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전 여름. 그 해도 올해처럼 더위가 기승을 부렸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온통 눈 덮인 히말라야뿐이었고 더위를 느낄 수 있는 신경은 여름 내내 마취 상태였다. 히말라야의 무엇이 그토록 몰두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원초적인 유혹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수 십 명의 셀파를 동원한 등반도 오체투지로 설산을 고행하며 어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금 더 가까이 가서 그 산을 보고 싶었다. 박완서님의 「모독」은 티벳 네팔 기행기 이다. 히말라야와 관련된 것은 모두 궁금했던 터였기에 티벳과 네팔에 대해서도 자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티벳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로 들어가는 여행기였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감행한 여행은 너무도 엄혹한 자연환경 때문인지 생애에서 가장 고된 여행이었다고 작가는 써놓고 있었다. 여행 후에 돌이켜보면 즐거웠던 기억보다 힘들었던 순간이 더 오랫동안 그 여행을 생각나게 한다고 했던가. 고생을 많이 했던 티벳에 특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듯 이 책은 주로 티벳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하늘도 산도 이국적이란 말은 왠지 감미로운 느낌마저 들어 오히려 지구가 아닌 다른 천체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라고 그 낯설음을 묘사했다. 사진으로 보여지는 풍경도 달표면이나 아니면 지구의 원형을 보는 듯 황량하였다. 특히 하늘빛은 비록 사진이긴 하지만 그 독특한 푸르름이 신비하다 못해 공격적이기까지 했다. 작가는 햇빛 특유의 마모되지 않은 야성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하늘빛은 황토색과 더불어 티벳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색깔처럼 사진 곳곳에 묻어 있었다. 그러한 하늘을 이고 생명 이전의 땅을 밝고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 문명보다는 자연에 순응하며 신과 조화롭게 살고 있는 그 사람들을 일탈을 꿈 꿀 때마다 떠올리게 된다. 비록 우리네의 관광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순환의 땅엔 모독이 될지 모른다 해도.. 노 작가의 사유와 타문화에 대한 관조를 차분한 음성으로 그려나간 이 책은 수다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여름 휴가로 텅 비어버린 도심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일상을 안타까워하며 낯설지 않은 책장을 펼쳐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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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여행기에 이런 제목을 붙일 수 있는 작가는 박완서 선생뿐이리라. 자신이 스스로 속물임을 인정하지만 사실은 속물 근성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는 선생의 글은 늘상 실랄하면서도 따뜻하다. 아마도 비판보다 자기 반성이 앞선 겸손함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티벳을 여행하면서 갖가지 생각들을 하면서 “한 마디로 관광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완전 순환의 땅에겐 모독(冒瀆)”이라고 자괴하고 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천혜(天惠)의 자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름지고 풍족한 땅이 아닌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티멧인에 대한 애정과 안쓰러움이 중간중간에 드러난다. 이미 중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생기기 시작하고 상대적 빈곤감에 지친 사람들을 비루한 걸인으로 만들고, 자연친화적인 그들의 삶이, 신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만들어진 문화 유산이 그들을 지배하는 이민족에 의해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는 것을 보며 남의 일 같지 않은 감상을 적고 있다.
