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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신화의 시절부터 오늘날의 수많은 대작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운명에 대해 찬가를 부르는가하면 사랑의 덧없음의 아리아가 지금도 곳곳에 울려 퍼지고 있지요. 에디뜨 삐아프는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을 위해서라면 조국도 친구도 버리겠노라 노래합니다. 그러나 막연한 사랑의 동경이 아닌 다음에야 소위 연애를 해 본 사람치고 사랑의 씁쓸함에 눈물짓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누군가는 동경으로, 누군가는 상처가 아닌 진짜라 부를 사랑을 그리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운명을 꿈꿉니다.
「늦어도 11월에는」은, 주변을 못견뎌하던 재벌집 젊은 마나님이 남편 없이 참석한 한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젊은 작가를 만나 운명을 느꼈다면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는 일로 시작하는 소설입니다. 언뜻 마담 보바리의 철없는 엠마가 떠오릅니다.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주인공인 마리안네가 작가 베르톨트 묀켄을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부분이 흔한 로맨스소설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처음부터 강렬한 임팩트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만났을 당시의 상황이 몇 페이지에 걸쳐져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느껴질 정도죠. 작가가 사르트르로부터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적 작가이며 세계적인 소설가"라는 극찬을 받았다는 책소개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저 그런 책으로 치부하고 덮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2차 대전이후의 어느 공업도시, 상공인협회가 수여하는 문학상 시장식장에 마리안네는 출장으로 바쁜 남편 막스를 대신해서 참석합니다. 사실상으로는 막스의 회사인 헬데겐사에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상입니다. 그녀는 가진 것과 사회적 위치로 으시대는 위선으로 가득한 사람들속에서 지루해 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상을 수여하러 온 작가 베르톨트 묀켄과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둘은 보자마자 서로를 '알아 봅니다' 서로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요.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에게 그녀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겠노라 말합니다. 마리안네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와 함께 바로 떠날 채비를 하러 집으로 가죠. 처음 만난 남자와 만나자마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지만 마리안네의 마음은 갑작스레 타오른 정염같은 바람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베르톨트와는 키스는 커녕 그 어떤 애무조차 없는 만남이었으니까요. 오히려 그녀의 마음속엔 첫사랑 아르남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마리안네는 열정을 지니고 있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첫사랑이었던 유부남 아르남은 그녀에게 상처만을 주었고 그 상처는 세상을 향한 모든 열정을 감추며 살게 만들었습니다. 마리안네는 어쩌면 자신도 체면치례에 어긋남 없이 주변에 맞추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만족해하는 조건을 가진 막스와 결혼하고 그렇게 자신을 누르고 주변에 맞추어 살아왔습니다.
막스는 베르톨트가 말했듯이 '품위있는' 마리안네의 모습에 만족할 뿐입니다. 젊은 시절 사업에만 열중하느라 곁을 주지 않은 아내가 말없이 떠난 일을 겪었던 시아버지는 마리안네를 이해해 줍니다. 그렇게 자신이 참고 있던 것을 모두 버리고, 목숨과도 같은 아들 귄트까지 포기하고 떠나는 마리안네는 마담 보봐리의 엠마의 모습이기보다는 인형의 집에 노라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마리안네가 노라일 수 없는 것은 그녀 스스로의 떠남이 아니라 떠남의 계기가 베르톨트라는 점에 있어 결코 노라가 되지 못합니다.
마리안네와 베르톨트는 어디든지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여권문제로 국경의 작은 마을까지만 가게 되죠. 그리고 함께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리안네는 베르톨트의 작가적인 예민함을 알게 됩니다. 창작의 고통에 힘겨워하는 베르톨트를 보며 그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 그를 혼자있게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가 어쩔수없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불안해 합니다. 또 마리안네는 막스가 사람을 시켜 자신을 찾지는 않을까 걱정합니다. 베르톨트역시 마리안네에게 그녀가 떠나오기 전에 누렸을 풍족함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안함을 가집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가지는 상대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점이, 그리하여 상대에 대한 자신의 부족함의 불안감의 모습이 두 사람을 통해 세밀하게 묘사됩니다.
