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는 소설이 있다. 옴니버스 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87년도에 초판발행된 것으로, 당시 소시민들의 일상사를 담고 있다. 1980년대의 생활과 2001년의 생활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내면의 진솔함과 인간 생활사의 본질적인 측면은 변함없는 것이기에 '원미동 사람들'이 지금까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 같다. '원미동 사람들'에 실려있는 11개의 소설들은 각기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고, 주인공도 매번 바뀐다. 그러나 그 글들은 동시대의 '원미동'이라는 마을 안에 거주하고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하나의 소설로 묶일 수 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원미동 사람들'은, 노모를 모시고 사는 30대 부부가 어느 겨울날 부천 원미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시작된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는 그들의 이사풍경을 닮고 있다. 지금은 이삿짐전문배달업체를 이용하는 비율이 많아져 이사풍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이사가는 날의 걱정과 어수선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원미동은 그 곳을 향해 떠나는 '그' '아내' '노모'에게 한자풀이 그대로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이다. 비록 서울시민으로 남아있기가 어려워 그곳으로 가지만, 거기에는 그들의 새로운 집과 생활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미동에는 인간소외, 이기주의, 불신, 획일화와 같은 사회부조리현상과 도시공동화로 인한 빈민층의 형성과 몰락이 있었다. '불씨'에서 알만한 회사의 사원이었던 진만이 아빠는 직장에서 떨겨난 뒤 거리의 샐러리맨으로 전략한다. 물건을 팔기 위해 입을 열어야 하지만, 아무도 좀처럼 그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 어렵게 찾은 그의 청자는 터미널의 짐꾼이었다. 말에 굶주려 있었던 둘은 서로의 말을 경청해 준다. 이러한 '인간소외'는 정신병적인 한 남자가 원미산 숲속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는 설화적인 이야기 '한 마리의 나그네 쥐'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랑방 손님과 어미니'에서처럼 나이 어린 여자아이가 화자로 등장하는 '원미동 시인'에는 개인의 이기주의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평소 김반장 가게의 허드렛일을 열심히 도와주었던 몽달씨가 깡패들에게 이유없이 맞을 때, 김반장은 몽달씨를 모른다고 딱 잡아떼며 행여 자기 물건에 손상이 갈까 무서워 맥주박스를 옮긴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와 깡패가 달아나자 그제야 길길이 뛰는 시늉을 하고, 앓아 누운 몽달씨를 끔찍이도 생각해 주는 척한다. 이와는 조금 성격을 달리하지만 '일용할 양식'에도 이기주의가 그려져 있다. '일용할 양식'은 같은 동네에 있는 가게들이 손님을 더 유치하기 위해 벌이는 가격인하경쟁과 갖가지 사은품행사가 그 소재이다. 조금만 동네에서 먹고살기 위한 가게들의 상권다툼이라는 점에서, 생존권을 유지하려는 소시민의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지만, '싱싱청과물'을 그토록 모질게 몰아내는 것은 혼자 잘먹고 살겠다는 이기주의로 보여진다. 백화점과 대형할인마트의 셔틀버스 운행을 중지시키고 있는 현시점에 비추어 본다면, 그러한 경쟁이 무한경쟁시대의 발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판매자들간의 경쟁과, 그 사이에서 싸고 좋은 물건을 사려는 소비자들이 있다는 것은 똑같은 이치이다. 또한 '마지막 땅'에서 강노인의 땅에 높은 건물이 서면 집값이 오를 거라는 생각에 밭에 오물을 버리는 동네사람들 역시 이기주의로 뭉쳐 있다. 그래도 원미동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정과 양심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씨'에서 터미널의 짐꾼은 그냥 가기가 미안하다며 다시 돌아와 촛대를 사주었고, '비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에서 엄씨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봐주고 돈을 받았다. 여기에 반성하는 마음이 든 '그'는 엄씨와 기꺼이 술동무가 되어 나이까지 같다고 속여가며 친밀감을 자아내려 한다. 또한 행복사진관은 엄씨는 살림이 어려운 진만이가 다치자 병원비를 보태주기도 한다. '원미동 사람들'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지하 생활자'였다. 노동자와 계급자를 다룬 소설은 보통 지루하고 읽히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테두리를 벗어나 인간의 기본적 생활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인지 아이러니컬하게도 재미있게 읽었다. 지하에서 살고, 지하에서 일하는 지하인생인 그는 기본적인 본능인 먹고 싸는 것마저 위협당한다. 최소한의 본능도 억제하고 살아야 하는 도시빈민노동자인 그의 삶에 동정이 갔지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쩌다 집앞에 있는 개똥을 봤을 때 눈살을 찌푸리거나, 그럴 낌새가 보이는 개들을 후드려패서라도 내쫓던 내가 생각나서이다. 그렇다면 그는 개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아마 그는 사람으로 살고 싶더라도 그의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개처럼 여기저기에 몰래 볼일을 보면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의 임씨에게서도 이러한 도시빈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돈을 떼이고도 생계에 급급해 비오는 날이나 되야 돈을 채근하러 갈 수 있는 임씨는 농촌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도시로 나와 하위빈민계층이 되어버린, 도시공동화가 만들어낸 빈민이다. 이 책은 원미동 주민이 된 그녀가 지난 기억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한계령'으로 끝을 맺는다. 갑자기 걸려온 찐빵집 딸 은자의 전화를 받고 그녀는 옛기억을 더듬는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했던 은자는 미나 박이라는 밤무대가수가 되어 그녀에게 한번 찾아오라고 한다. 은자로 인해, 그리고 은자가 부른 '한계령'으로 인해 그녀는 예전의 오빠와 가족들의 기억을 떠올린다. 미래의 희망으로 시작해, 일상적인 삶에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순서로 짜여진 소설집의 탄탄한 구성은 우리들 삶의 순서를 묘사해 놓은 듯 하다. 미래의 희망에 부풀어 시작한 생활이 일상의 삶에 찌들어 갈 때쯤 과거를 돌아보곤 하는 우리네 인생사 말이다. 이 소설의 묘미는 삶의 평범함과 진실성에 있다. 지극히 평범한 원미동 사람들이 80년대 산업사회의 중산층과 빈민층을 대표하고 있으며, 그 안에 가식적이지 않은 삶의 진솔함을 담고 있다. 지금은 1980년대가 아닌 2000년대이고, 산업사회가 아닌 정보화사회이다. 그러나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빈부차, 그리고 입에 풀칠하겠다고 바둥대는 중산층과 빈민층일 것이다. 변한 것이 있다면 원미동 주민들처럼 이웃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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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귀자, 「원미동 시인」
양귀자의 「원미동 시인」은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제목에 나타나는 대로 이 연작소설은 원미동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다. ‘원미동(遠美洞)’은 서울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서울 근교의 신도시에 해당되는 셈이다. 1980년대에 발표된 이 소설은 산업화의 그늘에 드리워진 한국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원미동 사람들을 중심으로 펼쳐낸다. 원미동 시인 에는 일곱 살짜리 서술자가 나온다. 마흔이 넘은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딸만 다섯인 집안의 막내딸이다. 아들이 아닌 것에 실망한 엄마가 차일피일 출생 신고를 미루어 아이의 실제 나이는 여덟이나 아홉이란다. 어쨌든 작가는 아이의 시선으로 원미동 사람들을 바라본다. 아이는 보이는 대로 말하고 생각한다. 어른들처럼 자기 주관에 파묻혀 사건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아이의 시선을 차용하여 ‘원미동 시인’이 겪는 시대적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내려고 한다.
