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코맥 맥카시라는 작가를 『로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신화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우화를 보는 듯한 그의 작품 속에 내제된 알레고리를 파악하며 읽는 다는 것은 내 일천한 독서로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의 문장 속에 내제되어 있는 힘과 무게감으로 인해 난 제목도 예사롭지 않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숨 쉬는 것 조차 고통스러웠다. 그의 문장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 속 숨겨진 알레고리는 마치 땅을 뚫고 나온 하나의 줄기 밑에 연결된 수 없이 많은 뿌리처럼 읽는 이에 따라 문장 뿐 아니라 단어 하나까지도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의 선을 넘어선 다면성을 갖는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이정표도 없는 사막에 던져진 사람처럼 당혹감과 별빛에 의지하여 어두운 길을 더듬는 듯 한 막막함을 느끼면서도, 길을 찾는 동안 그 사막에 찍힌 고독한 자신의 발자욱을 새기며 본래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핏빛 자오선』을 읽어나가며 '소년'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름이 있다는 점에서 나는 '소년'이 이 작품의 화자이며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판사에게 죽임을 당하는 '소년'을 보면서 이 책의 실제적인 화자가 '판사'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큰 충격과 함께, 판사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나는 간혹 '시간이 흘러가면 그 흘러간 시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도 새벽 2시 19분 ?? 초 라는 현대는 바로 1초 후에는 흘러간 시간이 된다. 인간의 삶은 불확실한 것이며, 부정확한 것 이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인간의 시간은 죽음이라는 가장 확실한 진실을 향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은 마지막에 이르러 만나는 종착역이 아니라 지금 숨쉬고 살고 있는 내 삶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핏빛 자오선』을 통해 얻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실제적인 화자인 '판사'의 정체는 내가 짐작해보건데 '죽음(死神)'이다. '죽음' 그 자체인 판사가 처음부터 소년의 삶과 함께 하며 소년이 죽음과 만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 하며 소년의 죽음 이후에도 그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판사'를 따르는 글랜턴 용병부대는 전쟁을 통해 죽음을 위한 피의 제사를 지내는 '판사(죽음)'의 사도들인 것이다. 글랜턴 용병부대가 '죽음'의 권능에 심취하여 맹신을 하는 중에도, 죽음과 가장 가까이 조우하면서도 쉽게 '피'의 제전에 합류하지 않는 '소년'에게 '판사'는 호기심을 느낀다. 그의 사도들이 한 명씩, 또는 여러 명씩 잔혹한 죽음을 당했음에도, 마지막 순간에 '소년'에게 직접 자신이 죽음을 선사한 까닭은 '소년'에 대한 호기심이 '호감'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자네는 자네 발로 끼어들었어. 하지만 자네는 자기 자신에게 반하는 목격자가 되고 말았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심판해 댔어.」p396 판사가 소년에게 느꼈던 호기심은 불명확한 인간이 스스로의 명확함을 가지려 했던 의지에 대한 것으로, 완전한 존재가 완전함을 위해 죽기 살기로 쫓아오는 자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해본다.
『핏빛 자오선』에서 '판사'가 '죽음(사신)'임을 알게 된 것은 책의 말미에 '소년'을 죽이고 난 후 술집으로 돌아와 판사가 춤을 추는 대목에 이르러서였다. 「~털 하나 없이 새하얗고 거대한 몸은 마치 덩치 큰 아기 같다. 그는 결코 자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빛과 어둠 속에서 춤을 추고 최고의 사랑을 받는다.」p432
그는 잠들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이다. 또한 그는 인간이 전쟁을 지속하는 한 '춤을 추고 최고의 사랑을 받는'존재인 것이다. 죽음은 소년에게 말한다.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데, 그 운명 속에서 춤을 추지 않는 곰과 춤을 추는 곰이 있을 뿐이라고....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p427
죽음이 지켜보는 인간은 우주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날아다니는 한갖 의미없는 먼지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우주 내의 가장 명확한 진실인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춤추는 자들을 '죽음'은 사랑하는 것이다.
