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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파리, 피렌체, 암스테르담, 에든버러, 쾨니히스베르크, 베를린, 런던, 바젤, 아테네, 로마 생각만 해도 모든 일을 훌훌 털고서 한번쯤은 여행해 보고 싶은 유럽의 도시들이다. 특히 이들 도시의 매력은 옛스러움과 새로움이 공존하고 있는 도시들이다. 흔희 우리의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와는 사뭇 다른 도시색을 가지고 있다. 고대와 현대가 서로 공존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한쪽 발을 드리우면 몇백년에서부터 몇천년의 시대로 회귀하고 다시 한쪽발을 빼면 작금의 시대로 복귀하는 타임머신 같은 도시들이다.
바로 이들 도시에서 부터 서양철학의 맥을 집어 본다. 아니 그냥 그들 도시 한복판에 서 있는것 만으로도 철학을 느낄수 있을 만큼 철학과 도시가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여기서 철학이 먼저냐 도시탄생이 먼저냐는 논외의 대상이 아니고, 될 수 도 없다. 철학과 도시는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붙어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유럽도시로의 여행을 통해서 서양철학의 커다란 맥을 독자들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가 교양과목의 형태로 알고 있는 서양철학사의 역순으로 그러니까 현대철학에서 출발한 철학은 로마에라는 최종목적지에 가서 그 끝을 맺는다. 사실상 서양문화라는 틀을 만들어낸 로마제국에서 대미를 장식하므로써 현대,근대,중세,고대철학의 이어진 끈의 시작이 로마와 아테네임을 암시하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각종 도시사진과 지도등을 첨부하여 유럽여행이라는 보너스도 제공 해주고 있으면서 서양철학에 대한 진수만을 추려서 서술하고 있어 서양철학에 대해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충의 맥을 잡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마치 여행을 하면서 서양철학을 인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 서양철학에 문외한인 이들에게 그렇게 녹녹치 않는 내용임에는 틀림없다. 고교시절 국민윤리라는 교과목과 대학시절 교양과목을 통해서 서양철학을 접했지만 사실 철학보다는 무슨무슨주의, 무슨무슨론이라든지 이름만으로도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자들과 그 주의를 연관해서 암기했던 나에게는 더욱더 쉬운 책은 아닌것 같다. 그런면에서 필자는 나와 같은 문외한들을 위한 많은 배려를 했지만 역시 기초적인 철학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기에는 상당한 진통을 수반하는것 같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이 그러한 각론을 접어 두고 개론서적인 입장으로 읽기에는 필자의 의도에 부합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중세만 하더라도 세상의 학문은 신학과 철학이외의 학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말은 종교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학문은 철학으로 대변 되었고 철학안에 모든 학문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근대과학이 대두되기 전까지만 해도 철학자, 과학자라는 경계를 나누것 조차 모호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철학은 인간이 고민해야 할 모든 분야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만큼 철학의 비중이 커지다 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이론과 주의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학이 더 발전하고 난해해지듯이 철학 또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심오해지고 어려워 질 수 밖에는 없는 운명아닌 운명을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만큼 인간의 삶이 복잡해 지고 사회제도가 변하면서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양식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은 인간과 가장 밀접한 학문이다. 육체적인 만족이 아닌 정신적인 공허감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학문이다. 우리는 고래로부터 진리는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고민을 했다. 바로 철학이 그러한 고민의 흔적이고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결과물인것이다. 고대에는 그 해답을 자연에서 찾았가 어느날 소피스트라는 궤변론자들에 의해 그 해답은 인간안에 존재한다고 해서 인간 스스로에게서 정답을 찾았다. 그러다가 신이라는 유일절대자의 탄생으로 모든 해답을 신에서 찾았다. 그래서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는 표현도 하지만 그런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의 대부흥기를 맞이하고 계몽시대를 거쳐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진리추구는 지금도 진행형이며 그 끝은 아마도 인류가 멸하는 날까지 이어질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난 필자가 이 책을 통해서 서양철학의 리얼리즘, 관념론, 포스터모더니즘, 경험론등의 각종 이론을 되도록이면 쉽게 설명하면서 독자들을 이해시키려고 하는것에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논조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도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진 않을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헤겔의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을 모른다 하여 크게 낙담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정말 그러한 문제는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자들의 몫인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책을 2번을 읽었지만 아직도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 물론 나의 무지함에 동정심을 던져보지만 어럽기는 매한가지이다. 철학의 사전적 의미인 지혜를 사랑하는다는 말은 아마도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을 의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도 서두에 언급했듯이 명사로서의 철학이 아닌 동사로서의 철학을 일반독자들에게 피력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싶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철학 또한 예외없이 그 결과물에 대한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특히 인간의 정신세계를 연구하는 철학의 경우 도구로서의 철학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철학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피히테나 헤겔의 철학을 통해서 철학이 도구로 인식되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지에 대해서 뼈아픈 경험을 했다. 물론 도구로서의 철학이 절대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본말이 전도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사실 각종 서양철학이론에 대해서 어느 이론이나 학파의 주장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마 아무도 특정이론이 정답이라고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이 의미가 바로 과정으로서의 철학을 해야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처럼 이론과 가정에 의해 어느누가 감행하더라도 그 결과가 일치하는 산출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철학에는 없다. 아니 있으면 철학이 아닐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명사로서의 철학보다 동사로서의 철학을 강조하는것이다. 