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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하다 <다정한 매일매일> 책을 알게 되었다.그런데 인기가 엄청난 책인지, 빌릴수 있는 도서관 모두 예약까지 걸려 있는 상태다.내가 읽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듯 해서 목차를 살피다 읽어볼 책들은 먼저 골라 읽고 있다. <런던 스케치>이어 두 번째 고른 책은 <기괴한 라디오>
구입만 하고 읽지 않은 줄 알았다.그런데,2008년 아주 재미나게 읽었다는 나의 리뷰 발견^^
<레이먼드 카버>에 소개된 존 치버에 대한 평가는 '교외 지역의 체호프' 라는 별명이 있다는 거였다.('기괴한 성당'을 읽은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으니..) 그때도 호기심은 발동했던 것 같은데,당장 찾아 읽지 못했다. 다시 <기괴한 성당>에 실린 단편들을 읽으면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은 더이상 미루지 말고 냉큼 읽어봐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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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소설 속으로 내가 들어가있게 된다. 아마도 그래서 소설이 허구임에도 나는 허구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내가 겪었던 혹은 듣었던 경험과 생활들이 소설속에 등장 하는 요소가 많을수록 더욱그렇다. 그렇기때문에 소설은 나에게있어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그것이 단편집일 경우엔 더욱그러하다.
<기괴한라디오>란 소설 역시 단편집이란 매력도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소재였기때문이다.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 가다 보면 라디오란 것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재미와 유쾌함이 없더라는...오히려 타인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하게 해 준 책이되었다. 어느 방송에서 유명인이 인터뷰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뉴스는 늘 어둡고 즐겁지 않은 기사들뿐이라는,그래서일까 우리는 늘 나에게 언제가 닥칠지도 모르는 사건 사고에 대해 불안해한다. 실제 일어나 확률은 극히 적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단편집 가운데 기괴한라디오에선 그런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사실 라디오의 사연들을 보면서 나는 위로를 더 많이 받는다고 생각을 했었다.그런데 뉴스나 신문의 소식들은 나를 일정부분 불안하게 했다는 것도 책을 통해 확인 하는 기분이었다. <아파트관리인>은 또 얼마나 많이 공감이 되었던지,아파트관리비를 납부한다는 이유로 경비원 혹은 관리인들은 마치 아파트주민의 중재자 역활을 무조건 해야 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던 것,그래서 늘 그들이 조금 불친절 하다고 생각 될때마다 불쾌했던 기억,반성하게 만든다.타인에 대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기...
이렇게 여기 실린 단편집들은 저마다 다른 에피소드들이었지만 결국엔 타인에 대한 생각,혹 입장 바꾸어 생각 해 보기를 나에게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웃과 혹은 가족과 혹은 사회에 대해서 그래서 나 보다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하는 그 마음까지...
처음엔 단편 하나마다 내 모습을 투영하면서 읽고 있었다.그러다 어느 사이 내 입 속에서 반복적으로 하게 된 말은 '타인에 대해 입장을 바꾸어 생각 해 보기'였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읽기엔 아주 필요한 책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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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통 희망을 가지고 산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것이라는 희망. 내년 이맘때 쯤에는 해외여행을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돈을 더 많이 벌 것이라는 희망.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지 않을것이라는 희망.... 온갖 희망들. 외로운 사람일 수록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것 같다. 그 희망마저 없으면 더 외로워 질까봐.