「~운명은 끝내 피할 수 없어. ~운명이란 이곳 세계만큼이나 거대하여 반항자까지도 다 품고 있거든. 너무나 많은 이들이 파멸하고 만 이곳 사막은 너무도 광대하여 우리 마음을 마구 끌어당기지만 사실상 텅 비어 있지. 황량한 불모지일 뿐이야. 사실상 거대한 돌덩어리지.」p426
그렇게 '죽음'은 인류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류를 기다려온 전쟁의 과업을 충실히 이행하는 인류의 시간들을 자신의 수첩에 기록해 간다. 그의 기록은 바로 인간들이 살아온 역사의 매 순간, 순간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테네시 출신의 웹스터가 판사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런 기록이며 스케치를 해서 대관절 어디에 쓰느냐고 물었다. 판사는 빙그레 미소 짓더니 그것들을 인간의 기억에서 지우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다.」p189 「무릇 무엇이든, 이 세상에 나의 지식 없이 존재함은 곧 나의 허락없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네.」p259 이는 죽음의 수첩에 기록되지 않는 인간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은 것으로, 인간의 역사는 곧 시간의 소멸(시간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된다.
인간들이 전쟁의 과업을 이행하는 한 명확한 진실인 '죽음' 앞에 인류의 운명은 예측된 종말을 향해 앞서간 사람들의 쌓여 있는 죽어 버린 시간의 사체들과 이 사체의 뼈다귀를 주으며 그 길을 뒤따르는 후손들이 시간 소모일 뿐이다. 「~늑대는 열등한 늑대를 스스로 도태시키네. ~한데 인류는 예전보다 더욱더 탐욕스럽지 않은가? 본디 세상은 싹이 트고 꽃이 피면 시들어 죽게 마련이야. 하지만 인간은 쇠락이라는 것을 모르지. 인간은 한밤중에도 정오의 한낮이라는 깃발을 올리네. 인간의 영혼은 성취의 정점에서 고갈되지. 인간의 정오가 일단 어두워지면 이제 낮은 어둠으로 바뀌네. 인간이 게임을 좋아한다고? 그래, 맘껏 도박하게 해. 여기를 보라고, 야만인 부족이 폐허를 보고 경탄하는 일이 미래에는 또 없을 것 같나? 전혀, 있고말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후손들이 그런 일을 겪겠지.」p197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내전이 일어나고 인류는 끊임 없이 자신의 종족끼리의 전쟁을 획책한다. 코맥 맥카시는 이러한 전쟁이 어떤 소수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기원 이전부터 존재했던 전쟁의 과업을 인간들이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전쟁이 우리를 선택하여 역할을 부여했고, 인류는 이를 수행하는 수동적인 존재일까? 전쟁은 애초에 자연계가 생성 되면서 그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연계에서 한 개체의 무한증식은 다른 개체의 멸종을 불러일으키는 연결고리로 구성되어 있기에, 한 종족의 적정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쟁은 존재했으리라 판단된다. 이러한 전쟁이 인간에게 주어지면서 인간은 본래의 목적보다도 이에 자신의 욕망을 부가하여 참혹한 결과를 불러왔고 이는 다시 후대로 가면서 후대의 욕망이 그 위에 쌓이며 악순환의 고리는 갈수록 심화 되었다. 결국 전체 우주의 운명 속에서 인간들은 '뼈를 찾는 사람(춤추지 않는 곰)'과 '뼈를 찾지 않는 사람(춤추는 곰)'으로 나뉘지만 그 운명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수정하는 것 또한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존재만이 후대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는 코맥 맥카시의 말을 '에필로그'를 통해 짐작해 본다.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코맥 매카시의 '장편'소설이다. '장편'이라고 따로 칭하는 이유는 이전에 읽은 그의 소설 '로드'에 비해 내용도 길고, 문장도 길고, 말도 길고, 사연도 길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들을 (영화 한편 보고, 소설은 딱 두편 읽었을 뿐이지만) 관통하는 정서는 음울함이다. 비관적인 세계관과 비인간성에 대한 두려움이 소설을 움직이는 힘이자 원천이다. 삶에 대한 날것의 희망, 즉 근본적인 생존욕구 외에는 존재하지도, 꿈꾸지도 않는다. 매카시가 드러내고 싶은 세계는 그래서 더없이 원시적이고, 한없이 잿빛이다.
