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수의 공동이익를 그 기준으로 삼고자한 벤담의 공리주의적 사고는(최대다수의 최대행복), 행위의 결과만을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공리는 정치적 판단에 필요한 기준으로 시작했지만, 당연히 이것은 법률적 판단을 포함하며 도덕 일반의 체계에까지 상관되는 일이기도 하다. 정치는 법률을, 법률은 도덕을 결정하기 마련이니까. 이런 도덕에 있어 결과가 판단점이라면, 특히 결과 안의 쾌락의 양이 판단기준이라면 이건 도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선악의 판단이 쾌락의 양에 따르냐는 비아냥과 더불어, 사람마다 다른 삶의 기준과 가치를 어떻게 서로의 양적 평가로 판가름할 수 있느냐는 비난도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런 공리주의의 문제를 잘 이해하면서도 결국 해결책은 공리주의 밖에는 없다고 믿는다. 부친 제임스 밀과 벤담의 영향아래 공리주의적 교육을 받고자란 그는 성년이 되며 공리주의에 등을 돌린다. 하지만 결국 그는 종교적 가치를 상실한 인간의 궁극적 기준을 인간 공동 이익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공리주의의 변호자가 된다. 재전향한 대변자로 이 책을 쓴 셈이다. 밀의 [공리주의]는 급진적이고 투박한 초기 공리주의를 다듬고 더 나아가 도덕의 절대기준으로 공리를 확립하는데 목표를 둔다. 그래서 상대자도 의무론적 윤리론의 칸트가 된다. 밀은 공리적 도덕의 이해가 오히려 많은 윤리적 난점을 극복하고 명확한 기준점을 줄 수 있어 칸트보다 우월하다고 본다. [다수가 만족할 만한 결과에 대한 현재 판단]으로 살아간다면, 미래에 다른 결과가 나타나 그 판단을 후회하게 되더라도 윤리적으로는 옳다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그 판단은 틀릴리가 없다는 것이다. 밀은 공리로 도덕의 이유를 삼을 수 있다고 한다. 미래의 예측결과라는 것 혹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의 결과들이 현재의 동기와 이유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지대한 성과를 거둔 기술이나 자본경영 혹은 인간경영manipulation의 테크놀로지가 똑같은 방법론으로 도덕과 인간가치의 절대적 기준점으로까지 등극하는 장면이다. 인간의 가치도 도덕도 공리밑에 일사불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밀을 통해 공리는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지고지존의 삶의 목적이 되며, 정의와 도덕의 동일어가 된다. 과연 그의 의견대로 인류공영, 인류복지의 기치는 누구도 막아설 수 없는 힘으로 삶을 강제하게 될 것이다. 그 중에 생기는 부작용은 있어봤자 하찮은 것들이다. 노동자, 소수자, 미개민족의 과정적 희생 정도...인간의 판단이 기준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또 불가피하다. 더 큰 이익이 있었으니 그 정도는 눈감아주자. 너무 심하면 개량하면 된다. 그래 지금도 인류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잘 굴러가고 있다. 빈민도 좀 있고, 낙오자들이 길거리에서 자고, 여자들이 몸을 팔아야 결국 사회는 공동이익이 증진되는 법이다. 잃어버린거라곤 신의 모습을 가진 인간존재, 겨우 그것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