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클래식음악 아마추어다. 학창시절 교과서에만 묻혀 지내는게 지루해서 책장 구석에 박혀있는 거대한 백과사전속 그림보기를 시작으로 맘에 드는 항목들 읽기를 재미있어 했는데 아마도 그 주변에서 우연히 발견한 시대별 클래식음악 셋트와 설명책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클래식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 집안에서 누군가 이 테잎들을 구입했거나 얻어서 놔둔 것으로 차후 친정어머니로 추정되는 심적증거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어머니 젊은 날 문화적 사유가 특별했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쨋든 외할아버지와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적혀진데로 교향곡, 실내악, 이태리 가곡, 오페라 아리아, 피아노 소나타, 독일 가곡등 닥치는대로 들었다. 그 중 가장 귀에 편안하게 들리던 것은 이태리 가곡이었다. 입안에서 굴러가는 듯한 언어와 섬세한 감정 표현은 물론 멜로디가 웬지 가깝게 다가와서 자주 들었던 것이 이제는 문화적 자산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 내 운명의 파트너를 만난 것도 집안 곳곳을 뒤져 아무도 듣지 않고 내버려두던 그 음악들을 듣게 된 까닭이 아닐까?
한국인의 감성에 가장 비슷하게 닮아있는 음악이 이태리음악이다. 감성이 비슷하다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사계절의 날씨,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인 위치, 그로 인해 꽤 닮아보이는 성질과 성격등이 친근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실제 대충대충, 설렁설렁, 죽자고 놀자등등 한탕하는 성격이 우리와 비슷하다. 너무 놀아버린 나머지 나라자체가 흔들리는 것이 힘겹게 일해도 경제생활이 힘든 우리랑 다른 점이다. 이탈리아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음악가는 분명 주세페 베르디이다. 세계인이 다 아는 인물이고 그의 음악은 365일 어디에선가 연주되고 무대에 올려진다. 많은 음악가들이 살아생전 밥벌이로 일관하며 지냈지만 베르디만큼은 귀족적인 생활과 장수의 기쁨을 맛보았다. 끊임없는 자기연찬을 멈추지 않았고 정력적으로 음악작업에 몰두한 결과로 세상에 나오는 음악마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오페라 <리골레토>중 "La donna e mobile(여자의 마음)"가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자마자 일파만파로 퍼져 전염병처럼 알려졌다고 한다. 참 친근하기도 하다. 그의 음악은....
베르디 최대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돈 카를로>는 음악의 깊이란 바로 이런 것이란 생각을 갖게하는 작품이다. 소장한 앨범은 게오르그 솔티경 지휘 카를로 베르곤지, 레나타 테발디 연주의 이탈리아 버젼 연주이다. 잠시 알아둬야 할 사항은 베르디 <돈 카를로>는 두가지 버젼으로 연주된다. <돈 카를로>라고 이름하면 이탈리아 버젼으로 연주되고 <돈 카를로스>라고 이름하면 프랑스 버젼으로 연주된다. 원래 베르디는 프랑스 버젼으로 총 5막에 해당되는 그랜드 오페라를 작곡했다. 리브레토는 당연히 불어였고 2막의 발레를 추가하여 장대한 형식의 프레데릭 폰 실러의 원대본에 충실하게 내용을 담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격조 높은 그랜드 오페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앨범을 다섯번 듣고 실제 공연되는 오페라 <돈 카를로스>를 보았다. 이름으로 보아하니 프랑스 버젼으로 무대에 올려지나보다. 불어의 묘미를 음미해볼까하고 공연장에 앉아서 서곡의 웅대한 발돋움을 기대했는데 이런....서곡이 아예 다르게 연주된다. 오리지널인 프랑스 버젼과 이탈리아 버젼의 악보가 다르다고 한다. 그러니 연주되는 음악이 다르게 들리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중간중간 모티브가 되는 멜로디는 비슷하거나 같았다. 다만 가사만 불어일 뿐이었다. 베르디는 왜 이렇게 작곡했을까? 의문이 깊어진다.
프랑스 버젼 <돈 카를로스>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
<돈 카를로스>의 내용은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역사적인 배경은 종교재판과 신구교의 대립을 생각하면 된다. 굳이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문학과 역사속에 등장하는 왕과 왕비의 친하지 않은 사이, 왕비의 진짜 사랑,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늙은 왕의 막장 불륜,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의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여인 밀라디같은 캐릭터의 등장. 왕과 종교 재판장사이의 대립과 타협, 결국 절대 왕권유지와 현세의 삶은 허구이기에 신의 이름으로 왕비와 그녀의 진짜 사랑 돈 카를로스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안에 가장 주목을 받을만한 사건은 스페인의 왕자 돈 카를로스와 그의 친구 로드리고의 깊은 우정을 과시하는 중창인데 사나이들의 인생을 걸 만한 우정이 깊이 새겨진 우렁차고도 보석같은 곡이다. 개인적으론 듣기에 가장 좋았다. 공연중 이벤트성 퍼포먼스가 등장하는데 관객속에서 연주하고 연기하는 장면으로 이단자들을 끌어내며 폭력과 굴욕을 주고 결국 화형에 처하는 장면은 장시간 객석에 앉아있어야 하는 지루함을 깨고 머릿속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주는 재미있는 광경으로 박수를 받았다. 주인공 돈 카를로스 연주를 하는 테너의 고음불가및 뒤집어지는 목소리때문에 오페라 후반부 다른 테너로 교체되는 일이 발생했는데 전 테너가 시작부터 아팠다고 하면서 프랑스 테너의 새로운 연주를 기대하라고 알려준다. 바뀐 테너의 우렁차게 기막힌 불어 콧소리는 기대이상이었다. 무엇보다도 한 방, 테너라면 바로 그것, 시원하게 뽑아내는 기나긴 고음의 매력...큰 박수를 받았다. 2011년 내가 본 마지막 오페라이다. 이 오페라 음반을 올려놓고 리뷰를 정리하면서 올해도 다양한 공연을 봤구나 되새겨본다. 새해에도 내게 찾아 올 새로운 오페라를 기대해보면서 음악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감정 조절에 상당한 일조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깊이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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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멋진 돈 카를로인 듯 싶다.
베르곤지의 카를로. 테발디의 엘리자베타. 거기에다 화끈한 솔티의 지휘.
힘이 넘치면서 낭만성이 풍부한 돈 카를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