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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프랭클린의 전기소설<느림의 발견1>편을 감동 깊게 읽었다. 쉽지 않은 번역서였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느림의 의미는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2권 역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느림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존프랭클린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탓인지 존의 일생을 매끄럽게 충분히 전해 주지는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1편을 읽고 나서 많은 나날이 지난 후 2편을 읽었다.
존이 변한만큼 그의 고향 스필스비도 많이 변했다.존은 이제 서른이 넘었다. 탐험대 전체의 단독대장이었던 존은 탐험에 대한 기대와 함께 두려움도 컸지만,북극항로를 발견하기 위해 쌍돛대 범선 '도로테아'호와 '트렌트'호를 이끌고 얼음를 뚫고 항해를 한다.배에 물이 새기도 하고,기온도 너무 떨어져 얼음을 깨면서 지나가기도 하며,해마떼에 배가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존은 장교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솔선수범하여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대원들은 병이 들기도 하고 그들은 굶주림에 지쳐 장화의 가죽으로 연명하기도 한다.굶주림이 극에 달한 동료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범이 되기도 하고,존은 굶주린 동료에게 사냥감이 될 뻔한 위기를 넘기기도 한다. 북서해협을 찾지도 못했고,11명의 대원들을 잃었지만 존은 책을 쓰기위해 만났던 여류시인 엘리너와 결혼도 하고 탐험기를 출간한 후 유명인사가 된다.사람들은 승리와 패배에 대한 그의 솔직한 글에 감동한 것이다.
두번째 탐험은 북서항로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성공적이었다.식민지 총독으로 발령받은 존은 식민지 관리들의 온갖 부정부패를 목격하고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한다.비리로 엮어진 세상이 존에게 냉정하게 대할 때도,세상이 그에게 부정한 손길을 내밀 때에도 존은 그의 소신대로 행동한다.그런 존이지만 63세라는 세월만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세번째 탐험에서 북서항로를 발견한 대영제국해군소장 존 프랭클린은 죽어가면서도 많은 일을 해낸 위대한 인물로 기억된다.그가 위대한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너무 느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너무 느리기 때문에 빠른 이들보다 오히려 더 높이,더 멀리,더 깊게 볼 수 있었던 존 프랭클린을 통해서 나는 진정 느림의 미학을 깨우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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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존 플랭클린"이라는 이름을 검색하여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적다. 영국의 위대한 탐험가이지만 가장 많이 북극 탐험을 했으면서도 북서항로는 발견하지 못한 "실패한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결국 최초의 북서항로 발견...이라는 타이틀은 52년 후 로알 아문센에게 돌아간다.
세계 역사에 남겨지는 이름(일반인들이 기억하는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은 무언가를 처음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것이다. 분명 그 사람들이 이룩한 결과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실패가 있을텐데,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여기, 장애로 보일만큼 모든 일에 서투르고 느린 아이가 있다. 그를 가르친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학생 F.가 느린 이유는 눈에 띈 것을 아주 오래 관찰하기 때문이다. 한번 포착하면 철저하게 탐구하기 위해 상 자체를 정지시킨다. 뒤따라오는 상들은 지나친다. 학생 F.는 완벽성을 위해 세부(細部)를 희생시킨다. 세부를 보자면 머리 전체를 사용해야 하며 다음 세부가 다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 (2권 69p)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굼뜨고 서투른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눈 앞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제대로 쫒아갈 수가 없고 온전히 이해한 후 행동하기 때문에 느리며, 서두르다보면 제대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서투른 것이다.
하지만 존 플랭클린은 자신이 "느리다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면 자신의 이런 단점(남들이 생각할 때)을 장점(좀 더 효율적으로)으로 바꿀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하며 바꾸어 나간다.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배" 안에서도 그는 그만의 노력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 진지함, 성실성으로 여러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빠르게 행동해야 하는 순간에 대해서는 미리 준비하고 대비한다. 이런 과정들이 얼마나 감동적으로 다가오는지....
