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을 연다는 것, 스스로 자신의 껍질에서 기어 나온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만큼 많은 용기와 지혜를 필요로 했다. 그녀는 그 용기와 지혜가 자신에게 있는지 종종 생각해 보았다. 고정적인 사고방식과 선입견 내지 본능적인 자기방어나 이기심이 용기와 지혜라는 것들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런 용기와 지혜는 항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예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먼저 마음을 여는 것이었고, 그것은 더 큰 용기와 지혜를 얻기 위한 작지만 힘든 첫걸음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이상과 현실의 교차선 위에 서 있는 자신을 의식할 때, 주문처럼 이 말을 중얼거렸다. "낙하산과 마음은 열리지 않으면 추락하고 맙니다. 낙하산과 마음은 열리지 않으면 추락하고 맙니다. 낙하산과 마음은 열리지 않으면 추락하고 맙니다.…"』 정은이가 책을 냈단다. 정은이는 내 초등학교 친구다. 작년이었는데, 그냥 방치해두고 열어보지도 않던 이 메일 계정이 혹시 없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들어가 보았다가 도착한지 한 달이 지난 이 메일을 발견하였다. 정은이의 메일이었는데, 뜬금없이 문학사상사의 장편소설문학상에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정은이가 글을 쓰는지도 몰랐었다. 단지 지난해에 한국을 다니러 왔을때 대학로에 가서 너무나 웃기는 소극장연극을 같이 보았었다는 기억밖에. 내게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국어를 사용하는 나조차도 생활에 치여 관찰력과 감수성을 잃어 가는 만큼 말을 잊어버렸다. 어떨 때는 말할 때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끙끙대고 한다. 언어도 때로 익혀 내 것으로 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것이 아무리 태어나면서 배운 모국어라도. 그런데 미국에서 미국학교를 나오고 미국회사를 다니는 정은이가 국어로 장편소설을 썼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노력을 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정은이를 글쓰는 일에 몰두하게 했을까. 정말 궁금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난봄에는 문학사상사에 전화를 걸어 오정은의 펭귄의 날개는 언제 나오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은이에게 책을 받았다. 정은이는 초등학교6학년 때 내가 전학 갔을 때 만난 친구다. 나는 처음 전학가서 부딪히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외떨어져 있었다. 얼마나 어리버리하게 보였을까. 엉뚱하고 대범한 친구였었다. 정은이는. 정은이는 중학교 3학년 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멀리 있었으면서도 늘 함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은 삐딱했던 사춘기시절과 엄청난 문화충격 속에서 가치관의 혼돈을 겪은 대학시절에 나의 너저분한 생각의 찌꺼기를 멀리 있는 정은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묻어서 보냈었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자기를 표현하는데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 정은이의 글쓰기는 스스로에게 마음을 여는 첫걸음이었을 것이다. 정은이의 글을 읽었다. 오랜 시간 알아온 친구인데 나는 정은이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했다. 엄청난 관찰력과 감수성은 존재하는 아주 작은 것에 대해서도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할거라는 생각을 했다. 정은이가 살아오고 살고 있는 세상이 내가 살아오고 살고 있는 세상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다름을 느꼈다. 인간관계를 엮어주는 사랑이나 우정에 대한 생각이나 자아나 행복에 대한 생각에서도. 하지만 이질감을 느꼈다기 보다는 함께 나누어야 할 대화를 즐겁게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은이의 세상에 대한 따듯한 시각이 부러웠다. 주인공인 예리가 공원 벤취에 앉아 목 놓아 울고 있을 때 잔돈을 구걸하던 걸인이 "울지 마, 우는 건 너무 슬퍼‥."하면서 동전이 반쯤 찬 종이컵을 건네주고 사라지는 장면에서 나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사람을 이렇게 따듯하게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이해하는 한 "펭귄의 날개"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행복에 대한 것이다. 『유년시절 그녀는 친구들과 같아지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고 믿었다. 흰 피부, 긴 다리, 탄력 있는 통통한 엉덩이가 행복의 껍질이었고, 소수의 행렬에서 벗어나 다수의 행렬에 끼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청소년기에는 끓어오르는 불만과 의문을 극복하고 그녀 앞에 놓여진 과제에 충실하는 것이 행복의 준비작업이라고 믿었다. 우수한 성적, 대학입시 그리고 부모님이 그녀 앞에 펼쳐놓은 계획표에 따라 성과를 올리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고 믿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끊임없이 반항하면서도 속으로는 부모님의 기쁜 모습을 보는 것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들에 대한 당연한 보답이라고 여겼고, 졸업이 가까워지자 안정된 직장, 보장된 미래가 행복의 문의 열쇠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마 이런 생각은 주인공 예리의 유년시절의 생각이자, 대학입시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청소년과 부모님의 생각 일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 예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고, 새로운 삶에 도전한다. 