작년 12월, 어떤 이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인데 어렵지만 재밌다며 존 치버의 '기괴한 라디오'라는 책을 건네주었다. 책 제목이 왠지 유머러스 하게 느껴졌고 단편집이라 길이도 짧은데 왜 어렵다고 하는지 궁금해졌다. 1900년대 초 미국의 도시들을 배경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어떤것은 유머러스 하고 어떤것은 기괴하다. 노처녀도 있고 싸이코도 있고 바람둥이도 있고 농부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등장인물들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 희망을 현실로 성취하지 못한다. 그들은 인생의 하향곡선의 시작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인물이 한명 있다. 좋은 아파트에서 그보다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가는 중년부인의 이야기. '지금 빚만 갚으면 다시 이곳으로 이사오려구요'라고 말을 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이 입는 옷은 점점 헤져가며 아무것도 새로 살 수가 없었다. 결국 가장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지만 다시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놓지 못한다. 이 책에서 나는 인간의 허무한 희망을 보았다.
이 사람들의 희망이 배신당하는 이유는 어쩌면 시대적 배경이 1900년대 초 미국 대공황 시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존 치버가 마르크스주의자여서 계급의 낙하를 주로 묘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네이버에 검색해 봤지만 존 치버에 대한 정보가 많지는 않았다). 책의 외부적인 배경은 잘 모르겠으나 나는 사람들의 희망이 미련스럽고 허무해보였다. 희망이 항상 옳은것인가. 억지스럽고 미련하게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것일까. 대 공황시기에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경우는 몇이나 될까.
읽다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의 행복과 불행은 나의 탓인가 너의 탓인가 우리의 탓인가. 따져봐야 한다. 그 이유는, 편파적으로 나만 혹은 상대방만을 미워하거나 무시하거나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
희망이 항상 좋은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희망은 때론 사람을 기만한다. 짜여진 구조속에서 인간은 종종 타인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당한 희망을 쫓아 살지만 결국 다 신기루일 뿐일때도 많지 않은가. 어쩌면 때로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라는 생각은 강박적인 종교가 아닐까.
때로는 치열하게 현실을 인식한채로는 희망을 갖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반 정도는 현실을 희망으로 흐리멍텅하게 미화시킨 적도 있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세상엔 꽤 많지 않을까. 희망에 대한 현실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작정 갖는 희망. 그 덧없는 가벼움. 곧 직장을 갖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취업은 너무 힘들었고, 1년정도 지나면 저 사람은 결국 날 좋아할거라고 기대했지만 우리는 헤어졌다. 첫번째로는 나의 문제로, 두번째로는 너의 문제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하여.
그래서인지, 나는 '희망'보다는 '행복'이이 더 좋다. 나는 이 길 터널 끝에 빛이 있을거라는 희망의 컨셉이 싫은걸지도 모른다. 현재의 나는 미래를 위해 바쳐야하는 제물이 아니다. 행복은 오늘의 가치를 깨달았을때 느껴지는, 나의 오늘이 유의미다하다고 믿을때 느껴지는 힘이다. 미래에 이보다 더 못한곳에 있을지라도 현재가 살아갈 만하다고 믿는것. 그래서 난 희망보다 행복이 더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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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단편집을 읽다가 연보를 보고 존 치버를 알게 되었다. 카버와 술친구였다고. 카버의 작품들을 좋아하게 되서 관심은 저절로 존 치버로 옮겨 가게 됐다. 비슷한 작품을 찾는 도중에 그가 쓴 소설 중 번역된 것은 그 당시 ‘불릿파크’ 뿐이었다.(지금은 단편선집 4권에 왑샷 가문 연대기, 몰락기 2권까지 나왔다) 그러나 문학동네에서 존 치버 단편선집을 4권이나 내주는 덕분에 그의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됐다. [사랑의 기하학], [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 [기괴한 라디오],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4권의 순서로 읽고 있다. (현재 3권은 읽었다.) 책 말미에 역자 또는 작가분이 그의 작품세계를 알려주는 개관적인 글이라도 실렸음 좋으련만 그것은 독자에게 맡겨졌다. 