사람들에게 원미동 시인은 어떻게 비쳐질까? “원미동 시인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퀭한 두 눈에 부스스한 머리칼, 사시사철 껴입고 다니는 물들인 군용점퍼와 희끄무레하게 닳아빠진 낡은 청바지가 밤중에 보면 꼭 몽달귀신 같다고 서울미용실의 미용사 경자 언니가 맨 처음 그를 '몽달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원미동 시인을 경멸한다. 머리가 약간 돌았다는 게 그 이유이다. 어른들 눈으로 보면 원미동 시인은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이다. 당연히 그가 하는 행동도 바보가 저지르는 행동으로만 해석될 뿐이다. 스물일곱 몽달씨가 일곱 살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어른들은 몽달씨를 어른으로, 그러니까 자신들과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곱 살 아이만 몽달씨를 친구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고? 아무도 몽달씨와 말을 섞지 않기 때문이다. 몽달씨는 오로지 아이인 ‘나’와만 속에 품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나’는 형제슈퍼를 운영하는 김 반장도 친구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몽달씨와는 다른 이유에서 그렇다. 김 반장은 셋째 언니인 선옥에게 마음이 있어서 ‘나’에게 잘해주는 것이다. 김 반장은 몽달씨 편이 아니라 몽달씨를 바보로 생각하는 사람들 편인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청소부이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쓰레기통만 뒤지고 다니는 직업이라 아버지 몸에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냄새가 난다. 큰언니는 농사꾼의 아내가 되었고, 둘째언니는 버스안내양, 여 공원, 다방 종업원 등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구로동 어디에서 대포집을 열었다. 중학교도 간신히 나온 여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를 마친 셋째언니는 서울로 올라가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산다. 소도시 구석에서 슈퍼나 운영하는 김 반장이 눈에 들어올 턱이 없다. 내 친구들은 이미 학교에 입학했고, 나보다 어리지만 그래도 놀 만한 아이들은 죄다 유치원에 다닌다. 한마디로 나는 동네에서 놀 사람이 없다. 자연 몽달씨처럼 사람들이 외면하는 ‘바보’와 친해질 수밖에 없다.
올 봄에 ‘나’와 몽달씨가 친구가 되었다. 형제슈퍼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내 이름을 몽달씨가 부르더니 '너는 나더러 개새끼, 개새끼라고만 그러는구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다. 나는 몽달씨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데 한 번 놀라고, ‘개새끼’라는 말에 또 한 번 놀란다. 나는 결코 몽달씨에게 개새끼라고 한 적이 없다. 정말로 머리가 돈 사람인가? 사람들 말을 따라 ‘몽달귀신’이라고 부른 적은 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런 내 마음과 상관없이 몽달씨는 개새끼가 들어간 말을 계속해서 중얼댄다. 몽달씨가 왜 이러는 거냐고? 몽달씨는 지금 자신이 쓴 시를 읊고 있는 것이다. ‘개새끼’가 들어간 말이 시라고? 몽달씨가 쓴 시가 아니라, 어느 유명한 시인이 쓴 시를 베낀 거란다. 몽달씨가 시를 쓴다고 하니, 김 반장이 그럼 멋있는 시 한 수를 지어보라고 했고, 순박한 몽달씨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형제슈퍼 앞에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김 반장은 이게 무슨 시냐며 빈정댔지만, 나는 이때 몽달씨와 친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시인과 친구가 되는 게 참으로 근사해 보여서다.
시를 빼고 나면 나와 마찬가지로 몽달씨도 심심한 사람이었다. 낮 동안에는 꼼짝없이 젊은 새어머니와 한집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동네를 빙빙 돌면서 시간을 때워나갔다. 내가 김 반장과 마주앉아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샌가 슬쩍 다가와 약간 구부정한 허리로 의자에 주저앉곤 하는 몽달씨는 나보다 훨씬 강렬하게 김 반장의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들은 제법 뜨거운 한낮 동안 각기 편한 자세로 앉아 신문을 읽거나 졸거나 하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막걸리 손님이라도 들이닥치면 몽달씨와 나는 재빨리 의자를 비워주곤 김 반장이 바삐 설치는 모양을 우두커니 바라보곤 하였다. 김 반장은 몽달씨가 시가 어쩌구 하며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할라치면 대번에 딴소리를 해서 입막음을 하기 때문에 몽달씨도 김 반장 앞에서는 도통 시에 대한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에 내가 원미동 시인의 ??시적 대화??를 끊임없이 듣는 형편이었다.