사고의 과정중에서 다양한 이론이 추론되었고 비판과 비판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과정의 사고가 진행되는것이 철학의 진정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적인 경헙을 통해서 유일절대신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계와 나 개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가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왔고 지혜의 침체를 겪어 왔는지를 알고 있다. 또한 각종 이론에 대한 절대주위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던 왜곡된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각 개인의 사고의 과정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현대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명사는 항상 그자리에 있는것이지만 동사는 말 그대로 항상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 움직임이 진보가 될 수 도 있고 퇴보가 될 수 도 있지만 움직임이 없는 정체는 암흑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또한 모든 철학이론에는 절대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사고의 과정에 절대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양의 역사, 정치, 문화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제국이 오래토록 유지될 수 있었던 원동력중에 하나가 바로 절대라는 개념, 유일신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팍스로마나를 영위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서양철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철학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 있을것 같다. 진정한 철학의 의미와 철학에 대한 약간의 거리감을 해소하는데 일조를 한 부분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철학에 대한 문외한인 이들로 하여금 그동안의 편견을 해소할 수 있는 내용들이 상당히 많다.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여행을 하고 나면 왠지 가슴이 뿌듯하듯이 필자와 같이한 철학여행을 통해 철학에 대한 많은 부분들을 오래토록 간직하게 된것 같아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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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을 통해 도서와 학문의 탈경계화를 본다. 이 책은 서양철학사, 철학인물사, 여행가이드, 사회사상사, 사고력과 논리력 개발을 아우르며, 도서의 장르, 학문의 경계를 헐어버렸다. 한 눈에도 아주 공들여 만들어진 책인 것이 보인다. 저자는 어머어마한 꿈을 꾸고 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생각의 3부작'을 꿈꾸고 있는데, 후속작으로 '생각의 전쟁'과 '생각의 함정'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 기대를 걸어볼만 하다. 그 첫 번째 책인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는 '생각의 역사'라고 부른다. 우리는 저자를 따라 유럽의 도시(12도시 중 한 지역만 유럽이 아니다)를 여행하며, 그 도시 안에서 인간의 사상이 생성과 쇠퇴를 반복하며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지, 서양 철학 2500년의 역사를 딱딱한 강의가 아닌, '재밌는 옛 이야기'로,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비인기 교양과목이 된지 오래된 철학이야기가 우리에게 재밌게 느껴지는 것은, 그림책을 보는 듯한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서, 명사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동사로서의 철학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부'해온 철학은 저자가 말하는 '명사로서의 철학'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명사로서의 철학은 이해하기가 편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왜 그렇게 정리되었는지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생명력을 잃는다." "나는 철학을 이렇게 도식적으로 나누는 것을 싫어한다. 철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미리 분류된 철학 상자의 틀에 맞추어 쏙쏙 집어넣으면 읽기에 편하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편한 대신 생각을 연결하는 재미을 잃는다. 다른 상자 속에 갇힌 철학과는 소통할 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생각을 서로 연결하면 생각의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중심 도시와 핵심 인물을 축으로 철학의 '흐름'을 연결하여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동사로서 철학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맛볼 수 있다. 이 여행의 최종 목표를 유럽 철학을 이해하는 데 두지 않고, '지금' '여기'에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으로 정했다는 저자는 우리에게 "자신의 질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시각으로, 자신의 말로, 자신의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그 제자들에게 했듯이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근대 프로젝트는 성공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근대 프로젝트의 결과물로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내려야 한다. 여러분은 과학이 세계의 비밀을 풀었다고 생각하는가. 과학이 인간의 비밀을 얼마나 밝혀냈다고 보는가. 인류 사회는 과연 진보했는가. 그리고 지금 당신은 행복한가." 언제부터인가 생각하는 기능보다 감각적인 기능의 자극을 더 많이 받고 살아가는 우리는 질문을 잃어버린 세대로 살아간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그저 느끼고 발산하려고만 한다. 인간에게 해방을 약속했던 이성의 빛이 인간에 대한 지배논리로 전환되고, 그리하여 인간의 잠재적인 욕구마저도 과학기술에 의해 지배당하는 무서운 세상을 살면서도 그것을 모른다.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생각하기에 지쳐버린 것인가. 서양 철학 2500년 역사가 보여주듯이 인간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그토록 오랜 세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진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 세대가 되어버렸다. 내가 사춘기를 막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셨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사업에 실패하니 달라지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물질의 부질없음 뿐 아니라, 이제 막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나에게 삶에 대한 허무와 회의 심어주었다. 카뮈와 사르트르, 카프카의 소설을 탐독하며 회의와 비관의 병이 깊어질 때, 나를 살린 진리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리'라고 말씀하는 성경이었다. 인간 사상사의 역사는 신이 주시는 계시의 빛을 거부하고,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이성으로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하는 투쟁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모두 지금까지 길을 잃고 있다고 본다. 리얼리즘을 지지하는 저자는 아직 인간의 이성의 빛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측면에서 계몽의 끝자락, 계몽주의 막내 아들쯤 된다고 하면 화를 내실까. 인간의 생각의 역사를 추척하듯 쓰여진 이 책의 장점은 서양철학사의 핵심과 도시에 담겨 있는 인간의 역사를 간결하고 재밌게 전달해주며, 스스로에게 질문과 답을 생각하게 해줌으로써 (객관적인)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것 말고도, 내가 지금 살아가는 시대, 그리고 맞이할 시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내가 역사의 어디쯤에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또한 나에게 이 책이 특별히 더 반가웠던 이유는 나의 전공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존 스튜어트밀식 독서법'을 실천하고자 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힐러리도 이 독서법으로 입체적인 사고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이 독서법은 한마디로 말하면 '철학 고전 독서법'이다. 