그는 명성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라면 오랜 시간 남들에게 멍청하게 보이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다."...(1권 238p) 느리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그는 기억하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그런 결과로 탄생한 그만의 <프랭클린 시스템>. 빠른 판단을 요구하는 윗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만의 느림에 맞는 "신뢰의 대가로 충성을 다 한다."는 시스템을 만들고 배에서, 그리고 총독을 맞게 된 반 디멘즈 랜드(오스트레일리아 남쪽)에서 실행에 옮기게 된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를 믿고 따르는 정직한 인간으로서의 실무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총독 임무는 실패하게 된다.
그의 마지막 위대한 항로에서 그는 끝내 북서항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들과 지도, 항해술 등은 분명 그 후의 탐험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위대한 실패가 있었기에 위대한 발견도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을 읽는동안 난 전기소설의 함정에 빠져있었다. 이 모든 내용들이 사실일 것이라는 함정. 하지만, 분명 이 책은 "소설"이다. 작가의 말을 읽고나서야 상당 부분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 속 플랭클린의 삶 속에는 바로 작가의 삶(영화와 학교에 대한)과 생각(느림에 대한)이 많이 녹아있다는 사실.
작가 스텐 나돌리는 아주 오랫동안 존 프랭클린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다. 따라서 이 책은 작가 본인의 노력의 산실이다. 제목 <<느림의 발견>>은 아주 천천히 존 프랭클린의 인생을 더듬어왔던 작가 스스로의 발견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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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책이다..느림의 발견이란 제목은 처음엔 이상하게 다가오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이뻐게 잘 지어진 것 같다.
자식을 키우는 엄마 입장이.. 주인공 존을 보면서 많이 주인공 존을 보면서 많이 안타깝게 생각되어진다.
누군가 자기를 믿고 응원해 주는 이만 있다면..
다른 사람보다 익히는 속도가 늦다고, 운동하는 속도가 늦다고, 반사신경이 늦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모자라진 않다.. 다만 사고하는 방식이 다른 이들은 금방 금방 반응하는 사고로 만들어졌지만 존은 사물의 움직임을 다 파악할 수 있는 사고를 가졌을 뿐이다. 자연의 움직임과 사물의 움직임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재주 말이다. 존은 남들보다 느리다고 그냥 포기하지 않는다. 오늘 훈련. 훈련 하다 보면 내일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훈련하고 연습하는 과정이 얼마나 애틋한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잘 하기 위해서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말들을 연습하고 상황을 머리속으로 골백번 더 만들어가며 연습~~ 또 연습.... 주위사람들에게 욕 들어가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열정...으로 인해 자기 몫을 다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어른들은 존을 배워야 할 것이다. tv 뉴스시간에 생활에 찌들려 쉽게 포기해서 가족을 죽이고, 본인을 죽이는 일까지 하는 어른들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다. 당장 삶이 힘들다고, 돈이 없다고, 욕좀 얻어 먹었다고 금방 성질 내고 포기해버리면 그 삶은 거기에서 멈춰 버리게 된다. 그리고 빠르기만 하는 세상, 빨라야만 하는 세상에 약간의 여유를 더해서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웰빙의 바람이 그것이 아니겠냐.. 삶의 여유를 자연의 움직임에서 찾고, 자연과 함께 먹거리를 만들어 가면서 병들어 가는 우리네 몸과 정신을 추스리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요즘같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이 책 "느림의 발견"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다. 조금만 느리게 보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을테니까. 마냥 빨라야만 하고, 즉각 반응하고, 사람을 측정하는 판단보다는 좀 더 보면서 천천히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의 행동으로 판단해 버리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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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간혹 책을 읽은 후에 마음과 몸이 심한 몸살을 앓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작품이 그랬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고 단지 내가 넘겨 추측하기론 작품이 주는 심리적 무게감에 짓눌리며 읽었던지, 아니면 내가 작품과 현실을 구분짓지 못하고 작품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읽어서이지 않을까? 하는 정도이다. 이 책을 설명하는 문구에서 "상처를 주는 소설"이라고 했는데 이 작품을 읽은 지금의 내 상태가 그 문구처럼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아님, '존 프랭클린'의 빠진 이나, 이마의 상처를 떠올리며 "존" 자체를 상처로 받아들였나?