단편 소설은 순서 상관없이 어디서부터든 읽을 수 있고 내용 흐름을 놓칠 가능성이 적어서 선호하는 편이다. 존 치버는 카버와는 다르다. 그는 미니멀하지 않으며 오히려 구사하는 언어가 예술적이라고 해야 한다. 그의 묘사부분이나 상황에 대한 적확한 그의 말솜씨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세계관에 있어서도 카버만큼 염세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이웃들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얘기해주고 있으며 어떠한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다. 위 두 단편집을 먼저 읽고 난 후 그의 스타일에 적응한 것인지 이 단편집은 이해하기에도 읽기에도 큰 부담이 없다. 오히려 처음을 이 책으로 접했으면 좋았을 것을.(이 책 먼저 읽고 다른 순서로 읽어가길 권한다.) 15편의 작품이 실렸는데 제목인 [기괴한 라디오]의 내용처럼 이 책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기괴한 라디오이다. 즉, 우연찮게 라디오에서 이웃들의 사생활을 들을 수 있게 되면서 겉으로는 사회적 지위에 걸맞게 사는 사람들이 같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쯤 자신 역시도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할까. 이 책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여러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이거봐. 너희들 알고 있는 거야 ’ 라고 묻는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제목은 잘 어울린다. 기억에 남는 단편 몇 개를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정숙한 클라리사]에서는 정숙한 클라리사가 어떻게 정숙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지 그 미묘한 심리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남자들이여!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이혼의 계절]은 이웃에 사는 의사 트렌처씨는 나의 아내를 사랑한다. 나의 아내 에델은 부드러운 성격으로 나와 자식을 위해 그녀의 삶을 희생하는 여자이다. 그런 그녀가 트렌처의 사랑고백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집에 위기가 오게 되는데..다시 일상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애절한 짝사랑의 노래]는 약간은 무서운 느낌이다. 잭의 자존심 때문에 조앤의 방문을 죽음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느낀 건지 아니면 조앤이 만났던 남자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망자를 만드는 기운 때문에 그녀를 내쫓았을까? [바벨탑의 클랜시] 아내와 아들 존 밖에 모르는 착한 제임스 클랜시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조종사이다. 그는 그 아파트를 모든 욕망이 교차된 바벨탑이라 부른다. 그곳은 동성연애자 로언트리가 사는 소돔이기도 했으며 그는 로언트리를 경멸한다. 그 대가로 그는 해고 경고를 받게 되고 로언트리가 실연 때문에 자살 기도를 할 때 클랜시는 그를 도와준다. 오히려 로언트리는 클랜시를 해고하려들고..클랜시가 몸살로 병원에 있자 로언트리는 클랜시에게 200달러 성금을 모아다 건네준다. 그에게 하직인사를 한 것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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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 현대문학을 주도하여 퓰리처상 수상도 거머줬던 존치버의 단편15편이 실린 시대소설이다. 소설 글에는 익숙치 못한 내게 존치버는 단편으로 당장 그 현실을 내게서 끄집어 내고야 말았다. 열일곱 살때부터 단편글로서 재주를 선보이기 시작한 존치버. 기괴한 라디오의 원작은 1953년에 쓰여졌으며 존치버의 문학적 가치는 주로 1950,60년대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존치버의 단편글들이 대체로 어떤 경향을 어떤 색채를 띠는 지는 잘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기괴한 라디오"책에서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그에 대한 인상이 매우 색다르고 여느 단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그 어떤 암시와 머리속을 스치는 느낌은 인간적인 감정의 공유라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책 줄거리의 시대상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단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나이 열일곱 살때부터 단편 등재를 했으므로 그의 나이 20대에서 30대에 주요 단편들이 쓰여졌다. 사람 사는데 어찌 완연히 다른 시대배경을 할 수 있겠는가? 존치버는 인간이 처해진 상황 속의 삶에서 느끼는 자기 만의 독특한 느낌을 당시 부와 명예와 지위 보다는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적인 사랑과 고뇌 그리고 향수와 애착들을 예리한 관찰과 표현과 암시로서 표현하고 있음이다.