철학 고전을 100권 이상 읽으면 천재적 사고 능력을 갖게 된다고 한다. 소문난 삼류대학에 지나지 않았던 시카고 대학이 이 독서법으로 노벨상의 텃밭이 될 만큼 명문대로 부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작정 철학 고전을 읽으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막막했었다. [철학, 도시를 디지인하다]는 나에게 잘 닦인 새 길을 열어주었다. 각 사상의 주요 핵심과 흐림의 쟁점을 파악할 수 있으니, 각 철학자들의 위치와 주요 논점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입문으로 읽게 하면,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 고전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리라 확신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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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철학’, 단어만 머릿속에 떠올려 봐도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오지 않는가? ‘철학’이라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접근하기도 어려운 거리감 있는 학문의 영역으로 생각하진 않는가? 나 또한 ‘철학’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다고 철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다. 다만 철학에 관심을 가져서 학부 4년 동안 8학기를 꾸준히 수강했던 짝퉁 철학생으로 졸업 후에도 철학은 여전히 관심 영역이지만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인 것 같다. 아마 모르긴 해도 철학이나 철학 책에 관심은 있지만 쉽게 손에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철학을 생각하면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나의 첫 철학 수업 중에 누군가가 교수님께 ‘어거스틴’과 ‘아우그스티누스’가 동일 인물이냐, 아니냐의 질문을 했었고, 그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1시간이 넘는 공방과 설전이 오갔었다. 지금이야 웹서핑으로 정보를 찾아보면 쉽게 해결할 문제지만 10년이 훌쩍 넘은 그 시대는 서고에서 책과 씨름하다 보면 하루가 30시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었다. 왜 ‘어거스틴’과 ‘아우그스티누스’가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되었는지 궁금하다면 직접 찾아보길 바란다.
최근에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2] 책을 보게 되었다. 집에도 몇 권의 철학책들이 있지만, 이 책을 읽게 된 배경은 올해 초, 이집트를 거처 요르단, 이스라엘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시간과 재정의 부담으로 터키를 지나 그리스와 로마까지 가지 못 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기에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눈길을 사로잡는 주제가 되었으며 그뿐만이 아닌 여행을 좋아 하는 사람들이라면 유럽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가지고 있을 텐데 나 역시 그러하다. 여기서 잠깐. 철학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여행 얘기를 한다고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책은 철학과 유럽여행이 만나는 책이며, 철학적 사고여행, 역사여행을 이야기 형식으로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책이기 때문에 여행적인 요소를 살짝 언급 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유럽여행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하면 적잖은 실망을 할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유럽여행을 경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기를 권하고 싶다. 또한 이 책은 철학적인 배경 없이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장점이 있으니 철학 책이라는 거부감과 부담감을 버렸으면 좋겠다.
여행을 하기에 앞서 집에 세계지도가 있다면 세계지도를 보면서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렇게 책을 읽었고 세계지도로 보는 또 다른 세계관을 경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한다면 유럽의 어느 곳을 제일 먼저 방문하고 싶은가? 파리 에펠탑, 피사의 사탑, 알프스 산맥?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은 유명한 관광지를 소개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철학이 태동한 곳과 유명한 철학자들의 삶이 녹아있는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철학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철학만 여행할 수 없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면 수학, 과학, 언어에서 문화, 역사에서 종교, 미술, 음악, 의학,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철학적 사고와 철학적 개념은 어떻게 하고? 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세 번이나 소개를 하는데, 첫 번째는 데카르트의 적으로, 두 번째는 플라톤의 제자로, 세 번째는 위험한 철학자로 등장 시키면서” 철학에 대한 배움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철학을 배울 때 가장 어렵다던 중세철학을 먼저 배우게 되었는데(누군가에게는 쉬울 수도 있겠지만)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확실하게 건진 것이 있다면 ‘현현’이란 단어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공부 한 것 같다. 이 단어 하나만 가지고도 2주 동안 서고에서 백과사전들과 씨름했으니 당연하리라. 그런데 그 당시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는 시대의 흐름으로 공부를 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철학을 공부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라고 생각해 왔는데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이 책의 구조는 현대, 근대, 고대, 중세로 구성되어져 있다. 또 다시 시대의 구조가 바뀌는 것인가?, 저자는 시간의 순서를 뒤집어서 철학 여행을 하는 이유에 대하여 단순히 철학자와 그들의 사상이라고 집약한 한 줄의 문장만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기를 원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재확인하기 위해서다.”라고 분명한 목적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12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철학의 큰 흐름과 그 흐름을 주도한 철학자들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며 중간다리 역할을 했던 많은 철학자들도 소개하고 있어서 흥미 진지하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생각해 보라! 철학책을 이야기책 읽듯이, 또한 추리소설을 읽듯 한다면 그 느낌이 어떠할지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책은 쉽게 읽으며 철학을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저자 또한 “이 책은 철학에 입문하려는 청소년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쓴” 입문용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는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이 책을 적극 권장해 주고 싶다. 단순히 철학이 아닌 철학을 넘어서 학문을 함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알아야하는 것들에 대하여 쉽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라는 세계관으로 ‘너’라는 세계관을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볼 때 그 세계관이 올바를 수는 없다. 