몽달씨는 김 반장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김 반장은 언제나 거리를 둔다. 몽달씨야 부자 아버지를 두어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지만, 김 반장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김 반장은 몽달씨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 편이다. 몽달씨가 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김 반장은 대번에 딴소리를 해서 입막음을 한다. 원미동 시인의 ‘시적 대화’를 들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는 셈이다. 셋째언니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은 김 반장은 나를 ‘경옥이 처제’라고 부르며 잘 대해주지만, 셋째언니 마음을 한결같다. 간혹 집에 들어오는 셋째언니는 애인이라도 생긴 듯 요상하게 생긴 팬티를 보여주면서는 선물로 받았다고 자랑을 한다. 이때만 해도 김 반장을 좋게 생각하던 나는 김 반장이 불쌍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형제슈퍼 앞에서 죽치고 있는 몽달씨를 보며 대학 다닐 때까지는 저러지 않았다며 혀를 끌끌 찬다. 학교에서 잘리고 곧장 군대에 갔는데, 제대하고부터 저리 바보가 되었단다. 몽달씨는 아마도 대학을 다닐 때 데모대에 가담한 모양이다. 한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형제슈퍼 앞에 그냥 앉아있자니 심심해서 두 사람은 김 반장 일을 조금씩 돕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길에 고무호스로 물을 뿌려주는 정도였는데, 차츰차츰 몽달씨 하는 일이 늘어났다. 몽달씨가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김 반장은 더욱 의젓해지고 몽달씨는 자꾸 초라해진다. 몽달씨로 해서 일이 편해진 김 반장은 언젠가 정색을 하고 “자네는 확실히 시인은 시인이야.”라고 외치듯이 말한다. 바쁘지 않을 때는 정말로 시를 찬찬히 읽어볼 거라는 말까지 한다. 진심이냐고? 그럴 리가! 바보 같은 몽달씨는 시를 읽어준다는 말에 신이 나서 생선 잘라주는 통나무 도마까지 깔끔히 씻고, 널브러져 있는 채소들까지 다듬는다. “몽달씨가 짐짓 아직 자기 시는 읽을 만하지 못하니 유명한 시인들의 시나 읽어보지 않겠느냐고 구깃구깃 접은 종이를 꺼낼라치면 김반장은 온갖 핑계를 다 대서라도 줄행랑을 치면서 그가 보지 않은 틈을 타 머리 위에 대고 손가락으로 빙글,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김 반장은 그저 몽달씨를 심부름할 꼬마처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몽달씨보다 김 반장을 더 따랐다. 그가 셋째 형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품었다. ‘나’가 김 반장을 멀리하는 사건은 보름 전에 일어났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김 반장을 형부감에서 제외시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건은 초여름 10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낮부터 엄마와 아버지가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였고, ‘나’는 엄마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 낮부터 적잖이 욕설도 들어먹었던 차였다. 낮에 시작된 말싸움이 저녁때는 주먹다짐으로 이어졌고, ‘나’는 집에서 몰래 나와 형제슈퍼 앞에 노천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날 따라 유난히 한산했다. 지물포나 사진관은 일찌감치 간판에 불을 꺼둔 채였고, 정육점은 휴일인지 셔터까지 내려져 있다. 미용실 불도 꺼진 채여서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공단쪽으로 가는 어두운 길에서 뭔가 비명 소리도 같고 욕지기를 참는 안간힘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렸다. 깜빡 졸고 있던 내가 그 소리에 움찔 놀라며 눈을 떴을 때 누군가가 어둠을 뚫고 나와 필사적으로 가게를 향해 덮쳐왔다. 젊은 사내 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 사람을 쫓아왔다. 도망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뒤를 쫓는 사람들도 그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가게 옆구리의 샛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새 사내의 발길에 채여버린 도망자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김 반장이 만약을 위해 사내 주변의 맥주박스를 방안으로 져나르면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김형, 김형…… 도와주세요.” 쓰러진 남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빨간 셔츠의 사내가 다시 쓰러진 자의 등허리를 발로 꽉 찍어눌렀다. ??이 새끼, 아는 사이요? 그러면 당신도 한번 맛 좀 볼 텐가 ?? 맥주병을 거꾸로 쳐들고 빨간 셔츠가 소리질렀다. 김반장의 얼굴이 대번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무, 무슨 소리요? 난 몰라요! 상관없는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서들 하시오."
어린아이인 ‘나’를 제외하면 슈퍼에는 김 반장밖에 없다. 사내의 발길에 채인 도망자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데도 김 반장은 사내 주변의 맥주박스를 방안으로 져나르기 바쁘다. 도망자가 김 반장을 ‘김형!’이라고 소리친다. 김 반장과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빨간 셔츠의 사내가 쓰러진 자의 등허리를 발로 찍어 누른 채, 맥주병을 거꾸로 쳐들고는 김 반장에게 이놈과 아는 사이냐고 묻는다. 김 반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다. 그는 사내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괜한 일에 끼어들기가 싫다. 어차피 동네에서 바보로 소문난 놈이 아닌가. 그렇다. 도망자는 몽달씨였다. 바보인 몽달씨는 왜 깡패 같은 사내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것일까? 사내가 김 반장과 말하는 틈을 타 몽달씨가 가겟방을 향해 튀었다. 방 저쪽에 바깥쪽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는 걸 몽달씨도 알고 있다. 그러나 몽달씨보다 더 빨리 방문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김 반장이었다. “나가요! 어서들 나가요! 싸우든가 말든가 장사 망치지 말고 어서 나가요!”
