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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저 꽃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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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꽃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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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꽃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환하게 피어나는

  저 꽃덩어리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는 거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이다

  몸뚱어리가 시체처럼 굳어지는 거

  그거

  밤새 술 마시며 너를 부르다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하는 거

  비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져 뒹구는 꽃떨기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 박영근, 「저 꽃이 불편하다」

 

 

 

 

 

눈앞에서 환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환하게’라는 말 속에 이미 답이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눈앞에서 피는 꽃을 보면 마음이 환해진다. 꽃은 함부로 제가 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주 느린 속도로 꽃은 제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그런 꽃을, 시인의 말대로라면 “저 꽃덩어리”를 시인은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모를 일이다”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저 환한 꽃을 외면하는 마음을 모른다. 피는 꽃을 외면할 이유가 없다. 꽃과 무슨 원수를 진 일도 없을 텐데, 피는 꽃을 보면 자꾸만 고개를 돌리게 된다. 고개를 돌리면서도 시인은 “불붙듯 피어나/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 앞에서” 헐떡인다. 돌려 말하면 시인이 환하게 피어나는 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헐떡임 때문이다. 불붙듯 피어나는 꽃을 보면 시인은 가슴이 뛴다. 꽃은 자기 속을 완전히 드러낸다. 속속잎까지 벌어진 꽃 앞에서 시인은 어쩔 줄 모르고 헐떡이기만 한다.

 

제 몸을 벌린 꽃 앞에서 헐떡이던 몸뚱어리는 이내 시체처럼 굳어진다. 시인은 자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밤새 술을 마신다. 술을 마셔도 마음속에서 들끓는 욕망은 사그라질 줄 모른다. 술을 마시며 시인은 “너를 부른다”. 시인이 말하는 ‘너’가 “저 꽃덩어리”인 것은 분명하다. 시인이 “그거”라고 부르는 대상. 타자라고 이름을 붙여도 상관없겠다. 시인은 도대체 너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너를 보면 시인은 불붙듯 온몸이 피어나지만, 동시에 너를 보면 시인은 시체처럼 굳어지는 몸을 느낀다. 삶과 죽음 사이에 너-그것이 있다. 너는 인간이면서 사물이다. 아니, 인간과 사물 사이에 ‘너’가 있다. 시인은 “네가 오면 쌍소리에 발길질”을 한다. 맨정신으로는 너와 마주할 수 없다. 쌍소리를 해도 너는 그 자리에 있고, 발길질을 해도 너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자리에 있다. 시인의 인식(=폭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너는 있다. 너와 함께 있고 싶은 시인은 참으로 미칠 지경이다.

 

비바람에 떨어진 꽃떨기가 땅위를 뒹군다. 핀 꽃을 보고 불붙듯 피어난 시인의 몸은 떨어진 꽃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시인은 그 빛바랜 입술에 침을 내뱉는다. 침을 뱉는 행위는 상대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꽃이 피는 일이나 꽃이 지는 일은 자연이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꽃이 진다. 시인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때가 되어 땅위를 뒹구는 꽃을 향해 침을 뱉는다. 너를 향한 증오가 그만큼 깊다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시인은 저 꽃을 이리도 불편해하는 것일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흐느끼는 거”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흐느끼는 나’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우선 흐느끼는 시인이 있다. 시인은 너와 함께 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저 꽃을 바로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고작 하는 일이 떨어진 꽃을 보고 흐느끼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시인은 비바람에 휩쓸리는 꽃떨기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고만 있다.

 

‘흐느끼는 나’는 한편으로 비바람에 떨어진 꽃으로도 읽힌다. 떨어진 꽃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흐느끼고 있다. 때가 되어 떨어졌는데도, 꽃은 왜 이리 흐느끼는 것일까? 시인은 떨어진 꽃떨기에서 자기 모습을 본다. 비바람이라는 외부 조건에 속절없이 제 몸을 떨어뜨린 꽃이다. 때가 되었다는 건 달리 말하면 그렇게 살도록 운명이 지어졌다는 말이 아닌가? 때가 되면 피는 꽃은 때가 되면 지는 꽃과 다르지 않다. 한 자리에 뿌리를 박은 꽃은 비바람에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제 자리를 지킨다. 시인이 너=꽃을 향해 쌍소리를 하고 발길질을 해도 자연으로서 이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꽃도 울고, 시인도 울 수밖에 없다. 시인에게 꽃은 자기이면서 곧 타자이다. 시인은 자신이 열망하는 대상 앞에서 헐떡이고, 동시에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을 향해 침을 뱉는다. 한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한없이 자기를 증오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한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데서 시인은 “내 끝내 혼자 살려는 이유”를 찾는다. 우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한 나르시스와 같은 상태이다. “속속잎까지 벌어지는 저것”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 한없이 자기를 증오(사랑과 통하는 증오!)하는 데서 시인은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고 싶은 데도 시인은 차마 너를 떠나지 못한다. 너를 향한 사랑이 이토록 깊은 것일까? 네가 떠나면 시인 또한 떠나야 한다는 걸 시인은 잘 알고 있다. 돌려 말하면 시인과 너는 한울타리에 묶여 있다. 둘이면서 하나인 존재는 떨어져도 하나가 되고, 붙어 있어도 둘이 된다. 혼자 살려고 해도 그리 할 수 없고, 네 곁을 떠나려고 해도 그리 할 수 없다. 시인은 ‘저 꽃이 불편하다’는 제목으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어떤 경우에도 타자는 편한 대상일 수가 없다. 하나와 둘 사이에서 타자는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니고, 타자이면서 타자가 아닌 삶을 시인은 ‘저 꽃’과 더불어 살고 있는 셈이다.