철학은 나의 세계관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며, 동시에 너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접함으로 “각 시대가 던졌던 철학적 화두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문제에 어떻게 연결되고, 또 그 시대의 질문이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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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 책의 매력은, 단지 살았던 시대만 천차만별로 다를 뿐 우리와 똑같이 느끼고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우리와 똑같이 부대끼며 살아온 우리 이웃, 우리 친구, 우리 가족의 삶이 축적된 공간과 철학을 연결시킴으로써 철학이 가졌다고 오해받아온 고리타분함과 딱딱함을 씻어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매력은,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이 태어나고 성장해온 유럽의 도시를 선정하고, 그 도시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철학자들의 삶을 연결시켜서 마치 도시의 오래된 거리를 느릿하게 산책하며, 때론 노상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사색에 잠기는 듯한 편안한 접근성에 있다. 이 책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는 다른 철학책이 고대→중세→근대→현대의 시간 순서를 따르는 데 비해 이 책은 거꾸로 현대→근대→고대 및 중세의 순서를 취한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철학을 ‘동사로서의 철학’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아마도 저자도 밝혔듯이 ‘이번 유럽 철학 여행의 목표로 설정한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에 대한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것이리라. 철학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가 아니다. 비록 위대한 철학자들의 자연인으로서의 생명은 종료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남긴 철학 유산은 계속하여 확대되고, 재생산되고, 반박되고, 공박당하며, 재발견되고, 공격하면서 끊임없이 변증법적 나선형으로 발전되어 왔다. 어쩌면 변증법적 나선형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보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볼 때에 아래에 토대로 깔린 전(前)단계들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더 잘 보일 수 있겠다. 나는 철학을 동사로 파악하는 저자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을 비롯하여 인문학에 ‘위기’가 운운되는 가장 큰 원인은 오히려 그 학문에 있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이다. 전문가들에 의하여 독점되는 학문, 고상하고 현학적으로 보이는 말의 성찬, 대중성을 얻고자 하는 노력에 대하여 순수성을 훼손시킨다는 비판 등. 최근에 와서야 학문의 대중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기본적으로 우리 학문이 대중 속에서 호흡하기 보다는 정형화된 모습으로 고정되었던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변화의 양상으로 철학을 바라보고, 그 변화의 주체를 독자들 개인에게 돌리고자 하는 저자의 모습, 그러면서도 본인이 제시한 문제에 성실한 답안을 제시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동사’로서의 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본다. 물론 저자가 말한 ‘동사’로서의 철학은 다소 다른 의미이다. 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동사는 움직임, 즉, 변화를 내포한 개념이다. 어쩌면 철학의 변화가능성과 다양성에 항상 눈을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상 몇 가지를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보다 더 나은 철학적 자세가 아닐까. 저자는 제3장에서 ‘실재’의 귀환으로 본인의 답안지를 작성하여 독자들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독자에게 스스로의 답안지를 작성해 볼 것을 권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내 개인적인 답안지를 써서 정리해 보는 것이 예의가 될 것이다. 저자는 중세 이후 철학사의 가장 큰 흐름으로 ‘근대 프로젝트’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성 프로젝트’, 또는 ‘계몽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서양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뼈대라고 할 수 있겠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자기를 발견하고, 철학의 제일 원리를 이성에서 출발하였다. 물론 경험주의는 이성과 다른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또다른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었으나, 칸트는 이성과 경험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였고, 헤겔은 이를 절대정신으로까지 끌어올려 독일 관념론 철학의 정수를 구성한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맑스 역시 그 주체를 프롤레타리아로 바꾸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이성 중심의 사고와 이성 중심의 프로젝트, 근대 프로젝트를 뒤집지 않았다. 이성 중심은 근대를 넘어올수록 ‘과학’과 결합한다. 비엔나에서 시작한 논리실증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을 이성의 최고봉으로까지 상정하고, 과학적 세계관 하에서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8혁명세대로 대표되는 파리,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이 모든 이성과 근대를 해체하고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선언하였다. 이제 만능의 이성과 절대불변의 과학적 세계관 대신에 모든 것이 처지와 조건에 따라 ‘구성’되어 왔으며, 그 구성의 이면에는 권력이 숨어 있음을 대대적으로 폭로하게 된다. 80년대 사회과학도에게 필수적인 학습대상이 맑스라면, 90년의 필수 학습대상은 미셀 푸코라는 이야기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미셀 푸코에 대한 대대적인 붐은 실상 우리나라에 있어서 90년대 들어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한 ‘신세대’, ‘X세대’라는 인구 구성상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격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의 문분별할 정도의 유입으로 대표되는 사상적 혼돈이 결합된 시대에서 나온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열풍처럼 불었던,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감안해 준다면 ‘구조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의 과제가 현재 우리 사회의 과제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서양철학사에서 구조주의가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절대화된 과학과 이성에 반기를 들었고, 맥락에 따른 사상과 그 사상의 구현체인 사회의 구성가능성 및 변화가능성을 새롭게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푸코 등은 그동안 신성하게까지 여겨왔던 권력(power) 아래에 감추어진 본질적인 면을 ‘폭로’함으로써 새로운 담론과 새로운 실천방안을 제시한 것은 인류 지성사에서 소중한 성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일부 구조주의에서 주장하는 진리의 상대성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다. 또한 과연 서양의 탈근대 프로젝트가 우리 사회에 적용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수준이 아니라 확신의 수준으로 ‘아직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맑시스트들이 주장하는 당파성 개념의 유효성을 여전히 인정한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라고 갈파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근대 사회에 접어들어 있는가. 