김 반장이 외면한 사람을 어린아이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사내 둘 다 술기운이 벌겋게 올라 몽달씨를 슈퍼에서 개처럼 질질 끌고 나온다. 김 반장은 어지러워진 가게를 치우느라 바깥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끌려가지 않으려는 몽달씨를 사내들은 구둣발로 사정없이 짓누른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속수무책이다. 도리어 그들이 ‘경찰서’를 들먹이며 몽달씨를 끌고 간다. 몽달씨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며 자기한테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 울부짖는다. 사내가 몽달씨의 얼굴을 구둣발로 짓밟기 시작한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원미지물포로 뛰어들었다. 지물포 주씨 아저씨는 아랫목에 길게 누워 텔레비전을 보느라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동은 모르는 듯했다. 깡패가 몽달씨를 죽인다는 아이 말을 듣자마자 건강한 체구의 주씨 아저씨가 밖으로 뛰쳐나간다. 마침 지물포 앞을 지나는 몽달씨의 꼴을 보고 그는 냅다 소리를 지른다. 사내들이 김 반장에게처럼 이놈을 아느냐고 묻는다. 주씨 아저씨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이 아저씨가…… 이 새끼 아는 사람이오?” “잘 아는 사람이니 이카제. 이 착한 청년이 무신 죄를 졌다꼬 이래 반 죽여놨노? 무슨 일이라?” 그제서야 빨간 셔츠가 슬그머니 움켜쥔 머리칼을 놓았다. 몽달씨가 비틀거리며 주씨 곁으로 도망쳤다. “아무 잘못도…… 없어요…… 지나가는 사람 잡아놓고…… 느닷없이 때리는데.” 더듬더듬, 입 안에 괴어 있는 피를 뱉어내며 간신히 이어가는 몽달씨의 말을 듣노라고 주씨가 잠시 한눈을 판 것이 잘못이었다. 멀찌감치 서서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어이, 저봐요. 저 사람들 도망쳐요!” 정말 눈깜짝할 사이였다. 벌써 공단 쪽 길로 튕겨가는 모양으로 발자국 소리만 어지럽고 녀석들은 어둠 속에 파묻혀버린 뒤였다.
김 반장이 몽달씨를 모르는 척했다면, 주씨 아저씨는 몽달씨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빨간 셔츠가 그제야 움켜쥔 머리칼을 놓는다. 몽달씨는 비틀거리며 주씨 곁으로 도망친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는 느닷없이 때리기 시작했단다. 만만해보이는 몽달씨를 사내들이 재미 삼아 때린 것이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묻지마 폭행’이겠다. 주씨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두 사람은 잽싸게 도망친다. 공단 쪽으로 난 어두운 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발자국 소리만 어지럽게 들린다. 그런데, 도망친 사내들을 보며 유독 흥분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김 반장이다. 가게에서는 모른 척해놓고 이제 와서 생색을 내는 것이다. 김 반장이 몽달씨를 부축해 일으킨다. 몽달씨는 김 반장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간다. “세상에 밸도 없지,”라는 말로 작가는 이 상황을 표현한다. 밸이 없는 사람은 김 반장일까, 몽달씨일까?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김 반장도 김 반장이지만, 그런 김 반장이 내민 손을 덥석 잡는 몽달씨도 참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이 일 이후로 ‘나’는 김 반장과 서먹한 사이가 된다. 김 반장이 예전과 다름없이 굴어도 나는 자꾸만 김 반장을 멀리한다. 위험에 빠진 몽달씨를 외면한 것도 모르고 동네 사람들은 겉으로는 몽달씨를 아낌없이 챙기는 김 반장을 칭찬한다. 김 반장을 추켜세울 때마다 사람들은 몽달씨를 꼭 ‘미친놈’으로 부른다. 어른들이 이럴 때마다 ‘나’는 속이 상한다.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는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 상황도 제대로 모르고 떠들어대는 어른들을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본다. 한편으로 ‘나’는 몽달씨를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열흘 만에 만난 몽달씨는 형제 슈퍼에서 음료수 박스들을 차곡차곡 쟁여놓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는 밸이 없는 것인가? 얼굴이 마주보기 어려울 만큼 핼쑥한 얼굴로 몽달씨는 뭐가 좋은 히죽히죽 웃고 있다. 몽달씨는 그날 밤을 잊은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몽달씨를 이해할 수 없다.
일을 끝낸 몽달씨는 비치파라솔 밑의 의자에 앉아 뭔가를 읽고 있다. 또 시를 읽느냐고 내가 묻자 몽달씨는 아주 슬픈 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핼쑥한 얼굴을 쳐들어 행복하게 웃는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는 몽달씨 옆에 그날 벌어진 일을 다 보았다고 고백한다. 아주 잠깐 몽달씨의 까만 눈이 반짝인다. 김 반장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자 몽달씨는 팔뚝을 탁 치며 아니라고 응수한다.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다. 몽달씨는 그저 팔뚝만 문지를 뿐이다. 그리고는 슬픈 시가 있다며 들어보란다.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 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 같다…….” ‘박해 받는 순교자’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이다. 순교자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이다. 몽달씨는 왜 이 시를 “아주 슬픈 시”라고 말한 것일까?
1980년대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원미동 시인이 읊은 시에 나오는 ‘순교자’의 의미를 헤아리기 힘들다.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몽달씨는 아마 미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광기가 지배하는 세상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광기의 시대를 광기로 맞선 몽달씨는 어찌 보면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순교자를 미친놈으로 치부한다. 이룰 수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몽달씨라고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일곱 살 아이조차 “바보같이, 다 알고 있었으면서……”라고 말하지 있지 않은가. 모든 걸 알면서도 몽달씨는 기꺼이 순교자의 길을 걷는다.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는 어찌 보면 순교자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경고인지도 모른다. 일곱 살 아이는 어른들이 외면하는 이 진실을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작가가 아이의 시선으로 ‘순교자’를 다룬 것은 시대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1980년대는 군사정권의 오만이 극에 달했던 시대이다. 민주화를 외치던 시민들을 폭력으로 제압한 전두환이 정권을 쥐던 시절이 아닌가. 두려움에 떠는 어른들은 김 반장처럼 상황에 맞춰 움직였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받아들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냉정하게 내쳐버리는 기회주의. 군사정권은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알기에 틈만 나면 폭력을 행사했다. 몽달씨만 해도 대학에서 쫓겨나 강제로 군대에 가야 했다. 온갖 감시와 멸시를 받으며 군 생활을 보내고 사회로 나온 몽달씨를 권력은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을 몽달씨는 정말로 미쳐서 살아냈다. 그는 ‘바보처럼’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순교자는 신념을 따라 자기가 갈 길을 갈 뿐이다. 