그렇게 불안과 무료함에 놓여 있던 마리안네에게 시아버지가 찾아옵니다. 마리안네는 시아버지의 방문을 계기로 막스를 떠났을 때처럼 베르톨트를 훌쩍 떠납니다. 대외적으로는 요양하다 온 것인양 돌아간 마리안네에게 막스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대합니다. 그런 막스에게 마리안네도 예전처럼 맞추어 잘 지내는 듯 보입니다만 마리안네는 모두가 다 알고 수근거리는 것같은 불안함에 시달립니다. 모두가 베르톨트와의 일을 알면서 부러 묻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합니다.
베르톨트는 11월로 예정되어있는 연극작품을 쓰고 있었습니다. 11월이 되면 모든 게 나아지리라 두 사람은 막연한 기대감에 차 있었죠. 그리고 두 사람만이 알고 있던 11월이 다가왔고 신문에 베르톨트의 작품이 마리안네가 있는 도시에서 상영된다는 기사를 보게 됩니다.마리안네는 막스가 그 기사를 봤을지, 봤다면 여전히 베르톨트와 연락을 주고받고 지낸 것으로 생각하진 않을지 새로운 불안감에 눌립니다. 공연날이 되자 불안감이 증폭되는 한편 막연한 기대감에 휩싸입니다. 그것은 베르톨트가 약속했던 모든 것들을 꼭 지키고야 말 것이라는 예감이었습니다. 처음 베르톨트를 만났을때 그냥 알았던 것처럼 역시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당연한 것처럼 느낍니다. 격정적일 정도로 상승하던 불안의 곡선은 막상 베르톨트가 그녀를 찾아오자 오히려 침착해 집니다. 모든 불안이 알지 못함에 있어서라면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진정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녀를 찾아온 베르톨트와 함께 마리안네는 다시 떠납니다. 단순히 뒷풀이 파티에 가자는 떠남이었지만 베르톨트와 마리안네는 영원히 함께 하게 됩니다.
「늦어도 11월에는」은 마리안네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매우 독특한 작품입니다. 마리안네의 1인칭 시점이기 때문에 그녀가 상황설명을 하는 때문도 있지만 그녀의 생각의 부분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마치 연극무대를 보는 것 만큼이나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아마도 연극으로도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리안네는 자신의 상상력이 사실은 두려움이라고 고백합니다. 한스 에리히 노삭은 여성인 마리안네의 1인칭 시점을 통해 내밀하고 세밀한 심리적인 부분을 표현하는데 비단 여성의 심리뿐이 아니라 예민하고 섬세한 여성의 눈을 통해 주변 인물들의 심리 또한 밀도있게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또 극중 베르톨트를 통해 창작의 행위가 스스로를 파괴하고 신랄하게 냉소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글쓰기를 계속 할 수밖에 없슴을 고백하는 듯 보입니다.
대작이라 부르는 많은 작품들이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룹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가 그러했고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고전이라 불리는 이런 대작들이 여타 범상한 작품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남다른 서정적인 요소인 경우도 있겠지만 시대를 아우르는 사람간의 심리, 사회적인 관계등 단순히 누구와 누가 만나서의 연애담을 담은 것이 아닌 여러가지 시대적, 사회적 가치를 담은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또 대부분 그런것은 시대가 달라도 그다지 변하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늦어도 11월에는」은 운명적인 사랑으로 시작해서 운명적인 사랑으로 끝을 맺는 듯 보이지만 390여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에 비해 매우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초반 몇 페이지의 지루함과는 달리 굉장한 속도감으로 읽혀졌던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보기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되짚어 생각해 보게 되는 점이 참 많았습니다.
독일인의 작품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프랑스의 국민 여가수 에디뜨 삐아프의 노래였습니다. 영화 인셉션에서 줄기차게 흘러나오던 바로 그 노래 말이지요.