이성이 신격화될 정도로, 더 이상 계몽의 과제의 유효성을 제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이성중심적이고 합리적인가의 물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사회 각 부분이 돌아가는 모습 속에는 계급간에, 성별간에, 지역간에, 세대간에 아직도 ‘전근대적인 야만이 독버섯처럼 남아있다’ 근대 프로젝트는 이러한 전근대적 억압과 착취의 틀에 대해 개혁적이다. 그리고 이 개혁성이 유효한 사회에서 근대 프로젝트의 단절과 포스트모던으로의 해체는 하버마스가 푸코에 대해 공격한대로 ‘보수주의적’일 수 있다. 탈근대의 전제조건은 누가 뭐래도 ‘주체의 성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회사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갖추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양극화로 대표되는 계급 또는 계층간 불평등이 여전히 크고, 그 불평등이 교육을 통해 세대를 거쳐가며 여전히 확대재생산되는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지점은 근대의 해체가 아니라 여전히 정치경제학적 문제에 있다는 생각이다. 우연이겠으나, 2008년 마지막 책으로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었던 분야를 정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아주 뜻깊은 독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을 보니, 아마도 이 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사에서 끈질기게 대치하고 경쟁했던 사상의 충돌을 그린 ‘생각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와, 이러한 생각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오만과 독선을 논파한 ‘생각의 함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의 시도에 응원을 보내면서 또 하나의 의미있는 철학적 소산을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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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부끄럽지만) 나는 '전혀'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만큼, 철학을 거의 모름을 밝혀둔다.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 중에는 철학에 상당한 지식이나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도 있을테고, 나처럼 철학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한 번쯤은 발을 담가보고 싶은,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나와 비슷한 경우의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읽은 느낌을 간단히 남겨본다. 철학,이라는 말을 듣고 "너 자신을 알라"나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철학자를 떠올리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철학책이 바로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이다. 작년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고나서 갑자기 무척 알고싶어진 철학자가 있어서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철학 쪽을 기웃거려 책을 몇 권 빌려 왔었다. 의욕에 불타 올라 그 중 한 권의 책장을 펼쳤지만, 결국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함께 빌려온 다른 철학서와 함께 그대로 반납하고 말았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그 뒤, 몇몇 흥미로운 철학서 소개를 보았지만 선뜻 집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책,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가 기어이 나를 잡아 끌어 책장을 펼쳐들도록 한 데는 그만한 매력이 있었을테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일단 겁없이 철학책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제목을 보고는 철학과 '도시 디자인'이 결합된 책인가, 생각했는데 책 소개를 읽어보니 유럽 도시 곳곳으로 철학 여행을 떠난다 한다. 그렇게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과 사람을 살살 유혹하다 못해 황홀하게 만드는 여행이 결합된 책이라니, 내가 작년에 맛 본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기억 저편으로 밀어내고 다시 도전해볼 용기를 내도록 해준다. 저자의 당부대로 먼저 여행짐을 꾸렸다. 나는 이제 열한 곳의 유럽 도시와 고대 그리스로 떠날 테니까! 하지만 사뭇 경쾌한 발걸음으로 떠난 '여행'은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이 여행의 무게가 그리 가볍지 않음을, 아니 상당히 무거울지도 모름을 느끼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경치나 보고 즐기자고 떠난 여행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철학 여행'이니까. 저자는 이 철학 여행의 목표를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살면서 한 번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여행 목표만 보고도 그 무게가 느껴지리라 생각된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만큼 답도 없고 어려운 질문이 있을까? 그런데 이제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이 여행을 떠나자 한다. 처음의 경쾌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사뭇 비장해진다.
그리고 닷새 정도에 걸쳐 대단원의 '철학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어떤 도시를 다녔으며, 어떤 철학 사상을 보고 들었고, 어떤 철학자를 만났는지는, 책 소개에 나와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다. 사실 그걸 정리하기에는 아직 나는 '철학을 너무 몰라~'가 진심이겠지만.) 이 여정에는 정말 흥미로워 정신없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닌 곳도 있었고, 엄청난 무게감에 짓눌려 한 줄 한 줄 천천히 따라가며 잠시 쉬었다 가고 싶은 곳도 있었다. 아, 이런 게 철학의 묘미로구나 하며 열심히 밑줄 긋고 황홀한 마음으로 읽은 부분이 있었는가 하면, 아, 역시 철학은 너무 어렵구나 하며 흰색은 종이요 검은색을 글자,라는 심정으로 읽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해 떠난 여행길일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으로만 충만할 수는 없는 법. 이번 '철학 여행'도 그런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굴곡이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나 같은 철학 문외한도 겁없이 덤벼들 수 있도록 매력적인 소재로 접근했다는 점이었다면, 그 다음 매력은, 이 책을 읽고 나면 철학이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될까? 이 책에서 소개해준 데카르트의 <방법 서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읽고 싶어졌으니까. 앞으로는 다른 철학책도 과감히 도전해 볼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생겼으니까. 물론 책 속에서 만난 여러 철학적인 내용들이 무척 어려웠고, 정말 철학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읽기에는 힘든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말했다시피 나는 철학을 '하나도' 모르지 않는가. 어떻게 전혀 모르는 분야에 접근을 하면서 그저 쉽고 재미있기만을 바란단 말인가. 나의 '도둑놈 심보'가 부끄러워지고, 그런 나의 마음가짐을 반성할 수 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꾸짖기라도 하듯, 여행에 앞서 말한 저자의 한 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남이 먹기 좋게 꼭꼭 씹어서 한입에 넣어 주는 철학은 생명력이 약하다."(당연히 이 책에서는 그렇게 '꼭꼭 씹어서 한입에 넣어 주는' 밥은 없다.) 그러니 이 책은 내 스스로 꼭꼭 씹어가며 몇 번이고 읽어 생명력이 강한 철학을 내 안에 키워야겠다.