존 프랭클린 (John Franklin, 1786~1847) 영국의 군인이고, 탐험가이며, 호주 식민지 섬의 총독이기도 했던, 그러다 다시 북극으로 가서 생을 마친 실존 인물.. 아마 이 정도의 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역사 책에서 슬쩍 이름 정도는 봤을 것도 같다. 아님 정말 이 사람을 위인전에서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마 난 그에게서 탐험가로서, 매우 온화하면서도 인격적인 정치인으로서의 면모에 감동하여 주변 지인들에게 그에 관해 노래하듯 목소리를 높여 업적을 나열했을 거다. 하지만 소설속 주인공으로 만난 존 프랭클린은 왠지 세상에 동화되지 못하고 떠돈 배와 같은 느낌이었다. 작품으로 만나 따라가본 그의 삶이 그랬다.
어떤 이유로든 남보다 못하다는 건 놀림이나 굴욕을 예상해야하는 조건이 되는 것 같다. 고목이나 그림을 떠올려야 할 정도로 움직임이 느렸던 존은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누구에게든 걱정거리고, 놀림감이었다. 존처럼 느린 엄마와 바다에 가고싶다는 존을 꼭 바다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한 매슈, 그리고 빈민구역에 사는 어린 세러드를 제외하고는 그를 이해하지도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말이나 행동이 느린 반면 존은 계속 생각하는 아이였다. 어떤 상황이나 말을 자신의 방법으로 치밀하게 관찰하고 사유하여 자신만의 공식으로 이해햐며, 반응하고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게 존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존은 자신의 상황에서 벗어나기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가고싶었고,그래서 학교에 가서공부를 하고, 해군 사관학교 생도가 된다. 하지만 바다로 나가기 위해 선택했던 그 길이 그를 전쟁터로 인도하고,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그는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가 아무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시간과 경험은 존을 더 깊은 사유와 준비로 이끌고 이는 공동 생활에서, 위기의 순간에 점점 빛을 발하게 된다. 존은 여러 해동안의 바다 생활을 거쳐 북극으로 간다.
북극 탐험 과정은 나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탐험 과정을 서술한 부분은 모르는 지명과 장비 이름이 너무 많아 보고서를 읽는 느낌도 들었으나 사실과 추측, 상상과, 뛰어넘는 시 공간 개념의 복잡한 구성으로 말미암아 마치 내가 탐험 대원이 되어 그들이 겪는 혼란과 고통을 함께 겪는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여러 인물들이 보이는 반응과 행동들 하나하나가 실제처럼 다가왔고,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이이해가 되기는 했다.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본성을 보는 것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으나 존을 보면서는 너무나 인간적이지만 인간 이상의 그 무엇이 그에게 있는 것 같았다.
첫 번째 북극탐험은 실패했지만 그가 쓴 책으로 인해 유명해지고, 이를 계기로 식민지 섬 태즈메이니아의 총독까지 된다. 하지만 몇몇 사람의 모략으로 결국 본국으로 귀환하고, 존은 그의 마지막 탐험이 될 북극으로 향하여 여러 대원들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완전한 성공드라마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의 생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깊고 시린 긴 영화를 한 편 본 것같은 느낌이 든다. 작가의 상세한 서술 방식은 내 머릿 속에 영상들을 만들어내어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작품을 보게 했고, 그래서인지 나만의 시각으로 인물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건 이 작품을 읽으면서 겪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느림'이라는 한마디 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존의 삶을 따라가며, 그의 말을 들으며 어느덧 그의 생각을 쫒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빠름'이 능력이고 효율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에 살면서 문득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발견한 그 깨달음이 너무 소중하고, 나도 존처럼 나만의 속도를 존중하며 사유하며 행동하며 살고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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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종류의 전기문을 읽는 느낌이었다.