11월은 지났으나 늦어도 12월에는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리라 다짐해 봅니다. |
|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첫사랑 Y는 여러모로 나와는 닮지 않은 사람이었다. 성취 욕구는 너무 강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심각하게 좋아했으며 우울의 문턱에는 가본 적도 없고 문학적 소양이라고는 은물로 눈을 밝히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이었다. 첫만남에서 나는 그를 흘려버렸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그의 웃음이 보기에 좋았고 세 번째 만남에서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그의 밝음에 동화되어 수소풍선처럼 퐁퐁거리며 날아다녔다. 그와 함께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 흥겨웠고 그 속에서 나누는 은밀한 애정에 자주 잔소름이 돋았다. 그의 직설적 화법이 세상 어느 상징보다도 달콤하고 감동적이어서 눈물 글썽이는 일도 잦았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그가 쓴 첫 편지는 이랬다. 편지를 읽으며 그동안 내가 남발했던 비유와 상징들이 얼마나 지루하고 가식적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수식어가 배제된 채 던져지는 고백은 얼마나 당당하고 황홀한가. 베르톨트는 작가다. 그의 수상은 홍보 효과를 노린 한 기업의 전술이고 그 회사의 사장은 베르톨트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다루는 작품들이 어떤 류의 것인지, 최소한의 관심조차 없다. 그가 베르톨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회적 성공과 가정의 붕괴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마술처럼, 교통사고처럼, 폭풍처럼 사랑은 온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을 부르는 주문이다. 이 말 한 마디에 마리온은 남편과 아이와 풍요와 안정을 버리고 사랑을 좇는다. 하지만 도피가 한순간에 사랑을 완성시키지는 못한다. 베르톨트는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고 불안정하다. 그가 침묵의 한 가운데에 있을 때는 ‘세상의 모든 탄식’마저 입을 다물어야 했고 그럴 때면 마리온은 박물관 벤치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 척 꾸미고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한다. 그와 그녀의 사랑을 좇는 내 가슴이 부산스럽다. 가슴이 답답하고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늘 긴장하고 경직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안다. 존재 자체가 심장에 압박을 가하고 진공청소기처럼 공기 중의 산소를 모두 흡입하고. 진공의 상태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마리온은 고백한다. ‘그때 이미 순수한 사랑의 감정은 조금씩 변질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이미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그런 외로움이었다.’, ‘그에게 있어 나는 두 가지 다른 일 사이에 존재하는 짧은 휴식일 뿐이다.’ 결국 마리온은 그들을 방문한 시아버지를 따라 귀가한다. 그리고 잘 훈련된 말처럼 기업의 안주인으로서, 행복한 아내로서, 따뜻한 엄마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베르톨트가 희곡을 완성하고 그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기 전, 늦어도 11월 전까지는.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낯설기도 하고 내 살처럼 익숙하기도 하다. 수동적 삶의 전형처럼 보이던 마리온이 사회가 부여한 질서, 세습되어 온 도덕적 관습에 대항하는 모습이 놀랍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념무상이 저지른 만용일지라도 말이다. 두서없이 진행되는 마리온의 대사는 불안정해서 슬프고, 거듭되는 침묵 속에 불현듯 던져지는 베르톨트의 그리움은 애처롭다. 찰나에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부럽고 그들이 이어가는 위태로운 사랑은 아프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랑을 대변하는 듯한 ‘인류 역사의 모든 위대한 연인들은 지상에서 파멸을 당했다.’ 라든지 ‘그들은 어느 시대에도 늘 인류로부터 배척을 당해왔다.’ 라는 작가의 고백은 어설퍼 보인다. 그런 말들을 현수막으로 걸 만치 그들의 사랑이 알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사랑한다면, 이 이 책보다 훨씬 감각적이고 적나라하지만 말이다. 죽음으로 완성된 사랑, 이란 공통점 때문일까.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던 첫사랑 Y는 아직 죽지 않고 행복하거나 불행할, 나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하여 우리의 사랑은 완성되지 않았다. 죽은 이가 ‘화자’라는 설정이 재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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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기만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법을 배우고, 그런 행위에 대해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순간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일에 대해 우리가 하는 후회는 결국 우리 자신을 기만했던 모든 행위와 생각과 어리석음에 대한 자책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외부 환경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진실로 솔직해지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의 비난도, 다가올 미래도, 어쩌면 죽음까지도 잊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외부 조건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혁명과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적 관습이나 통념에 비추어 그들을 단죄하고 비난한다.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진심으로 축하할 용기는 과연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한스 에리히 노삭은 우리를 향해 진지하게 묻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우리가 대답해야 할 차례이다.
베르톨트 묀켄은 작가이다. 어느 날 그는 상공인협회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사실은 '헬데겐 사'가 주최한 시상식이었지만 헬데겐 사의 대표인 막스는 익명을 원했고, 수상식장에는 그의 부인 마리안네를 대신 보낸다. 베르톨트는 그곳에서 만난 마리안네에게 첫눈에 반한다. "당신과 함께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베르톨트. 마리안네와 베르톨트는 그 순간이 자신들에게 가장 솔직한 순간임을 직감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외부 환경이나 사회적 비난, 그들이 걱정해야 할 미래마저도 초월하는 순간이다. 그날 마리안네는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베르톨트와 함께 집을 나간다.
