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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영의 내면성의 형식들은 그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것때문인지, 저자 역시 결론부분에 이후에 진행될 연구에 이어질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국가에 의해 자행(?)되고 타자에 의해(그것이 권력을 가진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새겨졌던 내면성을 쫓아가면서 현시기의 자본주의의 폐단을 뒤엎고, 맑스가 이루려고 했던 보편적 개인들이 숨쉬면서 살아가는 꼬뮌주의로 나아가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의 내면성을 나았고, 러시아혁명은 볼셰비키의 내면성으로 인해 저자가 말하는 혁명에 도달하지 못하고 하고 있다. 저자는 이전의 논해지고 있는 혁명의 정의에서 다소 새로운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을 지니고 있는 지배계급을 뒤엎는것이 혁명의 최종 목표가 아니며, 그것은 단지 표면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저자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개인들의 내면성의 혁명이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 진행되는 시작이라고 하고 있다. 그것이 저자가 책 전체를 통과하고 있는 역사를 통한 내면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즉,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존재를 망각시키는 온갖 힘들을 벗어나는 것이 꼬뮌주의적 내면성'(p402)이다. 그리고, 이 꼬뮌주의적 내면성을 지니고 그것을 제도화할 수 있는 꼬뮌주의로의 이행이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혁명의 완수가 아니라 단지 시작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현시점에도 꾸준히 혁명을 하기위한 꼬뮌주의적 내면성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내면성을 갖추기 시작할 때 꼬뮌주의는 실현될 수 있으며, 요즘 유행처럼 말해지는 '표면적인 꼬뮌주의'가 아닌, 진정한 꼬뮌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전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혁명이 정치 자체를 폐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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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만나게 된 계기는 폭력(가학적)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지속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인식하고픈 욕구라고나 할까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대중서적들을 읽고 가지치기 식으로 추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가학성․자유․타자』라는 서적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저자의 책들이 9권이다. 일부는 절판되어 중고와 새물결출판사에서 구해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저자가 말한대로 ‘무지에의 열정(무지이던 고의이던 어떤 이유던 간에 현실에 대한 무지몽매한 정도의 몰인식과 무개념을 향한 열정으로서 아주 적절한 표현)’과 더불어 씌여지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진리들을 엄밀한 과학적 노동을 통해 밖으로 드러내고 엄격한 논증과 토론도 허용하자는 진지하고 철저한 근원적인 인식들이다. 큰 제목으로는 ‘인간과 사회구성체(가 돌아가는 근본적 원리)’랄 수 있고, 좁게는 ‘지배와 권력(의 내면적 형식과 원리)’이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한 번 읽어가기(인식하기)를 시작하면 계속하기를 멈추기가 힘든 내용들이다. 푹 빠져버리게 됨을 뜻한다. 가끔 용어가 어려워서 헤매기도 ...
전통공통체사회라고 할 수 있는 전자본주의 사회구성체로부터 일정한 과도기(중상주의를 상징하는 절대주의 체제와 식민지제국주의)를 거침과 동시에 부르주아적 사회구성체가 무르익으며, 그 고유성의 하나로 이에 대립하는 민족적사회주의(파시즘)가 분출되고, 또 다른 대립체제로서 볼세비키적 사회체들이 확산되고 상호 충돌하는 세계에서 각 사회체제를 이루고 있는, 그리고 그렇게 작동되는 원인을 그 사회의 지배체제세력(부르주아, 파시스트, 볼세비키)의 내면성과 구조(집합적)를 수많은 자료들을 분석하고,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그리고 과학적 논증을 통해 그 뿌리부터 드러낸 내용들이다. 사실 출간된 순서부터 차례로 읽어야 앞의 내용들이 연결이 되어 이해가 가능할 듯 하지만 절판된 책들이 있어 다른 독자들께는 아쉽다(물론 나의 경우도 백의에서 나온 책 세 권을 확보 못했지만).
제4장에서는 맑스의 꼬뮌주의와 엥겔스의 계획주의 및 국가주의와 레닌의 국가(유일당)사회주의, 이들을 서로 분리해 볼 수 있는 내용들에 대한 상세한 추적들도 매우 독보적이고도 흥미롭다. 본문에도 자세히 설명 나오지만 레닌은 그 내면성 관점 하에서 그렇다고 하더라도(이종영 저, 『지배와 그 양식들』 제7장), 엥겔스에 대해서는 그의 그러한 입장이 무얼을 의미하는지 계속된 의구심이 든다. 논외지만 앞서 그의 저서로서 논증된 들뢰즈도 - 하이데거와는 차원이 다른 - 그저 교활과 억지와 기만이 들어간 파시스트 옹호자임을 확증한다. 역시 본문에 나오지만 꼬뮌은 우리에게 중세의 도시에서부터 존재했던 꼬뮌과 1871년 부르주아를 극복하고 세운 새로운 체제인 파리꼬뮌을 생각나게 한다. 파리꼬뮌하면 생각나는 것이 역사상 최초(?)의 주체적 이행을 시도했던 대중들이 부르주아의 복수로 인해 무참히 죽어감과 동시에 부르주아 사회에의 속함의 깊음으로 인한 대중의 철저한 잊혀짐(무지에의 열정)이다. 부르주아의 복수(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내용에서 꼬뮌이 돋보이는 것은 그야말로 30년 이상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인한 부르주아 사회체 내에서 인간적 인간성과 타자성은 어디로 갔는지 상실 그 자체이고 그저 동물적 인간성들로만 꽉 채워진 그래서 압력을 끊임없이 가해지는 듯한 폭발 직전 상태의 압박을 느끼는지라 ...
결론은 주체성이란 우리 내면에 온통 뒤덮여 있는 동물성(언어, 욕망, 정체성, 이데올로기 등)으로 구성된 두꺼운 껍질 사이에 낼 수 있는 조그만 틈새로 깊숙이 내재하는 그 조그만 것을 밖으로 겨우 표현할 수는 있을까말까 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가능적으로 보이는 가능성만으로도 덧없이 살다갈 수 밖에 없는 동물적 인간이 타자성으로부터의 진정한 정체성(이른바 행복한 감정?)을 향유하는 인간적 인간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희망은 있다라는 것! 개인에게도 달렸지만 오히려 그것은 제도에 달렸다는 것과 꼬뮌주의는 거창한 주의나 이즘이 아닌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의 제도라는 것!
다음 독자들을 위해 세부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글씀능력이 언제나 부족해서인 듯 하다. 아무튼 책을 읽는 도중 이 책의 인용문헌들 중에서 이상하리만큼 생각집중이 되는 도서들을 구입하느라 이번 달 도서구입비가 삼십만원에 육박한다. 이행총서를 일게 되어서 저자와 새물결에게 감사드린다. 교정은 나중에. 계속 또 보러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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