아쉬운 것은 탐험가에 대한 전기문이므로 그가 간 곳의 상세한 지도가 추가되었다면 더 현장감있고 배우는 것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별 생각해보지 않았던 곳.. 캐나다의 북부지방 호수, 강 그리고 북극해의 섬들의 지리를 공부할 좋은 기회였는데..
1900년 초에도 남북극의 탐험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인데, 그보다 거의 100년 빨리 북극탐험을 시도했으니.. 좀 무리였을 것같다.. 지식도 부족하고, 안전장비도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실패했지만...위대한 도전의 첫발을 내딪는 사람에 대한 좋은 글이었다.
아래는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 나온 존 프랭클린애 대한 글이다.
프랭클린 (잉글랜드 탐험가) [Franklin, Sir John]
출처: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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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 4. 16 잉글랜드 링컨셔 스필즈비~1847. 6. 11 영국령 북극제도(지금의 캐나다 노스웨스트 준주) 킹윌리엄 섬 근처.
영국의 해군소장·탐험가.
1845년에 감행된 그의 불운한 탐험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캐나다 북극 해로인 북서항로의 존재를 증명한 것으로 평가된다. 14세 때 영국 해군에 들어가 매슈 플린더스의 오스트레일리아 탐험(1801~03)에 따라 나섰고, 트라팔가르 해전(1805)과 뉴올리언스 전투(1814)에 참전했다. 1818년 북극점에 도달하려 했던 데이비드 뷰컨 대령의 북극 탐험 때 '트렌트호'를 지휘했다. 1819~22년에는 허드슨 만 서쪽 해안에서 북극해까지 육로로 탐험하고, 북서부 캐나다 코퍼마인 강 동쪽 유역 일부를 조사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1819, 1820, 1821, 1822년의 북극해 연안 탐험기 Narrative of a Journey to the Shores of the Polar Sea, in the Years 1819, 1820, 1821, and 1822〉(1823)를 출판했다.
1825~27년에 2번째로 행한 같은 지역 육로 탐험에서는 북서부 캐나다 매켄지 강 하구에서 북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서쪽을 향해 지금의 알래스카에 있는 포인트비치까지 간 탐험대를 이끌었다. 또다른 탐험대는 매켄지 강 하구에서 동쪽으로 가서 코퍼마인 강에 이르렀다. 북아메리카 해안 북서부 1,932㎞에 걸친 지역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 이러한 시도는 그의 〈1825, 1826, 1827년의 2번째 북극해 연안 탐험기 Narrative of a Second Expedition to the Shores of the Polar Sea, in the Years 1825, 1826, and 1827〉(1828)에 설명되어 있다. 그는 1829년 기사작위를 받았고, 1836~43년에는 지금의 태즈메이니아인 밴디먼스랜드에서 총독으로 재임했다.