자, 그러나 여기는 인간이라는 이성을 가진 동물이 지배하는 세상이므로, '로드'의 아버지와 아들, '자오선'의 소년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래도 작은 빛,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사막 한가운데로 난 도로의 끝에서 일렁이는 작은 호롱불을 찾아 나선다면, 소년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인디언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으면서도 옅은 본성을 지키기 위해 안감힘을 다한다. 그들이 잿빛 하늘 아래서 그나마 작디 작은 위안거리이다. 딱 거기까지이다. 작가는 그나마 표백시켜버려 희멀건해진 주인공들 외엔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그러한 인간상이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끝까지 절망적일게 뻔한 소설을 끝까지 읽는다는 건 고욕이다. 그리고 전작도 그렇지만, 이 책의 문체는 절대 독자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문장은 수려하지만, 그 과함으로 인해 눈의 피로와 오독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위에 쓴 평가와는 다르게, 솔직히 서부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들께 권하고 싶다면 좀 아이러니 한가???
|
|
인간이 가진 원초적 엄습함은 본성에서 베어 나오는 것일까?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로 과거의 기억이 오롯이 망각의 늪을 지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기록된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되어 객관성을 잃을 때가 있다. 역사는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반복되어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는 커다란 명제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 「핏빛 자오선」은 그 섬뜩함이 오래도록 뇌리 속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게 한다. 저자가 바라 본 세상의 일부는 도덕성을 상실한 무차별한 살육과 약탈의 무자비한 반복으로 인간의 영혼 깊숙이 뿌리내려 어떠한 죄의식이나 윤리적 가치관이 투영되지 못한다. 습관처럼 총구를 겨눠 피 비린내를 동반한 역겨운 악취를 토해 내며 마치 지옥경 같은 세상은 저자가 바라 본 인간의 음습함을 치열하게 소묘하고 있다. 이 책은 19세기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 국경지대 사이를 배경으로 원주민인 인디언과의 진정한 명분을 잃은 약탈의 시대를 배경으로 익명의 소년을 따라 전개된다. 소년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혼란한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아파치 인디언을 소탕하는 용병의 무리 속으로 내몰리게 된다. 소년은 머리가죽 사냥꾼으로 불리 우는 용병의 대장격인 글랜턴과 타락한 신부 토빈과 의뭉스럽고 요상한 판사 홀든과 조우하게 된다. 소년은 추악한 용병들의 속에서 빠르게 인간 본성을 상실하게 되고 거침없이 살인과 약탁을 자행하게 된다. 계속되는 머리가죽 사냥으로 쫓기고 쫓는 일상을 반복하게 되고 무차별한 살육으로 인해 결국 서로를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총구를 겨누게 되며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다. 끝까지 살아남은 소년과 판사는 30년 후 어느 이름 모를 술집에서 조우하게 되며 판사는 그가 행한 과거의 기억을 건조하기 짝이 없는 사막 모래무덤과 같이 덮어 은폐시켜 버리고자 소년을 살해하게 되고 광인처럼 춤의 행위를 통해 합리화 시키며 서서히 미쳐 간다. 이 책은 일반적인 대결구도를 벗어 나 시종일관 악의 편향구조를 이루고 있다. 익숙치않은 구도를 바탕으로 저자는 사물을 의인화 시켜 장소의 이동에 따라 심리세계를 연결시켜 처리하고 있다. 전체적인 배경으로 뒤 덮고 있는 지옥 같은 황량한 사막과 어둠은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심적 변화를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음이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표현으로 저자는 음습함을 무기로 역사 속에 비친 미국인의 선량한 이미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실존한 역사를 바탕으로 잊혀 진 시간을 되살리고 있다. 이렇듯 저자의 색다른 이야기는 처음의 심리적 거부감을 넘어 점차적으로 빠져 들게 만드는 늪과 같은 놀라운 필력을 보여 준다 하겠다.