예리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어떤 사건이 예리를 변화시켰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으면 한다. 그래서 『가끔 소리를 죽이고 있으면 마음의 상자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가슴이 허했던』 정은이의 글쓰기를 관심을 가지고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펭귄의 날개를 읽으면서 미국의 여러 도시를 구경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기발한 묘사에 의해서 그려진 그곳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 정말 오랜만에 본 소설책이기에..밤을 세워 봤다.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고,공감할수 있는 글들이 많아 밑줄까지 쳐가며 읽었다. 문장구사력에 신인 작가라는게 안 믿어질 정도였다. 새롭다는게 더 어울릴까? 아무런 가치없이..사는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자아를 찾기위해 끝까지 나아가는 주인공을 보며..난 밤을 설쳐야했다. 옛사랑이 생각나 나랑 비교도 해보고..읽어갈수록 책을 놓을수가 없었다. 우정은 노력으로 만들어지고,사랑은 느낌으로 만들어진다고..우정은 의지이고,사랑은 본능이다..라고 생각하는 주인공처럼.. 나두 우정은 아이스크림과 같다고..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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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절대로 날수없는 펭귄의 날개, 그동안 펭귄을 보면서 펭귄에게 있는 날개의 의미를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하였다. 이 책의 제목을 발견한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결코 날수 없는 펭귄의 날개였다는 생각이 의미있게 떠 올랐고 더우기 2002년 문학 사상사 장편 소설 문학상 당선작이라는 알림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주 두꺼운 소설이다. 한장 한장 활자로 가득 찬 355페이지의 분량의 소설 처음 책을 읽기 전에는 그 분량에 약간 벅찰 것이라는 생각도 했고 작가의 약력이나 내용의 스토리가 먼 이국땅이라는 것에 조금 버겹지 않나했지만 이런 걱정은 기우였다. 긴 장편 소설의 단점을 보완하기라도 하듯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조금은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 덕에 천천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 같다. 작가의 성장 소설의 한 부류하고 말 한 이 소설, 사랑이라는 의미와 인간 관계에 대해서 결코 날수없는 펭귄을 생각해낸 것 같다. 때론 힘들고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삶, 그런 세상을 혹은 나 자신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소설이며 글의 흐름과 묘사, 문장력이 탁월하다. 역시 당선작 다운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는 일종의 배신감이 남긴 씁쓸한 뒷맛 때문일까. 예리는 언제나 혁진 앞에서만큼은 태연하고 당당해 보이고 싶었다.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사라졌다 제멋대로 불쑥 나타난 그라는 존재를 보기 좋게 묵살해 버리고 싶었다. |
| 나는 예스24의 책 소개 광고와 아래의 독자리뷰를 보고 이 책을 구입했다. 단숨에 읽기에는 분량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지루했던 건 아니다. 작가는 중3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지금은 30대 후반의 회사원이다. 그리고 이제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대단히 놀라운 필력이나 묘사력이 돋보인다고 말할 수 없다. 문장의 흐름이 매우 유연하고 구성도 밀도있게 이루어져있지만 최근 소설들에 비하면 약간 세련미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어린 시절 특별하게 다가왔던 소년 혁진과 예리의 곁을 지키고자 하는 현재의 혁진, 의문만 잔뜩 남기고 죽은, 혁진의 친구이자 주인공 예리의 약혼자 선우, 출장지에서 만난 바다 등과 만나고 헤어지는 연애의 과정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순수하고 아름답지만 달리 보면 감상적이고 너무나 드라마적(이를테면, 가을동화, 겨울연가 풍)이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드디어 갖가지 의문들이 시원하게 풀리지만 출생의 비밀 부분은, 비밀을 푸는 실마리로 볼 수 있는 소설적 장치들이 지나치게 '우연'으로 놓여있어서 맥이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특별한 미덕 또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사춘기때부터 적응해야했던 이민생활동안 모국어를 많이 잊어버렸을 법도 한데 장편소설 한권을 완성해낸 작가의 성실함이 대단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무엇보다 감동적이고 가장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이 바로 글쓴이의 성실한 노력이다. 그리고 주인공 예리의 내면을 그림처럼 그려보이는 솜씨도 좋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서술도 섬세하고, 주인공이 본래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용기있고 아름다운 사람인지 다시금 알아보게 해준다. 작가 또한 어렸을 적 꿈을 한가지 이룬 것으로 끝내지 않고 앞으로도 좋은 작품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 선택하는 자인, 선우에 의해 선택받아지고 주변의 상황들을 주도한다기보다는 이끌려들어가는 주인공 예리가, 결국은 선택받아졌던 것들을 버리고 선택하는 자, 의 자리에 서서 자의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확립하게되는 과정이 성장소설의 한 측면이라 일컬어질 수 있다면 그런가보다, 한다.