온갖 환락과 사치를 누리면서도 염세적인 문명인과 인간 정신의 아득한 심연, 극한까지 도달한 그들이 밑바닥을 막차고 도달하고자 하는 높은 정신의 경지를 지향하는 그들의 삶 모두에서 안타까움과 아이러니를 느끼는 선생의 생각은 꾸밈없는 자연을 마냥 경탄하지만도 아니 하고 그들의 빈곤과 굶주림을 멸시하지도 않는 순례객의 속 깊은 상념에서 나온 것이리라. 수없는 마음 속 다짐도 속절없이 쇼핑 센터에 갈 때마다 카트 가득 물건을 담아대는 내 속된 욕심도 티벳을 여행하게 된다면 아주 잠시라도 멈춰질 수 있을까.......? 선생의 글을 따뜻하지만 실랄한 위안이다. [인상깊은구절] 우리는 말을 잃고 숨을 죽였다. 호숫가에서 잠시 쉴 때였다. 소설도 잘 쓰지만 시인이기도 한 김영현이 마침내 벌떡 일어서서 호수를 향해 일갈을 했다. 글로 옮기기 민망한 쌍욕이었는데 가슴이 후련해지는 절창(節唱)이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 지리적 종교적 특수성 때문에 천 년도 넘게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고, 지구상 가장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오히려 가장 자연친화적인 자급자족 사회를 이룩해 온 그들의 눈에 풍요하고 획일적인 서구 문명이 어떻게 비쳤을까. 면역성이 생기기 전의 인체처럼 , 이 순결한 문명은 세계적인 획일성 속으로 자취도 없이 흡수되고 마침내 소멸되고 말 것인가. |
| 티베트, 네팔은 세계의 지붕이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우리와는 왠지 거리가 느껴지는 외국이다. 다수의 네팔인들이 노동자라는 옷을 입고, 우리 땅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고, 히말라야를 동경하는 산악인이나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일부분을 빼고는 우리의 관심 분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국이다. 역시 여행기는 작가의 능력에 따라 읽는 재미를 좌우한다. 우리 시대의 노작가인 박완서님의 필력은 우리가 잊고 있던 깨끗한 자연 그대로의 옛모습까지 떠올리며 자상하게 친절하게 아직도 처녀지인 그 모습을 재현시키고 있다. 여러 권의 여행기를 통해 네팔과 티베트 두 나라의 모습을 읽고 상상했지만 이 책만큼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온 책은 없었다. 그건 아마도 도시 문명에 찌들지 않았던 우리의 옛모습을 기억하는 노작가의 연륜 탓이 아닐까? 한 장 한 장 공들여 찍은 사진과 어우러진 세상. 종교와 자연의 힘이 물씬 느껴지는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
| 박완서님이 쓴 모독. 그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의 삶을 어줍잖은 글로 옮겼다고 해서, 작가 스스로 "모독"이라고 표현했다. 뒷부분의 여행기는 예전의 글로 대신했다고 하는데, 좀 부실한 느낌이 있긴 하다. 하지만, 티벳에서 보고 느낀 점들을 써 내려간 박완서님의 글은 역시 노작가다운 원숙함이 느껴졌다. 특히 같이 동행한 이가 찍은 티벳의 사진들이 쓸쓸하면서도 광활한 이국의 정경을 생생히 전해 준다. 난 1999년에 캄보디아에 있으면서 이 책을 읽었는데, 책을 읽은 후에 육로로 어떻게 티벳이나 네팔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나 고민했었던 기억이 있다. 책이 작고 분량이 많지 않아서 읽는데 어려움이 없이 잘 넘어가는 편이다. 매일 도시의 일상에 쥐어살다가 가끔은 솜씨좋은 글쟁이가 감칠나게 써놓은 이국의 모습에 취해보는 것도 기분전환에 좋지 않을까? |
| 어딘가를 여행하고 와서 쓴 글이라면 필자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읽는 이로 하여금 책장을 덮을 때까지 여행지에 대한 동경과 글쓴이에 대한 부러움으로 들뜨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박완서 선생이 티벳과 네팔을 다녀와 쓴 여행기의 제목은 모독(冒瀆)이다. ‘신을, 국가의 명예를, 나를....모독하지 마라’ 영화에서나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지만 여행과 모독이란 단어는 뭔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일곱 개의 도형이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테트리스는 아니더라도 뭔가 연상은 되야할 것인데 아쉽게 그러지 못했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네, 열대의 바람 속으로, 이런 흔한 제목이 아니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노작가만의 깊은 뜻이 숨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가로운 나그네는 아닐지라도 생활에서 벗어나 어딘가 여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여행지를 익명의 자유로움 속에서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평범한 여행지라도 여행자에겐 특히 여행기를 쓰는 필자에겐 여행지를 한껏 추켜올려 아름답게 쓸 수 있고 떠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행기의 제목은 모독이다. 무엇을 더럽히고 있는지, 누가 누구를 모독하고 있는지 봐야만 했다. 토요일이면 자주 찾는 인근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쉽게 발견했다. 예전에 누군가의 글에서 이 책을 인용한 걸 본적이 있어서 주저 않고 집어 들었다. 그림이 많고 종이가 두꺼운 편이라 도서관에 앉아 다 읽을 수 있었다. 