또한 독특한 캐릭터인 저능아와 등장인물들간의 관계를 의도적 장치로 삽입하여 이성적 본능을 잃어 버린 인간군상의 피폐한 정신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저능아의 지적한계로 인해 오염되고 방치되어 버린 모습이 어둠에 굴복하는 비열한 모습과 자연스레 연결되어 부합한다. 인간은 야만적이고 통제 불능의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 사회적 관습과 윤리적 규범을 스스로 재단하여 통제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목적의식이 분명한 규범의 틀 속에서 타인의 침범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종족안전이라는 명분으로 집단적 목적의식을 합리화시켜 내세우며 더러운 죄의식을 씻어 버리는 역사를 새겨 왔다. 인류가 걸어 온 역사의 무수한 장면 속에 저자 코맥 매카시가 허구의 틀로 창조한 세상이 본질적인 관점에서 전혀 이질異質스럽지 않음을 동조하게 하는 것은 역사 속에 각인된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역사의 일부분이라 하겠다. 이처럼 「핏빛 자오선」은 다양한 상념을 제공하며 정복자에 익숙한 사고의 틀을 재고하는 계기를 불어 넣어 주며 우리네 역사 속에 깃든 아픈 상흔을 기억하게 하는 시간과 사색의 폭넓은 사고를 일깨워 줄 것이다. |
![]()
코맥 매카시, Cormac McCarthy |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지금 이야기하려는 책 ‘핏빛 자오선, Blood Meridian’은 구성에서부터 매우 독특한 책이었다. 매번 새로운 장(章)이 시작할 때마다 저자는 이야기의 소재를 순서대로 나열해 놓았기 때문이다. 순서대로 이야기의 주요 소재를 늘어 놓았으니, 이야기를 예상하려거든 해보라는 작가 당당함의 표현인지 혹은 순전히 독자를 위해 먼저 소재를 드러낸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튼 이 책은 이렇게 매우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책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열네 살의 소년으로부터 시작된다. 테네시에서 태어나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집을 가출하고는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다가, 소년의 발걸음은 서부로 향한다. 그리고는 비정규 군이 되어서는 ‘아파치 인디언’을 죽이러 다니지만, 그건 순전히 명목상의 허울일 뿐이다. 사냥의 대상이 비단 인디언뿐만 아니라, 멕시코 인이건 미국인이건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는 죽인 사람의 머릿 가죽을 헤아려 그만큼 돈을 받는다. 그런 탓에 그들에게는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은 없다. 그저 살아가는 수단으로 사람을 죽일 뿐이며 작가는 그 속에서 인간이 가진 잔혹함과 폭력성을 아무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보통 미국인을 정의롭게 그리며 그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애쓰는 지도 않는다. 이러한 내용을 무척이나 삭막한 시선으로 작가는 담담하지만 매우 풍부한 묘사를 통해 풀어나간다.
하지만 이 책이 그저 읽기에 좋은 것만은 아니다. 미학적(美學的) 문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영어로 된 원문(原文)을 한글로 무리해서 옮긴 탓인지, 책을 읽어가면서 과연 역자(譯者)가 제대로 이해하고 옮긴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종종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의 사용이나 의성·의태어를 활용한 묘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을 읽고 있노라면, 과연 원문이 어떻길래 영어 단어와 정확히 뜻을 맞추기 힘든 단어를 끌어다가 한글로 옮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100대 영문소설이니 혹은 최근 출간된 최고의 미국 소설이니 하는 설명이 매우 인상적이고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趣向)으로는 읽기도 어려운데다가 그 뜻까지 파악하기 힘든 탓에 그다지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지는 않은 책이었다. |
|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가인 '코맥 매카시' 라는 이름 때문에 읽게 된 책이다. <핏빛 자오선>이라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제목인데도 불구하고 읽었는데 역시나 내 취향이 아니었는지 읽으면서 내용이 불편했다. 뒷표지의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한 소년의 이야기 라는 홍보글에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사람마다 개인적인 취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분들은 굉장히 좋았다고도 하던데 나한테는 피가 낭자하고 사람의 머리가죽을 벗기는 일들 때문에 책 읽기가 힘겨울 정도였다. 눈쌀을 찌푸리며 내내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책을 놓을 수 없었던건 이름없는 한 소년의 여정 때문이었다. 약탈과 살인이 난무하는 미국의 서부의 모습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할 정도로 폭력과 살인이 자행되고 있었다. 책의 한장을 시작하기 전에 작은 글씨로 그 장의 사건 전개가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는 걸 유심히 읽었다가 책의 내용을 읽어가면서는 어느 순간에 잊어버리고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었다. 영화도 서부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이 책 또한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를 챙겨보고 싶기는 하다. <로드>라는 책도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다. |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 무엇! 그리고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나름의 경험들이 생겨나면서 그 경계가 정말 모호해지곤 한다.