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는 황제펭귄을 예리 자신과 동일시하며 황제펭귄의 날 수 없는 서글픔에 자신 또한 억눌려지는 듯한 압박감에 내내 웅크려있는 듯하지만, 종내는 선택받는 자였던, 선택하는 자가 되었던, 예리가 예리이듯이 날지 못하는 황제펭귄은 언제까지라도 날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날지못하는 속박감 대신에 다른 측면, 넓은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자유, 짝을 찾아서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확고한 의지, 를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예리 또한, 긍정적인 자기발전을 하게 되는것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 약혼자인 선우를 잃게 되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 열려지면서 극도의 절망적인 상황을 맞게 되지만, 그럼으로써 한차원 더 높게, 성숙, 곧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인가, 한다. 해도 왜 성장으로 가는 인생의 여정에는 아픔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인가, 그 아픔들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속에 허우적거리다 내처 앉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성숙,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네는 이른바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인가... 라는 한숨섞인 탄식이 새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중간중간의 매끄럽지 않았던 문체들, 재미교포작가를 감안하더라도 아름다운 미사여구도 좋지만 간결하게 읽혀지지 않은 단어들의 조합에서 간혹 끊겨지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보면 지루하지 않아서 짧은시간에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의문점이라 한다면 본문에서는 예리의 출생, 생부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게 매듭지어졌던 것 같은데 - 예를 들면 그때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아이, 라든지 - 작품해설에 의하면 동복이부라 규정지어 해설되어 있어서 약간은 의아했었던 부분이다. |
| 2002년도 문학사상사 장편소설문학상 당선작이란다. 작가는 66년생으로 15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뉴욕의 대학을 거쳐 IBM의 컴퓨터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매니저를 거쳐 현재는 IBM의 본사 금융지원사업부 마케팅 분야 간부로 근무하고 있다는 설명이 책날개에 올라와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꽤 잘 나가는 대기업의 간부 사원이 자신이 평상시에 쓰지는 않지만, 잘 알고는 있는 다른 언어로 장편 소설을 쓰고, 그것이 문학상을 수상한 셈이다. 책을 읽고 있는 내게 아내가 재밌냐고 물었다. 별로, 라고 시큰둥하게 말하면서 위의 내용을 부연설명 했더니 그 여자 재주도 좋네, 라면서 부러워한다. 이 부분에서 문득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에 품고 있던 의구심 하나가 튀어나왔다. 다른 모든 예술 장르에는 신동이라는 것이 있다. 피아노 신동이라느니 어린 명창이라느니가 간혹 매체에 등장하고는 한다. 시에도 신동이 있어서 아직 발음도 정확하지 않은 북한의 어린 소녀가 쓴 시가 소개된 적도 있다. 천재적인 능력을 부여받아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신동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읽어본 적은 없지만 귀여니라는 어린 친구가 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걸 두고 소설 신동이 났다고 하기에는 어딘지 낯간지럽지 않은가. 그러니까 소설은 하늘이 내려준 천부적 자질의 개입 여지가 가장 적은 예술 장르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소설은 모든 예술 장르 중 가장 인간적인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자질보다는 그의 삶의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는 경험 자체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장르인 것이다. 이국땅에 살고 있는 삼십대의 여성이 이십년 전에 사용을 중단한(물론 완전한 중단은 아닐테지만 그 이후 그녀는 영어를 일상 언어로 삼아 생활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미국땅의 주류 사회에 편입되어 있지 않은가.) 모국어로 소설을 쓰고, 그것으로 모국의 한 문학상을 수상한 데에는 이런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소설은 흥미롭지 못하다. 예리가 사랑한 선우는 비행기 사고를 당한다. 사체를 찾지는 못했지만 그는 죽은 것이 확실하다. 예리는 선우를 잊지 못한다. 이런 예리 앞에 혁진이 나타난다. 혁진은 어린시절 예리와 은근하게 애정을 나눴던 사이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상태다. 이건 선우가 없는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그 사이 예리는 바다라는 남자를 만난다. 하지만 그를 통해 선우를 잊을 수 있는 단초를 제공받지만 그녀는 그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 사이 예리는 여행중에 제시라는 여성을 만나고 그와 죽은 선우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리는 죽은 선우를 의심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리와 제시가 배다른 자매지간이라는 것이다. 꽤나 복잡한 관계들이다. 여기에 꽤 많은 우연적 만남들과 충분히 납득이 되지 않는 기다림과 슬픔들이 소설 전반에 골고루 포진되어 있어 즐거운 독서를 가로막는다. “이 작품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근원에 대한 무거운 주제를 유려한 문장력으로 완화시킨 강렬하고 은밀한 매력을 갖추었다”라고 심사를 맡은 김윤식 교수는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저 덕담에 불과해 보인다. 타문화권에서 생활하는 작가의 경험이 이국적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되돌아보게도 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