그러나 행복은 실로 순간적인 일이다.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비추어 좋은 사람으로, 남들에게 비난 받지 않을 정도로 착하게 산다는 것(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지만)은 그 순간을 만나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어떤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처음의 그 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그 역시 행복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행복이 비록 오랫동안 계속될 수 없음을. 그것이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것과 같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행복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행복은 오직 현재일 뿐이다. 거기엔 과거도 미래도 없다.그때 우린 참다운 행복을 알았고, 그래서 그후 우린 불행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P.128)
한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베르톨트의 머릿속에는 오직 미래만 존재한다. 과거와 단절한 채, 자신의 엄마와 동생조차 만나지 않는다. 미래에 저당잡힌 베르톨트는 현재의 시간을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소비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오직 그에게는 잘 팔리는 희곡을 완성하여 좋은 집으로 이사도 하고, 폭스바겐도 한 대 사고, 마리안네와 마음껏 여행할 날만 기다린다. 늦어도 11월에는.
"너무나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탄식마저 입을 다무는, 아무리 빠져나오려 애를 써도 빠져나올 수 없는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울고 싶어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해야 비로소 숨이 좀 트였다." (P.180)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마리안네에게 시아버지의 방문은 한줄기의 빛이요, 탈출구였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시아버지는 성공을 향해 오직 앞만 보며 살았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부인은 집을 나가 죽고, 아들 막스는 어머니도 없이 자랐다. 이제 자신이 세운 회사는 그에게 긍지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주의 대상이었다. 사회적 통념과 관습에 의해 전 인생을 바친 그는 이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되었다. 원인은 서로 달랐지만 베르톨트와 마리엔느, 그리고 시아버지는 사회적 통념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무참히 짓밟혔음을 깨닫고 이에 저항하려 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그들은 타자(他者)인 동시에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한몸인 것이다. 시아버지에게 베르톨트와 마리안네는 자신을 대신하여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저항하는 대리인이다.
"나 역시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지. 내 나이에도 말이다. 부끄러운 일이지.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누구도 깊게 생각해보려 하지 않아. 그냥 대충 그런 식으로 넘기려는 거지. 하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야. 운수가 사나울 땐 흔히들 소리치지. 이따위 인생이 다 뭐야! 정말 지긋지긋해! 하지만 어쨌든 인생은,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거다..." (P.227)
시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마리안네는 결국 베르톨트를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남편 막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해 11월, 베르톨트의 희곡이 마리안네가 사는 도시에서도 공연된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마리안네는 공연 입장권을 구입하였지만 정작 자신은 가지 않는다. 그리고 11월의 어느 날, 우박이 심하게 내리던 날 밤 베르톨트는 마리안네의 집을 찾아온다. 베르톨트임을 직감한 마리안네는 베르톨트와 함께 다시 집을 나간다. 그러나 베르톨트가 약속한 폭스바겐을 타고 떠나던 두 사람은 철로 교각에 부딪쳐 영원한 여행을 떠난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말했던 것처럼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가장 탁월한 작가"인 한스 에리히 노삭은 연애 소설이라는 구조물 속에 또 다른 스토리를 깔고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삶의 수동성과 맹목적성에 저항하는 젊은 두 남녀와 이를 지켜보며 지지하는 한 명의 노인, 그리고 인습과 통념에 순응하며 사는 대다수의 주변인들. 성공, 의무, 도덕 등 우리에게 주어진 외부 환경에 의해 우리는 단 한 번도 저항하지 못한 채 우리의 삶을 마감한다. 이런 삶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시아버지의 관점에서 그렇게 살았던 자신의 삶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 자신은 감히 용기조차 낼 수 없었던 일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두 젊은이는 얼마나 부럽고 대견했을까? 관습과 통념에 따라 읽으면 이 책은 한낱 흔한 러브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인습의 벽을 깨고자 시도했던 두 젊은이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한가요? |