제목이 주는 인상대로 책을 읽는 동안 편하지 않았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너무 아름답다고 호들갑 떨고, 조금 예쁜 것은 너무 이뻐하며 안달하곤 한다. 한마디로 너무 쉽게 감동하는 것이다. 작은것에 감동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없는 것은 없는 만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사랑과 배신 술과 향락, 희로애락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티벳과 네팔의 땅과 사람들은 여지껏 너무 아름답고 신비롭게만 그려져 그들의 이면을 본 작가는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그들은 ‘모독’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나이가 느껴져 그럴 수도 있지만 그만이 가진 겸손함은 치앙마이가 굽어보듯 두렵고도 경건하다. 4월의 눈부신 날씨를 즐기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숨어든 내 마음이 서늘해진다. ‘우리의 관광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완전 순환의 땅엔 모독이었으니. 당신들의 정신이 정녕 살아 있거든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주오, 랏체를 남길 말은 그 한 마디밖에 없었다.’(본문 208~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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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5 써주는 글보다는 《모독》 박완서 글 민병일 사진 학고재 1997.1.25. 《모독》은 2018년에 처음 장만했다. 그때 나는 일에 묶여 살았다. 일기도 쓰지 못했다. 집밖이며 나라밖이며 아무튼 바깥이 몹시 궁금할 때 장만했다. 박완서 님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닌 듯하다. 다 다른 곳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서 꽃을 피운 아름다운 이야기를 쓴다. 빼앗고 빼앗기며 싸우던 숱한 슬픔이 깃든 여러 나라를 기웃기웃하는 이야기를 쓴다. 그런데 이 책을 쓴 박완서 님은 ‘여행을 다녀와서 글을 써주기로 하고 따라가’는 나들이였다고 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녀온 셈이다. 게다가 사진사가 붙으니 굳이 품을 들일 일도 없고, 짐도 가벼웠겠지. 티베트는 어떤 나라일까. 글과 사진으로 보자면, 풀이 없고 먼지가 자꾸 일고 높직한 땅이라는데, 한때 집짐승을 키우며 떠돌다 머문 사람들이 불교에 몸을 담고서 마음을 닦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라는데, 그곳은 언제부터 사람들이 바닥에 온몸을 엎드려 절을 하면서 나아가는 곳이 되었을까? 이제 티베트라는 나라는 없이 중국이 집어삼켰는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척 궁금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으로는 이 궁금한 곳을 하나도 풀지 못한다. 《모독》에 나오는 티베트 사람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본다. 티벳사람이랑 우리랑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 멀잖은 우리 할매 할배에, 예전 사람들 모습을 닮았다. 꾸미지 않는 얼굴에 차림새이다.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 그을렸다. 보고 자란 탓일까. 큰 나라에 가려져 나라 밖으로 나아 가지 못하고 억눌린 삶이 시간을 멈추어 놓았을까. 총칼에 쉽게 무너져 내렸을까. 풀꽃나무보다 광물이 넘치는 나라 못잖게 번쩍번쩍 번쩍하는 불상 이야기가 흐른다. 《모독》에서 205쪽을 가득 채운 사진에 빨려든다. 옷이나 귀걸이나 목걸이나 구슬이 아닌, 얼굴빛에 빨려든다.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이 웃는다. 웃는 밭고랑에서 빛이 나온다. 온통 하얗게 바르며 꽃처럼 꾸미는 아가씨나 여왕한테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웃음빛이다. 사람으로서 살아오면서 해와 바람과 비를 맞아들여온, 살림하는 사람이 뿜어내는 빛이다. 책이 나온 지 스무 해 남짓이라지만, 글이나 사진이나 줄거리가 묵었다기보다는, 어쩐지 속은 듯한 글과 사진이지만, 돈 한 푼 안 들이고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서 “써 주는 글”이라지만, 주름살을 녹여내는 웃음 하나가 마음으로 스민다. 어쩌면 이 모습을 먼발치에서 사진으로 만나려고 이 책이 나한테 왔을 수 있다. 나도 언젠가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싶다. 나는 스스로 번 돈으로 찾아가고 싶다. 무겁더라도 사진기도 손수 챙겨서 찍고 싶다. 내 발로 딛고, 내 어깨에 지고,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으로 느낄 적에, 비로소 나다운 글이 태어나리라 본다. 집도 삶도 숲을 살피면서 살아가기에 웃음빛이 태어난다면, 내가 볼 곳과 나아갈 곳은 아주 환하다. 이 봄날에 봄볕을 듬뿍 머금자. 마을을 걷고, 마을 둘레부터 느껴 보자. 2024. 3. 2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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