    

 

o*****s 2019.01.15.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대궁밥 먹고 자라며 꽃이 된 시인 (저 꽃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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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62대궁밥 먹고 자라며 꽃이 된 시인― 저 꽃이 불편하다 박영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2002.11.15.  낫을 쥐어 억새를 끊습니다. 큰아이 손에 억새를 한 다발 안깁니다. 나도 억새를 한 다발 안습니다. 가을이 깊으면서 억새는 눈부시도록 하얀 꽃씨를 터뜨립니다. 바람 따라 한들거리는 억새는 부드러우면서 해맑은 빛깔로 고개를 까딱여요.  억새꽃씨를 쓰다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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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62



대궁밥 먹고 자라며 꽃이 된 시인

― 저 꽃이 불편하다

 박영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2002.11.15.



  낫을 쥐어 억새를 끊습니다. 큰아이 손에 억새를 한 다발 안깁니다. 나도 억새를 한 다발 안습니다. 가을이 깊으면서 억새는 눈부시도록 하얀 꽃씨를 터뜨립니다. 바람 따라 한들거리는 억새는 부드러우면서 해맑은 빛깔로 고개를 까딱여요.


  억새꽃씨를 쓰다듬고, 억새줄기를 만집니다. 끊은 억새를 들고 논둑길을 걷습니다. 밭자락 한쪽 흙으로 된 거님길에 억새를 곱게 깔아 놓습니다. 요새는 시골에서도 흙길이나 논둑길에 으레 시멘트를 덮지만, 나는 우리 보금자리에 시멘트를 덮고 싶지 않습니다. 애써 낫으로 억새를 끊어서 흙바닥에 깔아 놓습니다. 시멘트를 덮은 길에서는 아이들이 뛰놀다 넘어지면 무릎이나 낯이나 팔꿈치가 쉬 까지는데, 짚을 깔아 놓은 흙바닥에서는 아이들이 뛰놀다 넘어져서 살짝 긁히거나 까질 뿐, 또는 멀쩡하지요.


  가을 억새를 끊어 흙바닥을 덮고서 시집 한 권을 손에 쥡니다. 이제 이 땅에 없고 저 흙에 몸을 맡긴 옛 시인 한 사람을 그려 봅니다. 어느새 흙으로 돌아가서 온누리를 홀가분하게 지켜볼, 또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풀씨가 되어 온누리를 나긋나긋 바라볼 숨결을 헤아려 봅니다.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길)


이제 고개를 숙인다 온통 쇼핑몰이 되어 흘러가는 길 / 인파와 소란 속 / 무스탕을 걸치고 웃고 있는 네거리 현대백화점 / 마네킹 앞에서 // 맨주먹의 이력서를 쓰는 마음으로 / 그러나 몇번이고 고쳐써도 지워낼 것은 / 나밖에 없다는 듯이 / 그것을 똑똑히 확인하는 자세로 (고개를 숙인다)



  1958년에 태어난 박영근 님은 1984년에 첫 시집을 선보였고, 2002년에 다섯째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를 선보입니다. 이녁은 2006년에 흙으로 돌아갔고, 2007년에 유고시집이 나옵니다. 첫 시집부터 다섯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또 유고시집에서도, 박영근 님이 노래하는 이야기에는 ‘취업공고판’하고 ‘공장’이라는 말마디가 곧잘 흐릅니다. 그리고 ‘꽃’이라는 말마디가 ‘어머니’하고 ‘나’ 사이에서 가만히 어우러져요.


  전북 부안이라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뒤, 인천이나 서울 같은 도시에서 공장 어귀에서 땀을 흘린 한 사람은 기름때와 땀과 일옷 사이에서 꽃을 그립니다. 어릴 적부터 늘 곁에 있던 꽃을 되새깁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기름밥을 먹던 나날에는 도무지 만날 길이 없던 꽃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이 꽃을 문득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으면서 어쩐지 “저 꽃이 불편하다”고 한 마디 내뱉습니다.



그러나 집이 어디 있느냐고 성급하게 묻지 마라 / 길에 제가 가닿을 길을 모르듯이 / 풀씨들이 제가 날아갈 바람 속을 모르듯이 / 아무도 그 집 있는 곳을 가르쳐줄 수 없을 테니까 /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흰 빛)



  날마다 먹는 밥 한 그릇에 담긴 쌀알은 나락이 맺은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꽃이 핍니다. 그냥 손쉽게 사다 먹는 쌀이 아니라, 이 땅 저 너른 들에서 자란 나락을 시골지기가 손으로든 기계로든 벤 뒤에 햇볕이나 건조기에 말리기에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쌀입니다. 꽃이 지고서 맺는 열매인 쌀이요, 그러니까 열매를 먹는다고 할 적에는 꽃을 먹는다는 소리도 되고, 꽃으로 피어나는 씨앗을 먹는다는 소리도 되어요.