| 추천으로 접하게 된 책이다. 몇몇 지인들에게 추천한 결과 호평을 받았던 책이라며 확신에 찬 미소로 내게 귀띔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미소로 답해줄 수 없었다.(왠지 그녀에게 오점을 남긴 것 같아 미안했다.) 내 반응에 이유를 굳이 만들어보자면... 우선, 사건이 지루했다. 말하자면 특별한 사건이 없어 보였다. 이건 작가의 의도였을까? ㅡㅡ;; 유부녀의 일탈이 특별하다면 특별한 사건이건만, 회상과 진행이 더디고 뱅뱅 돌아서 그 맛이 상당히 떨어졌다. 지리한 일상을 질질질 나열하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무언가 자극적인 것을 혹은 감성적인 것을 기대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사랑 이야기가 구태의연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너무나 비현실적으로 감성적인 일본 소설에 혹시 내가 길들여졌는지 스스로 반성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왔던 길 다시 되돌아가는 듯한, 알 듯 모를 듯한, 어영부영한, 동문서답식의 대화가 내 맘에 와 닿지 않았다. 이건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이 책의 문체는 맘에 들지 않았다. 읽어도 안 읽은 듯, 안 읽어도 읽은 듯, 그 말이 그 말로 맴돌고 맴도는 듯 한 말투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이런 대화들이 이 소설의 특별한 사건을 진부하게 만들어 버리는데 일조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은 기대했던 '가을에 어울릴만한 감정'을 내게 건네주지 못했다. 제목에서부터 가을을 알리는 이 책을 읽고 그 달콤쌉싸름한 감정을 전해 받은 그들이 무딘 감정의 소유자인 나는 마냥 부럽다. 나도 '늦어도 11월에는' 이 책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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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오직 현재일 뿐이다' 마리안네는 이렇게 말하며 남편과 자식과 시아버지를 버리고 처음 본 남자, 베르톨트를 따라간다. 단지 그가 읊조린 한 마디 말 때문에.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자로서의 삶 대신 사랑하는 여인의 본능에 충실했던 마리안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끝은 어디일까.
사랑만 믿고 떠난 자들의 미래가 결코 밝지만은 않듯, 마리안네와 베르톨트의 여정도 녹록치않다. 우아한 귀부인은 부유한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대화의 단절. 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좌절. 막연한 기다림. 이들은 끊임없이 마리안네를 괴롭힌다. 결국 여행 중 그녀를 보러 온 시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들 마리안네를 정성껏 보살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인형처럼 숨막히는 공간에서 자기 역할을 다해간다. 그리고 약속했던 11월. 베르톨트의 작품이 마리안네의 동네에서 초연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거부했으나 다가온 재회의 시간. 그들의 사랑은 사랑 이상이었다. 간절한 기다림 속에 만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전과 다름없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꼭 같은 입술이었다. 그와 함께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이렇게 상대에 대해 단언할 수 있을까. 벙어리가 된 사람들을 앞에 두고 그들은 나간다. 드디어 구한 베르톨트의 차를 타고 떠난거다. 결말에 대해서는 참 슬프다고만 이야기해두자.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정을 버리고 떠난 마리엔느는 부정한 여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을 찾아 간 그녀에게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집을 나섰지만 자신의 삶 내내 지나간 시간에 묶여버린 불쌍한 여인을. 행복을 꿈꾸었지만 단 한번도 현재의 충만함을 느끼지 못한 어리석은 여인을. 끊임없이 괴로움에 떨던 그녀에게 어쩌면 죽음은 최고의 평안이자 행복이었을지 모른다.
사랑, 그 처절함에 녹아내리고 싶다면 권한다. 늦어도 11월 전에 읽으시길. 찬바람 부는 계절에 읽기엔 너무 추운 내용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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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트르로부터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적 작가이며 세계적인 소설가'라는 극찬을 받은 한스 에리히 노삭.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삼 년간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다가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노동자와 회사원으로 전전했다. 1933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한 때 독일공산당에서 활동했던 것을 이유로 저자의 작품은 나치 치하에서 출판금지를 당한다. 1943년에는 함부르크 공습으로 인해 일기와 원고를 모두 잃었다. 1955년 발표한 대표작 '늦어도 11월에는'으로 독일 최고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흐너 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독일산업협회 문화상과 빌헬름 라베 상 등을 수상했다. 네이버 책에 담겨있는 저자에 대한 소개글이다. 이렇게 소개글을 전부 옮겨놓은건 오늘 만난 이 책이 작가의 작품 중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작품이란 소리.;
늦어도 11월에는. 제목이 참 멋들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하는 궁금증 하나만으로 읽어본 연애소설. 그럼에도 아주 위험한 책 한권을 만났다. 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짤막한 줄거리만으론 그 느낌을 알 수 없던 이 책. 이미 11월은 지난지 오래긴 하지만..(이 책은 2010년 12월에 읽은 작품이다.) 그래도 한번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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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그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잘못을 깨닫게 되면 바로 그만두어야 한다는.. 세상 일이란 언제나 아주 사소한 일에 좌우되게 마련이다. 그건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정작 중요한 일은 늘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기 때문에 닥쳐도 별로 놀랄 일이 없지만 작은 일들은.. 그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저는 정말 행복했어요. 그 시간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게 잘못일까요? 행복해지고 싶은 게,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그게 잘못일까요?