몽달씨처럼 바보 같은 순교자가 있어 지금 우리가 이만큼의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걸 알고 있는가? 때가 되면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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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미동이 속해있는 부천은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 틈새에 끼어있는 주변도시다. 주변도시에는 주변인들이 살고 있다. '원미동 사람들'은 주변도시에 살고 있는 주변인들의 삶에 대한 얘기다. 원미동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괴팍한 늙은이, 정신지체자, 화장실 조차 맘데로 쓸 수 없는 지하방 세입자 등의 주변인들은 등불 및의 그늘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삶을 끈질기게 살아가고 있다. 원미동 사람들의 땀과 애환은 그대로 70년대 경제성장의 그늘이기도 하다. 2004년 부천은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다. 신시가지가 들어섰고, 판타스틱영화제의 성공과 같이 각종 문화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내 과거의 칙칙한 이미지를 많이 덜어내는 데 성공했다. 곳곳에서는 아파트를 세우기 위한 재개발이 한창이다. 부천 어지간한 곳 아파트 값은 이제 서울에 비해서도 그리 낮지 않다. 그러나 원미동 사람들은 이 소설이 나오기 전이나 나오고 나서나, 그리고 부천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오늘 현재나 여전히 상처입은 가슴을 쓸어안고 대한민국 곳곳에서 팍팍한 삶을 살고 있다. 등불의 빛이 더 강하고 넓게 퍼질수록 그늘은 더욱 작아지고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
| 내가 변하는 걸 느낀다. 나이만큼 지나버린 세월이 변하게 했을까. 몇년전만해도 그토록 경멸해마지 않았던 그런 삶을 내가 살고 있다. 남들과 별로 다를게 없는 그저그런 평범한 삶이다. 아직도 가끔씩은 이건 진정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라고 눈앞의 현실이 숨통을 막아 올때도 있다. 성장기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그렇기때문에 무지개빛이 발하는 특별한 미래를 꿈꾼다.나역시 예외는 아니었을꺼다. 조금은 불행해도 주어진 운명을 거역하며 붉은 선명함으로 살고싶었다. 그러나 오늘 거울에 비추는 나의 모습은 소박하다. 「원미동사람들」도 극히 소박하다. 양귀자는 여자이다.그러나 그니가 보여주는 소설을 보면 역시 여자이기전에 작가인 모양이다. 그의 초기의 작품에 속하는 이 소설집은 구질구질할정도로 사람살이 를 잘도 그려놨다. 학교가 파한후 집에 돌아올때마다 부럽게 올려다보았던 부잣집 하얀 담장너머로 흐드러진 빨간 넝쿨장미를 기억해내는 이들에겐 원미동은 자신이 자랐던 동네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느낄꺼다. 바로 우리동네의 모습이다. 형제슈퍼의 김반장. 원미동 시인. 은혜네. 덜렁 빛바랜 사진만이 걸린 사진관의 모습하며... 연신 화려하기만 요즘의 TV속 인물들은 다수의 우리들을 기죽게 하지만 원미동의 이웃들은 읽는이로 하여금 따스한 안스러움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이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아스라한 과거를 추억해보자는 것만은 아니다. 가만히 읽다보면,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우리사회속에서 자꾸만 외곽으로 소외되어져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정계층의 소수가 사회의 경제력을 장악한채 사회의 중심에 우뚝서 그 화려한 네온의 도시마냥 끊없이 부를 축적해갈때, 우리처럼 부모의 유산도 없고 번듯한 집한채 가지지 못한, 세상 곳곳의 원미동주민들은 평생을 일해도 그저그렇게 근근히 살아가야 하는 비뚤어진 현실을 꼬집고 있다. 그렇지만 양귀자의 방법은 목청 높인 구호가 아니다. 초상화를 그려내는 화가의 가늘고 수많은 연필선처럼 원미동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아주 객관적이고 치밀하게.. 그러나 양귀자의 그것은 감정이 배제된 메마르고 차가운 시선이 결코 아니다.오히려 그들에 대한 사랑이 듬뿍하다. 조금은 못나고 어리숙한 평범한 다수를 원미동이란 제한된 공간으로 옮겨놓으며 한땀 한땀 정성어린 수를 놓아 읽는 이로 하여금, 초라함이 싫어도 매번 다시찾는 고향동네어귀를 상상하게한다. 속이 상해 가슴이 아프지만 애정이 쏠리지 않을 수없는 사람들로 각인시킨다. 요즘같은 세대에는 책이 만들어 내는 감동의 파장이 최첨단 매체에 곧잘 자리를 내어주기도 하지만 얇은 한지의 색처럼 은은하다. 최첨단이 절대 이르지 못하는 마음의 틈새를 연기처럼 스며든다. 물론 그런 소설이 흔한것은 아니다. 그래도 양귀자의 소설에서는 건질게 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힘이있다. 나는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으면서 나름대로 씩씩한 소설이 좋다. 원미동 사람들은 그런면에서 후한점수를 주고 싶다. 평범하기만한 내 소박한 월급장이의 삶과 닮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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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지음 문학과지성사
소장하고 있는 책이 원미동 약도가 그려 있는 오래된 책이 있는데, 정작 아이가 프로젝트 수업에 사용할 때는 '쓰다'에서 나온 새 책으로 구입해 주었다. 나는 이 오래된 책으로 읽었던 모양이다. 그 때는 이 책을 찾지 못했는데, 책정리 하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집어 들었다. 197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저자의 연작 단편소설집. 성장과 소외, 풍족과 빈곤, 폭압과 자유에의 갈망이 치열하게 갈등하며 공존했던 80년대의 소시민적 삶의 풍속도가 담겨있는 소설. 원미동의 세계가 문제적인 것은 단순히 한 시대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삶의 진실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마지막 땅>,<방울새>,<한계령> 등 원미동을 무대로한 11편을 소설을 묶었다. 수업한 내용을 다시 살펴보니, 소설 속 우리의 모습과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다. 1. 작품 속 당시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
2. 지금의 일산은 수도권 1기 신도시 개발(1988년 올림픽 이후, 주택난은 부동산 투기와상승 작용하여 주택가격이 폭등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였다. 이에 따라 주택 200만호 건설의 일환으로 수도권에 5개 신도시, 분당, 일산, 평촌, 산본 및 중동을 건설하였다. 줄거리 이해하기도 다시 살펴본다. 1.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은 11개 소설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그 중 어느 소설이 가장 인상 깊었는가? 2. '일용할 양식'의 줄거리를 바르게 배열해 보면, ① 싱싱청과물이 개업하면서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함 ② 형제슈퍼와 김포슈퍼가 동맹을 맺고 싱싱청과물을 폐업시킴 ③ 김포 쌀 상회가 '김포슈퍼'로 확장하면서 부식, 과일, 채소를 팔기 시작함. ④ 형제슈퍼 역시 쌀과 연탄을 팔면서 김포슈퍼와 경쟁함 ⑤ 새로운 전파상이 개업을 준비하면서 '써니전자'와의 갈등이 예고됨. (③ - ④ - ① - ② - ⑤ ) 3. 이 소설에 나오는 주요인물, 김 반장, 사진관 엄씨, 가리봉동 임씨, '한계령'의 큰 오빠의 성격은 어떠한가? 김 반장 : 사진관 엄씨 : 가리봉동 임씨 : 한계령의 큰 오빠 : 4. 김 반장은 왜 방문을 가로막아버리고 몽달 씨 편을 들지 않았을까? 5. 소설 속의 화자는 몽달 씨가 김반장의 부축을 거절하지 않은 것을 두고 '밸도 없다'라고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원미동 사람들과 지금의 우리 동네를 살펴보면, 원미동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공통적으로 있는 것은 사진관이나 슈퍼 등이다. 그러면, 원미동에는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 1980년 대의 부천과 일산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작품을 이해해 본다. 2016.12.24.(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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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받고 싶어하는 시대의 부랑아 -원미동 시인 ' 몽달씨'를 중심으로