15개의 단편 가운데 주요 공통 소재가 있다면 뉴욕시의 지리적 환경 그리고 당시 아파트나 호텔등의 주거지 여건 그리고 엘리베이터 조종자와 가정부 등의 관리인들이 각 단편들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는 존치버의 생애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조심스런 추측도 해본다.
단편 '기괴한 라디오'에서의 라디오는 한 사람의 심정을 어지럽히어 자신의 즐거움 보다는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그것이 습관이되어 궁금해 하는 어쩌면 인간의 두가지 얼굴을 그리고 있어서 현재 우리 삶에도 그러한 구석이 없지않아 요즘엔 '기괴한 라디오'가 아니라 '희안한 TV'라고 해야하나 보다. 매일 TV에 나오는 비극적이고 걱정스런 뉴스와 시사적 일들은 '기괴한 라디오'의 웨스콧부부의 감정 상태를 충분히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일들이겠다. 슈베르트의 사중주를 좋아하지만 정작 라디오에서는 주변의 불행과 두려운 일들만이 방송되어 귀에 들어오고 결국 그것들이 자신의 행복을 앗아 가버리는 어떤 주종의 매체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지고 즐거운 시간을 준비할 수 있다는 지극히 해피엔딩의 기대치도 들어 있다고 해야 하나?
'부서진 꿈들의 도시'에서는 당시 시대상 경제적 여건이 극악스런 상황에서 취업에 목숨건 일들이 벌어지고 다른이들의 행복이 곧 나의 불행으로 이어지는 서로 관계형성에 있어 부정적 상호작용의 요소로 등장한다. 최근 미국금융발 경제난국으로 우리나라도 실업자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는 바, 1950-60년대 문제들이 다시 재현되고 있다면 논픽션인가 아니면 픽션인가? 사건 액면 그대로만 볼건 아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서로 돕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나누는 긍정적 상황 보다는 흑백논리로서 당장 먹고 살아가야 하는 시급한 인간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터치하고 있는 점에서 우리의 현 상황에 있어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기도 하다.
단편 '가난한 자들에게는 슬픈날, 크리스마스'는 존치버의 단편 성향이 매우 극열하게 나타나는 결정판이 아닌가 한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조정자인 찰리는 가구 딸린 셋방에 살고 있고 가족도 하나 없는 그는 매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손님들을 안전하게 이동하게 하는 조종자이다. 크리스마스 이지만 엘리베이터 조종자에게는 기쁜날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함께 지낼 사람도 그립고 사랑도 필요하지만 당장 의,식,주를 해결하자니 아파트 손님에 비해 비극적 요소가 작용했을 터. 찰리는 크리스마스 하루 종일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며 손님들과 인사를 주고 받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신의 딱한 사정을 손님들에게 해소하게 되나 손님들은 그를 동정하여 갖가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찰리에게 하게 되고 결국 선물들을 모아모아 두던 찰리는 근무중에 선물로 받았던 술을 한잔 걸친 상태에서 엘리베이터 손님에게 실수를 하게되고 이로인해 찰리는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상황적 요소로 보면 사람사는 가운데 가진자들은 없는 이들의 진정한 희망. 즉 사람사는 맛나는 그런 세상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엘리베이터 고객들은 찰리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모두 작은 것부터 소중한 것까지 선물을 찰리에게 했지만 찰리는 이로서 만족하기 보다는 무언가 텅 빈 자신의 마음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을것 같다.
존치버 소설을 처음 대하는 나로서는 사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편이지만 내포하고 있는 여러 상황과 암시는 약간 어색하고 난해하다는 느낌도 든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 전개나 등장 인물들의 암시성은 시대적 배경을 타고 각기 다른 색깔을 띠고 있어 그 속에서 일어나는 반전과 기대와 좌절은 쉽고도 어려운 이해가 되지 않았나 싶다. 존치버의 '팔코너'1977작품에서 그의 또다른 색깔을 느껴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