코맥매카시의 작품을 보면 그러한 것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14세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본성에 대한 성찰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자신을 지켜줄 법도 없고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죽여야한다면 삶의 질이 아닌 생존이 목적이 되는 삶에서 인간의 도덕심은 얼마나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 생각이다.
책의 첫장부터 묘사된 소년의 이름은 30년의 세월이 흐른 마지막장까지 묘사되지 않는다
또한 감정이 배재된 문체는 매우 독특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읽기에 쉽지 않은 책임은 분명해보인다 ^ ^;; |
|
코맥 매카시 저
코맥매카시님작품은이번이처음이다. <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와<로드>등유명한작품들이있지만장바구니에오랜동안담겨있을뿐기회가닿지안았다. 표지랑제목만봐도너무끌렸던<핏빛자오선>..이벤트를통해읽게되어서무엇보다뜻깊었던것같다 표지에있는띠지를보면영화화가결정됐다는데읽기전부터기대가됐다. <노인을위한나라는없다>도책과영화가의견이반반이던데아마<핏빗자오선>도만만치않게의견이나뉠꺼같다. 코맥매카시는어떻게이렇게잔인하고무서운이야기를소설로쓸생각을했을까? "죽음만이세상의유일한진실이다"라는표지에타이틀처럼이책에는죽어나가는사람들이많이등장한다. 아무이유없이사람을죽여도죄가되지않았던1850년대의미국..그당시14살이된어느소년이집을가출하면서부터이야기가시작된다. 소년은정처없이떠돌아다니며서쪽으로가던중군인들의무리에흘러들어가게된다. 그러면서여러가지싸움과약탈,살육을서슴치않는그들사이에서점점소속감을느끼게된다. 중간중간사람을죽이는부분에서의묘사가너무잔인하고사실적이서읽는내내너무섬뜩하고무서웠다. 사람을죽이고나면그죽은시체에서머릿가죽을벗긴다는것도정말충격이었다. 점점갈수록정도가심해져인디언이던,미국인이던,원주민이던,이민자던거침없이살인을저지르게된다. 그들은말그대로"인간사냥꾼"이었다.살기위해사람을죽이는것이아니라,사람을죽이기위해살아간달까? 이책은코맥매카시가1985년에쓴책이라고한다. 정말이렇게미국의1850년대의어두웠던과거이야기를사실적으로쓸생각을하다니. 들리는말중에는실제있었던일이라는말도있던데..정말미국은수많은사람들의피를바탕으로세워진나라인것인가.. 그당시의인간은내면의악에게지배당하여사람을죽이기위해살아가는살인마같다는생각밖에들지않는다. 영화화한다고해서기대를갖고읽기시작한책이었는데생각보다더욱더잔인하고무서운내용이어서몇번이나손에서책을내려놓았었다. 다읽고난후제목처럼모든것이핏빛으로물들어버린듯한느낌이다. |
|
붉은색은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이다. 하지만 같거나 비슷한 색이더라도 단어 선택, 표현 방식에 따라 그 느낌은 크게 달라진다. 《핏빛자오선》이 그러하다. 사막의 일부가 아련하게 물든 붉은 표지는 태양을 담은 모래알의 뜨거움보다는 고요함속의 쓸쓸함을 던져주는 듯하다.
미국 서부의 국경지대. 소설은 14세의 ‘소년’의 가출 이야기로 시작한다. 소년은 이리저리 떠돌다가 화이트 대위에게 면접을 받고 부대에 입대하게 된다. 어린 그에게도 소총과 말이 지급되고 낮에도 밤에도 행군을 하며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인디언 학살이 이루어진다. 코만치의 습격으로 화이트 대위도, 부대원들도 대부분 죽게 되었지만 소년은 살아남아 예전에 만났던 토드빈과 함께 글랜턴의 부대로 들어간다. 글랜턴의 부대는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머리 가죽을 벗겨 가져다주는 대신 돈 또는 황금을 받는다. 글랜턴의 곁에는 거대한 체격과 하얀 피부의 판사가 늘 같이하고 있다.