1845년 5월 18(또는 19)일에 '에레보스호'와 '테러호' 등 2척의 배를 이끌고 138명의 장교와 선원을 동반해 북서항로를 찾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이들의 배는 7월 25(또는 26)일 랭커스터 해협으로 진입했는데, 배핀 섬 북쪽에 있던 포경선에 의해 목격된 것이 이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1847년 아무런 연락이 없자 수색대가 파견되었다. 그후로도 12년 동안 이들 탐험가를 찾기 위한 여러 차례의 다양한 탐사가 있었으나 1859년까지 이들의 운명은 알 길이 없었다. 1857년 프랭클린의 2번째 아내인 제인 프랭클린 부인에 의해 구성되어 프랜시스 레오폴드 매클린턱 대령이 지휘하는 최후의 수색 겸 구조대가 랭커스터 해협 남서쪽의 킹윌리엄 섬에 도착했다. 이 섬에서 선원들의 유해와 1848년 4월 25일까지 계속 써내려간 탐험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에레보스호와 테러호는 퀸엘리자베스 제도에 있는 웰링턴 해협을 거슬러 올라가 비치 섬에서 겨울을 보냈다(1845~46). 이들은 콘월리스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돌아와 필 해협과 프랭클린 해협을 통과했다. 1846년 9월 이들은 킹윌리엄 섬 앞바다 빅토리아 해협(대서양과 태평양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서 빙산에 걸려 꼼짝 못하게 되었다. 1847년 6월까지 프랭클린과 24명의 선원이 이곳에서 죽었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1848년 4월 22일 빙산에 부서진 배를 버리고 남쪽을 향해 북아메리카 본토를 지나 백 강으로 진입하려고 시도했다. 한 에스키모 여인이 매클린턱에게 전해준 말에 의하면 굶주린 사람들이 쓰러졌으며, 걷는 도중에 죽었다고 한다. 프랭클린 자신은 북서항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으나 그의 탐험대원 몇 사람은 이전에 프랭클린이 방문했던 서쪽 해안을 연결하는 심프슨 해협에 도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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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프랭클린'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세상 이치가 그러하듯이 세상은 정말이지 냉혹한 곳이라고 결론 내려본다. 한가지 분야에서 최고가 아니면 그저 잘하는 전문가 정도로만 생각해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더군다나 성공을 통하여 이름을 드높인 훌륭한 리더들 틈속에서 성공도 하지못했던 존 프랭클린의 경우는 더더욱 생소하게 느껴지는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한다. "거기서 프랭클린이 어쨌기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포기란 걸 모르는 사람입니다." -(P152~153) 우선 '느림의 발견'을 읽는 내내 존 프랭클린의 느림을 염두하며 애써가며 철저하게 프랭클린이 되기 위하여 몰두하며 상황에 집착하다 한참동안 눈길이 머물렀던 구절이다. 여러번 되풀이 해서 읽고, 그것도 모자라 붉은 줄로 진하게 표시를 해 놓았다. 조금만 힘이 들어도 온갖 핑계를 들먹이며 쉽사리 포기를 해버리고 마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항상 왜들 저렇게 나약하고 끈기가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물론 나 자신도 그렇게까지 끈기가 있는 편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목표를 향한 변화의 패러다임에 과감히 뛰어들어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느림의 발견"이란 책을 통하여 또, 그 주인공인 '존 프랭클린'을 통하여 현재까지의 나의 모습을 되돌려 볼 수 있었던 훌륭한 계기가 마련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목표와 꿈을 달성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면 결코 포기를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 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저 예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소설로 각색하여 즐거움이나 몰랐던 사실에 대하여 알게 해주기 위한 내용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저자가 '존 프랭클린'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세지가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인정 받을 수 있는 현재의 시대상이 조금은 못마땅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쉴새없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의 패러다임에 동승하거나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빠른 결정이나 결단등도 무엇보다 필요하고 더군다나 '만만디' 라고 느림의 극치였던 중국인들 까지도 요즘엔 '콰이콰이' 라며 급하게 서두르는 시대에서 결코 느림만이 미학은 아닌것도 사실이기도 한것 같아 조금은 씁쓸한 기분마져 들기도 한다. 