나처럼, 철학을 어렵게만 느끼고 선뜻 접근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철학을 만나보라고 적극 권해주고 싶다. 후회하지 않는 철학 여행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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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의 나른한 빛이 고왔던 도서관이었다. 복도가 아니라 난간이어서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금강하구가 내려다 보였다. 나를 설레게 했던 국어선생님은 늘 그곳에서 책을 보거나 담배를 피우셨다. 긴 머리 고등학생인 나는 선생님이 계신 그 도서관 주위를 맴돌 때가 많았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조용히 날 부르셨다. 빛바랜 책들 위로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은 알싸한 옛 냄새가 곰팡내와 어울려 눅눅했던 그 도서관으로. 그날은 키 큰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나비춤을 추며 하무도 없는 교정에 사뿐히 내려앉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쓴 독후감을 읽고 계셨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 관한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이었는데 감수성 예민했던 내가 꽤나 그를 옹호했었나 보다. 내심 걱정이 되셨던 게다. 난 그저 선생님이 날 따로 부르셨다는 것에 설렜던 기억뿐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쇼펜하우어가 늘 궁금했다. 그 사람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철이 조금 들기 시작할 무렵 쇼펜하우어가 여성을 폄하했고, 종교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싫어했다.
철학은 선생님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늘 그 만큼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홍세화선생님의 강연회에서 근대철학이 현대사회에 미친 영향과 지금도 유효한 이론들의 정연함에 감탄했다. 철학적 삶이 한 사람을 참으로 매력적으로 만들기도 하는구나. 내 행동과 내 생각이 어디에서 기원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은? 그것이 궁금해졌다.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이 책은 20세기 비엔나와 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14세기에서 16세기의 피렌체, 17세기의 암스테르담과 에든버러, 19세기 후반의 런던과 바젤, 19세기 전반의 베를린, 18세기 계몽 시대의 쾨니히스베르크, 그리고 나서 기원전의 아테네, 중세의 유럽으로 끝을 맺는다. 그 방식이 독특하다. 생각이 지형을 넘나든다. 이 책 떠들어볼수록 참 맛이 난다. 씹을수록 고소하다. 먼저 도시를 소개한다. 도시의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특징. 그리고 그 도시에서 성장한 철학과 철학가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그 도시에서 왜 그런 철학이 발생하고 현대가 주목해야할 점은 무엇인지 말해준다. 어렵고 난해하기만한 철학의 접근을 쉽게 했다. 저자는 철학의 입문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철학은 최초의 출발지점을 잡는 일이 가장 어렵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철학의 출발점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대목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철학의 역사란 보편타당한 잣대를 세우기 위한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이 딱이다. 깊이 있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어려워지기도 하는데 통사적 서술의 딱딱함을 여행이라는 형식을 취해 흥미롭다. 더군다나 유럽의 2/3가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현재를 생각할 때 매력적인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함께 하고 있으니 더욱 흥미롭다. 철학의 흐름이 전시대와 단절이 아니라 상호소통이라는 부분에서도 이와 같은 구성은 상당히 적절하다고 본다. 2권으로 구성된 2,000년의 철학역사를 다 서술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그리고 아무리 옮겨도 저자만큼 옮길 자신도 없다. 그렇지만 이말 만은 꼭 옮겨보고 싶다. 근대가 중세의 단절인가 연속인가 하는 논의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근세의 단절인가 연속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는 내가 홍세화선생님의 강연에서 느꼈던 것이기도 했다. 철학이 과연 복잡한 현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말이다. 저자는 “중세가 우리에게 준 선물 세 가지, 곧 대학과 의회, 그리고 정치에서 분리된 교회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 제자들의 작품이며, 플라톤의 제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이 구축한 중세의 질서를 무시하고 새로운 역사의 도래를 선언하면서 아예 판을 뒤집어 버리고 이는 르네상스가 시작된 피렌체에서 근대를 열게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책의 끝을 중세로 잡은 것은 ‘중세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거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테네 학당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깊고 깊은 사유의 뿌리가 그리고 방향성을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다시 아테네로 간다는 것이다. ‘과학적 세계관’이 가져다 준 ‘세계 표준’과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관’이 가져다 준 ‘다문화주의’. 이는 그가 현대 철학을 ‘비엔나’와 ‘파리 ’에서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 서평이 좀 어려운가? 그렇다면 정재영선생님이 쓰신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을 참고(?)하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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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독일 여행을 다녀온 뒤 나한테선 오래 잊혀 있었던 유럽사, 즉 서양사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여행 가기 전 간단한 서양사 개론이라도 한 권 읽고 갔다면 더 많이 느끼고 생각하며 감동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때는 도저히 그럴 틈이 없었다. 아이와 동반하는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연속이기 때문이기에 말이다.
다녀온 뒤, 교과서 수준의 청소년들을 위한 서양사 책을 하나 읽고 이주헌 씨가 쓴 스테디 셀러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을 읽으며 다시 한 번 가게 된다면 박물관이나 미술관 위주로 다녀오자 욕심을 가져보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간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이 동행의 빡빡한 일정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이쪽으로는 아는 것이 바닥이 훤히 보일만큼 밑천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주헌 씨의 50일 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을 읽으면서 철학에 관해서도 여행기와 병행된 책이 있으면 참 좋겠다, 읽어보면 재미있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 시대의 철학을 빼 놓곤 설명되어질 수 없기에 철학 여행서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신간으로 이 책이 나왔다는 걸 신문에서 접했다.