행군, 전투, 살인, 폭력, 학살.
글랜턴의 부대원들은 이런 것들을 끈임 없이 반복하고 심지어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서로 총을 겨눈다. 결국 글랜턴도 유마인디언들의 습격에 의해 죽게 되고 판사와 소년만 살아남게 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소년. 우연히 술집에서 판사를 만나게 되지만 판사는 남자를 살해하고 춤을 추며 판사 그 자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핏빛자오선》을 읽으며 몇 번이나 눈을 가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그려내는 학살의 장면들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다가왔다.
- 산 자나 죽은 자나 가릴 것 없이 머리채를 움켜쥐고 두개골에 칼날을 박아 피투성이 머리 가죽을 하늘 높이 쳐들고, 벌거벗은 몸을 조각조각 썰어 팔다리와 머리를 떼어 내고, 기묘한 하얀 몸통에서 뽑아낸 창자와 성기를 두 손 가득 그러쥐는가 하면, 몇몇 야만인은 피웅덩이에서 개처럼 굴렀는지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고……79p 중에서 -
노인, 어린이, 여자는 물론 성인 남자들까지 인디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사냥을 당한다. 글랜턴의 부대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가 사람이기에 지켜야할 도덕성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일까.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사냥하는 그 모두를 일컬어 야만인이라고 칭하지만 진짜 야만인은 오히려 그들이 아닐런지. 황금빛 모래는 어느덧 피에 물들어 붉게 변해간다.
코맥 매카시는 글을 통해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이나 후각적으로도 그 현장을 담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부대원들의 행군은 단지 사막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황무지, 초원, 절벽은 물론 강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데 여기에 계절감과 아침과 저녁, 밤, 새벽과 같은 시간감각까지 더해지면서 그 묘사는 한층 더 풍부해지고 역동적이 되는 것이다.
- 그날 밤 그들은 번개가 광기를 휘날리는 지역으로 들어섰다. 기묘한 형태의 부드러운 푸른 불이 마구의 금속 위를 쪼르르 내달리고, 마차 바퀴가 불처럼 번쩍이며 굴러갔다. 창백한 푸른빛은 말의 귀나 사람의 턱수염에도 약하게나마 가물댔다. 자정의 적란운 너머 서쪽으로 뿌리 없는 번개의 장막이 밤새 전율하여 저 멀리 사막이 대낮처럼 퍼레지고, 느닷없이 지평선 위로 산맥의 시커먼 형체가 도드라졌다 70p -
- 별이 소년의 발치에 떨어지고, 불타며 떨어져 나간 유성이 이름도 쉼도 없이 줄을 그었다. 277p -
이 책은 비록 그 시대 상황을 그려낸 장편 소설이라고는 하나 14세 소년이 살기 위해 소총을 더 우선시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딘가 씁쓸한 기분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직도 어딘가에선 정말로 차가운 쇳덩어리 무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생명에 관한 존엄성, 폭력과 죽음 앞에 선 인간 본성에 대해서 한번쯤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할 것 같다. |
|
이 작품을 통하여 코맥 맥카시를 알게되었으며 < 핏빛자오선>을 옮긴이- '김시현'을 통하여 맥카시의 또다른 작품,<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한국어판이 나오면 또 만나볼 생각이다. 핏빛자오선은 이미1985년 발표되었으며 <타임>이 뽑은 100대 영문소설로도 선정된 작품이라고 한다. 2008년 한국어판이 나온것이니 꽤 늦게... 나름 상상해보건데, 이 작품을 선뜻 번역할 옮긴이가 나타나지 않아서였을까?
난이작품을 접하는 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듯 싶다. 처음부터 속도감있게 진전되는 스토리에도 눈을 땔 기미가 없었지만 작품내내 흐르고 있는 죽음의 묵시록과 같은 그림, 인간의 잔혹성, 난무한 폭력에 인간적인 분노를 느끼며 숨막히는 스토리를 질주하였다.
사백쪽이 넘는 장편소설이기에 기대도 있었지만 내가 투자한 시간에 합당한 배움과 감동을 기대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도 처음엔 없지않아 있었다. 그러나 페이지를 더할수록 살인마적인 광기가서린 매마른 작품이라는 생각보다는 작가의 미학적표현에 점점 매료되었고 마지막장을 덮었을때에는 작가에 대한 찬사와 함께 긴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여행자처럼 쉴수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듯 싶다.