사회적 통념을 부정하고 오로지 사랑에만 뛰어든 여인의 이야기. 살짝 아쉬운게 있다면 11월의 늦가을.. 그 시기에 이 작품을 접했다면.. 베르톨트의 희곡이 초연되는 날, 우박이 쏟아지는 밤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이 어떤 식으로 머리에 그려졌을지 궁금하다는 점이었다.;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는 한 여인 마리안네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 소설은.. 그래서 그녀의 심리변화를 꽤나 세밀하게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처음 만난 남자가 건넨 한 마디 말 때문에 가정을 버리고, 삶의 고통마저도 버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 여태껏 자신의 생각으로 의지대로 살아오지 못한 그녀에게 이전에 주어졌던 안락한 삶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른 누군가에게 '안락하게 보이는 삶'이었다.
이 작품을 건실한 재벌 2세의 아내가 집시와도 같은 떠돌이 작가 묀켄을 만나고 그를 따라나서 지낸 두 달간의 짧은 동거생활. 이라는 내용만 보자면 지극히 통속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런 통속성 보다는 그저 행복에 대한 소망을 가진 한 여인의 감정에 주목하여 흘러간다. 사랑에 대한 동경, 사랑의 도취감 속에서의 만남.. 그리고 베르톨트와 마리안네가 처음 만났을때부터 시작되는 믿을 수 없는 분위기와 대화는 그 통속성을 극적으로 변모시킨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행복한 삶을 떠나 행복해지고 싶은 게,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잘못이냐고 묻는 그녀의 물음에서 우리는 과연 그녀의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을까? 행복해지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와 결정을 따르고자 하는 걸, 타인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잣대를 들이대 평가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의 결정에 따라 타인이 정말로 불행해진 것일까, 아니면 남들에게 불행하게 보이는 것일까?
그녀의 행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자유였을까. 많은 궁금증을 뒤로하고 책장을 덮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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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도서목록을 보다가 늦어도 11월에는 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심은하 한석규 영화가 갑자기 떠오르더군요.ㅋ 내용은 다르지만, 제목만으로 저를 사로잡아서 구입 후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뭔가 씁쓸한,,,하지만 따뜻한 그런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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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 본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처음 본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모든 걸 뒤로 하고 그와 함께 떠날 수 있을까? 세속적 눈으로 보면 불륜이고 자식을 버리고 간 매정한 엄마이다. 무엇이 그녀를 어린 아들까지 두고 떠나가게 만들었을까?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떨렸다. 섬세한 감정 흐름이 그대로 전해졌다. 베르톨트를 따라 떠날 때, 그와 함께 지내며 슬프고 외로울 때,시아버지를 따라 돌아올 때, 집에 돌아온 후 11월이 되어 베르톨트의 작품 공연 소식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할때..... 그때그때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나 역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있는것같았다. 마지막 장면 베르톨트가 그녀가 부르던 자장가를 휘파람으로 부는 장면에 전율을 느꼈다. 창작의 고뇌 속에서 그녀를 내버려둔 것처럼 보이고 외롭게 만들었지만 그는 그녀와 함께 했고 지켜보며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가장 행복한 순간 함께 죽음을 맞는 것은 비극이 아닐지도 모른다. 남겨진 사람들에겐 그들의 사랑이 완성되지 못한 비극이겠지만 그들에겐 해피엔딩일 것이다.
역자의 말대로 예술적인 연애소설이다.작가가 남자인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문장이 섬세하다.
