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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터 맘에 쏙 드는 책. 읽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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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계기로 책은 나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고 난 아무런 기대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난 어디선가 많이 봤던 기분이 들었다. 예전 TV드라마 이였던가? 계속 책장을 넘기다 보니 드디어 생각이 났다. 여관에서 일어나는 일들. 특별히 생각나는 건 "솔아 솔아 푸른 솔아"가 애잔히 나의 가슴을 적셨던 기억뿐이다.
성인도 아닌 어린이도 아닌 바로 재수생의 눈으로 객관적이고도 재밌게 그려 내려가는 글을 보며 난 단숨에 읽어버리기가 아까울 정도로 천천히 정독을 하였다. 점점 꽉 차 오르는 가슴을 억누를 수조차 없었다. 삶에 대한 진부함이 아닌 진솔함과 담백함이 담겨져 있는 글귀는 어쩌면 내 삶에 대한 회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글에서 나오는 어머니와 아버지, 형, 누나, 막일을 하는 아저씨와 뽕짝 아줌마, 형 등등, 이들은 각자의 삶에 있어서 어느 누구한테도 인정받지 못하는, 말 그대로 이 사회의 화려함 속에, 코끼리 무덤과 같은 고도자본주의 사회의 밑에서 움직이는 미미한 벌레와 같은 존재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삶을 위해서 살고 있다. 벌레만도 못한 자신들의 삶에 대해 욕을 하기보다는 그것을 위해 기력이 쇠잔해 질 때까지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치고, 꼬이고, 넘어지고, 일어서려다가 다시 넘어지고,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는 삶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허술한 나성여관 옆에 세워진 삐까뻔쩍한, 돈으로 도배를 한 듯한 모텔. 그들은 다시금 짚 밟히고 이젠 더 이상 일어설 기력조차 없다. 항상 딸 하나만을 바라보며 세월을 한탄스레 슬퍼하는 노인네와 돈에 이끌려 집을 나간 누나.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간 형. 그들은 여전히 막막 대로를 힘차게 걷고 있다. 가시덩불이 온몸을 찢고 발을 걸고 넘어뜨려 무릎팍이 피멍이 들어도 그들은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을 일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을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양귀자님의 소설을 보다보면 왜 이런 제목을 쓰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줄곧 읽어 가면서도 머릿속의 제목과 내용은 왠지 동떨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점차 느껴지는 게 있다. 제목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어느 순간 단어 하나가 머리 속을 강타하고, "아!"라는 탄성과 함께 모든 걸 알 수 있는 듯 고개가 연신 끄덕이게 된다. 그들은 몰고 가는 힘은 바로 희망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희망일지라도, 남들이 인정하지 않고 발로 밟는 것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삶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자 신앙인 것이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강물 저어 가리라"는 노래 가사처럼 그들은 여전히 강물을 저어 가고 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이겨내려는 힘겨움과 눈물겨움이 한동안 내 가슴을 적시고 떠나려 하지 않았다. 과연 이사회는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 만약 돌아가고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다고 난 확신할 수 있다. [인상깊은구절] 누나는 잊지도 않고 뒷문을 두들겼다. 아니, 두들겼다기보다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었다. 난 늦게까지 내 방의 짐들을 꾸리면서 바깥의 기척에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문 두들기는 소리는 분명코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어느 순간 무엇에 홀린 듯 뒷문을 열어준 것은 누나의 소리없는 부름에 대한 내 마음의 자동응답이었으리라. 이제는 쓸쓸함으로 말하지만, 누나와 난 그런 사이였다. |
| 양귀자님의 첫장편인 장편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독자들에게 외면까지는 아니지만 그다지 큰 호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무척 아끼는 작품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무엇을 지켜야하는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작가의 정공법이 마음에 들었고 절망 속에 희망을 찾아 헤매는 찌르레기 아저씨라는 캐릭터가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고문 기술자가 사라졌다고 믿는 요즘에도 비록 조폭에게 가해진 폭력이지만 일선 검사가 고문 사건으로 옷을 벗고 아직도 인권 보호는 멀기만 한 게 현실인데도 내 일이 아니면 예전보다 더 무심해진 것이 또 안타까운 우리의 모습이다.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결국 불륜에 마약에까지 빠져드는 누나의 모습은 이제는 흔해빠진 인물이지만 의로움을 목숨보다 숭배하는 도연의 모습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찾기 어려운 것은 이 사회가 좀 더 희망적으로 변한 탓이라고 애써 자위해본다. 