철학도 역시 내게로부터 잊혀졌던 존재라, 밑천이 뻔한 내 앎의 수준 덕(?)에 읽기가 녹록지는 않았다. 실은 청소년들이나 대학 새내기들이 읽으면 좋을 듯한 내용과 구성이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철학이 어디 그리 만만한 존재던가? 그 어렵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철학을 지은이만의 독창성과 탁월한 문체로 술술 적어놓았다.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생각보다 그 도시의 얘기는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깐 여행서가 아니라 철학책이기 때문이다. 제목만 감각적으로 뽑았다. 물론, 특정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철학자가 소개되고 그 철학자가 펼쳤던 사상이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보통 기존의 다른 철학 서적들이 과거에서 현대(지금 -여기)로의 시간 흐름으로 책을 구성했다면 이 책은 거꾸로 현대에서 과거로 간다. 정확히 말하면 탈근대에서 시작해 근대를 지나 고대, 중세의 흐름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1권과 2권을 이어서). 이러한 구성은 참으로 독특했고 읽는 이로 하여금 지겨움을 덜 준다고 생각되었다. 나 역시 읽으면서 여타의 철학 책들보다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지은이의 변은 과거 역사로서의 철학이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는 유물에 불과하다면 끊임없이 현재와 소통하는 철학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이기에 그렇단다. 어차피 절학이라는 게 그 시대의 세상을 보는 눈이라면 그 눈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고, 오늘 날의 그 눈과 비교하며 우리의 눈을 생산적, 발전적으로 확장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철학 그 자체나 어떤 철학자의 사상 그 자체가 훌륭하고 위대하게 치기보다는 그 철학자의 사상을 통해 시, 공간 상의 세상과 소통해 가는 과정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즉, 지은이가 책 속에서 여러 번 강조하는데, 명사가 아닌 동사로의 철학, 생각의 결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과정으로서의 철학이 중요하고 자신 역시 그런 책을 쓰고자 했기 때문이란다. 철학이 그 단어만 들어도 딱딱하고 어렵고 머리가 지근거리는 것으로 연상되는 건 그간 명사로서의 철학, 생각의 결과로서의 철학만 말해왔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학자와 그의 유명한 이론에 관해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학자가 그러한 이론을 성립해 갔는지 하나하나 따지고 살펴가는 과정이 이 책에서 펼쳐진다. 이러한 서술은 현대(탈근대)에서 시작해 중세로 이어지는 이 책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물론, 그 흐름을 좇아가다가 종종 놓치기도 하여 앞 페이지를 여러 번 다시 넘겨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 방식은 참으로 독특하고 지겨움보다는 재미를 선사해줬다.
한편, 지은이의 문체는 참으로 깔끔하고 논리 정연하며 빈틈이 없다. 철학 외의 방대한 주변 지식을 인용하며 이해하기 쉽게 풀어가고자 애쓴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본인의 감정이나 주장도 아주 조금씩 드러내고 있지만, 원체 딱딱 맞아 떨어지는 문체라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아니, 개인적 감정과 주장도 너무나 논리정연하게 풀어놓아서 약간은 삭막한 느낌이 들 정도다. 뭐, 어찌보면 그냥 건조한 정도다. 취향에 따라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고 나같은 사람한테는 아쉽기도 한 것이다.
이 두 권의 책으로 서양 철학사 모두를 톺을 수는 없다. 생략되거나 빠져 있는 철학자가 기술되어 있는 이들보다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뒤 서양 철학사에 흐르는 큰 물줄기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느낌이 든다. 개인적으로 맑시즘에 관한 저자의 생각에 많은 부분 동의하며 읽었고 저자가 좋아했다는 니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책 잡고 있는 내내 들만큼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그 지식의 씨실과 날실을 이용해 한 편의 글로 짜내는 능력은 감탄스러웠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한 저자도 실수를 했다. p491의 호엔슈방가우성이라 설명되어진 사진은 노인슈반슈타인성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지난 여행에서 여기를 다녀왔는데 호엔슈방가우성은 산 아래 따로 있다.
* 덤,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기도 했는데,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한 말이란다.
<인상깊은 구절> 여러 장에 걸쳐 많았지만, 그냥 지금 보이는 하나만 적어본다면.... "어제와 오늘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소통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소통이 막혀 있으면 과거의 사실이 오늘의 입맛에 맞게 임으로 재단되거나, 오늘의 관심과는 전혀 상관없는 골통품이 되어 버린다. 전자는 역사를 왜곡하는 길이고, 후자는 역사를 골동품으로 만드는 길이다. 나는 중세를 암흑으로 보는 시각에서 전저의 위험을 읽는다. 중세를 낭만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후자의 유혹이 거슬린다." -p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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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볼 때,편집과 구성의 측면보다는 내용에만 치중하여 책을 평가하는 타입이다.편집과 구성보다는 아무래도 책의 본질인 내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하게 되면서, 나 역시 편집과 구성에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끼며, 현대의 출판업에서 이 분야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라는 제목에서 눈을 이끄는 새로움, 기존 철학입문서에서 볼 수 없었던 시간과 공간의 접목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인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면에서 눈을 감고 긍정적 평가만을 내릴 수는 없기에 비판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다.