1. 우리가 마주치는 시인이라는 존재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있다. 대체 이 인간이 뭘 하는 놈인가, 그것이 가장 궁금한 것은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 사람의 정체성은 그의 내면과는 상관없이 대개 소속이라든지 취미, 특기, 미래직업군 등에 의해 평가받기 마련이다. 당신이 소개팅 자리에 나갔는데 맞은편의 남자가 시인이라고 밝혔을 때, 평소 시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던 당신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랬다. 그나마 배운 인간들이 득시글하다던 곳에서조차 내가 시 쓰는 인간이라고 밝히면 소위 ‘은따’ 당했다. 사실 따 시킨 그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아직 어려서 분위기 파악 못하던 내가 문제였지. 참하게 영화감상이니 독서니 그 따위를 말했어야만 했다. 우리 사회에서 시인을 보는 눈이란 아직 존경스럽거나, 거리감 있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시하거나,-어차피 다 같은 말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 중 하나인 것을. 그것은 문학 중에서 읽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태연이나 이정하와 같은 쉽게 읽히는 시를 쓰는 시인(?)들이 대중들에게 선호 받는 것도 일면 타당한 이유가 있다. 나름의 비유체계를 해독하는 법만 획득하면 시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하면서 중얼거려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잘난 척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리고 가끔씩 어떤 장소에서 튀는 사고와 행동들이 시인들을 더욱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지도 모른다.
결론만 말하자면 시인들은 특별한 인간, 맞다. 사회적인 면으로 보자면 일반이 아닌, 오히려 이반쯤 되는 불순분자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리는 부분까지 속속들이 지적하는 세심한, 혹은 쪼잔한 인간들이다. 모든 세계를 자기 세계 안으로 끌어들여버리는, 지독하게 자기 중심적인 인간이다. 그 덕에 쉽게 타자에게 감정이입이 잘되는 보기 드물게 순진하고 순수한 인간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사회적인 문제가 나섰을 때는 골방으로 처박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마음이 너무나도 여려서 비겁해지기 쉬운 유형들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시비는 별도로 받겠다. 이건 적어도 자아비판을 겸한 주관이니까.) 그리고 원래 시인들은 시대에 휩쓸려 가면 안 되고 관망해야 하는 종류라고 말하며 자기 합리화를 시켜본다. 굳이 서정주와 같은 친일 시인까지 갈 것도 없이 양귀자의 『원미동 시인』에서 나오는 몽달씨가 그렇다. 동네 사람들의 눈에 몽달씨는 학교를 관두고 하는 일 없이 그저 어슬렁거리는 날건달이다. 자칭 시를 읽고 쓴다고 하지만 돈이 안 되는 일은 역시 쓰잘데기 없는 일이므로 그 말이 그 말이다. 머리는 약간 모자란 듯하고, 옷은 허름하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는, 그래도 꼴에 대학은 갔다는 미래가 암울한 청년이다. 몽달씨에 대한 묘사는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시인을 보는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이란 어차피 무용지물이니 그런 상황에서 지식인이란 것도 별 것이겠는가.
2. 삶이라는 것, 혹은 일상성의 억압과 폭력
개인에게 있어서 시대라는 것은 마치 사진의 배경처럼, 해를 등진 그림자처럼 떼어낼 수 없이 따라다니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때문에 이 작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시대적 배경을 언급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인 80년대 후반의 사회적인 모습들을 작품에 투영시켜보는 것은 아주 고전적인 방법이다. 80년대에 일어난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들은 이미 다 아는 내용이니 굳이 예로 들진 않겠다. 그 때 대학가를 중심으로 소위 데모라고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치열했다는 것은 몽달씨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대학생이었던 몽달씨는 박해받은 지식인이라는 계층을, 김반장은 산업사회로 도래하면서 나타난 이기적인 인간상을, 지물포 아저씨는 예전부터 있어왔던 인정미 넘치는 이웃을, 또 경옥은 삶의 틈바구니에서 영악해지고 조숙해져버린 도시 아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원미동 시인'에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산업사회의 도래와 권력의 횡포에 따른 삭막한 소시민들의 삶이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작가가 의도한 전부라고 말하기엔 충분치 않다. 사실 이러한 소시민적 유형들은 비단 80년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도 형태와 모습을 달리하여 존재했지 않은가? 더구나 몽달씨와 김반장, 경옥이 그 시대를 드러내는 보편적 전형이냐 하면 그것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작품에 나타나지 않고 경옥의 말로만 표현되는 경옥의 언니들이 오히려 그 시대에 적합한 인물군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버스 안내양, 소시지 공장의 여공원, 대폿집 마담, 옷가게 점원, 가난한 농부의 아내 등으로 묘사되는 경옥의 언니들이야말로 80년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이라 보인다. 따라서 그들이 아닌 어쩌면 시대와 관계없이 일반적인 몽달씨와 김반장, 경옥에게 초점을 맞췄다는 것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얘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꾸어 생각했을 때 이 작품은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몽달씨가 인물의 핵심인지를 생각해 보면 해답은 금방 나온다. 이유 없이 몽달씨를 무지막지하게 팬 정체불명의 사람들은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국가권력으로 치환해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살아가면서 그런 일들이야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천만 번의 한 번쯤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재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더구나 몽달씨 같은 약간 만만해 보이는 인물이야 일회적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기엔 안성맞춤이다. 경옥의 말을 주의깊게 들어보면 몽달씨는 시인인데 시인 같지 않다는 것, 사람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해서 김반장 아저씨의 심부름꾼 노릇이나 한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나 새어머니조차도 덜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 등이 주요 요지다. 이 모습이 진정한 몽달씨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글의 말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몽달씨의 변장은 완벽했다. 아니, 실은 변장이 아닌데도 변장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문제였다만.
