은 학문에서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선뜻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몸과 마음을 분리시키는 ‘가치중립적 교육’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교훈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요즘의 고등 교육에서는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경우가 많지 않다. 심지어 학생들이 지식을 통해 감동받기를 절박하게 원하는 때조차도, 교수는 여전히 도전을 두려워하며 통제권을 잃을까 걱정하느라 가르치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을 무시한다. 동시에 늘 똑같은 오래된 과목을 늘 똑같이 오래된 방법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은 우리가 한 때 느꼈을 열정을 되살리지 못한 채로 자주 지루해 한다.p.236
감동과 열정이 사라진 공간으로서 교실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교실의 풍경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정이란 것이 몸과 결부되어 미묘한 결과를 낳는 것도 사실이 아닐까요? 가령 학생들은 젊고 잘 생기거나 예쁜 교사를 더 선호합니다. 이를 불결하거나 불손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도리어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합니다. 정면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요컨대, 나이 많고 못 생긴 교사만이 탄식처럼 육신의 쇠락을 날카롭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젊고 잘 생기거나 예쁜 교사 역시 자신의 신체가 어떤 교육적 효과를 유발하는지 냉정하고 인정하고 성찰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젊고 잘 생기거나 예쁜 교사가 언제까지 젊고 잘 생기고 예쁠 수 있겠습니까. 가르치는 학생들은 언제나 젊고 활력이 넘친 채로 있는데 교사의 육신은 쇠락해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몸을 교육적 열정과 활력의 중심에 놓다보면 이러한 쇠락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퇴임 이외 별다른 묘수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가 모두 동등한 척하는 것은 잘못된 신념입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점수를 준다는 것은 힘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며, 평가는 학생과 교수 모두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공적인 교실에서 인정되는 힘은 사실 학습하는 과정의 힘, 즉 우리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하는 작업이 지닌 힘입니다. p.186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함께 교육을 이끌어 갑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학생들과 교사는 “학습 맥락을 만들어내는 데서 동등”합니다. 때문에 교사도 학생들도 모두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을 해야 하고, 학생들은 책임감을 배워야 합니다. 즉각적인 즐거움으로서 편안하고 즐거운 느낌만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놀이이지 학습이 아닐 것입니다. 학생들도 교사도 학습 맥락에서 기꺼이 어렵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학생들은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나 책, 토론 등과 같은 어려운 학습 도구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고결함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정이 교실의 기능을 높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단지 분위기가 어떤지 파악하려 하거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하고 의문을 갖기만 해도 학습 과정에 흥이 날 수 있습니다.p.188
저자는 다만 우리가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도외시하는 감정과 열정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육신이 쇠락하든 쇠락하지 않든 교사가 지향해야 할 기본적인 태도는 무엇일까요?
그러나 교수들이 상처입고 부상당한 이들이며 자아실현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대학을 도전과 변증법적인 토론과 성장의 장소로 만들려 하기보다는 대학에서 은신처를 찾으려 할 것입니다.p.200
아마도 ‘자아실현’이 아닐까요? 자아실현을 교수활동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할 때, 그래서 자신을 왜곡하지 않을 때 열정은 살아나고 성찰과 고민은 치열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의 자아실현은 무엇일까요? 물론 변하지 않은 지식을 매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르치는 행위를 통해 배우고, 그 배움을 통해 성장하며,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고결함을 수확하는 것, 그것이 교사의 자아실현이 아닐까요? 같이 배운다는 것이야말로, 그래서 학생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교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자아실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