시인은 천상의 언어를 전달하는 특별한자.. 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맥카시의 작품에는 함축된 시를 통하여 받을수 있는 진한 여운이 있으며 표현된 언어의 극과 극의 만남- 그럼으로서 빚어지는 절묘한 미학적 매력이 넘쳐나게 흐르고 있었다.
주인공 소년을 통하여 미국과 맥시코간의 치열했던 영토분쟁을 배경으로 소설은 엮어지고 있으며 미국인들이 아파치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누구든 가리지않고 평범한 인디언이나 멕시코인을 잔인하게 도살?하는 과정에서 난무한 폭력속에 실제 역사적사실을 읽을수 있었고, 개인적으로 인디언 치료사나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엮은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물론 그부분은 묘사가 적었지만) 흥미진진하게 접하였다. 끝부분에 소년과 판사의 만남에서 (소년은 이미소년이 아니다. '그'라고 묘사되었고 30살가량의 장년이 됨) 초현실적인 분위기 또한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잔인한 살인, 전쟁의 흔적을 아름다운 언어의 유희로 가득채웠다. |
|
코맥 매카시 ... 이 분 작품을 처음 읽은게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 이후 매카시 스타일 특유의 건조함과, 음울하고도 묵시록적인 시선이 마음에 들었던 나는, 그의 작품을 모두 구해서(사실 국내에 정식 출판된 작품만;;)읽어보았다. 이번작품은 개인적인 감상으로 매카시의 묵시록적인 시선이 절정에 달한듯이 느껴진 작품. 이야기가 진행되는 매순간이 실로 잔혹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이 부분이 또한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부분이기도 한데 .. 기존의 서부장르 소설에서 탈피한 이 작품은,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기존의 틀을 깨어내서 후대 작품들에 미친 영향이 실로 크다고 한다. 이때가 바로 ... 1985년이었다. 내 나이 ... 4살때...) 영화로도 제작이 된다고 하는데 ... 스크린에는 아마도 피바람이 진득하지 않을까 싶다. 1840 년대 맥시코와 미국사이의 영토분쟁 관계를 그린 작품으로서, 사람 내면에 잠재된 잔혹함은 대체 어느정도일까? 하는 의문과 동시에, 더 나아가 삶과 죽음 에 대한 미묘한 관계에 대한 의문(성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작품. (작품은 사람들의 잔인함(특히 미국인)에 대한 묘사가 사실 주를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 맥시코는 밖으로는 국경문제, 안으로는 인디언의 반란과 쿠테타의 문제에 접해있어서, 반란 진압을 위해 미국용병들을 고용하지만 .. 그들은 난폭한 아파치 인디언들 대신, 오히려 맥시코인을 죽여서 그 머리가죽을 벗겨가서 돈을 타낸다. 죽음만이 결국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 와중에 한 소년은 그 혼돈의 가운데에서 성장해 나간다. 선한 존재도 악한 존재도 딱히 정해지지 않은 혼돈속에서 .. 결국 모두는 스스로의 생존과 욕망을 위해 총을 쏘고 무기를 휘두르고 있을뿐 ... 소위 미국 서부작품의 경우에는 미국인을 미화되어 그려진 경우가 많지만, 이 작품은 그러지 않은 것으로도 또 한번 유명했던 작품. 매카시 특유의 간결하지만 매혹적인 문체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일듯 싶다. (사실 처음 이 사람의 작품을 접할때는 정말이지 어려웠다. 아마 나 스스로도 여러번 보면서 어느정도 익숙해진 부분이 아닐가 싶다.) 이번에도 그렇듯이 매카시 작품은 대체 이 작품을 왜 읽고 있을까? 하는 의문과 동시에 ... 손에서 놓기힘든 묘한 매력이 있는거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목적없는 묵시록에 대한 끝없는 사막같은 느낌이면서도 ... 그 속에 남겨진 한줄기 희망과도 같은 메시지는 ... 그의 작품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고 아우르게 하는 묘한 ... 시선을 던지고 있기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