결국 몽달씨를, 시인을 억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상이다. 사소하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문제들 말이다. 그 사람의 내면을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가치에 두고 재단하는 사회적 인식과 편견들이 시인인 몽달씨를 죽이는 가장 큰 원인이다. 따지고 보면 원미동 사람들 모두가, 원미동에서의 모든 일상들이 몽달씨를 억압하는 주원인이 된 셈이다. 그래서 몽달씨는 마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루한 '개새끼'라고 부르는 양 시를 중얼거리고 다닌다. 그리고 이를 들은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몽달씨에게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던 것과 같은 묘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일상만큼 견고한 감옥은 없다. 일상의 낱낱의 단면들이야 문학의 소재가 되고 자양분이 되겠지만, 지루하게 반복되는 시간의 틀에 갇혀버리는 순간 사고는 거기에 온순하게 길들여져 날카로운 모서리를 잃게 된다. 따라서 문제조차도 문제로 인식하지 않게끔 무뎌져버리는 것이다. 또한 보편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모든 삶들을 몰개성화시키는 보편 앞에서 개성이란 포장된 인도에서 혼자 튀어나온 아귀가 맞지 않는 돌일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엔 눌려지거나 아니면 들어내어지게 된다. 따라서 멀고 아름다운 동네를 의미하는 원미동이란 우리에겐 가장 낯익고 친숙한 모습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는 동시에 시인에게는 어디에도 유토피아가 없다는 반어적인 의미까지도 포함한다. 즉, 원미동은 돌아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일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동네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인이란 일상에 저항하는 자이다.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삶의 틈 사이에서도 어떤 가치와 세계를 발견하는 자이고, 숨겨진 자연의 은유를 이해하는 자이며, 시대를 통찰하는 자이며, 나이와 상관없이 순수함을 간직한 자이며, 이 때문에 어디에 가도 물 위의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단독자이다. 적어도 『원미동 시인』에서의 몽달씨는 그러하다. 시는 그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고 일상의 폭력에 저항하는 미약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몽달씨가 실천적이지 못한 나약한 지식인이어서가 아니라 본디 시인의 역할은 거기까지라는 것을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지하나 박노해와 같이 시만 쓸 수 없어 과감하게 사회현실에 몸을 내던진 투사와 같은 시인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소수의 사람들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인의 본분은 시대와 일상을 끝까지 관조하고, 비겁하지만 어떻게든 끝끝내 살아남아서 그 참상들을 기록하여 전하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몽달씨는 모든 부조리한 일들에 침묵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시를 쓰는 일 뿐이다. 그러나 그인들 비겁함에 안주하고 급류에서 혼자 몸을 비껴 서 있고 싶겠는가. 시인만큼 자의식이 강한 존재들도 없는데 말이다. 따라서 그는 고뇌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골방에 처박혀 수음하듯 시를 쓰고, 아침이 되면 다시 찢는 비생산적인 일들을 반복하는 것은 이러한 내면적 고뇌의 표출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자괴감에 한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결국 남의 시들을 읽고 외우는 것이 몽달씨가 하는 일의 전부이고 그것을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는 그에게 있어 단 하나의 종교이자 처방전이다. 몽달씨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상적 삶들의 박해들을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마른 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 하는 순교자 같다’는 황지우의 시 구절은 이런 몽달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통과 아픔 없이 시는 쓰일 수 없다. 밀가루 반죽을 오랫동안 치대야만 나중에 빵이 온전히 부푸는 것과 같은 이치로, 몽달씨가 받는 박해는 고스란히 시가 된다. 시를 쓸 수 있게끔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에 몽달씨가 오히려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면서까지 끊임없이 ‘박해받’고 싶어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몽달씨의 삶에 근원적으로 묻어있는 비애를 이해하는 것은 아직까지 순수한 눈을 가진 경옥 뿐이다. 시가 슬픈 게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미련한 모습이 슬프다는 사실을 경옥은 마음으로 이해한다.
3. 유토피아를 꿈꾸며
시인이 현실적응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들이 훨씬 더 섬세하고 밝은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력이 2.0인 사람과 0.2인 사람이 보는 세상은 분명 다르다.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더러움과 어긋남까지도 모두 볼 줄 아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분명 0.2의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를 매도하고 비난한다. 그 결과로 2.0의 시력을 가진 사람이 되려 비정상으로 취급받게 되고 결국에 그는 본 것들을 혼자만 간직하게 된다. 남들이 착시라고 손가락질하건 말건 어쨌거나 그에게는 살아 숨쉬는 생생한 사실이자 진리였으니까. 플라톤이 ‘시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너무 많은 것을 보는 인간은 사회체제에 길들여 조종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세뇌까지 되지 않는 이 또랑또랑한 인간들은 당연히 박해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시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숨을 죽인다. 봐도 못 본 듯이, 들어도 못 들은 듯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듯이 말이다.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후천적인 삼중고를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숙명적인 비애의 존재들이다.