  시인 박영근 님은 흙을 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기름밥을 먹는 어른으로 살림을 지었습니다. 이른바 ‘노동자 시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녁은 노동자 시인이면서도 이녁이 어릴 적에 언제나 곁에서 누리던 시골집을, 논밭을, 들을, 바다를 멧자락을 되새깁니다. 공장 담벼락만 바라보지 않고, 공장 담벼락 한쪽 귀퉁이에서 조그맣게 고개를 내미는 들꽃을 함께 바라봅니다. 골목에서도, 아파트 꽃밭에서도,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아무리 도시가 커지고 높은 건물이 올라서더라도 어디에선가 반드시 고개를 내미는 들꽃을 으레 바라봅니다.



때로 어떤 시간은 아무것도 떠나보내지 않는다 / 그곳을 떠나서도 내 안에서 / 봄이면 어김없이 판자울타리 개굴창에 개나리꽃들 피어올랐고, / 먼 데서 샛강물이 밤새 흘려보내던 뜨개기 같은 소식들 (문장수업)



  흙으로 돌아간 시인 한 분은 왜 “저 꽃이 불편하다”고 노래해야 했을까요. 그냥 저 꽃하고 함께 흙에 뿌리를 내리면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굳이 도시에 남아서 도시 노동자로 있기보다는, 이녁이 나고 자란 어린 날 너르고 따사로운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서 흙을 사랑하고 “저 꽃이 사랑스럽다”고 노래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 녹슨 철조망에 /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뜨리다 /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 흐르는 바람에 / 햇살 속에 (꽃들)



  참으로 많은 시골사람이 도시로 와서 도시사람으로 바뀝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90퍼센트가 훨씬 웃도는 숫자가 도시에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오늘 도시사람이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만 거슬러 올라가도, 또 할아버지나 할머니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모두 ‘시골사람’ 뿌리이기 마련입니다. 몸은 도시에 있되 마음은 아직 시골하고 이어진 삶이라고 할까요. 몸은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 있어도, 마음은 꽃이나 풀이나 나무 곁에 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시인 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 시인 한 사람은, 꽃을 바라보면서 마냥 꽃내음을 누리거나 즐기지 못합니다. 자꾸만 “저 꽃이 불편하다”는 마음이고 맙니다. 이녁 뿌리인 흙을 밟거나 만지지 못하는 삶으로 공장 담벼락에 서서, 이녁 몸통이던 흙을 가꾸거나 일구지 못하는 살림으로 아파트 꽃밭 앞에 서서, “저 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는지 망설이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돌아보면 / 옛집 마당가엔 지금인 듯 싸락눈이 붐벼 / 개오동나무는 하얗게 머리를 풀고, / 애비의 대궁밥을 기다리던 소년이 / 애써 고개를 들어 / 아잇적 어머니 얼굴을 더듬는다 // 문득 세월이 잿더미 속에 묻어둔 불씨를 찾아 / 엄동에 샙겨밥을 짓고, / 집강아지 한 마리 / 정짓간 환한 아궁이 불 곁에서 / 잠이 든다 (문득 세월이 잿더미 속에서)



  애비가 물려줄 ‘대궁밥’을 기다리던 앳되고 가녀린 아이를 그려 봅니다. 노동자 시인으로 숨을 거둔 어른이 아닌, 아버지 대궁밥을 침을 꼴깍 삼키면서 말없이 가디리던 그 앳되고 가녀린 아이를 그려 봅니다.


  그 아이네 그 시골 아버지는 이녁 아이가 ‘대궁밥을 기다리는’ 줄, ‘침을 삼키면서 바라는’ 줄 뻔히 알았을 테지요. 그 시골 아버지는 이녁 배가 차지 못하는 밥을 먹으면서도 일부러 ‘밥맛 없다’면서 밥그릇을 물리며 대궁밥을 잔뜩 남겼을 테지요.


  대궁밥을 먹고 자란 가녀린 아이가 이웃을 따사로이 품는 마음을 시 한 줄로 노래하는 씩씩한 일꾼으로 살아냈습니다. 대궁밥을 기다리던 작은 아이가 이웃을 넉넉히 보듬으려는 사랑을 시 한 줄로 빚어내는 고운 숨결로 살아냈습니다.


  입으로는, 글로는 “저 꽃이 불편하다”고 읊었을지라도, 속으로는, 마음으로는, 또 깊게 우러나는 사랑으로는 “저 꽃이 곱다”고 웃음지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꽃이 어머니 같다”라고 웃기도 하고, “저 꽃이 누이 같다”라며 웃기도 하고, “저 꽃이 울 아버지 같다”라며 웃기도 했겠지요. 2016.10.2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h*******e 2016.10.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