불륜이라 비난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소설. 그냥 한눈에 반했다라고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처음 마주친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전부를 느끼고 읽어버린,서로의 세계를 빨아들여버린 영혼 대 영혼의 만남의 이야기라고 본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읽고 나서 한동안 계속 떨리고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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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미묘한 감정을 이렇게 섬세하게 다룰 수 있을까... 한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과 떠나고, 그 사람과 살다, 이별을 하고, 다시 일상에서 그를 기다리고, 또다시 만나 영원히 떠나는 그 과정에서 마리안의 그 섬세하고 복잡한 감성, 늘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여자의 마음을 너무나 세심하게 써내려가서.. 읽는 내내 내 마음을 읽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강박증세를 보이면서도 절제하는 마리안의 일상 묘사는 책 페이지 페이지 마다 내 한숨을 흡수해 갔다. 권태로운 일상을 살아내가는 상류층의 여성이 어느날 소울메이트를 만나 한눈에 그를 알아보고.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와 기차를 탄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 모든 이야기들이 다 통하고, 편안할 것이라 하지만.. 그를 보는 그녀의 마음이 시리고 그녀를 보는 그의 마음이 시리다. 함께하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상대가 후회하진 않을까. 두렵고.. 이쯤에서 상대를 자유롭게, 평안하게 놓아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늘 마음을 쓰는 시린 두 남녀 이야기.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는데 3초면 된다지만,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외면하고 그대로를 현실로 지켜내긴 너무 힘들다. 그것이 또다른 현실이 될까봐 두렵기 때문에. 상대에게서 자신에 대한 그 날의 그 감동이 사라져 가는것을 보게 되는 것이 아프기 때문에. 그 사랑이 내가 버린 현실이 되어 가지 못하도록 이별은 선택하고 가슴에 묻어버린다. 이 책의 주인공 마리안과 베르톨트를 보면서. '밀애'의 두 주인공 이종원과 김윤진을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 살면 다를 것 같아요? 아니요. 이미 해봐서 알잖아요. 우린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갈 거예요." 하지만 이 책은 해피엔딩이다. 그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변해가면 살았답니다가 없는, 극적이고 행복한 재회와 동시에 그들의 현실의 시간은 멈췄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지금 옆의 그 사람과 함께라면 죽을 수도 있습니까? --------------------------------------------------------------------------------------- 문명 그렇게 오래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순긴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단 스쳐 지나가고 나면 계속 그리워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 순간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니 내가 한 말 같았다. 내 목소리가 그대로 메아리쳐 되돌아온 것 만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다른 말을 했다면 그것은 전부 거짓이었다.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행복했다는 것을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하는 얘기려니, 생각할 것이다. 내 앞에선 믿는 척한다 하더라고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저토록 불행하면서 왜 저렇게 끊임없이 행복에 대해 이야기 할까. 그렇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나역시 인정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불행이 무엇인지는 모두들 알고 있다. 무슨 일이든 그 뒤에는 빈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낮에는 그것도 모른척 슬척 지나쳐 버릴 수 있지만 어스름이 내리고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옛노래를 듣고 있다보면 두려움은 점점 커지고,쉽게 잠을 이룰 수 도 없게 된다. 도대체 이 빈자리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들 그렇게 이야기 한다. 행복은 붙잡아둘 수가 없다고...... 그래서 그들은 행복보다 의무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르톨트는 행복했다. 나는 알고 있따. 그는 행복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나 역시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은 너무 늦게, 모든 것이 절망으로 치달은 후에야 우리를 찾아왔다. 행복은 그렇게 슬그머니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가 베르톨트를 잘못 보았던 것은 아닐까......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너무 피곤한 상태였다. 그래서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행복했던 기억은 없었다. 행복했다고 느껴지는 기억의 빈 공간이 있긴 했지만 정작 그 공간을 채우려 들면 어느 하나 거기에 맞는 게없었따. 그것이 정말로 내가 체험한 사실인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 빈공간은 여전히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때떄로 나는 내 방의 거울 앞에 앉아 나 자신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다른 일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나는 그렇게 꼼짝도 없이 앉아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그것은,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은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나는 베르톨트가 나를 바라볼 때의 그 못브으로 그의 눈으로 나를 보고 싶었다. 베르톨트가 나를 보았을 때의 내가 어땠는지, 나는 영원히 그때의 못브으로 살고 싶었다. 베르톨트와 만난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내가 진정한 나의 모습이었기 떄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몹시 고단힌 일이기도 했다. 복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 반가운 마음에 나는 얼른 밖으로 뛰어 나가곤 했다. 베르톨트가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따. 처음에는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무릎위를 스쳐가는 그의 휘파람은 전에 내가 가르쳐준 그 자장가였따. 그는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휘파람 소리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행복해 하고 있었다. 나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의 휘파람 소리를, 나의 자장가를 함꼐 듣고 있었다. 행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