따라서 굳이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을 들지 않더라도 역설적으로 시인들은 시인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뒤집어 말하자면 시인만이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모여서 그저 아무런 이기적인 다툼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기도 하다. 더는 눈에 불을 켜 더러운 것들을 찾아내어도 되지 않는 세상, 부조리와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국가나 개인이 개인을 억압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상이 그들이 바라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서 또 다른 의의를 가진다. 이 세상에 없기에 더욱 그립고 갈구하게 되는 역설. 이것이 유토피아의 진정한 매력일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작가가 ‘원미동 시인’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 삶에서 시인이라는 존재가 과연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과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답이 무엇인지는 이제까지 글을 읽어본 당신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물론 나는 예스라고 대답하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나 옷에 머리카락이 묻었을 때, 반복되는 세뇌에 길들여져서 틀린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 그것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친절한 조언자 하나는 곁에 둘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되지 않을까? 때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너무 적나라하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몽달씨와 같은 사람이 마음에 거슬리거나 불편하더라도 말이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외면하는 것도 때로 삶을 살아가는 한 가지 지혜가 될 수도 있다. 아예 모르고 살면 마음이 더 편하기도 하다. 스타킹 올이 나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전혀 거리낌 없이 거리를 당당하게 활보하는 것처럼, 진실을 안다는 것은 이처럼 때로는 초조하고 주눅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귀싸대기를 얻어맞더라도 스타킹 올이 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 그래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 그러나 그럼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고 그것을 다시 고칠만한 기회를 부여하는 사람이 결과적으로는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러니 중심부에서 비껴난, 시대가 내버려놓은 몽달씨와 같은 시인들이 부랑아처럼 어슬렁거리면서 세상의 주변을 떠돌고 있더라도 보통 사람과의 차이를 인정하고 따뜻한 포용하는 세상이야말로 작가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환상이 아닐까 한다. (빗방울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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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중학교 2학년 이상
글은 시대의 거울이라고 한다. 특히 이 책, '원미동 사람들'은 80년대 개발 바람이 불던 변두리 동네 삶의 생생한 기록이다. 가난한 월급쟁이 '은혜아빠'는 서울에서 셋집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부천 원미동으로 집을 마련해 이사 가게 된다.(멀고 아름다운 동네) 내 집 마련의 기쁨도 잠시, 날림공사로 지은 집장사의 집을 사는 바람에 여기 저기 계속되는 하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는다. 마침내 목욕탕까지 새게 되서 어쩔 수 없이 집수리를 해야한다. 그런데 그는 집 수리 하러 온 임씨의 실력이나 수리비용에 대해 불신을 감출 수 없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임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민과 갈등을 거듭하는 그와 그의 아내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 였다. 개발 바람의 빛과 어두움을 보여주는 '마지막 땅', 동네 구멍가게 간의 경쟁과 갈등을 보여주는 '일용할 양식', 그늘 속에 가려진 도시 생활자의 삶이 그래도 녹아 있는 '지하 생활자'...
한 편, 한 편이 작고 아름답고 슬픈 서민 생활의 소중한 기록이자 역사이다. 겪어 본 이들에게는 공감과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간접 경험으로나마 지난한 삶의 단면들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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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격차가 더욱 심해져 제대로 된 눈돌림을 할 겨를이 없는 이들이 우리의 주변에 있을 것이다. 먹고 살기 빠듯해서 기본적인 것외에는 도저히 마음 나눌 겨를이 없을듯 보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삶에선 인간미 물씬한 정감을 느끼게 될 때가 더 많다. 조금 더 제것을 만들기 위한 시비와 질투를 마다 않는 우리와 다르게 없는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많이 있는 것에서 나누고 헤아리는 것이 아닌 삶을 살 수 있는 그들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들은 우리에게 정감을 느끼게도 하고 어쩔 수 없는 고단함의 것을 찾아내게도 한다.
그러나 상호간의 갈등을 이해하고 그 화합점을 찾아가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 어떤 입장을 지켜가야 하는 것인지를 느끼며 우리는 다시금 반성케 되는 것이 많다. 각박한 현실의 삶 속에서 보다 더 이익을 위해 벌이게 되는 경쟁의 것들, 그러한 갈등의 골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들 나름의 몸부림은 처절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정과 믿음의 것들이 있었기에 모진 세월의 힘겨움을 이겨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게 여겨진다.
원미동 2통 5반에 모여 살아가는 여러 이들의 삶은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케 하고 있다. 어찌보면 웬만하면 서로에게 간섭과 지시를 하려 들지 않는 지금의 삶의 형태와 다르기에 더한 복작거림으로 소란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 안에서 나누게 되는 감정의 교환과 인정을 더한 감동이 행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상대적인 부족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고단함의 것을 떨쳐 내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때로는 애환과 갈등을 만들어 내지만 이후 그것을 극복해 가는 시간의 대처는 결코 소외되지 않는 인생의 것들을 품어가기에 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
| 작가의 체험을 담은 <부엌신>이나 최근작 <모순>처럼 세련된 문체로 양귀자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원미동 사람들="">은 양귀자라는 이름 석 자를 독자들에게 알린 작가의 실질적인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다. 80년대 서울 특별시의 변방 부천지 원미구 원미동을 배경으로 시골도 도시에도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 소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파헤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 소설은 2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상대적 박탈감에 괴로워하는 서민들의 이야기로 공감을 자아낸다. 같은 원미동 사람들이라도 밥벌이가 가능한 직업과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은 그 중에서도 가진 층, 기득권이 있는 계층이 되고 지하 셋방이나 장사가 되지 않는 찻집을 운영하며 조강지처라는 이름을 붙인 이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이들은 당장 다음 끼니와 사람으로서 기본적 권리마저 돈때문에 누릴 수 없는 절박한 환경속에서 살아간다. 한 푼을 벌기 위해 이웃간의 정도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지만 힘든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연민으로 술 한 잔에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을 만큼 툭 터 있는 이웃들의 모습. 이 작품으로 발돋움 한 작가는 지금 서울 특별시에서도 부촌인 평창동에 살고 고급 음식점도 경영하며 작품집을 낼 때마다 히트작을 날리는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불평등에 관한 날카로운 시선을 잃지 않았던 초심을 잊지 않기 바란다.원미동>모순>부엌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