느림은 결코 나쁜것이 아니다. 단지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느림의 극치를 보여 주었던 '존 프랭클린'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항해술은 물론 이겠거니와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으로 무장하고 목표와 꿈을 향한여 보여준 끊임없는 열정과 사람들을 대하는 대인관계 및 리더십등이 비록 꿈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많은 사람들로의 기억속에 자리잡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요즘 전 세계가 많이 힘든것이 사실이다. 이럴 때 일수록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것저것 빨리빨리 수박 겉핡기 처럼 많은 지식을 습득하려 두문불출 하지 말고 한가지 분야에서 정통할 수 있는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기 위한 지혜를 쌓았으면하는 바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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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부 명예 편입니다. 그는 북극 탐험을 떠나게 됩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지나가야 하는 기존 행해가 아니라 가까운 북극해를 지나 베링해협을 통해 태평양으로 가는 항로을 개척하기 위해서입니다. 결론은 실패입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북극해가 얼어붙어 있는 상태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죠. (요즘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190년 전과 달리 요즘은 북극해의 빙원이 줄어들었다고 하니까요) 아무튼 1818년 출발하여 1819년에 돌아옵니다. 1819년엔 육로로 탐험을 떠납니다. 의사 리처드슨, 사관생도 백, 후드, 선원 헵번이 일행이고 모피사냥꾼 등이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한 것입니다. 모피사냥꾼들이 합류하였지만 에스키모와의 협력에 실패했고, 모피상사의 협조도 현지에서는 거의 없어 이들은 고립되고 굶주립니다. 먼저 출발한 백이 간신히 출발 시에 만났던 인디언 추장 아카잇초가에게 도착하여 구조팀을 데리고 돌아옵니다. 모험은 실패로 끝났고, 그들을 파견했던 사람들도 등을 돌립니다. 그래서 존은 글을 써서 출간합니다. 1823년 책이 출간된 다음 전환이 되어 영웅이 되어버렸습니다. 엘리너와 결혼을 했는데 엘리너 앤을 낳은 뒤 다시 육로 탐혐을 떠나는 1825년에 사망합니다. 1827년에 돌아와 항로 개척을 제외한 나머지 성과가 좋았기에 기사 작위를 받습니다. 1836년 경에는 반 디멘즈 랜드(Van Diemen's Land 현재 태즈매니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갑니다. 책에는 두 번째 아내 제인과 어린 딸 엘리너 앤 그리고 두 살짜리 조카 소피아 크래크로프트가 있었다고 했는데 소피아의 나이는 그 뒤에 나오는 행동들을 보면 두 살이 아니라 12살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아마도 오식이나 오타로 생각됩니다) 딸도 어리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1살이 어리기만 한 것은 아니죠.전 총독의 사위인 몬타규가 비서관이었기 때문에 견제를 받게 됩니다. 새 총독이 내리는 지시가 어떤 것은 환영을 받고 어떤 것은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결국 적이 많이 쌓여서 7년 만인 1843년 교체됩니다. 1845년 5월 19일 그는 마지막 항해를 떠납니다. 46년 여름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1847년 5월엔 북서항로를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배가 계속 갖혀있는 상태였기에 차석 지휘관들(크로우저와 피츠제임스)에게 6주 후 가장 강건한 일부를 데리고 구조요청을 하러 떠날 것을 지시하지만 6월 11일에 그는 두 번째 뇌출혈이 찾아와서 사망하고 맙니다. 남은 자들은 그 후 실종이 되었다가 미망인 제인의 열정으로 인한 구조대의 파견으로도 끝내 소식을 알지 못합니다. 1857년 마지막으로 구조대가 떠나고 1859년에 크로우저와 피츠제임스가 남긴 종이를 발견하였고 사체들도 다수 발견합니다. 이들은 1848년에 출발을 하였다가 아사한 것입니다. 당시엔 에스키모들도 배를 곯았던 해여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책의 뒷부분에 저자의 재출간사가 들어있습니다. 그걸 보고 이게 소설이 아니라 전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읽을 때 좀 이상하더라니...... 실체를 알게 되어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디 모르던 분(주인공에서 분으로의 변경입니다)의 이야기라서 소설로 이해하고 읽은 것입니다. 전기임을 알았더라면 이 책을 빌렸을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전기는 흥미를 두고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00725/10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