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 서른에 "잔치는 끝났다"며 우울한 청산주의자의 독백을 읊조리던 시인을 기억한다. 그녀의 책이 나온 이후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언제부턴가 저자가 여성인 경우, 특히 그 저자가 미인이라고 판단되는 경우, 저자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리는 지면 광고를 자주 보게된 듯하다. 어디 지면 광고뿐인가. 이 책처럼 표지에 저자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리기도 하니까. 표지에, 그리고 책의 중간 중간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 페트라 켈리는 과연 상당한 미인이다. "생전의 페트라는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정말로 정치를 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인터뷰를 중단해버려 물의를 빚은 적이 몇 번 있었다"고 저자가 밝히듯, 페트라 켈리의 미모는 그녀의 대중적 인기를 설명하는 한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녹색정치인으로서의 삶의 궤적을 올바로 평가하는 데 그것은 방해 요인일 뿐이다. 어린 시절 읽던 이순신 장군 위인전류의 평전이 아니라면,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 '성장'처럼 한 사람의 위업보다 그 사람의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모습들의 스케치는 독자들에게 살아있는 (혹은 살았던) 사람의 체취를 가까이에서 맡게 해준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를 훨씬 더해준다. 이 책이 그러하다. "동시에 여러 남자와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고" 반문했던 그녀의 남성편력도,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놀이에" 서툴러서 너무나 이상적이고 지나치게 감성적이었던 그녀의 정치적 신념도, "가장 큰소리로 주장하고 가장 소중하게 지켜온" 비폭력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신변의 위협 때문에 자기 집에 총을 가져다 두도록 허락한 영혼의 불안함도 모두 페트라 켈리를 이루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환경파괴는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정의 그리고 개인에게 가해지는 국가권력의 남용이라는 문제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pp.162)"는 그녀의 통찰은 오늘 새만금 매립 문제와 온갖 이권 놀음에 파헤쳐지는 강산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걸프 전쟁 직후, "소련이라는 '적국'이 없어지고 나니 또다른 적이 필요하고, 이제 제3세계를 그 대상으로 삼고(pp.357)" 있는 미국을 비난하는 대목에선 걸프전 당시의 아버지를 이어 이라크의 유전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부시 미대통령을 두 눈 부릅뜨고 꾸짖는 듯하다. 책을 읽는 동안,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와 우리 문단의 작가 이문열 같은 이의 전혀 다른 방식의 현실 참여 방식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옥의 티는 물론 있다. "방사능에 감염(pp.66)" 되었다는 표현이나, 방송에 "출현(pp.226)"했다는 오자, "한국전쟁은 1955년에 종식(pp.66)"되었다는 저자의 오류는 번역 과정의 부주의의 결과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잘 쓰여진 평전은 매혹적인 소설보다 낫다. 잘 살다간 사람의 삶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잘 산다"는 것이 화석화된 위인전의 그것이 아니라면. |
| 보스톤에 갔을 때, BU(여기 택시기사에게 Boston University 가자고 얘기하면 기사가 깔본다고 한다. 보스톤 사람들은 BU라고 하지 그렇게 길게 말하지 않는다)에, 마틴 루터 킹 기념비가 대학 교회 바로 앞에 서있었다. 잘 알려진 인권운동가이다. 페트라 켈리...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내가 잘 모르는 거겠지?) 여성 정치가, 아니 사회운동가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페트라 켈리라고 말하면 잘 모르겠지만, 녹색당이라고 말하면 왠지 조금은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독일 녹색당을 만든 사람 중의 하나이고,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시절 의문의 죽음을 당한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독일에서는 20세기 10인의 정치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반핵/군비축소 운동이 중심이던 시민들의 작은 모임을 정치조직으로 만들어, 1979년 유럽의회 선거에 뛰어들었고, 1983년 녹색당은 의회에 의석을 얻을 만큼 선거에서 성과를 거뒀다. 의회로 진출해 의원이 된 그녀는 티벳 독립운동과 인디언 같은 소수민족을 위한 인권 투쟁을 계속해나갔다. 환경보호와 비폭력 반전평화운동의 중요성을 시민들에게 부각시킨 것이 그녀가 한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생이지만 전후 독일에서 주둔군으로 복무했던 미국인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 가족사, 암으로 세상을 뜬 의붓동생에 대한 사랑과 가족을 잃은 상실감을 이겨낸 이야기,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교육받고 정치가로 독일에 정착하기까지의 성장과정을 비춰보면, 그녀가 왜 그 길을 걷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미리 말하지만, 재미있는 책은 절대로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들게 된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우연히 들춰본 서평 속에, 참 매력적인 그녀의 말이 보여서 집어들게 되었다. “아이들 학교에 필요한 돈을 먼저 확보하고, 그 대신 전투기 비용의 마련을 위해 우리 공군이 일일 찻집을 여는 그날, 그날이 곧 우리의 축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라면, 인간적인 사회로의 변화의 가능성도 늘 꿈꿀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