너무나 서민들의 생활 면면을 그리면서도 우리 사회의 아팠던 어둠의 시기를 평범한 삼수생의 시각을 빌려 그려낸 이 액자 소설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바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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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1년을 이 소설과 함께 살았다는 양귀자씨, 하지만 이 소설을 읽기 전엔 오래전 tv에서 방영된 드라마로 더 기억이 났다. 원작이 드라마보다 훨씬 알차다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상하게 텔레비젼으로 희망을 읽어버려 쉽게 책을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았지만 그 어설픈 기억들이 이 책을 읽게 만든 것 같다. 나성 여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구질 구질하다는 표현도 웬지 어울릴 것 같은 나성 여관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는 나성 여관의 둘째 아들 재수생의 이야기이다. 각각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삶의 어둠에 대해 그들은 자신을 비관하기도 하고, 때론 무방비속에서 자신을 마냥 방치해 두기도 하지만 그렇게 상처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늘 희망이 도사리고 있다. 긴 밤이 지나가고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듯이 그들은 새 아침과 함께 다가올 희망을 꿈꾸며 그 희망을 잡고 놓치 않으려 한다. 드라마에서 그들의 삶과 희망을 단지 눈으로 보았다면 이 책을 그들의 삶을 마음으로 다시 한번 느낄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울었다. 모르겠다. 형의 글이 눈물이 나올 만큼 슬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온 몸에 소름이 돋았고 무서웠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는 지체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형이 저지른 일을 다 이해할수 없다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 형의 곁에 가까이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는 어쩌면 형을 둘러싸고 있는 장벽 안으로 뛰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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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의 우리 영화 <세 친구="">를 본 사람?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는 정말 세 친구가 나온다. 모두 사회에서 낙오된 대학에도 가지 못한 세 친구가 나온다. 양귀자의 <희망>에는 훨씬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오지만,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임순례 감독의 영화와 일맥상통한다.
<희망>은 땅으로 내려온 작품이다.
무협처럼 상상의 나래를 펴지도, 재벌과 하층민의 사랑이라는 허황된 이야기도 아닌, 우리네 서민들의 실제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니 인물들은 사실적이고 정감이 가며, 이를 잡아내고 그려내는 작가의 숨은 눈길은 섬세하다. 독자들이 받는 감동은 잔잔하다. 현실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지만, 오히려 절망적이지만, 인간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하는한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 역설적일지라도. [인상깊은구절] 양귀자의 "희망"은 우리 시대가 짊어진 여러 문제들을 응축시킨 성장 소설이다. 파산된 가정의 노동자, 실향의 고통때문에 평생을 폐인처럼 살아가는 노인, 운동권인 형, 바람난 누이들의 곡절한 사연이 막 사회에 눈뜨기 시작하는 어린 주인공의 눈으로 포착된다. 이 천진하면서도 진지한 눈은 우리 시대의 문제에 접근하는 발상법의 새로움이자 낯설게 하기인 것이다.희망>희망>세> |
| 희망 상에서는 모든 것이 엉키고 설켜서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희망 하에서는 엉키고 설킨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나가는 과정이 보인다. 하지만 결코 그것은 좋은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누나는 마약 중독으로 죽어가고 있었고, 10호실의 할아버지는 손자 민구만을 남긴 채 외롭게 죽어갔고, 형은 찌르레기 아저씨가 하려고 했던 일을 대신 하여-물론 그것은 나중에 밝혀진 일이기는 하지만- 감옥으로 가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가느다란 희망을 발견한다.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 순진한 민구에게서..할아버지가 죽은 후 민구는 고아원으로 넘겨지지만 '내'가 찾아갔을 때 민구는 풀이 죽은 모습이 아닌 활짝 웃는 밝은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작가는 어린아이를 내세워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라는 설정을 한 것이다. 또한 희망은 보라와의 교감 속에서도 발견한다. 하얀 눈으로 덮인 들판 위를 뛰어다니며 푹 쓰러지는 두사람 속에서 우리는 '휴우~'하고 안도할 수 있음을 느낀다.또한 안도함 속에서 모든 엉켜 있는 무언가가 쑥 내려감을 느낄 것이다. 작가의 '희망'은 우리에게 특별히 무언가 깨달음을 얻으라는 의도가 아니라 단지 포근함 따뜻한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