먼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시간과 공간의 교차를 통해 철학과 도시를 연결시켜 낸다는 것인데, 이 방식도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번째는 '도시'라는 소재를 통해 '철학'과 접목을 했다는 참신함이다. 유럽의 도시들의 공간적 특성을 철학의 시간적 특성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접근하는 방식은 철학을 어려워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게 한다. ‘비엔나’라는 도시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 ‘비엔나커피’, ‘비엔나소세지’의 예를 통해 혼합적인 문화의 특성을 살펴보는 부분은 재미있고, 기묘하다.
두 번째는 ‘철학사’라는 시간의 문제를 역으로 풀어가고 있는 방식이다. 기존의 철학사에 관련된 서적들은 과거에서 현대까지 시간순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방식의 치명적 약점은 철학에 흥미를 느끼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고대 철학자의 사상과 용어들이 친근하게 다가설 수 없기에 중도에 포기하게 만드는 주요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이 책은 현대사회의 문제를 현대의 철학적 관점으로 접근을 시작해, 점차적으로 과거로 돌아가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철학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문제의식을 던져주는지 깨닫게 해주고, 이 관심사의 증폭이 현대에서 근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의 크로스를 통해 철학을 가볍게 사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기획과 구성은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구성의 참신함이 강한만큼 내용상의 아쉬움이 크게 남는 것은 왜일까? 먼저 제목에서 느껴졌던 ‘도시’라는 접근법은 철학을 안내하는 수단의 역할일 뿐 기대보다 도시자체의 비중이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이 도시에 어떤 철학적 사상이 숨겨져 있는지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 도시의 역사나 건축양식들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말이다.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가 보여주듯이 시대에 흐르는 미적예술들을 철학적 해석으로 풀어내는 진중함이 아쉽다. 또한 철학사적 성찰의 깊이가 아쉽다. 물론 이 부분은 이 책의 구성상 철학을 가볍게 접근하기 위한 의도가 있기에 처음부터 갖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가 쉬우면서도 ‘주체’와 ‘진리’라는 핵심을 놓치지 않고 깊이 있게 풀어내는 것에 비하면 이 가벼움이 너무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서 토대주의와 보편주의로 나누어서 그 한계를 살펴보고, 객관주의를 통해 실체에 대한 개념을 도출하는 저자의 관점은 나에게 있어서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아이들에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때 나 역시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통한 보편성을 도출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식론적 사유와 존재론적 사유의 혼동을 구분한다면 객관주의가 가능함을 알게 되어서 혼란스러운 부분이 정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분들의 평이 워낙 좋게 나와서 내가 감히 이 책을 비판할 수 있을까,혹은 내가 잘못 읽은 것은 아닐까 고민이 들기도 하였다. 아마도 내가 장점으로 꼽은 이 책의 기획과 구성의 면에 포커스를 맞춰서 그렇지 않을까 싶다. 결국 철학에 관심이 있는 입문자들에게는 너무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철학사를 이해하고 있는 독자분들에게는 철학입문의 참신한 접근법을 통해 내용상의 아쉬움을 달래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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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이라고 대답하겠다. 내가 알고 있는 철학 지식은 철학이기는 하지만 교육철학에 관계된 것이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공자와 맹자,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그 외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교육에 어떻게 적용했는가에 관한 지식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들 철학의 토대를 이루는 내용임에는 다름 없다.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사용한 자신들만의 철학용어와 개념이었는데 그런 용어적 장벽이 철학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분야라고 해도 철학은 재미있는 학문이기도 하다. 허망한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과 깊이 관련된 학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행하는 사고의 정립과정이 바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생각하는 힘으로서의 철학' '생각하는 과정으로서의 철학'이 철학의 본질에 가깝다고 보고 있는데 그러한 철학을 '동사로서의 철학'이라 명명한다.
이 책의 구조적 특성을 잠깐 설명하고 넘어야겠다. 거의 모든 철학책이 고대에서 근대의 방향으로 변화한 철학 이야기를 다룬다면 이 책은 근대에서 중세, 고대로 넘어가는 독특한 구조를 지녔다. 또한 철학사상과 철학자에 알맞는 12곳의 도시를 선정하여 말 그대로 철학이 도시를 디자인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서를 즐겨읽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 책은 철학에 보다 쉽게 다가가게 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단 여행서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많이 적다.
만약 이 책이 단순히 철학자와 그들의 사상을 논한 책이었다면 나는 아마 이 두 권의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들이 쉬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근대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비엔나 편에서 다룬 논리실증주의, 실재와 표상에 관한 이야기,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네덜란드로 피신한 근세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와 헤겔의 이야기들은 한 번 읽어서 모두 이해하기에는 내 앎의 깊이가 너무 얕다. 저자 나름대로는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구체적인 사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관념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몇 번이나 되새김을 해보곤 했다.
가장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2권의 맨 마지막 장 '고대로 가는 길-로마' 편과 1권의 '철학의 새 천년, 1968년에 시작되다-파리' 편이었다. 고대 철학 부분은 교육철학을 공부하면서도 가장 재미있게 공부한 부분이라 다시 보는 즐거움이 있었고, 파리에서 일어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68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운동의 시초가 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두 도시에서 다뤄진 철학 이야기 모두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도 한몫한다.
철학과 관련해서 이렇게 재미있고 신나게 책을 읽은 적은 처음인 것 같다. 물론 내용을 모두 이해했는가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내가 가보고 싶어하는 도시들, 그 도시들에 여전히 살아숨쉬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들. 저자는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의 눈'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기도 하지만 철학이 살아숨쉬는 도시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예전' '거기' 그리고 '그들의 눈'으로 철학을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